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족이라는 명칭은 명말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만주족의 역사는 이것보다 긴 것으로 알려져 있고, 최초의 만주족의 조상은 숙신(肅愼 : * 쥬신으로 조선의 어원이라고도 한다)으로 기원전 1천년경에 이미 주나라 왕에게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한나라때는 숙신을 읍루(手+邑婁)라고 불렀으며, 남북조시기에는 물길(勿吉), 수나라때는 말갈(靺鞨)로 불렀다. 속말말갈(粟末靺鞨)은 발해국의 핵심족속이었다. 오대시대에는 여진(女眞)으로 불렸으며 흑수말갈의 후예인 완안부(完顔部)가 일어나서 1115년에 아구타가 금나라를 세운다.
16세기에 들어 건주여진(建州女眞)의 걸출한 영웅인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여진의 제부족을 통일하고 여진족이 핵심이 되어 만주족공동체를 구성한다.
만주족의 성씨를 알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라(哈拉 : hala)와 무쿤(穆昆 mukun)의 관계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여진족이 형성한 부계혈족조직에서 하라는 씨(氏)이고 무쿤은 족(族)이다. 큰 혈연집단은 하나의 하라이고, 혈연관계의 친소에 따라 다시 다음 등급의 혈연집단이 나누어지는데 하나의 하라 안에는 여러개의 무쿤이 존재하게 된다. 하라는 큰 범위의 혈연집단이고, 무쿤은 그 안의 작은 집단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라는 한족의 장, 왕, 이,송등의 성에 해당한다. 여진족에는 푸차씨(富察氏), 페이모씨(費莫氏), 과얼가씨(瓜爾佳氏)등이 있다. 청나라때 편찬된 만주어사전에서는 hala는 "성(姓)"으로 번역하고, mukun은 "족(族)"으로 번역했다. 만주족이 만주어로 "si hala ai"라고 하면 "당신의 성은 무엇입니까"이고 상대방이 "mini hala sakda"라고 하면 "제 성은 사크다입니다"가 되는 것이다.
혈연집단은 지연집단으로 발전하는데, 혈연의 hala와 mukun은 지연의 gasan과 falan으로 발전한다. gasan은 "향(鄕)"으로 falan은 "리(里)"로 번역될 수 있다. 만주족 팔기를 조직할 때는 우록(牛祿)이 기준이 되는데, 우록은 우록액진(牛祿額眞: niruiejen, 후에 우록章京으로 개칭)이 관장한다. 하나의 혈연집단만으로 하나의 우록을 구성할 수 있는 경우에는 하나의 혈연집단만으로 구성하고, 하나의 혈연집단으로 부족하면 여러개의 혈연집단으로 하나의 우록을 구성한다.
매 하라에는 족장에 해당하는 하라다(哈拉達)가 있다. 청나라때 만주족이 자녀를 낳으면 우록액진에게 가서 등기한 후 하라다에게도 등기를 한다. 평상시에는 성을 부르지 않지만 결혼등을 위해서는 하라다에게 등기하여야 하므로, 족내혼은 할 수 없도록 하였다.
해서여진(海西女眞)은 호륜사부(扈倫四部)가 있다. 예허(葉赫), 우라(烏拉), 하다(哈達), 휘파(輝發). 4부의 성은 모두 나라(納喇)이다. 하다와 우라는 원래 하나의 씨족으로 성씨는 나라였으며, 동일한 혈연관계이다. 예허는 본성은 투무터(土默特), 휘파의 본성은 이거더리(益革得里)였는데 후에 나라로 성을 바꾸어, 그들의 세력을 확대하는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팔기만주씨족통보>>에서는 "나라는 만주의 저명한 성씨이다. 그 씨족은 예허, 우라, 하다, 휘파 등 각 지역에 흩어져 있다. 비록 하나의 성(姓)이지만 각자의 족(族)은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성은 하라이고, 족은 무쿤이다. 나라라는 하나의 하라 내에 4개의 무쿤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애신각라(愛新覺羅:아이신줴뤄)의 성씨에 대하여 오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사해(辭解)>>에서는 애신은 황금이라는 뜻이고, 각라는 성이라는 뜻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만주족은 황금을 아이신(aisin)이라고 하는 것은 맞으나, 줴뤄(gioro)는 성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라가 성이라는 뜻이다. 실질적으로 애신각라는 mukun과 hala를 붙여서 쓴 것이다. 즉, aisin은 mukun, gioro는 hala인 것이다.
