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전에 노대통령의 기자 회견이 끝났다.
이회창씨와 비교가 된다.
대통령의 담화가 끝나자 마자 거명된 대우건설 전 사장이 한강에 뛰어들었다.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처분을 바랄 때이다.
소설가 최명희씨는 진정 그 말에 맞는 사람이다.
시중에 구할 수 없는 단편 소설이다.
소설 혼불의 작가의 경력에 나오는 소설이다.
작가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이 작품을 따로 보기란 힘들다. 국립도서관의 서가에 꽂힌 전집중에 올려있을 따름.
당나귀나 프르나로도 검색이 안되는 작품이며, 혼불이외 다른 작품이 별로 없는 작가의 소설로서 귀한 작품이다.
22쪽 되는 작품이니, 글을 갈무리해서 보시는 것이 좋다.
몌별(袂別)
최 명 희
그는 오른손을 공중으로 들어올린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이윽고 주먹
을 쥐는 시늉으로 나머지 손가락들을 접으면서 검지만을 놓는다.
그 검지 손가락은 붓대처럼 날렵하였다. 미동도 하지 않는 흰손 끝은 어쩌면 지금 막
붓 끝에 먹물을 빨아들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공중에 뜬 채로 한동안 그렇게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그지없이 맑게 개여 새파랗게 깊은 하늘은 그대로 홍건한 벼룻물이었다. 그래서 이렇
게 허공으로 들어올리 마른 모필의 갈피를 얼마든지 적셔 주고도 남을 것 같았다.
어느새 그의 흰 손등으로 스며든 물빛이 푸르게 얼비친다. 그는 그대로 하늘을 보고 있
었다. 수관(水管)처럼 투명한 붓대의 끄트머리 손톱 너머로는 어디라고 할 수 없는 곳으로,
물고기만한 비행기가 한 대가 아득하게 사라지는 중이었다.
눈물이 돌게 맑은 하늘이어서 그런가. 비행기는 하늘 저쪽이 아니라 보다 아득한 가슴
의 밑바닥으로 잦아든다.
순간 티눈이 마치는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
이다지 투명한 가을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점이 되어 멀어진 비행기는 어찌 보면 잠
깐 비친 낮별인가 싶기도 했다.
이제 마지막 은빛마저 스러져버린 공중에,
素
라고, 그는 드디어 글자를 쓰기 시작한다. 한 획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잠깐씩 손을 멈
추던 붓 끝은 신중하게 다음 글자로 옮겨진다. 글자가 허공에 음각한다. 손가락 끝이 각도
(刻刀)처럼 날카로워진다.
연(비단연)
" 아름다운 이름이로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낮은 탄식이 어린다. 그의 손이 빈 손짓으로 허공의 글자를 지운다.
그녀의 말도 따라서 지워진다.
그러나 그녀는 허공에서 쉽사리 눈을 거두지 못한다. 그가 써놓은 이름자는 이미 지워
져 버렸는데도, 그녀는 웬일이지 가이없는 푸른 하늘의 한가운데 소, 연, 이라고 씌웠던 자
리만이 말갛게 뚫려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본 일도 없는 이국 처녀의 이름은 가슴이 시
린 창천에 문신으로 새겨져 남은 것이다. 어쩌면 그 자리는 그 처녀의 맑은 동공이 아닌가
생각되어.
"중국의 여인들은."
하다가 그녀는 그 다음 말을 잘라 삼킨다. 미처 하지 못한 말 대신에 억눌린 한숨이 새어나
온다.
이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렇지만, 휠 소(素)자와 비단 견자가 서로 어우려저 빚어낸 처연함이 까닭없이 애절했던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아니… 그것은 정직한 이유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경호(鏡湖)의 물은
달빛같이 맑고
약야계의 계집은
눈처럼 희다
라고 찬탄한 중국의 고인은 누구를 보고 그렇게 노래했을까.
절강성(浙江省)의 회계(會稽)와 산음(山陰) 사이에 고인 호수의 물이 거울같이 맑아서
달빛에 비유되고, 회계 땅에서 북쪽으로 흘러 경호에 드는 물을 약야계 (若耶溪)라 한다는
데, 그 계곡의 물은 또 얼마나 차고 깨끗하여, 그 물 먹고 노닐며 거기 사는 여인을 그려
눈과도 같다고 했을 것인가.
"소연의 고향은 절강성이예요."
라고 그는 말했었다.
그녀는 고개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 하늘을 본다.
눈자위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다.
청람(靑藍)
일년초 마디풀. 일찍이 쪽을 본 일은 없으나, 얼마나 그 잎이 푸르면 진액을 모아서 저다지
도 짙은 남빛 물감을 들이리.
삼백 리나 된다 하는 경호의 물빛이 저와 같을까.
