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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화 <늑대와 춤을>
이 영화는 자연과 인디언들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한 백인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마이클 블레이크의 원작을 케빈 코스트너가 기획, 각색, 감독, 제작, 주연한 작품이다. 케빈 코스트너가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하고 제작자를 물색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서부극은 이미 한물 간지 오래된데다가 작품이 너무 길고 특히 대사 중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인디언 언어를 자막 처리하는 경우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시키기에 무리가 있다는 점 등이었다. 그러나 코스트너는 이러한 어려운 여건을 딛고 과감히 직접 제작, 감독으로 나섰다.
이 영화는 그동안 침체기에 있던 할리우드 서부극을 부활시킨 공로와 아메리카 원주민을 악으로 보지 않는 1970년대 수정주의 서부극을 계승했다는 두 가지 의의가 있다. 원주민을 조명하면서도 백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과 수우적과 대척점에 있는 포니족 등을 악랄하게 묘사했다는 점 등이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원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전의 다른 영화들과는 매우 달리 무척 신선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우족의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코스트너는 서정성과 따뜻한 인간미 그리고 아름다운 장관을 통해 서부영화 사상 가장 매혹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기존의 서부극에서는 인디언들을 난폭하고 야만족인 시각으로 묘사해 온 반면에 이 영화는 인디언들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전통적인 서부영화에서는 대부분 인디언들을 약탈자, 머리를 벗기는 미개인, 납치자 등으로 그려왔고 그래서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관객들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백인들의 서부개척은 그들에게 있어 자기네들의 조상들이 대대손손 살아온 땅을 강탈당하는 것이 다름 아니다.
사진, 수우족 추장(발로 차는 새)와 함께
그래서 이들에게는 백인의 군대가 더 무지하고 야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우족은 자연에 순응하고 던바와의 관계에서 보듯이 이웃과의 따뜻한 교제를 통하여 백인들보다 도리어 더 문명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와같은 대비는 수우족과 백인들의 버펄로의 사냥을 통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수우족은 자기네들의 최소한의 생존을 위하여 버펄로의 사냥을 자제하지만 백인들은 단지 가죽만을 위하여 무차별 사냥을 한다. 던바는 가죽만 벗겨진 채 벌판에 버려진 참혹하고도 무수한 버펄로들의 시체들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사진, 수우족
이 영화는 수우족의 문화와 복장 고증 등을 치밀하게 재현하고, 영화에 출연하는 다른 부족 출신 인디언 연기자들은 수우족 언어를 배워야 했다. 결국 수우족 언어 전문가를 초빙하여 인디언 엑스트라들을 교육시켰을 정도로 고증에 충실했다는 후문이다.
영화가 개봉된 후 상업적인 대성공과 함께, 아카데미 7개 부문(작품,각색,감독,편집,촬영,음악,음향)을 석권했고, 골든 글로브 3개 부문과 베를린 영화제 곰상을 수상했다. 코스트너는 로버트 레드포드, 워렌 비티, 리차드 어텐브로에 이어 배우출신으로 4번째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가 되었고 이후 이 대열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합류한다.
시종일관 압도하는 경치가 펼쳐지는 이 영화의 실제 촬영은 사우스다코타의 광활한 대평원에서 이뤄졌다. 무려 3000마리의 버팔로를 사냥하는 장면은 영화사에 남을만한 스펙타클한 씬이기도 했다. 초보 감독답지 않게 4시간(감독 판)이라는 긴 대작을 지루하지 않게끔 적재적소에 사건을 적절히 배합한 연출은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로 손색이 없었다. 코스트너는 당시 각본에서부터 편집까지 너무나 많은 작업에 관여를 하였기에 마치 그의 일인극이나 마찬가지라 할 정도로 이 작품에 그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사진, 던바
수우족의 주술사인 ‘발로 차는 새’는 주인공인 던바 중위에게 “슈마니투통카 오브 와시테” 즉 ‘늑대와 춤’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는 참으로 시적이고 낭만적인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의리가 있는 인디언이기도 하다. 이 "발로 차는 새”는 실제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던바에게 "가장 멋진 길은 참다운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멋진 말을 남기기도 한다. 아울러 이 영화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휴머니즘을 짙게 풍기고 있다. 가죽만을 얻기위해 버팔로를 무참하게 사냥하는 백인들을 향해 수우족들은 "영혼이 없는 자들의 소행"이라고 분노한다. 백인들은 이렇게 순박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그들을 문명이라는 이름을 앞세우면서 무자비하게 침략하고 학살하였던 것이다.
