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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덕 장로님은 유명하셔서 누구라도 아, 그 분! 하고 아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믿는다. 임장로님은 제자교회 사태가 있기 전 제자교회를 방문, 강단에서 말씀을 전해 주신 바 있으며, 지난 해 하반기에 제자교회를 다시 방문하셔서 말씀을 전해 주신 바 있다. 우리 교회 사태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 교회 회복과 관련하여 많은 도움 말씀을 주신 훌륭하신 장로님이시다. 이하 몇년 전에 작성되어 널리 소개된 글이지만 하나님 공의를 위해 온몸을 던져 헌신해 오신 임장로님의 고귀한 신앙을 되새기고자 이 자리를 빌어 소개하고자 한다.
미 육사 교과서에 기록된 한국인 영웅
1949년
당시 12세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 하시던 부모님과 귀국, 서울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1년뒤 북한 6.25 남침으로 피난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그는 그날의 불행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 뻘 되는 한 청년이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 했다. 당시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 명 청년들이 곧 북한의용군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이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것이다. 의협심 강한 임종덕은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 교실 옆 목조 건물에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 자신의 집으로 도망 갔으며, 집안 큰 나무 위에 올라가 숨었다.
잠시 후 인민군 지프차가 집에 도착, 인민군 요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당에 있던 여동생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여동생은 겁에 질려 떨다가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해 버렸다. 잠시 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들은 반동분자이므로 인민 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형식적 재판이 끝나자 총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 어머니는 숙명여고 교사. 인민군들은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신을 얹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 때 미군을 만난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리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
임종덕은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이 열 다섯.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어느 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 29명이 “형, 오빠” 하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돌아 가라”고 소리 질렀다. “나 혼자도 얻어 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재운단 말이냐” 돌멩이를 던지며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손을 잡고 울며 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밑에 거처를 정하고 모두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 시간 후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모아 비빕밥 만들어 골고루 배식 했다.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 행복했다.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니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 날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 거지로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중요 규칙 몇 가지를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기 위해 반드시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 번 가지 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라.
날이 갈수록 고아들이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고아 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 아이들이 제대로
못 먹고 질병으로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약 살 돈이 없어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죽어갔다.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소매치기와 도둑질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1952년이었다. 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 옷도 사 입히고 약값에 충당했다. 간이 커지면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장충동이 활동 무대. 제니스 라디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 사가지고 왔다.
어느 날 임종덕 소년에게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임종덕이 서울역 대합실에서 고급스러운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가 미 공군 장성 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헌병들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 차 대기 중이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 그 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곧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툰 영어로 자신이 절도 하지 않으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파출소로 연행 하려는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장군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절호의 기회를 사양했다. 이유는 자기가 없으면 100여명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사실이라면 고아들 전원을 미 공군이 운영하는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보이로 일하도록 명령했다.
그 분이 바로 미 5공군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 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 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되었다. 양자로 입적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안긴 임종덕은 “탱큐” 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 미 공군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같은 하우스보이로 이곳 막사에서 일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느냐”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신이 일하는 이곳 하우스보이 자리를 차지하려 온 것으로
오해 한 것이다. 잠시 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 궁금하다” 면서 캐 물었다.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듣고 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 되자”며 격려 해주었다. 자신도 하우스보이가 된 사연을 간략하게 말했다.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형무소 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미군들이 먹다 남은 음식이 많이 있어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음식을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 몇 켤레를 보고