" 사실은 홍자색 풀이예요. 키가 이만큼 큰데요, 사람 허리 높이 정도예요. 아기 가슴까지
닿기도 하고요. 여름에, 칠월 팔월에 붉은 꽃이 피어요. 쌀꽃같이 작은 꽃,"
그는 쨟은 꼬챙이로 그림까지 그려가며 쪽풀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다섯 개의 화피편(花
被片)으로 싸인 붉은 꽃이 마른 땅에서 피어났다. 중원의 어디라던가. 황하(黃河)가 남류(南
流)하고, 남쪽에는 대파(大巴) 산맥이 우뚝하며, 북방에는 고비사막이 가까이 있다하는 섬서
성(陝西省) 어느 곳에 이름도 정취로운 남전( 藍田)아라하는 땅이 있다고 했지. 그곳에는 깨
끗한 쪽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거기 사람들은 누구라도 얼음 같은 진
남색의 물감을 빚어낸다고, 그는 말했었다.
어찌나 그 빛이 푸르고 깊은지 헤아릴 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무리 잡다한 세상사
에 시달리던 사람이라도 그 물빛을 한번 보기만 하면, 마음속에 찌든 먼지를 서늘하게 씻어
낼 수 있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아무리 잡다한 세상사에 시달리던 사람이라도 그 물빛을 한번 보기만 하면, 마음
속에 찌든 먼지를 서늘하게 씻어낼 수 있다고도 하였다.
"가슴이 시린 물빛이겠군요."
"저만큼."
그는 무릎 위에 내려놓았던 손을 들어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창천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
락이 아까 지워버린 이름을 점자(點字)로 읽는 것 처럼 보인다. 그는 쉽게 손을 내리지 못
한다.
황홀하게 물든 몇 백 년생의 은행나무 가지 너머로 새파랗게 창창한 하늘은 오래도록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 두고 온 기억의 안개, 아니면 동경 (憧憬) 의 이내가 차가운 물방울로 어리는 듯한
모습의 푸른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가슴으로 문득 봉선화 꽃물이 떨어진다.
어린 날의 고향 집 토담 아래, 혹은 장독대 언저리에 봉울봉울 피어나던 붉은 꽃, 흰 꽃,
그리고 분홍의 꽃 숭어리.
이상하게도 어른들은 다른 것 보다 흰 꽃의 물이 훨씬 더 진하게 든다고 했었다. 그러나
흰 꽃은 흔하지 않았다.
" 꽃잎은 봉황생 벼슬이고, 잎사귀는 날갯죽지란다."
아무리 보아도 어느 구석에 구만 리 푸른 하늘을 날아갈 만한 기상이 깃들어 있을 듯 싶지않은 화초 몇 포기는 마당 귀퉁이나 꽃밭 모서리, 아니면 고샅에서도 그저 무심하게 자라 올랐다.
봉선화 물은 밤에 들여야 한다. 생쑥 모깃불이 있으면 더욱 제격이었다. 소금과 백반, 그리고 숯가루를 잎사귀에 섞어 꽃잎까지 넣고는 고르게 고르게 으깨어지도록 찧는 것은 어머니나 큰언니가 해주었는데,
그것도, 찧으면 바로 감으면 물이 엷어 희끄무레한 주황이 되고 만다고, 한낮에 해 있을 때 찧어 두었다가 저녁밥을 먹고 나서야 물을 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주까리 잎사귀도 낮에 따 두었다. 그동안 억센 풀이 빠지라고 그늘에 놓았던 이파리로 손가락을 하나 하나 감싸며 등불 아래 무명실로 찬찬히 묶을 때, 손톱 밑으로 쓰라린 기운이 배어들면 저도 모르게 아, 하며 하늘을 본다. 밤하늘의 은하수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한잠을 자다가 깨보아도 밤은 아직 중턱에 걸려 있고, 손가락은 마디마디 지이잉 저리었다. 손톱 속으로 꽃물 스며드는 소리가 화닥화닥 들리며 가슴까지 울리게 했었지. 손톱을 물들이는 꽃물은 가슴에도 쓰라리게 물들었다.
풀 잎사귀 어디에 그런 매운 빛깔이 도사리고 있었던가. 간 밤의 쓰라림이 검붉은 선홍으로 단단하게 물든 열 손톱에 그녀는 소름이 돋았었다. 이슬 맺힌 아침 햇살을 받으며 불꽃같이 타오르던 붉은 손톱은 얼마나 요요하였던지, 행여 빛이 바랠까봐 손을 물에 담그지 못하고 그녀는 세숫물 앞에 앉아만 있었다.
"아가, 걱정 말그라. 손톨 빠지기 전에는 물 안 빠지는 것이다. 나중에는 초생달이 되지야."
어머니는 웃었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여름이 다 가고 하늘이 빙옥같이 푸르러져도 손톱의 꽃물은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무심코 손을 들어 차양을 만들다가 문득 보면, 유난히 새파란 하늘에 사금파리보다 조그맣게 박힌 붉은 손톱이 석류 꽃잎처럼 빛나던 것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하찮은 풀꽃이 무슨 사무친 마음이 있어 손톱 끝에 그렇게 맺히는 것이랴.