II. 제2의 게리 쿠퍼, 케빈 코스트너
케빈 코스트너는 그의 몇몇 대표작인 <늑대와 춤을>, <언터쳐블>, <JFK>, <오픈 레인지> 등을 통하여 묵묵히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카우보이와 같은 미국 남성의 전형적인 자화상을 미국인들에게 심어 왔다. 그래서 중산층 미국인들이 환호하는 영웅으로 입지를 구축하면서 새로운 게리 쿠퍼의 재림이라고 갈채를 받았다.
코스트너는 1955년 캘리포니아 린우드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인, 아일랜드인, 체로키족 혈통을 가지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바로 체로키족 혼혈이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케빈은 자주 이사를 다녔으며, 10살 때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시와 작문을 즐겼다. 18살 때 그는 직접 카누를 만들어 태평양으로 가기 위해 강을 타기도 했으며, 지금의 큰 키(185 cm)와는 달리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키가 겨우 157cm였다고 한다.
1973년 풀러턴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진학해 재정학과 마케팅학을 전공했다. 이때 코스트너는 야간수업을 통해 연기를 배우게 된다. 1978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신디 실바와 결혼을 한다.
첫 직장으로 그는 오렌지 컨츄리에서 마케팅 일을 하다가 멕시코행 비행기에서 우연히 영화배우 리차드 버튼을 만나면서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를 맞게 된다. 버튼이 그에게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인생을 살라고 충고를 해 준 것이다. 케빈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배우로서의 연기였던 것이다. 이후 1980년대부터 연기자로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여러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1974년 에로물 <말리부의 뜨거운 여름>으로 영화계에 얼굴을 내민 그는 몇 편의 저예산영화들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후 1985년 웨스턴 <실버라도>에서 좌충우돌하는 총잡이로 나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걸쳐 코스트너는 할리우드를 뜨겁게 달군 가장 빛나는 별 중의 하나로 자리를 굳혀갔다.
80년대 실베스타 스텔론으로 대표되는 근육질 배우들의 과도한 남성적 매력에 식상해 하던 관객들에게 코스트너는 신선한 대체물로 등장했다. 1987년에 브라이언 드 팔마가 연출한 <언터쳐블>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람보가 아니라, 법전을 들고 악을 응징하는 지적인 남자로 열연하면서 미국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어서 <노 웨이 아웃>에서는 성마른 기질의 섹스 심벌을 연기하면서 대박을 쳤다.
사진, <노 웨이 아웃>에서
이어서 두 편의 야구영화 <19번째 남자>와 <꿈의 구장>이 성공을 거두자 점점 상승세를 타던 그는 서부극 <늑대와 춤을>에서 주연과 감독, 제작을 맡아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휩쓸며, 할리우드 최고의 인기 배우 중 하나로 굳혀 간다. 흥행면에서도 제작비 2,200만 달러로 만든 이 영화는 4억 2,400만 달러의 흥행 성적을 올리며 대박을 터뜨렸다. 곧 이어 <로빈 후드>, <보디 가드>와 같은 상업영화 뿐만 아니라 <JFK>,<퍼펙트 월드>와 같은 작품성 있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관객들의 신뢰를 쌓아갔다. 이때 사십 줄에 접어든 나이로 할리우드의 정상에 오른 코스트너는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잘 나가던 코스트너는 제작, 감독 주연을 맡은 대작 <워터월드>와 <포스트맨>에서 연거푸 폭삭 망하는 대실패를 맛보게 된다. 두 영화 모두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터라 코스트너로서는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커다란 타격이었을 것이다. 잠시 주춤거리다가 정신을 차린 코스트너는 98년에는 <병 속에 담긴 편지>를 찍으면서 슬픈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돌아온 코스트너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 <D-13>을 찍은 다음 2003년에는 대형 웨스턴인 <오픈 레인지>로 왕의 귀환을 알렸다.
그는 2천만 달러를 마련해서 까마득히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캐나다의 광활한 평원으로 향했다. “요즘에는 진정한 서부영화를 볼 수가 없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야 말로 진정한 서부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러나 주위의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한물간 스타가 등장하는 서부영화를 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극구 말렸다.
