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정치에 복무한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통하여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자신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그는 결코 철학 전문가가 아니며 철학적 논쟁을 벌이는 이유도 진리를 설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레닌이 이 책을 통하여 치열하게 경험비판론을 공격하는 것은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사상투쟁은 일종의 정치투쟁인 셈이다.
레닌에 따르면 유물변증법이야말로 유일하게 모든 인민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자명한 철학적 학설이자 이론이다. 그것이 단지 진리이기 때문에 지지하고 이를 위해 목숨 걸고 정적들과 투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리가 특정한 사람들만 볼 수 있는 비밀의 언어로 쓰여 있다는 것은 마치 바티칸의 미사를 특별한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사가 반드시 라틴어로만 진행되어야 하느님에게 그 뜻이 전달될 수 있을까?
그는 아카데믹한 철학 논쟁을 벌이고자 한 것이 아니다. 결국 레닌이 보기에 철학이란 사상의 형태로 이루어진 계급투쟁에 불과했다. 레닌의 이러한 생각은 근대적인 사유를 뛰어넘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많은 사상가들은 철학이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며 진리란 곧 어떠한 특정 관점이나 편견에도 좌우되지 않는 객관적이고 의심의 여지없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레닌에게 철학이란 하나의 사상적 투쟁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며, 진리란 바로 현실 국면에서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레닌에게 철학이란 그저 진리 탐구나 앎의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활동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레닌의 철학적 태도는 니체나 푸코의 태도와도 일맥상통한다. 주지하다시피 니체에게 철학이란 진리 탐구라기보다는 이를 빙자한 하나의 권력 행위이며, 푸코에게도 앎이란 ‘앎의 의지’, 즉 권력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자신의 책에서 니체와 푸코처럼 지식을 권력투쟁이라는 말로 명시적으로 정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이들의 생각을 실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레닌의 철학은 근대 철학의 관행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철학은 정치에 복무한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