또한 어른들은 무엇하러 비늘 같은 어린 손톱 끝에 그렇게 독한 빛깔을 물들여 주는 것이랴.
어쩌면 그것은 그저 꽃물이 아니라, 모질게도 깊었던 누군가의 넋이었을는지도 몰라.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어머니는, 서러운 피에 어린 마음 한 점을 살점같이 떼어내어, 꽃잎을 빌어 소금을 넣고, 투명한 딸년의 손톱 속에 그렇게 새겨 넣은 것이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그 넋이 스미노라고 여름밤의 어둠은 그렇게 저리었는지도 몰라.
한번 스며든 꽃물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반달만큼 남았다가 초생달같이 가늘어지고, 드디어는 실낱처럼 아슬아슬 물려 있던 붉은 금이 깎여나간 다음에도, 여전히 손톱에는 지워지지 않는 선홍이 선연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낯선 계집아이나 우연히 지나치는 길거리의 얼굴 모르는 처녀와 아낙의 손톱에, 꽃불이 타오르듯 붉은 꽃물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순간 그녀는 손톱 밑에 쓰라린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아직도 잊지 않고 저렇게 유전같이 봉선화 물을 들이고 있다는 것이 눈물겨웠다.
명반을 구워서 만든 하얀 백반 부스러기는 보기만 해도 금방 입안에 떫은 신물이 돌았지. 그것은 길고 긴 여름 햇빛 아래 모래 처럼 잘게 부서지면서 끝내는 가루가 되어 봉선화 꽃잎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한번 스며든 그 맛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렇게 가슴에 그대로 가슴에 고여 있는 것이다.
무심코 만나는 다른 이의 손가락 끝에서도 그 신맛은 묻어났다. 그래서 붉은 빛은 더욱 붉게 빛나는 것 같았다.
맨 처음 서울로 전근이 되어 이 거대한 도시에 입성하였을 때, 무엇보다 그녀를 질리고 당황하게 했던 것은, '말'이었다. 단정하게 깎은 무색 투명의 서울말, 그 매끄럽고 날렵한 말씨의 유리면에, 어디 깃들어 스며들 만한 모세혈관 한 오라기 붙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언어 언저리에서, 그녀는 잘못 날아든 나비처럼 서성거리며 맴돌았다. 속이 투명하게 보이면서도 느낌이 삼투되지 않는 음색과 억양이 차갑고 견고하게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낯설고 쓸쓸하게 위축되어 그녀가 모르는, 그들만의 추억과 생애가 담겨져 있을 말의 외곽에 서 있었다.
그녀의 말은 고향에 벗어 놓고 온 고치의 부드럽고 남루한 허물속에 남아 있을 뿐, 명주실로 뽑혀 나오지 못하고, 오랜 세월 저희끼리 닦여온 타관 말은 그녀를 접붙혀 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 말에 자기를 감을 실이 없었다. 단순히 국정 표준어만으로는 감기어 섞여들 수 없는 막이 그곳에는 있었다.
그러다가 참으로 뜻밖에도, 가르치는 여학생의 손톱 끝에서, 서투르게 물든 주황 봉선화의 꽃물을 발견했을 때.
아아.
그녀는 가슴을 막고 있던 막의 꺼풀이 한 순간에 터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터진 자리에서 홍건하게 배어나오는 핏물이 여학생의 손톱 속으로 스미어 남 모르게 흘러드는 것 같았다.
그것을 위안이었다.
소연도 봉선화 물을 들이며 자랐을까.
아니면 서리같이 반짝이는 하얀 손톱을 어여쁘게 다듬으며 자랐을까.
그러나, 그 대신에 그 처녀는 눈부시게 흰 손 끝에서 청람의 얼음 섞인 물빛을 짙푸르게 빚어내었을는지도 모른다.
"쪽풀을 본 일이 있으신가요?"
" 아니."
"남전에 가 보신 일은?"
"없지만요,잘알아요. 어머니의 고향이니까. 어머니는 내가 아주 어려서 돌아가셨지만."
그래서 그에게는 그 이야기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저절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들과 더불어 자라고, 그런 이름의 땅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서로 낯익은 것들끼리 어우러지는 부드러움이 그 낱말들과 그를 한 덩어리로 묶어주고 있었다.
"지금은 못가요. 그곳에는, 그러나 아버지가 말씀해 주시니까. 나는 그런 일을 알아요."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떠나와 버린 대륙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서의 일과, 그곳에 크고 있는 나무, 그리고 그곳의 산과 물에 대하여, 또한 이제는 세상을 하직하였거나 혹은 살아 있다 할지라도 다시는 만날 수 없을는지도 모르는, 안부를 기약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얼굴이며 말씨, 사소한 습관 같은 것까지도 아들에게 이야기한 것이리라.
