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단 건설현장서 '삼악학교 비석'을 만나다
1908년 신문 기사에 실린 여준 '용인 삼악학교' 개교
이 땅의 ;독립투쟁의 큰 스승'으로 일컬을 만한 교육자 시당 여준(1862~1932)의 잃어버린 자취를 찾았다.
여준 선생의 고향은 용인이다.
1907년 서울 남대문 상동교회 지하에서 신민회를 결성했고 그해 평복 정주에 오산학교 설립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사람이다.
여준은 1908년 고행인 용인에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삼악학교를 세웠다.
1908년 9월 19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죽산의 삼악쟁영(세 봉우리가 높이 솟다) (죽산군 원산삼면능촌삼악학교) 해동거(그동네에 사는) 여준씨가
오태선 오용근씨와 협의하야 창설했는데 전 주사 오향선 씨 해동소재(같은 동에 있는) 자기가사
교사(자기 집 건물을 활용한 교실) 연부(기증)하얏다더라'
죽산군(용인) 원삼면 능말의 여준이 오태선, 오용근과 함께 삼악학교를 세웠고,
오항선이 자신의 집을 학교 건물로 내놓았다는 기사다.
능말은 죽능리의 마을로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기 이전엔 죽산군에 속했다.
이 동네에 터를 잡은 해주오씨들이 학교를 설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여준의 외가도 해주오씨 집안이었다.
삼악학교의 삼악은 마을을 두르고 있는 구봉산과 문수산, 쌍룡산을 가리킨다.
의병장과 일본군 총격전 벌인 느티나무 두 그루
삼악학교가 개교하기 8개월 전(1908년 1월) 죽능리 마을 앞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던 자리에서
의병장 정주원 부대와 일본군의 총격전에 벌어졌다.
현장에 이 사건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삼악학교에서는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학교를 세운 마을 사람들과 학교로 몰려온 학생들은 그 전투를 기억하며 반드시 배움으로 이들을 물리쳐야 한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1910년 일제 병탄을 앞둔 무렵에 세운 민족교육의 전당은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일본은 학교를 위해 기부하는 돈조차 문제 삼을 정도로 이 사립학교를 압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엄혹했던 시절에 교육이 국력'이라고 외치며 필사의 가르침으로 인재를 키워내던
이 학교는 결코 잊혀선 안 될 민족정신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심악학교 터 일대엔 반도체클러스터 조성
당시의 죽산군은 지금의 용인특례시 처인구이다.
원삼면에는 여의도 면적에 육박(92.2%)하는 415만6000m2(약126만평)의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다.
SK하이닉스는 2025년 3월 이곳에 드디어 1개의 팹(Fab)을 착공한다.
1차로 신축될 건축물 전체 면적은 367만km2로 인천공항1.2터미널을합한 면적의 2배가 넘는다.
우리 시는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를 열겠다는 계획으로 새로운 100년 먹거리를 키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의 골격을 만들고 있다.
이런 야심 찬 공사의 한복판에 여준의 삼악학교 터가 있다.
이 땅의 소중한 역사인 '교육 독립운동'의 자취는 이 땅의 미래를 열 반도체르네상스 속에서 그 존재조차 흩어지고 말았을까.
광활하게 진행되고 있는 원삼면 반도체클러스터 공사장을 찾아 나선 건 '미래'와 '역사'는 매체계가 아니라
공존해야 할 가치라는 인식에서였다.
조마조마했다.
삼악학교 터를 가리키는 유명한 비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두 그루 느티나무는 어디로 갔을까.
공막하게 닦아놓은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삐 오가는 큰 트럭들이 무엇인가를 실어 나르고 있을 뿐이었다.
허탈하고 먹먹한 기분으로 그곳을 서성거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트럭 하나가 서더니 우리 취재진에게 용무를 물었다.
'여기에 있던 삼악학교 터 비석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나요?'
너의 질문에 트럭 속의 청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SK 사업 현장사무소로 우리를 안내했다.
부지조성서 나온 문화유물, 박물관 지어 보관키로
그곳에서 만난 김동식(용인반도체 클러스터 일반산단 조성사업 프로) 선생이 친절하게 설명으로 궁금증을 풀어줬다.
