1931년 하얼빈에서 한 여인이 남편과 이별하였습니다. 바로 이송 김동삼의 아내 박순부(朴順夫, 1882~1950)입니다. 그녀는 반남박씨 박제희(朴濟禧)의 딸로 태어나 김동삼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1911년 남편이 만주로 망명하자 그녀도 아들 형제를 데리고 그 길을 따랐습니다. 만주에서 그녀는 남들처럼 따뜻한 가정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20년 동안 그녀가 남편을 만난 것은 단 두 번뿐이었는데 1931년 체포된 남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것이 남편과 조국을 위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박순부는 끝내 남편을 만나지 못했는데요. 국내 감옥으로 옮겨졌던 남편이 1937년 옥중에서 순국했기 때문입니다. 그녀 또한 1950년 이국땅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와 함께 만주에서 온갖 풍상을 이겨낸 며느리 이해동(李海東, 1905~2003)은 1905년 안동의 예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안면 인계리에 위치한 그녀의 집, 만화공댁은 바로 김락의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李睌燾)가 단식 순절한 곳입니다. 조부 이강호는 이만도가 순국하자 장례를 치른 뒤 아들 이원일(李源一)을 앞세워 가족 모두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 망명 대열에 여섯 살의 이해동이 있었습니다. 이해동은 조부와 조모, 아버지와 어머니, 숙부 이원행과 숙모, 고모 두 분과 함께 만주로 향했습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싸우는 것으로 첫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훗날 이해동은 회고록에서 “할머니께서는 고놈의 날씨 왜놈보다 더 독하다고 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고향에서 가져온 재산이 별로 없었던 이해동의 집안은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동포들은 첫 농사의 흉작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였고 풍토병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해동 일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20대의 청년이었던 숙부가 목숨을 잃었고, 이어 1년 뒤 10대 소녀였던 두 고모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아버지 이원일은 경학사 조직에 참여하여 간도 지역 독립운동 기반조성에 힘썼습니다.
# 이해동, 1920년 김동삼의 아들 김정묵과 결혼하다
세월이 흘러 16세가 되던 1920년 이해동의 혼사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마침내 김동삼의 아들 김정묵(金定黙)으로 혼처가 정해졌습니다. 김동삼은 아버지 이원일의 스승이자 투철한 동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해 시삼촌이 될 김동만(金東滿)이 일제에게 무참하게 학살되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위협을 느낀 양가는 북만주로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1921년 북만주로의 이동이 급작스럽게 추진되면서 결혼식도 급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름이 결혼식이지 그저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았을 뿐이었습니다.
# 북만주로 떠난 이해동
양가 일행은 길을 나서, 친정 가족은 여하(呂河)라는 중국인 마을에 터를 잡고 이해동은 영안현 주가툰에 정착했습니다. 처음으로 친정식구들과 떨어져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 이해동의 가족들은 북만주를 떠돌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녀는 생활선에서 사투를 벌였고 때로는 마적들과도 맞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1931년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만주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이어가던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녀는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으로 면회를 갔고 이는 끝내 마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박순부는 이때도 함께 면회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남편과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 이해동 7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다
광복 뒤에도 중국에 남게 된 이해동은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89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섯 살에 고국을 떠나 85세가 되어서야 돌아온 것입니다. 꼬박 77년이 걸렸습니다. 그녀는 그 고단했던 여정을 『만주생활 77년』으로 엮었습니다. 여기에 시어머니 박순부에 대한 회고가 담겨있습니다. 이 글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그대로!! “평생 불평 한마디 없이 말없이 참고, 침묵으로 살아온 시어머님의 일생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시아버님께서 직업혁명가로 평생을 국권 회복을 위하여 공을 세웠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님 몫도 있다고 생각한다.”김동삼은 1907년부터 협동학교와 신민회, 대동청년단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습니다. 이어 나라가 무너지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건설에 앞장섰습니다. 1914년 백서농장(白西農庄) 장주, 1919년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아 독립군단을 이끌었습니다. 이는 1920년 청산리대첩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 뒤 간도참변으로 무너진 동포사회와 독립군단 재건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1923년에는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를 이끌었습니다. 그 뒤 정의부와 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북만주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31년 10월 하얼빈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그는 1937년 끝내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