"고향은 꼭 내 몸이 태어난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다. 이렇게 아버지가 마음속에 담고
이곳으로 와서 살고 있으니, 고향은 그만큼 넓어진 셈이지. 사람은 누구라도 고향을 떠날 수는 없는 거란다. 쫒겨날 수도, 잃어버릴 수도. 다만 그것을 품에 안고 더 먼 곳으로 옮겨 갈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아가, 멀리 가면 갈수록 이 세상의 끄트머리까지라도 가면 갈수록, 고향은 그만큼 더 넓어지는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내가 서 있는 이곳을 내 고향의 마지막 울타리, 경계선이라고 생각해 왔다. 사람이, 어느 이름 붙은 땅에서 살고 있는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고향과 사람은 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자리도 잡지 못하고 정처도 없이 그냥 방랑하면서 낯선 산천을 걸어가고 있는 중일지라도 슬퍼할 필요는 없고 말고. 내가 곧 고향이니까 말이다. 아버지는 나그네가 아니고 주인이다.“
그의 어린 눈에는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피어나는 꽃과, 홍자색 붉은 꽃이 지는 모습, 그리고 방옥같이 푸르고 깨끗한 쪽빛이 가슴에 사무치게 비치어 어리었을 것이다.
'기억'이란, 이미 지나간 시절에 겪었던 어떤 일을 마음속에 새겨 두어 잊지 아니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지만, 그는 발도 디디어 본 일이 없는 중국 대륙의 그리운 고향을, 오래도록 살아본 사람처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지나해 남부의 조그만 섬에서 아열대의 무더운 하늘만 바라보고 살던 그가, 이 낯선 나라의 가을 복판에 서서 무심코 올려다본 청람의 하늘을 향하여, 아하, 슬픈 듯한 음향으로 감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 나는 어디서 살아도 상관 없어요. 졸업하고는 대만으로 가도 좋고, 그냥 여기 한국에서 살아도 괜찮아. 학교를 마치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길 거예요. 대만에서 살면 말 때문에 편리하기는 하지만... 나는 아무 데서나 살 수 있어요. 여기서 공부를 더 계속하는 것도 좋고요. 그리고....당신과...”
그는 아주 천천히 한참씩 생각해 가며 말을 했었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의 일이었다.
“소연은 바로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 편지가 왔어요. 여기.”
그는 도톰한 노트의 갈피에서 푸른 봉투를 꺼내 보였다.
달필로 쓴 한문의 주소에, 보내는 이의 이름이 너무나 선명하여, 아까 그가 하늘에다 새긴 素와 娟이 그대로 봉투 겉봉에 박혀, 검은 글씨로 양각된 것 같았다.
靜姬씨에게
安寧하세요?
오늘 우연히 연구실에서 만나서 저는 정말 반가워요.
요사이 中國語를 배우기 위해 저를 찾아온 친구는 참 많아요. 제가 이름 모를 사람도 있어요. 저는 한 번만 만난 일이 있더라도 7시에 다방에 가서 9시까지 그 친구에게 해설을 주었어요.
그러나 저는 韓國語를 잘 배우기 어려워요. 저는 靜姬씨가 친절하고, 文學 藝術面에 靜姬도 있는 아가씨를 느끼게 됩니다. 저는 항상 靜姬씨와 편지를 쓰고 이야기를 하면, 저의 敎養과 韓國語 實力이 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작년 4월 말 한국에 왔는데 이미 1년 반 보냈어요. 나중에 또 1년 반이 있어야지요.
오늘은 조금 추워요. 대만 12월 같애요. 韓國의 가을은 정말 멋있어요. 하지만 저를 우울하게해요. 울고 싶은 때가 가끔 있어요. 작년 가을에 저는 단풍잎과 은행잎을 따가지고 대만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냈어요. 그곳에 없기 때문이에요.
저는 눈을 좋아하지만 너무 추워서 못 견디겠어요. 작년에 눈도 별로 많이 내리지 않았어요. 금년에 아마 많이 내릴 거예요.
韓國語 實力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간단한 문장만 쓸 수 있어요. 틀린 곳을 고쳐주세요.
제가 쓴 中國式의 韓國便紙를 靜姬씨는 알수 있어요?
참, 저는 (高麗와 元나라의 외교 관계에 對하여)논문을 쓰려고 합니다. 요즘 자료 카드를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 밤 11시, 이만 줄이겠어요.
그가 그를 돌아본다. 그의 눈 속에는 아직도 하늘의 푸른 빛이 스치듯 남아 있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던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은 중국인의 머리털은 검푸르다고 했었다. 웬일인지 별 뜻이 없는 그 말이 그녀의 가슴에는 자국처럼 남아있었다.
“시리다. 이 말을 아시나요?”
그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면서 자기 손에 들고 있는 두툼한 노트를 그녀에게 건넨다. 가장자리에 손때가 묻어 있다. 앞의 몇 장은 아래쪽에 도르르 말려 올라간 채였다.
문득 그 손때가 뭉클하게 느껴진다. 종이가 말려 올라간 부분을 고르게 펴주며 그를 잠시 바라본다. 햇빛이 그의 머리칼에 청동색으로 부서진다.