사진, <오픈 레인지>에서
이렇게 여러 사람이 실패를 예상했던 <오픈 레인지>는 코스트너를 구했다. 개봉하자마자 제작비의 절반을 넘게 벌어들인 이 작품은 6주 연속 전미 박스오피스 상위에 랭크되면서 6천만 달러를 벌어 들였다. 작품면에서도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 서부영화를 따스하게 받아들였다. <버라이어티>지는 “코스트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후 마지막 고전 영화감독으로 탄생했다”라고 갈채를 보냈으며 영화인들도 이구동성으로 코스트너가 느리지만 아름답게 움직이는 고전적인 서부영화의 전통을 온전히 살려냈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후 <미스터 브룩스>, <맨 오브 스틸>, <하이웨이 맨>, <렛 힘 고>등의 준수한 영화에 출연하면서 다시 왕년의 명성을 재현하고 있다. <오픈 레인지> 이후 오랫동안 감독을 하지 않다가 2024년에는 사비를 털어 4부작 <호라이즌-아메리칸 사가>라는 대하 서부극에 제작, 감독, 주연에 나서 1부작을 완성했다. 제77회 칸 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는 물론 흥행 성적도 별로여서 과거 <워터월드>와 <포스트맨>에서 폭망 경험이 있던 터라 이번에도 말아먹는 게 아닐까하고 영화인들은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진, 칸느 영화제에서 다섯 자녀들과
코스트너는 3번의 결혼을 통해 7명의 자식을 두었다. 첫 번째 부인 신디 실바사이에서 3명, 이후 잠시 교제한 브리짓 루니와의 사이에 1명, 그리고 독일계 크리스틴과의 사이에서 난 3명이다. 2023년에는 조강지처라고 소문이 났던 크리스틴과 19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최근에는 벤 애플렉과 이혼한 제니퍼 로페스와 염문을 뿌리고 있다는 소문이다.
III. 눈물의 여정(인디언 수난사)
사진, 눈물의 여정 상상화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에는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영국편을 들었다. 이는 영국이 패할 경우 백인 정착민들이 그들의 지역으로 밀려들어올 것으로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인디언들의 판단이 옳았다. 영국이 패하면서 1800년 경에는 70만 명의 백인들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의 인디언 지역으로 쑤시고 들어와 정착했다.
이후 미국인들은 점차 미시시피 강까지의 영역을 차지하고 싶어 했고 급기야는 태평양 연안까지의 전역을 다 차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미국 정부는 백인들의 거주지를 마련하기 위해 인디언 이주 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주로 인해 엄청나게 많은 인디언이 목숨을 잃었으며 고통에 나날을 보내야 했다.
영미전쟁(1812년 6월에 영국과 미국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 나폴레옹 전쟁 때에 중립을 선언한 미국이 영국의 프랑스에 대한 봉쇄로 미국의 해운이 위협을 받자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으며 1814년 12월에 강화가 이루어졌다) 후 미국은 서부로의 진출을 가속화했다. 이번에는 프랑스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미시시피 강까지의 루이지애나 지역이었다. 이 땅에는 오래 전부터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잭슨이 대통령이 되기 전인 1820년대 초반에는 남부의 인디언들과 백인들은 함께 정착하여 평화롭게 지내며 왕래도 빈번히 가졌다. 백인들이 인디언 마을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손님이 되기도 하였다. 인디언들의 좋은 이웃이었던 이들 개척자들은 인디언을 추방하는 움직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데이비드 크로켓(알라모 전투에 참가하여 맥시코의 산타아나에게 죽임을 당했다)이나 샘 휴스턴(텍사스 독립전쟁을 이끌었으며 초대 텍사스 주지사를 지냈다) 같은 개척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1820년대에 들어와 백인들은 이들 인디언들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런 인디언 강제 이주를 밀어붙인 선봉장은 영미전쟁의 영웅이자 미국의 7대 대통령이었던 엔드류 잭슨이었다. 잭슨은 인디언 역사에서 가장 무자비했고 인디언들에게는 철전지 원수였다. 잭슨의 뒤에는 정치가, 사업가, 부동산 투기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진, 눈물의 여정 상상화
잭슨은 전쟁이 끝난 후 휘하의 민병대를 동원해 플로리다와 조지아에 살던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토벌해 나갔다. 인디언들에게 ‘긴 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의 잔인성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한편 잭슨은 이렇게 해서 인디언들을 쫓아낸 땅을 친구들과 헐값에 매입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대통령 잭슨은 더 나아가 인디언들을 미시시피 강 너머의 백인이 살지 않는 곳으로 강제 이주시킬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의회에 보냈다. 그는 “인디언들이 백인과 떨어져 있어야만 그들 방식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인도주의적 정책은 결국 인디언 자신들에게도 커다란 유익이 될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잭슨의 촉구에 의해 연방정부는 이 지역 인디언들에 대한 이주 정책을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수많은 인디언들이 이주하다가 또는 새로운 땅과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비참하게 죽어 갔다. 대표적으로 고통을 받은 부족은 크리크 족과 체로키 족, 그리고 세미놀 족이었다.