만주인들은 샤먼교를 믿었고 모든 하라는 자기의 샤먼을 가지고 있으며, 제문을 읽는다. 애신각라씨의 샤먼에게 제사지낼 때 읽은 제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abkadonji .... hala gioro ...."(하늘이시여 들어소서...성이 각라인 집안의...). 그 의미는 현재 성이 각라인 사람이 하늘에 제사지내니 하늘이 복을 내리소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애신각라씨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제문이므로 명확하게 자기의 하라가 각라라는 것을 의미한다. 애신은 각라라는 하라에게 갈라진 하나의 무쿤인 것이다.
청나라때 황족은 둘 로 나누어 "종실(宗室)"과 "각라(覺羅)"로 나누어 종실은 황금색요대를, 각라는 붉은색요대를 차서 구별하였다. 청나라의 규정에 따르면, 누르하치의 부친인 타크스의 직계자손은 종실이고, 그의 백부숙부형제의 자손은 각라이다. 이것은 명확하게 누르하치의 직계후손은 각라라는 하라내에서 애신이라는 무쿤에 속하는 것으로 한 것이고, 그 밖의 후손들은 하라는 각라이지만 다른 무쿤에 속하는 것이다. 각라에 속하는 다른 무쿤으로는 이얼근(伊爾根覺羅), 수수(舒舒覺羅), 시린(西林覺羅)등의 성씨가 있는데, 여기에서도 각라는 하라이고 이얼근, 수수, 시린은 무쿤에 해당한다.
역대왕조가 그랬듯이 청나라에서도 공신에게 사성을 한 사례는 있다. 예를 들어 오배(吳拜)의 원래 성씨는 과얼가였고, 나무타이의 본성은 수무루, 후얼한의 본성은 동가였는데, 모두 각라를 사성하였다. 각라를 사성받았으나, 이들은 애신각라를 사성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각라는 하라이고 애신은 무쿤이라는 것, 사성은 이들을 하라내로는 받아들이나 무쿤 내로까지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계공(치공, 1912. 7. 26 - 2005. 6. 30)선생은 근세 중국의 가장 유명한 서예가이다. 그리고, 그는 청나라 황실의 후예이다. 그가 청나라의 황실과 애신각라씨에 관해서 적은 글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
만주족의 성은 매우 많다. 만주어로는 성씨를 "하라"라고 한다. 많은 만주어 성은 모두 대응하는 한족성이 있다. 예를 들어 완안씨(完顔氏)는 금나라때부터 이어져온 성씨인데 음역으로 한 한어성은 왕(王)이다. 과이가(瓜爾佳)씨는 음역으로 한 한성이 관(關)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왕씨성을 가진 사람, 관씨성을 가진 사람은 완안씨와 과이가씨의 후예들이다. 물론, 더 많은 한족들이 그 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이것도 민족융합의 하나의 표현이다. 나는 일씨기 <<청나라때 소수민족성명의 개역을 말한다>>라는 글을 쓴 바 있고 <<청화대학학보>> 2002년 제4기에 게재되었으며, 이에 관한 내용을 전문적을 언급했었다.