그녀는 무릎 위에 펼쳐 놓은 노트의 윗머리에 빗금을 그어 날짜를 적는다. 그리고 시, 리, 다, 석자를 꼼꼼하게 쓴다.
글자 밑에서, 노트 갈피에 끼인 소연의 편지가 눌린다.
“ 이 말의 품사는 형용사, 형용사란, 사물의 상태나 성질이 어떠함을 설명하는 말. 그리고 이말의 뜻은, 몸의 어느 부분에 찬 기운을 느끼다.”
국어사전에 풀이된 낱말의 설명을 그대로 옮겨 적는 그녀의 수그린 고개에 은행잎이 날아 앉는다. 마치 그의 손 끝에 닿은 것 같은 느낌에 그녀가 흠칠 놀란다.
“ 노오란 비가 내려요.”
바람도 일지 않는데 늙은 은행나무의 무성한 가지에서 하염없는 잎사귀들이 하르르 하르르 날아 내린다. 어느 결에 노트를 노랗게 덮어버리는 은행잎을 한잎 한잎 집어올리던 그가 웃는다.
그녀도 따라 웃는다.
그는 그 중 한 잎을 그녀의 윗도리 단추에 끼워준다.
어여쁜 손.
아, 좋아요.
“ 처음에 눈이 왔을 때 나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거 무슨 꽃이에요? 그렇게 말했어요. 신기해서 얼굴을....”
“젖히고.”
“ ....저, 치, 고...눈을 받았어요. 너무나 차서 또 한번 깜짝 놀랐어요. 그러나 눈은 대만에 보낼 수가 없어요. 바로 녹으니까요. 그렇게 찬 것이 그렇게 빨리 녹다니. 그래서 편지로.”
“ 그때 그 차가운 느낌이 바로 '시리다'예요. 얼굴이 시리다.”
“차다와 시리다, 어떻게 달라요?”
“ 촉(觸)과 각(覺)의 차이.”
“차다는 촉, 시리다는 각?”
“ 기온이 낮다. 물체의 온도가 낮다. 이러한 외부적인 현상에 대하여 느낌의 주체가 되는 내가, 날씨가 차다, 바람이 차다, 물이 차다, 이렇게 반응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나의 체온보다 낮은 외부 온도와 맞부딪쳤을 때, 일차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차다'예요. 그러니까 아직 온도와 내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지 않는 상태지요. 사람이 차다는 말도 있는데요, 냉정한 사람, 보통 사람들의 마음의 온도보다 조금 온도가 낮은 사람을 말하겠지요.”
“ 그렇다면 '시리다'는 어떤 경우에 쓰이는 말일까?”
“나는 나대로, 찬 기운은 찬 기운대로 아무 관계도 없는 사이였는데, 한 순간에 그 찬 기운이 내게 끼쳐들 때, 차다!하고 긴장하게 되지 않아요? 온도의 대치, 그러다가 어느 틈에 그 찬 기운은 몸 속으로 스며들고 말지요. 깊이, 아주 깊이요. 이빨이 저리듯이 찬 기운은 살을 저리게 하면, '시리다'라고 말해요.”
“ 손이 시리다.”
“ 발이 시리다.”
그뿐인가. 눈을 들어서 하늘을 보라. 머리 위에 드리워진 저 무궁한 가을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으면, 마음이 섬찟하도록 푸르게 엉기는 우무. 한천(寒天)에 눈이 시리다.
“아아, 어려워요.”
나는 당신보도 더욱 어려워요.
“쉬운 거, 차다, 덥다, 시끄럽다, 조용하다, 가볍다, 무겁다, 멀다, 가깝다,길다, 짧다, 예쁘다, 밉다, 흐리다, 맑다, 쉽다, 어렵다.....이런 말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인가요?”
물론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의사의 기본적인 전달과 거래, 단순한 교환일 뿐. 그런 것을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란 풍경과 같은 것이지요. 밝은 해와 구름이 어우러지면서 땅에는 그림자 지고, 시냇물도 소리 내며 흘러가는데, 어디선가 저절로 꽃 피는 소리, 꽃 지는 소리, 천둥 치고, 번개가 칼날처럼 검은 하늘을 가르고, 빗소리가 천지를 삼키기도 하고요. 혹은 언덕이 무너지고, 혹은 흙탕물이 마을을 뒤엎어 흐르기도 하겠지요.
풍경은 살아있습니다. 저희끼리 일어나고 저희끼리 무르익어 저희끼리 스러지지만, 그것은 또 저희끼리 새로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그 풍경 속에서 뛰노는 한 마리의 자연입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나 그저 지나가는 바람 한 포기가 낱말이지요. 낱말이 모여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예요.
어느 날 아침, 문득 놀라운 감동으로 듣는 새소리에 가슴이 떨리듯, 홀연, 비치는 섬광처럼 새로운 낱말 한 마디는 놀랍고도 설리이는 목소리로 부딪쳐 온답니다.