“저것 가지고 가서 팔면 돈이 될 것이다”라 하면서 가지고 가자고 했다. 김장환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가지고 가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 후 흙투성이 된 군화들을 닦아 가지런히 놓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한 미군이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날의 인연으로 지게꾼 소년에서 수원
미 공군부대 하우스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자주 만나자 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모임이 있는데 너도 놀러 오라”고
했다.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콜릿과 과자를 가방에 가득 넣고 김장환을 찾아 갔다. 주요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양아버지의 본격적 신앙과 교육을 위한 원대한 계획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 외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었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대통령을
처음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 중 후반부가
임종덕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자유당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군종감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20대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해 나갔다. 감수성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 설교를 깊이 생각하고 각자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하면서 다시 군종목사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는 “공군 초대 군종감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 쓰는데 우리도 자체 교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대방동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설교했던 공군 군종감이 미국 LA 동양선교교회 임동선 원로목사다.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 졸업 후 양아버지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된다. 처음에는 미국행을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 대학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타일렀다. 한편
임종덕은 지금 양아버지께서 미국 본토로 근무지가 바뀌어 곧 출국하는데 따라가지 않으면 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 받아 본국으로 귀환한다. 한편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 주선으로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기숙사 생활에 만족하면서 하루 100개 영어 단어를
외우는데, 만일 하루에 이를 못 외우면 그날 저녁을
굶으며 밤새 외웠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하바드대에
입학하면서 향학열은 더욱 불타 올랐다. 1957년 하바드대 2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은 여행을 떠났지만 그는 기숙사에서 방학 숙제와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주제로 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것이 하바드대 잡지에 게재 되면서 미 언론과 정계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 외교안보 보좌관 키신저는 임종덕 논문에 자기 생각을
첨가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 있다”라고 썼는데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한편 임종덕은 <2차 대전 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바드대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이날 박사 학위식에 참석한 양부모는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있었다. 소매치기, 절도로 전락한 전쟁 고아를 자신에게 맡겨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하게 한 하나님
섭리에 계속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 날 학위식에 화이트 장군의 동료 장성들이 대거 참석해
자신의 아들처럼 임종덕을 껴안고 뜨겁게 축하해 주었는데, 하바드대학 개교 이래 최고의 “별들의 잔치”였다.
한편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입대,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는데, 낙하산 훈련,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미대사관 무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아마도 외교관으로
키울 계획이었지만 임종덕은 6개월만에 월남전에 지원, 특수부대로
간다. 임무는 미군을 포로로 붙잡아 두는 월맹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이다. 어느 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찝차로 귀대
중 매복 중인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숫자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그들에게 후퇴를 명령하고 대신 자신이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임종덕을 지켜 주신 하나님
임종덕은 먼저 포켓성경을 꺼내 급히 손에 잡히는 대로 몇 장을 찢어 몸에 감추고 성경을 풀 속에 던졌다. 이 포켓성경은 지난날 장교훈련소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훈련 당시 임종덕은 확고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료는 안타깝게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 앞으로 전쟁 터에서 하나님이 너를 꼭 지켜 주실 것이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임종덕은 그의 강한 권고로 성경을 세 번 읽고 난 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영접,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다. 자신에게 신앙을
심어준 동료는 뉴욕 큰 회사 회장이 되었다.
앞서 포로 되기 직전 성경에서 몇 장 찢어 간직한 것이 시편 1장에서 3장까지 였는데 특히 3장 내용이 늘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왜 나를 포로가 되게 했느냐”고 짜증섞인 기도를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속에 ‘탈출’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왔다.
단신의 체구에 단 한군데 부상 없이 월맹군
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돌아왔다. 부대는 함성으로 뒤덮혔고 월맹군 지역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 배치 내용도 파악하고 돌아 왔다.
한편 임종덕은 이때 국방성으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 받았다. 그의
활약은 주야간 없이 강행되었다. 적진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의 고위 지휘자를 납치하며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두번째 포로가 되었다. 첫 번
포로에서 탈출한지 3개월만 이었다. 임종덕은 이제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했다. 그러나 지난날 장교시절 룸메이트 말이 생각이 났다. “하나님은 너를 들어 쓰시려고 고된 훈련을
시키니까 지금 훈련을 잘 받아내야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분명 너를 도와 줄 것이다”라는 말이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다시 탈출 기회를 노리는데 어느 날 특별 심문을 받는 날이 왔다. 북한 군
몇 사람이 임종덕을 유심히 보더니 “이 놈은 틀림없는 남조선 군인이다”하면서 한국말로 심문하는데 임종덕은 그들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영어를 사용했다. 자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몽둥이로 임종덕을 엎드려
놓고 개패듯이 내려쳤다.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임종덕 입에서 “아이구 죽겠네!” 이런 말
한마디만 튀어나오면 한국군으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고통과 신음 속에 “오마이갓”이란 말만 계속했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낮은 음성으로 “이 놈 진짜 남조선 놈은 아닌 것 같은데” 계속 의심하면서 수용소를 나갔다.