나는 계공이라고 불리니 성이 계이고 이름이 공이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은 성이 애신각라이고 이름이 계공인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편지를 쓸 때 이렇게 쓰고,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표기방식에 따라 애신각라와 계공 사이에 점을 찍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나를 "김계공(金啓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애신각라씨들은 청나라가 망한 후 대부분 한족성을 따라 김(金)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계공의 집안에서는 이것은 원수인 원세개가 시킨 것이니 따를 수 없다고 하여 김(金)성으로 바꾸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는 내가 명확히 해야겠다. "애신(아이신)"은 여진어이고, 성이다. 금나라때부터 있던 것이다. 뜻으로 본다면 "금(金)"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각라(줴뤄)"라는 두 글자는 없었다. "각라"는 만주어 jir의 음역이다. 원래는 다른 뜻이 있었다. 청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누르하치의 부친인 타커스(塔克世)를 대종으로 하여 그의 후손들은 "종실"이라고 부르고 황금색 허리띠를 하였다. 이에 따라 세간에서 "황금허리띠를 두른 사람(黃帶子)"라고 불렀다. 타커스은 부친 줴창안(角昌安)에게서 여섯 명의 형제가 있고 이들은 보통 육조(六祖)라고 부르며, 타커스의 직계가 아닌 방계후손들을 각라(覺羅)라고 불렀고, 붉은 허리띠를 하였으며 그 후손들을 "붉은 허리띠를 두른 사람(紅帶子)"라고 불렀다. 이들 "종실" 사람(각라)들은 황실에서 관리하였으며, 정치경제적으로 특권을 누렸고,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청나라때 이 "각라"를 성의 뒤에 붙였는데, 예를 들어 유명한 작가인 노사(老舍)선생의 원래 성은 서서(舒舒)씨였다. 나중에 "각라"를 붙여 "서서각라"가 되었다. 그러나, 노사선생은 서서중 첫번째 서를 따서 본인의 성씨로 하고, 두번째 서(舒)를 사(舍)와 여(予)로 나누어 자기의 이름으로 삼았다. 즉, 서사여(舒舍予)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라"를 "애신"의 뒤에 붙여 "애신각라"가 된 것이고 이것이 한 씨족의 성으로 되었다. 즉, 원래 이 성은 없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고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라"는 "종실"이라는 의미가 있고, 단지 "대종(누르하치의 직계후예)"이외의 종실을 의미할 뿐이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히우에 다시 이 각라를 강조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성씨 본래의 발생이나 변화에 비추어 보는 것이, 내가 애신각라를 성으로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 이유이다.
현재 많은 애신각라씨는 자기의 성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성을 애신각라로 불러주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불러주고자 하며, 이것이 그에 대한 일종의 존중으로 보고 있다. 이건 실제로 의미없는 일이다. 신해혁명시에 일찌기 "구제단로, 회복중화(驅除단虜, 恢復中華)"의 구호를 외쳤고, 이것이 성공한 후에는 만주족들은 스스로 만주족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그 황족들도 자신이 스스로 애신각라씨라고 말하는 걸 꺼렸다. 나중에 당국자들은 이 구호가 나무 국한성을 지닌 것을 알고는 "오족공영(五族共榮)"을 외치며 상황은 좀 나아졌다. 그러나 해방후에 애신씨들은 여전히 자신이 애신각라씨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자 하였따.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이미 멸망한 구사회, 구세력으로 대하고 예전의 좋은 시절을 그리훠하는 것으로 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에 이르러, 자기의 성이 애신각라라고 말하는 것자체가 스스로를 봉건제도의 쓰레기나 우귀사신이라고 말하는 것이어서, 사람들마다 피하고 언급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후에 민족정책을 실시하며 더 이상 소수민족을 차별하지 않게 되고, 심지어 소수민족을 우대하게 되었다. 이 때 다시 애신각라라는 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현상이 나타났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들어주고...나는 이건 정말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통속적인 말로 한다면, "재미없다" 사실로 보면 애신각라가 만일 진짜 하나의 성이라면 그것이 영광스러울 때도 좋고, 욕될 때도 좋다. 완전히 정치에 둘러싸여있었는데, 이것이 자랑스러워할 것인가? 그리고 그걸 끌어안고 즐거워할 것인가? 이것은 내가 감정적으로 애신각라를 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이다.