“ 당신은 시인 같아요. 나는 학교에서도 당신이 노트에 적어 준 한국어 해설을 언제나 보아요. 그 말에 당신이 묻어있어요. 어느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하고요. 이렇게 만나서 배울 때는 잘 몰라서 못 느낀 말, 나 혼자 읽고 또 읽으면서 갑자기 알아요. 그때는 이렇게 심장이 출렁출렁거려요. ”
“ 그럴 때, 편지를 쓰세요.”
“ 네, 그렇지만 글로 쓰려고 하면 생각이 다 도망가요. 답답해요...말이 오히려 내 느낌에 방해가 되어요. 말이 나를 표현해주고 도와 주어야 할 텐데.. 마음은 알고 있는데, 말은 내 마음을 몰라요. 말을 안하고 뜻이 통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머리 속에 생각을 주고 싶으면....가슴을, 서로....아아, 나는 울고 싶어요.”
그의 검푸른 머리칼이 그녀의 가슴으로 쏟아진다.
물비늘을 일으키는 햇살이 머리칼의 갈피 사이에서 떨린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 않아요?
그분의 아버님과 당신의 아버님은 절강성의 다정한 친구이시고.
靜姬씨에게
안녕하세요?
나는 (우리 사이에 이제 '나 '로 쓰면 되니까요) 정희씨와 헤어진 후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왔어요. 함께 본 달.
발소리를 크게 내면 나의 마음이 울려요. 그래서 마음이 깨질 것만 같아서 조심히 걸었어요.
그런데도 가슴에서 쿵쿵 두근거리는 소리가 나서요. 나는 내가 소리인가요. 아니면 당신의 가슴 소리가 나와 함께 온 것인가 봐요. 이 말을 당신은 알 수 있어요?
지금 창 밖에 있는 동그란 달이, 가만히 아련히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아요. 고즈녁한 밤에는 눈문이 나요.
보일 듯 말 듯 하면서 秘苑에 있는 아름다운 정경이 지금 희미하게 그립게 떠오르고 있어요. 정경은 슬픈 마음에 스며듭니다.
그 운치있는 옛 나무들. 낙엽이 있는 길. 단청이 예쁜 대궐과 임금님이 선비옷을 갈아 입고 쉰다는 아담한 집. 나는 그 아무 색칠도 안 한 집의 정갈하고 순박한 방에서 정다운 사람과 앉고 싶어요. 두근두근 따뜻한 가슴. 마른 목....
以上, 내가 오늘 당신에게 배운 단어예요.
나는 밤에 옷을 적게 입으니까 꼭 감기에 걸릴 것 같아요. 그래서 빨리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서 이불로 덮고 있어요. 추워서 큰일이에요. 추우면 당신이 더 많이 생각납니다. 오늘 또 큰일이 하나 생겼어요.
보통 3층에 전화가 오면 (우리 대만 유학생들은 모두 3층에 있거든요) 집 주인은 1층에서 벨로 우리한테 알려주었는데, 오늘 저녁에 그 벨이 갑자기 고장났어요. 3층에 전화도 있지만 이것은 받기만 하고 말이 못 나가요. 요금 문제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주인은 3층까지 올라와서 우리한테 알려주어야 해요. 하지만 주인은 귀찮아서 그냥 잠을 잡니다. 당신이 만일 지금 전화를 하는 중이라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는 창문으로 허리까지 내밀고 1층을 내려다봅니다.
이만 안녕!
"오늘 오후 네시 이후에 몇 번이나 당신한테 전화를 했지만 다 통화중이예요. 내가 전화할 때 당신이 꼭 그 옆에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받고 있는 중이어서 답답했어요.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내가 신호를 보내고 당신은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가로막고 있으니까요."
그는 잠시 고개를 무겁게 떨어뜨리고 발부리를 내려다보았다.
"학교는 늘 그래요. 아이들 수업이 있고요. 또 비는 시간이라고 해도 바깥에서 오는 전화가 많아요. 그런 것은 별일이 아니예요. 이렇게 만났잖아요?"
그녀는 그 무거움을 덜어내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하고 웃는다. 웃음 끝이 처진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로 한참씩 생각해 가며 말을 잇는다.
"어제, 원래 당신과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정말……나는 당신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일 즐거운 일로 느끼는데요. 하지만 당신과 연락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자꾸만 편지만 쓰게 돼요."
靜姬씨에게
나는 14일에서 17일 사이에 관광 안내를 했는데, 참으로 피곤했어요. 체중은 3킬로그램이나 줄은 것 같아요.
이번 손님은 대만에서 온 32명의 단체인데, 나는 잠도 잘 못자고 음식도 잘 못 먹었어요.뿐만 아니라 팁도 나한테 안 주었어요. 모든 관광 단체 중에 대만 단체는 제일 짜요.
안내라는 직업은 좋은 직장이 아닐 거에요. 참 복잡해요. 나의 성격은 이 직업이 싫어요. 그러나 여행사는 안내원이 모자라기 때문에 나한테 도움을 청했으니까.
