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년말이 다가오면 길거리에서 풍경이 아름다운 사진이나 미끈한 여배우나 모델이 든 달력을 파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불경기 탓인지 아니면 코로나19 탓인지 카렌다 파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간혹 길거리에서 돌돌 말은 카렌다를 들고 가는 모습은 보인다.
사람마다 배꼽시계라는 체내시계를 갖고 있지만 때를 제대로 알려면 시계를 보아야 한다. 또 생일이나 제삿날, 무슨 요일을 알려면 달력을 보아야 한다. 체내시계는 동물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식물들도 다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도 각기 체내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전 등산을 갔더니 엄동설한인데도 날이 따뜻하니까 일부 진달래와 개나리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날이 따뜻하니 봄이 왔다고 잘못 인식한 모양이리라.
나의 어린시절 시골에서 살 때에는 6.25사변후여서 모든 물자가 부족하던 보릿고개 시절이었다. 논밭에 줄 비료가 없어서 개똥도 주우러 다니던 때였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처럼 흔한 개똥도 거름하려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부지런한 사람이 먼저 주워가고 없었다. 종이도 귀해서 학교에서 다 쓰고 난 공책은 아버지의 담배말이에 쓰이거나 방안의 흙벽을 바르는데 쓰였다. 간혹 뙈기를 만들어 뙈기치기로 따먹기 놀이를 하거나 아니면 통시에 가서 짚 대신 화장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집에는 진주,진양군 지역구 국회의원인 구태회가 보내준 한 장짜리 달력이 유일했다. 가운데는 자기 사진이 큼직하게 들어있고 주변에는 일년 열두달이 가지런히 정열돼 있었다. 음력도 작은 글자로 표시돼 있어서 절기를 보고 농사짓는데도 유용했다. 어린 내게는 학교에 가지 않는 빨간색으로 칠해진 일요일과 국경일이 제일 필요했다. 토요일은 반공일이라 해서 오전 수업만 했다. 지금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 보니 모든 것이 부족했던 보릿고개시절이 제일 행복했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제매인 고모부가 로우프 공장을 짓겠다고 자금을 대 달라고 했을 때 문전옥답 열마지기를 몽땅 팔아 주었다. 내가 먹이던 송아지까지 팔고 가을에 양식하려고 추수한 나락 가마니까지 팔아다 받쳤다. 그 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떨어지지 않는 구릉논이었는데 할머니와 고모들이 베틀에 앉아 길쌈을 해서 이룬 것들이고 송아지는 큰 고모님이 이야기해서 평촌동네에서 큰 암소를 한해 동안 먹여주고 배내기로 받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고모부가 공장을 짓는다는 핑게로 귀가 얇은 아버지한테서 돈을 끌어다 쓰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유추된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다가 마산으로 이사를 내려왔지만 먹고 살 일이 꿈만 같았다. 오동동 다리 밑 바닷가 움막 같은 집에 단칸방을 세들어 부모님과 아이들 다섯 형제가 오글오글 생활했다. 아버진 막노동일을 나가셨고 어머니는 선창에서 생선을 받아 기차를 타고 멀리 촌으로 장사를 다니셨다. 그런 도중에 어머니가 장사나가시다가 오동동 다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골반뼈가 나가는 바람에 정형외과에 입원하여 한 달이상이나 계셨다. 막내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내가 엎고 젖먹이러 병원까지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장사하는 이웃집 소개로 서울에서 약국하는 사람이 알바생을 구한다는 이야길 들었다. 낮에는 약국에서 일하면 야간 중학교에 보내준다는 조건이었다. 부모님은 입 하나 덜려고 중1인 둘째에게 물었더니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 공부할 욕심에 부모형제를 떠나 홀홀단신으로 낯설고 물설은 서울로 올라갔었다.