나는 옹정황제의 제9대손이다. 옹정의 넷째아들은 홍력이고 그는 황위를 이었으며 바로 건륭황제이다. 옹정의 다섯째 아들은 홍주(弘晝)이고, 홍력보다 1시진정도 늦게 태어났다. 당연히 모친이 다른 이복형제이다. 건륭은 즉위후 홍주를 화친왕(和親王)에 봉한다. 우리는 바로 이 화친왕의 후대이다.
홍자배의 아래 항렬은 영(永), 면(綿), 혁(奕), 재(載), 부(溥), 육(毓), 항(恒), 계(啓)이다. 영, 면, 혁, 재의 네 글자는 건륭황제가 태후에게 바친 싯귀에서 따왔다. "영면혁재봉자위(永綿奕載奉慈위)"에서 온 것이다. 혁은 높고 아름답다는 의미이며, 전체의 의미는 영원이 길이길이 아름다운세월을 자상한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겠다는 것이다. 부, 육, 항, 계의 네개자는 나중에 이은 것으로 특별한 근거는 없다.
우리 이 집안이 제1대를 옹정황제로 한다면,
제2대는 옹정의 다섯째 다들 화친왕 홍주이다.
제3대는 영벽(永璧)이다. 그는 화친왕 홍주의 둘째아들이고 여전히 화친왕을 세습하였다. 같은 배분으로 넷째아들, 여섯째 아들 영환, 일곱째아들 영곤등이 있다.
제4대는 면순(綿循)이다. 그는 영벽의 둘째아들이다. 여전히 왕의 작위를 물려받는다. 그러나 화친왕에서 군왕으로 등급이 내려간다.
제5대는 혁형(奕亨)이다. 그는 면순의 셋째아들이다. 이미 등급이 패륵으로 내려가고, 보국장국에 봉해진다. 같은 항렬에는 넷째아들 혁총, 여섯째 아들 혁근, 아홉째 아들 혁예등이 있다. 규정에 따르면 종실의 관직은 무관의 관직을 받는다. 청나라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송나라, 명나라때도 마차가지였다. 예를 들어 송나라때는 높은 등급으로는 절도사를 받고, 그 아래는 방어사를 받았는데 모두 무직이다. 명나라때에는 팔대산인 주용이 종실로 무직을 받았다. 혁형의 대이후로 우리 집안은 모두 장군으로 봉해졌지만, 이것은 허직(虛職)일 뿐이다.
제6대는 나의 고조할아버지인 재숭(載崇)이다. 그는 혁형의 다섯째 아들이다. 측실 소생이었으므로, 지반에서 갈라져 분가하였을 뿐아니라, 작위도 더욱 내려가서 겨우 1등보국장군일 뿐이었다. 같은 항렬로는 넷째 아들 재용등이 있다.
제7대에는 나의 증조할아버지인 부량(溥良)이다. 그는 재숭의 둘째 아들이다. 형재는 두 명이 더 있었고, 작위는 다시 내려가서 봉국장군에 봉해졌을 뿐이다. 그의 형은 부선이고 나의 큰증조할아버지이고, 동생은 부흥으로 나의 셋째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모두 봉국장군을 받았다.
제8대는 나의 할아버지인 육륭(毓隆)이다. 부량의 큰 아들이다. 모두 다섯 자식을 두었는데, 둘째 할아버지는 육성이고, 셋째, 넷째 할아버니는 요절하였다. 다섯째 할아버지는 육후인데, 나의 큰증조할아버지에게 양자로 가서 대를 이었다.
제9대는 나의 아버지인 항동(恒同)이다. 독자였다.
첫댓글 여기에도 올라왔네요. 제가 올리려고 그랬는데. ^^ 애신각라라는 성이 '신라를 사모한다' 라는 해석이라던가... 누르하치가 신라의 후예라던가 하는 이야기는 여기서는 더 이상은 안나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