1826년 조지아 주정부에서 대규모 병사들을 파견하여 크리크 족에 대하여 이주하라는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국 군인들은 크리크 족 마을에 마구 들어와 2,000~3,000명 단위로 묶어 이들을 서부로 쫓아내기 시작했다. 곧 바로 위기를 느낀 크리크 족은 알아서 고향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여 오클라호마로 떠나갔다. 낡고 썩은 배에 타서 미시시피 강을 건너다가 침몰해서 몰살당하기도 하고 기아와 질병으로 수백 명씩 죽어나갔다. 전체의 절반 이상이 험난한 여정 길에서 목숨을 잃었다.
체로키 족은 더 비극적이었다. 체로키 족은 일찍부터 백인 문명을 받아들여 농부, 대장장이, 목수가 됨으로써 백인들의 세상에 발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통치기구를 조직했으며 백인 선교사들까지 받아 들였다. 추장 세쿼이아는 체로키 문자를 만들어 영어와 체로키어로 신문을 발행했고 인근 백인들과도 아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1827년 그들만의 독립정부를 수립하고 조지아 주에 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지아 주정부는 이를 단칼에 거부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체로키 족은 연방대법원에 자신들의 권리를 확인해 달라는 소장을 제출했다. 대법원은 인디언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토지에서 몰아내는 것은 헌법위반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잭슨 대통령은 이 판결을 너무나 비상식적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조지아 주정부는 잭슨 대통령의 호응에 힘입어 대법원의 판결에 불복하고 체로키 거주지를 무력으로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소소한 일에 주정부가 반기를 들어도 힘이 약한 연방정부는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위협에 시달리던 체로키 족은 하는 수 없이 굴복했다. 마침내 1838년 10월 1일 1만 7,000여 명의 체로키 부족 일단이 첫 번째 ‘눈물의 여정(The Trail of Tears)’를 시작했다. 연방정부군은 마치 전쟁포로를 끌고 가듯 이들을 몰고 갔다.
반항하는 자는 쇠사슬에 묶이거나 가차 없이 처분되었고 잇따른 굶주림, 갈증, 질병 등으로 4,000여 명의 체로키 족이 눈물의 행로 도중 숨졌다. 그러나 잭슨에 이어 대통령이 된 밴 뷰런은 1838년 12월 의회에서 “체로키 족 전원이 미시시피 서쪽의 보금자리로 완전히 이주했다.”고 말했다. 이어서 체로키 족을 이주시키기로 한 의회의 결정은 “체로키 족에게 최상의 행복한 결과”를 낳았다고 지껄여댔다.
한편 플로리다에 흩어져 살던 세미놀 족은 크로키 족과 체로키 족을 반면교사로 삼아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오세올라라는 젊은 추장 밑에 수 천 명의 전사들이 모여들어 에버글레이드를 근거로 치열한 항전을 지속했다. 이 싸움은 무려 8년이나 계속되었다. 세미놀 족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택했다. 정부군은 진흙, 늪, 열기, 질병 등에 시달리면서 1,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오세올라가 정부군에 잡혀 처형을 당하면서 항전도 끝이 났고 남은 세미놀 족도 체로키 족을 따라 오클라호마로 강제 이주당하고 말았다.
사진, 서부개척시대 백인들과 인디언들
세미놀 족의 이주로 미시시피 강 동쪽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 지역 수천 만 에이커의 땅이 백인들의 손아귀로 넘어왔다. 백인들은 이를 개척과 진출이라고 불렀고 원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는 살육과 부당한 강점에 다름 아니었다. 백인들의 욕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인디언들이 오클라호마로 이주한지 채 20년도 되지 않아 백인들은 다시 그곳으로 몰아닥쳐 이들을 더욱 서쪽과 오지로 몰아냈다.
한편 극서부지역에는 아파치 족, 코만치 족, 샤이엔 족, 수우족 등의 매우 완강한 부족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수렵을 하면서 먹을 것을 확보할 수 있어서 백인들과 끈질기게 대항할 수 있었다. 양 진영 간에 끊임없이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 60년이 지나서는 인디언들은 모두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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