내가 한국에 온 후 4번 안내를 했으니까 이제 관광이라는 것을 조금 알았어요. 보통 안내료는 별로 많지 않아요. 일반 안내원은 다 기생소개하고 쇼핑할 때에 커미션을 받아요. 그러나 나는 이것을 안해요. 다행히 끝났어요.
오늘은 모처럼 청계천 헌 책방에 가서 책을 구경할 예정이에요.
원래 나는 두꺼운 옷을 잘 입지 않는데 요사이에는 조금 추워요. 그래서 밤에 나는 겨울옷을 다 입고 난로를 켜지요.
피곤하고, 춥고, 할 일은 많고요.
곧 예비 시험 5과목을 치게 되는데, 한글로 같은 시간 내에, 같은 시험 제목, 같은 채점 기준으로 하니까 참 힘이 들어요.
이럴 때는 대만으로 도망가고 싶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기대합니다.
그럼, 안녕.
"나는 내가 느낀 점을 말로 하고 싶지만 어려워요. 당신이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공연히 급한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편지로 쓰면 조금 침착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쓰고 싶지만, 또 못해요. 느낀 대로 되지 않아요. 아! 섭섭해요."
그는 짧은 한숨을 끊는다.
서로, 그녀는 그의 수그린 등 위에 손을 얹으며 하늘을 본다. 아까 그가 허공에 음각한 처녀의 이름은 아직도 그 자리만이 말갛게 뚫린 채, 동공처럼 말없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으로 뚫린 자리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바람은 그의 들허리를 스친다.그냥 스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손가락 틈 사이를 비집고 스며들어, 그의 허전한 등과 거기 얹은 손의 사이를 벌어져 떨어지게 만든다.
손을 움츠리며 거두는 그녀를 그가 올려다본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만두고 다시 고개를 숙이어 발부리를 내려다보는 그의 등허리위로 기울어진 햇살이 물무늬를 그리며 어린다.
"당신의 고향은, 대륙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그녀가 그녀를 만났을 때 첫 마디로 물은 말이었다.
"절강성."
그는 그때에도 손가락으로 공중에 浙, 江, 省이라고 또박또박 획을 그어 써 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낳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고향이니까 내 고향도 됩니다."
"이태백의 월녀사(越女詞)!"
"네. 절강성의 소흥(紹興), 회계(會稽), 산음(山陰), 동양(東陽), 또 약야계(若耶溪)와 경호(鏡湖)가 아주 유명해요. 그곳들이 모두 이백이 월녀사에서 노래한 곳이거든요."
"동양 태생의 맨발의 계집과, 회계에서 온 뱃사공 선머슴은."
달이 안 넘어 가
서로 바라보곤
까닭도 없이
한숨을 쉬고 있다.
그녀가 "월녀사"의 일절을 외다가 손 앞의 빈 종이에 한글로 적어 놓은 시(詩)를 곰곰이 들여다보더니 그는 한참만에
"아!"
하고 손가락을 반짝 치켜올리며 투명한 소리로 감탄했다. 그리고 그녀가 적은 글귀 옆에 빠른 글씨로,
東陽素足女 會稽素 郞
相看月未墮 白地斷肝腸
이라고 썼다. 원문이었다.
"당신은 이 시를 어떻게 알아요?"
호기심과 반가움으로 벅찬 음성이 낮게 떨리는 그가 물었다.
"배웠어요. 당시(唐詩). 경호의 물은 아득히 연꽃 삼백 리라 하던데요. 얼마나 아름다울까."
삼백 리나 되는 경호(鏡湖)의 물은
연꽃으로 뒤덮이고 말았습니다.
연 뜯는 한 여인이 어찌도 고운지
구경꾼은 언덕에 구름 같습니다.
달도 뜨기 전에 배 저어 돌아가다니
어느 곳 뉘 집의 부인일까요.
이번에는 그녀가 한문으로 시를 적었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서투른 한국어로 번역을 해보았다. 그리고는
"맞아요?"
그녀를 보고 갸웃하며 웃었다.
그녀는 마치 눈 앞에, 검푸른 경호의 호면과, 진분홍 부리에 연분홍 실주름 잡힌 연꽃이, 이승 아닌 세상의 물 위에 뜬 것처럼 아득히 핀 사이 사이로, 작은 조각배를 저으며 흰 손을 내밀어 꽃을 꺾는 정경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연 밥을 따고 있던 약야계의 계집은(耶溪採蓮女), 눈이며 눈썹이며 별인 듯 달인 듯(眉目艶星月), 나막신 신은 서리같이 흰 발에는( 上足如霜)……."
맵씨있는 버선도 안 걸치고 배에 올라 물장난하며, 푸른 물에 흰 발을 담그고 뱃노래를 부른다. 그러다가 나그네 지나가면 눈웃음 쳐 정을 보내고는, 연꽃 속에 숨어서 부끄러워 얼굴을 물들인 채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그리고, 그 서리 같은 맨발의 계집과, 투박한 나무배 뱃사공은, 물가에서, 무슨 까닭인가, 달이 안 넘어가 서로 바라보곤 저미도록 한숨을 짓고 있는 것이다. 애가 끊어지게.