못먹여도 품 안에 있을 때는 걱정이 없었는데 어린 것을 저 혼자 멀리 떼어 올려 보내놓은 부모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소식을 몰라 궁금하면 큰 아들인 나를 시켜 집에서 멀리 떨어진 마산 전신전화국까지 걸어가서 일반으로 전화를 신청하면 연결하는데 서너 시간을 족히 걸렸다. 급행은 조금 빨랐는데 요금이 비쌌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서울 몇번 연결됐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몇번 부스로 들어가서 통화를 했다. 반가운 목소리였으나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잘있나?" "형! 나 잘 있어" 그것이 끝이었다. 할말은 태산 같았지만 길어지면 전화요금 올라간다고 안부만 확인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마산으로 내려오니 년말이 되면 약국 같은데서 약을 사면 달력을 끼워 주었다. 달력을 얻기 위해 일부러 소화제를 사기도 하였다. 마산에서는 중심가인 불종거리 시민극장 밑에 있는 오행당약국이 제일 컸다. 년말이 지나면 헌 달력은 제 역할이 끝나지만 종잇장은 새로운 역할로 변신한다. 달력종이는 지질이 매끄롭기 때문에 학기초에 교과서를 받으면 책거풀 싸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자주 보는 교과서는 표지가 상하지 않도록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의 학생들이 책꺼풀을 쌌다. 책표지에 맞게 칼로 종이를 잘라 재단을 한 다음에 앞표지를 싸고 넘겨서 다시 뒷표지를 쌌다. 그러고선 책꺼풀과 표지가 밀착하도록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나는 대학을 제외하곤 초등에서 고등학교때까지 교과서는 책꺼풀을 싸고 책장 안에도 낙서 하나 없이 깨끗이 사용하면서 신주 모시듯 했다.
재희가 서울로 올라간 그해 년말이 되자 신년 달력을 우편으로 하나 보내왔다. 제일은행 달력이었다. 아마 약국 주인 남자가 은행에 다니는 은행원인 것 같았다. 달력중에서도 은행에서 나오는 달력이 그림도 좋고 지질도 제일 좋았다. 재희는 마산에서 중1을 중퇴하고 올라갔는데 야간중으로 전학을 시켜주지 않고 그해는 무급으로 일하고 다음해부터 학교에 보내준다고 약국을 문닫은 밤에 혼자서 야간중학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주경야독이었다. 그러다가 해가 바뀌어 입학고사를 치고 드디어 원하던 숭실중학 야간부에 입학을 해 교복을 다시 입을 수 었었다. 한해를 꿀렸으니 또래들보다는 덩치도 크고 인물도 반듯하여 반에서는 급장으로 선출되었다.
내가 재수한다고 부산에서 셋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금성사에 다니고 있던 고종형한테 빌붙어 야간에는 알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시립도서관에 공부한다고 다니고 있던 어느날 전보 한 장이 날아왔다. 서울에 있는 동생이 죽어 부모님이 급히 서울로 올라가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수중에 돈도 한 푼 없어 서울로 올라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간밤에 창문이 그렇게 많이 흔들리더니만 동생이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마지막으로 인삿말을 전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었구나. 급한 소식을 듣고 마산고모부를 대동해서 기차로 올라가신 부모님은 가슴이 메이어 통곡소리조차 나오시지 않으셨다고 했다. 서울에 도착하여 주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간밤에 혼자서 늦게 연탄불을 갈아 넣고 자다가 연탄가스가 문틈으로 새어들어 그만 변을 당했다고 한다. 아침에 늘 일찍 일어나는 학생이 해가 돋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아 문을 열어보니 가스에 중독돼 있었다고 한다.
방 안에 걸어둘 반반한 달력 한 장 없던차에 재희가 보낸 달력은 방 안을 환히 밝혀줄 그림이었다. 단지 날짜가 적힌 달력이 아니라 온 식구의 희망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꿈도 한 번 펼쳐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무참히 짓밟아버리시다니... 하느님도 무심하시다고 원망도 많이 했었다. 어린 내 마음도 세상을 온통 다 잃은 것 같았는데 부모님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동생이 가고 난 뒤의 세상은 무의미한 세상 같았다. 하루 하루가 덧없이 흘러가는듯 하였다. 동생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이제 내 손을 떠나 더 멀리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동생과 함께했던 지난 세월을 그냥 흘려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벽에 걸린 달력을 떼어내어 돌돌 말아 포장지에 싸서 상자 속에 깊숙히 감추었다. 재희와 함께 한 추억들이 멀리 도망치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서 언제나 마음속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한다는 생각과 함께.
첫댓글 현재 곳곳 돌라보면 도로,건물등 격세지감이지만 불평하는자는 항시 불평 각 어항 정비하고,삼바리 설치해 방파제등 설치한것 보고 어선들 쳐다보면 대단, 농촌 농로 정비.기계화되고/ 일손부족해 외국인들 쓰고 / 우리가 해외가 외화벌이 할시 하고 같아/1딸라가 귀한시절/요즘 배고픔 아는넘 있나/ 너무 흔하게 소비 하는것 같다 종이 한장이라도/ 카나다서 셀수없는 화물차에 한국 올 펄프원료 보니/중국도 자기국민 밥그릇 자기들이 곡물 생산 해야한다고 한다/ 언젠가 곡물 전쟁하면 우리 어릴시 시대가 도래 할것이다/ 한국 식량자급도 대략15-20% 내다/가축 사료도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