두번째 포로가 된 임종덕을 다시 찾아온 하나님
한편 임종덕은 월맹 최북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곳은 당시 소련, 중국,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는 포로들의 집합소였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 임종덕은 기막힌 현장을 목격한다. 어느 날
임종덕은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 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탄창을 몇 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 권총을 임종덕에게 주면서 자신의 머리에다 대고 발사하라는 것이다.
방아쇠를 당길 때 탄창에 실탄이 없으면 살고,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 그러니까 생존 확률은 6대 1이다. ‘러시안룰렛’이란 살인 놀음이다. 당시 책상 위에는 승자가 가질 돈이 놓여 있었다. 즉, 임종덕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각자 택한 것에 돈을 걸어놓고 놀음판을 벌이는…그야말로 인간 목숨이 파리 목숨이었다.
임종덕은 이 순간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저가 지금 이순간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제 생명을 빼앗긴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드디어 경호원의 명령으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긴 팀의 군인이 책상 위의 돈을 자신의 포켓에 넣었다. 수용소 고위 관리들이 일과가 심심하니까, ‘러시안룰렛’놀음판을 매일 한번씩 하는데 어떤 날 권총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시체는 바로 옆 강으로 던져 악어가 순 식간에 먹어 치운다.
임종덕은 이 절박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자나깨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에 매달렸다. 그리고 탈출 계획을 세웠다. 다시 ‘러시안룰렛’ 놀음판에 불려 나가면 지난 번과 같은 상황에서 4초 안에 현장에서 그들을 무력화시키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즉 4초란 것은 1초에 한명씩 사살하고 100미터 정도 떨어진 메콩강에 뛰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가던 순서가 그에게는 한 달이 되었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초조했다. 곧 월맹을 떠나 북한, 중국으로 끌려 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한달 동안 “4초 탈출”이란 작전을 세우고 마치 운동 연습하는 흉내를 내면서 “4초 탈출”의 연속 훈련을 한달 동안 계속했다. 임종덕은 후일 “그때 한달 동안 그들이 나를 부르지 않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탈출을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깨달았다.
한 달이 지 난 어느 날 드디어 그들에게 불려 나갔다. 4명이 권총을 차고 서로 2명씩 마주 보고 앉았다. 이날 따라 여자 경호원이 총을 옆에 세워놓고 서 있었다. 임종덕은 경호 원 옆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힘차게 불렀다. “하나님, 한달동안 훈련시켜 준 4초 탈출의 승패가 지금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 우선 권총의 탄환이 첫 번째 탄창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상대방 한 명이라도 사살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장교 1명이 자기들끼리 보는 앞에서 권총에 탄환 한발을 장전, 두루룩 돌린 후 임종덕에게 건넸다. 권총을 받은 그는 순간 용기가 생겼다. 조금 전 그토록 불안했던 마음은 순간에 사라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한달간 연습한 “4초 탈출” 작전을 개시했다.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는 척 하다가 가장 경계하는 표정의 상대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꼬꾸라지자 임종덕은 평소 그린베레의 무술로 상대방이 권총을 꺼내기 전 평소 훈련했던 4초만에 그들을 격파하고 강을 향해 뛰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순간이었다.
강물로 뛰어든 임종덕은 지난날 특수전 훈련 때 배운바 대로 뛰어든 물속 위치에서
10분을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월맹군들이 강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잠깐씩 숨을 쉬기 위해 순간 수면에 올라와보니 월맹군들은 2백미터쯤
떨어진 강물에 사격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2백미터이상 도망간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대형 물뱀과 악어들 속에서
살아나다
임종덕이
뛰어든 강은 매콩강 지류이므로 악어와 5미터 이상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한다. 그는 강물을 헤엄쳐 가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하나님 저 악어들과 물뱀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저들의 눈을 가려 주옵소서” 계속 이 기도만 했다.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나 밀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 매일 개구리를 잡아 먹고 어떤 날은 4미터
이상 되는 뱀을 잡아 껍질 벗기고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임종덕은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쪽이 남쪽이라고 판단, 계속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 날 미군 헬리곱터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순간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강가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미친 듯이 펄쩍 펄쩍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리곱터는
베트공 복장을 한 임종덕을 발견, 베트공인줄 알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임종덕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단 한군데 부상 없이 밀림 속에 다시 숨었다.