'지난달 중순 산단 부지를 조성하면서 삼악학교 터에서 나온 문화유물들을 모두 모아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후 공사가 완료되면 원삼면 문화박물관을 설립해 유물들을 보관할 계획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 서 있던 느티나무 두 그루는 아디에 있나요?
이런 질문에 그는 말했다.
'아, 느티나무 고목은 함부로 옮기면 고사할 위험이 있어서 공사 막판까지 현장에서 관리하다가 올겨심을 계획입니다'
그러면서 느티나무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과연 흙더미들이 쌓인 골짜기 사이에 두 그루 노목이 건재했다.
김 프로는 유물을 포장해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몇 명의 직원들이 달려와 포장을 풀었다.
거기에서 '삼악학교 터'를 가리키는 소중한 비석의 '안녕'을 확인했다.
워낙 무거워 앞면은 볼 수 없었지만 뒷면의 글들은 살필 수 있었다.
마치 여준 선생을 뵌 것 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이 유물들은 향후 이곳에 세워질 '문화유물 박물관'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1968년 건국훈장 받은 용인 출신 최고의 독립운동가
용인 '교육의 큰 별', 여준은 누구인가
1862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여준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교육'을 끊임없이 주도한 '교육보국'의 화신이다.
배워야 깨어있을 수 있고 깨어있어야 나라를 돋을 수 있다는 철학과 사명감으로 평생을 가르침과 독립투쟁에 헌신했다.
서전서숙, 신민회, 오산학교, 무오독립선언서, 의군부,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이런 이름들은 귀에 익지만
이 모두가 어준이 주도하여 설립한 학교이며 단체라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눈부신 활동을 펼친 그의 애국적인 생에 비하여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바는 너무 적다.
거의 잊어버린 대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준은 역사의 낡은 골방에 함부로 제쳐놓아서는 안 되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북간도 서전서숙과 정주의 오산학교 설립 주도
그의 생애를 정리해 본다.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이란 조선인 교육학교를 세워 숙장(교장)을 지냈다.
1907년 서울 남대문 상동교회 지하에서 신민회를 결성했고, 그해 평북 정주에 오산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1908년 여준은 용인에 삼악학교를 세웠고, 1911년 서간도 유하현에서 경화사를 조직했다.
이 단체가 1912년에 만든 학교가 신흥강습소이며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출범한다.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 설립, 서로군정서 부독판 활동
여준 선생은 1918년 삼일운동 이전에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2월에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4월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서로군정서 부독판으로 활동한다.
독판은 이성룡이었고 김동삼, 지청천이 참여한다.
10월에 무장투쟁조직 급진단을 결성해 단장이 된다.
1922년엔 액목현에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경성중학교를 세워 교장을 지냈다.
이후 서헌현 화수천 농장에서 만주농민학교과서편찬위원장을 맡기도 한다.
1930년 한국독립당 결성에도 참여했다.
1832년 그는 임종했고 정부에서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은 것은 1968년이었다.
전설의 정주 '오산학교'는 여준의 작품이었다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가 얼마나 놀라운 명문인지는 그 교사와 교장, 학생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교사가 윤기섭, 정지영, 이광수, 염상섭, 김억, 최남선이 있었고, 교장은 다석 류영도를 비롯해
백이행, 이종성, 나부열, 박기선, 조만식, 주기용 등의 애국지사들 이었고,
김소월, 김기석, 주기철 목사는 이름난 학생이었다.
당시 3대 천재로 꼽히기도 했던 최남선, 이광수, 류영모가 모두 이 학교에서 근무했던 사실에다
조만식, 염상섭, 김억, 김소월 등 스타들이 모두 이 학교에 집결했던 일을 떠올리면 불가사의한 일처럼 느껴질 정도다.
오산학교를 설립한 분은 남강 이승훈이다.
이분은 서울에서 열린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화를 받았고, 도산의 청을 받들어 오산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남강은 안창호에게 '나는 무식하여 학교를 설립해도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니 학교를 이끌 누구를 좀 소개해 주오'라고 말했고,
안창호는 여준을 연결해 주었다.
여준은 안창호가 만든항일 비밀단체인 신민회의 임원이었다.