엄청난 절망감으로 쓰러져 누웠다.
의식이 몽롱해진 그에게 다시 그 헬리곱터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큰소리로 외치면서 무조건 백사장으 로 다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펄쩍 펄쩍 뛰었다. 그 순간 미군 헬리곱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했다. 비록 베트공 군복을 입었지만 분명
월남군인 패잔병으로 판단, 구출하기 위해 백사장에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임종덕은 헬리곱터에 타자마자 실신,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임종덕은 의식이 회복되자 자신은 미군 그린베레임을 밝혔다. 미군임을
확인한 미군 수사관은 부모님께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다고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임종덕은 미국 공군 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연락해
달라고 했다. 수사관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임종덕은
즉시 메모지에 아버지 이름 “공군 참모총장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공군대장”을 정확하게 기록해 주었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밀림
속에서 미군 헬리곱터에 극적으로 구출, 사이공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 통화가 되었다. 아버지 화이트 대장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 사이공에
왔다는 아들의 육성을 듣고 “이게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너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네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당시 월남전에서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 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미군은 물론,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 당한 데는 없느냐” 계속 울먹이며 물었다.
울먹이는 아버지를 위로하면서 그가 항상 아버지께 한 말을 다시 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늘 얘기 했잖아요” 임종덕은 1주일 간 공군병원에서 요양하면서 3개월간 포로 생활, 생사의 갈림길에서 끝까지 자신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째 되는 날, 임종덕은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는다. “존손 대통령께서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 임종덕은 즉시 아버지께 이를 알렸더니 "이미 알고 있다. 나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은성 무공 훈장과 1계급 특진
임종덕은 거구의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훈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대위에서 6년후 소령이 되는데 대위에서 바로
소령 특진을 받았다. 은성 무공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훈장 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임종덕을 신기한 표정으로
아래 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키 164cm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 참모 총장에게 “귀관은 어떻게 이런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은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하자
존슨 대통령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러시안 룰렛, 권총 살인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니로를 비롯한 존케세일, 존세비지
등이 출연한 영화, 디어헌터 (The Deer Hunter).
미국 중국, 핑퐁 외교로 극비합의 성공
5년후
그는 닉슨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백악관을 가서 대통령 안보비서관
임명을 받고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미국과 중국이 적성국가로
외교가 단절된 상태이고 당시 중국은 모택동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경기만이 중국정부와 국민이 거부반응이 없었으므로 임종덕 비서관은 미국 탁구선수단을 데리고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지로 순방하면서 탁구를 통한
양국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임종덕 비서관은 당시 중국 총리 주은래를 여러 번 만났다. 주은래가 동생처럼 호의를 베풀며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모택동도 다섯 번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 소개로 결혼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키신저가 가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려야 겠다고 했을 때, “한국에도 알려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당신이 가서 알리시오” 해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렇게 좋아하면서 “일 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하며 육여사에게 당부하여 한국의 전통 가문인 민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하여 결혼하고 더욱 친밀해졌다.
노벨평화상 감이 된 탁구공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 방문에서 합의한 대로 1972년 2월 닉선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 양국 공식성명이 발표되었다 불과
2.5g 의 작은 탁구공이 미중외교를 성사시킨 1등공신으로 노벨평화상감으로 선정되어 세계를
흥분시켰다.
이민동포를 위한 LA 동양선교교회 설립
임종덕비서관은 LA출장 중 한국에서 온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 했다가 설교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과거에
본 기억이 났다. 20여년 전 1953년 15살 때 이승만 대통령과 화이트장군과 여의도 미군공군교회 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한국 공군군종감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았던 바로 그 목사였다.
임종덕비서관은 임동선목사에게 “70년대에는 한국에서
이민을 많이 올텐데 서로 위로 받을 이민교회를 세우자”고
하여 1970년 동양교회를 창립, 8000명의 교포가 모인
가장 큰 한인교회가 되었다. 1975년에 임종덕비서관을 장로추대를 했으나 자신이 장로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장로학과 장로란 책 두 권을 필독, 부족하다고 사양했다.
미국 대통령3대에 걸친 안보비서관
함께 일한 헨리 키신저가 국무장관이되어 미,중 외교에 전념하여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1974 년 양아버지가 83세로 서거하고 재산을
임종덕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바드대학과 모교인 미 공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임종덕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비서관을 잘 수행했다.
중국과 친선경기로 시작한 핑퐁외교로 1979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었다.
미군철수를 고집하는 카터
대통령과 결별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 5년사이 완전 철수 하겠다고 할 때 주한 미군사령부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이 철군 반대를 주장했다. 이틀 뒤 5월19일 카터대통령은 싱글러브장군을 소환하고 참모장직에서 해임시킨 후 카터대통령은 임종덕비서관에게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 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 보시오”라고 하여 “현재 4만여 미군이
주둔하여 북한이 도발 못하며, 한국은 경제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
답하였다.
또 카터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한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에 아무도 말 안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 달 앞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과 같이 불이익을 받을 줄 알면서도 전투 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 바치겠냐”고
했다. 임종덕은 대통령비서관이 걸림돌이 되어 결례가 되므로 자진해서 자리를 옮기겠다고 건의하여 백악관을 떠나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발길은 교회로 향하고 텅 빈 교회에 들어가
모처럼 하나님께 긴 감사기도를 드리고 1986년 육군대령에서 예편, LA동양교회
장로가 되었다.
미 육사 교과서 주인공
625 당시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물배라도 채우려고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를 찾아 허기에 지쳐 힘없이 누워있던 임종덕 아이를 625타임즈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기 자상을 수상한 사진 ‘우물 가의 소년’이다. 임종덕 소령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불을 받았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을”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한다.
첫댓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실화의 주인공 임종덕장로님이 제자교회와 인연이 깊다는 것은...
제자교회 성도님들에게도 큰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당시 임장로님 같은 걸인도 좋은 사람믈 만나게 되어 큰 인물 되었습니다.
진인사대천명님께서 답글을 자주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원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인사대천명님께서는 참 좋은 필명을 사용하시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실 것으로 짐작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떠 오릅니다.
(Faith by itself, if it is not accompanied by action, is dead.)
임장로님은 이 말씀을 몸소 실천해 오신 것이므로 존경하게 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진인사대천명님의 말씀처럼 좋은 이웃을 사귀어야 하며, 악인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이웃은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만...
악인은 언제 어디서나 악행을 저지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숱한 경험을 통해 이를 깨닫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제대로 만남이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줄 압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만남은 정말 더욱 그렇지요.
임종덕장로님 역시 좋은 사람을 만났음은 물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휼륭하게 되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자교회 성도님들과 만남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자 몸부림치는 용기있는 분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진인사대천명 임종덕장로님께서 목동제자들을 선택하신 사유가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위의 이야기의 주인공 임장로님은 전쟁고아, 미국 입양, 하바드대 정치학박사, 베트남 참전 (숱한 죽을 고비 넘김), 격변의 시대 국제 외교관으로 활동, 이민자를 위한 교회 건립... 등 숱한 역경 속에서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매사 최선을 다한 모습에 진한 감동을 받게 됩니다.
형편과 입지는 달라도 목동제자들은 수년 전, 뜻하지 않았던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악한 세력과 대적하여 최선을 위해 싸워 왔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위의 임장로님과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직 미완인 교회 정상화를 위해... 초심을 잃지 않고...
지금 무엇을 실행해 나가야 하는지 다시 한번 점검하고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해 추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드라마와 같은 감동적 실화를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믿음의 동역자들인 모든 목동제자들은 어떤 시련과 고난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도 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허물이 있어도 서로 위로하며 진정한 하나님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이며 공로자가 아닌 빚진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파랑새님의 귀한 의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