그의 실력과 열정을 잘 알고 있던 안창호는 여준에게 오산학교 운영을 부탁했을 것이다.
여준은 오산의 정신적인 기둥이었다.
학교의 품격과 교풍과 학교편제, 교육시간표, 교가, 기숙사 경영, 동문회 조직 토론회 운영 등이 모두 여준이 일궈놓은 것이었다.
이승훈의 호 '남강'도 여준이 지어주었다.
오산학교 교가를 지은 것도 여준이었다'
'뒤 뫼의 솔빛은 항상 푸르리
바애나 눈에나 변함 없이
이는 우리 정신 우리 학교로다
사랑하는 학교 오산학교'
여준은 역사-지리-산술을 비롯한 거의 모든 고목을 가르친다.
서진순은 육군연성학교 교관 이력이 있었기에 체육을 맡았다.
얼마 후 이광수가 교사로 초빙되어 온다.
이광수는 당시의 여준을 이렇게 기억한다.
'오산학교 부임했을 때 가장 어른되는 분은 여준선생 이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였죠.
키는 작지만 목소리는 크고 단단했으며 높은 식견을 지니고 계셨죠'
1910년 7월에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졸업생은 11명 이었다.
여준은 이 자리에서 이렇게 축사했다.
'천만가지 재주를 배웠더라도 실행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4년 동안 나라를 사랑하라, 민죽을구하라'는 말을 남강 선생 이후 많은 선생이 귀가 아프도록 얘기했을 겁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것만 실펀한다면 무슨 근심이 있으리오?'
신흥무관학교 교장 여준
1912년 7월 추가가 합니하에 옥수수 창고를 빌려 학교를 만들었다.
이름을 신흥강습소로 븥였다.
이 학교가 신흥무관학교가 된다.
1913년 영어 교사 여준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여준은 눈물이 많았다.
무관학교라지만 군사시설도 제대로 갖출 수 없었고 무기도 없었다.
학생들은 나무총으로 훈련했다.
쩌렁쩌렁한 목청의 선생은 그 장면만으로도 감개무량해 소리 없이 울었다.
조회 시간에 애국가와 교가를 부를 떄도 눈물을 흘렸다.
부르는 걸 보고 울고, 그 노랫말의 감동을 새기며 다시 울었다.
음식은 부실했다.
좁쌀밥은 좀이 슬었고 냄새가 났다.
반찬은 콩기름에 절인 통장 하나뿐이었다.
그것을 아무 불평없이 삼키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안쓰러워 몰래 울었다.
수업이 끝나면 야산을 일군 밭에 곡물을 심고 가꾸었다.
한 겨울에는 허리까지 차는 눈 속을 헤치며 떌감을 구했다.
3.1운동 직전에 무오독립선언서 주도
1919년 2월 27일 그는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고, 여준이 의군부 정령에 추대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직전에 여준은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 38인의 이름으로 무오(1918년)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문안은 조소앙이 작성했다)
유럽과 미국에도 독립선언서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1919년 3월, 삼일운동 이후 서건도의 독립투사 진영에서는 한족회가 결성됐다.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한족회는 '서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임정 산하의 군정부 역할을 맡는다.
여준은 서로군정서 부독판이 된다.
톡판은 이상룡이었다.
이박, 김동삼, 지청천 또한 서로군정서 주역들이다.
여준은 임정의 '준비론'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무정투쟁' 노선을 주장했다.
이런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흥무관학교로 돌아와 독립군 양성에 전념하기로 했다.
1932년, 70세에 여준은 별세했다.
그해는 큰별들이 지는 해였던가.
평생 동지로 지냈던 이회영과 이성룡, 여성투사 남자현 또한 같은 해에 임종했다.
여준의 외아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후손이 끊어졌고, 시신과 유품을 거두는 이조차 없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후손을 찾지 못해 훈장은 선생이 교사로 있었던 오산중.고등학교에서 보관 중이라고 한다.
후세는 그의 위대한 투쟁을 거의 잊어가고 있지만 역사는 여전히 그의 뜻과 충혼을 품고 있다.
용인소식팀이 광활한 공사 현장에서 그의 자취를 찾아낸 까닭은 용인의 여준이 영원히 빛나야 하는 역사의 큰 별이기 때문이다.
용인소식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