"아!"
그녀의 말에 그도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곳에서 밀려오는 힘으로 충만된 얼굴을 들어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시간 처음예요. 내가 살아서."
그녀는 순간 가슴 높이가지 들이밀린 물살에 밀리듯 그의 눈빛이 차올라 숨을 멈추었다. 멈춘 그녀의 숨 속으로 눈빛이 가쁘게 밀려들었다.
그날 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어느새 자기보다 먼저 방 안을 점령해 버린 그의 물살에 잠긴 채 숨을 고르느라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 모르게 사전을 펼치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비밀스러운 일이었고, 그가 모르고 사이에 그의 영토를 엿보는 것과도 같은 설레임을 감추기 어려운 일이었다. 담배종이처럼 얇은 미농지의 페이지를 펼치면서 그녀는 손끝이 떨리었다. 그 페이지들은 휘장이었다.
빼곡하게 박힌 검은 활자들 틈에서 그의 고향 지명(地名)을 찿아본다는 것은 확실히 경이로운 일이 분명하였다. 그 명사(名詞)는 친화의 복권처럼 뽑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강성(浙江省)(명)〈지〉중국 동남부 동해 연안의 성. 양자강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잇으며, 전당강(錢糖江)에 의하여 동서(東西)로 나뉨. 성도(省都)는 항주(杭州). 절성(浙省). [넓이 100,000㎢ :인구 20,000,000명]
사람은 엉뚱한 곳에서 슬퍼지기도 하는 것일까.
사전에 나열된 활자들이 간단 명료하게 그의 고향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는 것에 그녀는 한 순간 낙담하여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복받쳤다. 부풀어 넘치던 그녀의 마음이, 견고하고 차가운 철대문에 부딪쳐 문간에서 거절당한 것만 같은 무참함조차도 느껴진 것이다. 그녀는 쫓겨난 맨발이었다 아무것도 그와 함께 딛어본 일 없는.
사전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곳에 기록된 경제적이고도 규칙적인 어휘 풀이는, 알고자 하는 사물에 대상을 접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하던 언어의 자계(磁界)를 엉기어 줄어들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냉소로 뭉쳐 있었다.
그녀는 무안하였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무안함은 아무것도 아닐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그가 아니다. 내가 본 활자는 사전의 내용에 불과하다. 그것은 다만 기호이다. 그 기호의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그곳에는 내밀하고도 정겨운 꽃밭과 마루와 방이 있을 것이다. 그 대문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빗장을 열 수가 없었다. 어휘의 빗장은 완강한 이빨 같았다. 사전에 풀이된 어휘의 빗장을 통해서만 그의 속으로 섞여 들어갈 수가 있는 그녀는, 문 밖에 서서, 헤아릴 길 없는 담장 저쪽에 낙담하였다.
그러니 차라리 한 장의 지도를 말없이 들여다보며,그가 말해준 지명을 하나하나 정성껏 찾아내는 것이 훨씬 따뜻하고 눈물겨운 일이었다.
실같이 가느다랗게 그어진 무표정한 강물의 이름과 산맥의 황토빛, 그리고 녹색의 평야는 오히려 얼마나 진진하면서도 무궁한 미지인가. 북부는 평야이고 남부에는 구릉이 많으며, 기후는 온화하고 우량이 적당하여, 중국에서 가장 풍요한 지대를 이룬다는 절강성, 그리고 쌀․보리․차․면화 등의 농산이 주산물이고, 소금․어류의 수산물이 많이 나며, 수공업도 발달되어 있다는 땅. 거기다 무엇보다도 풍광이 아름다워, 그 절경에 홀린 시인과 묵객들이 하염없이 모여들던 곳. 그 낯선 세계가 낯설지 않은 얼굴로 다가오는 경이로운 감응.
심지어는 그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목소리까지도 손에 잡힐 듯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밤이 이울도록 홀로 지도를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혼자서 느낄 때 그처럼 무한한 자유와 더불어 숨소리가 들리게 가깝던 그곳의 사물들은, 그러나 그의 어눌한 한국어를 통하여 더듬더듬 힘들여 소개될 때, 이상하게도 우화적으로 들리었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단순한 기초 한국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들의 유아용어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아, 어려워요.
그녀는 안타까움으로 자욱해진다.
"말 안하고 살 수는 없을까요? 오리도 노루도 그냥 사는데요. 말이 생기기 전에 사람이 먼저 생겼지 않아요? 그런데 왜 나중에 생긴 말이 사람을 지배할까요. 말을 벗어 버리면 예쁜 몸이 있는데요. 왜 말에게 방해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말은 갑옷 같아요."
도대체 언어란 얼마나 속절없는 약속이랴.
사물의 자유를 붙잡아 껍질을 씌워 놓은 것이 바로 언어이다.
허나, 그 불완전한 도구마저도 곧바로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바람을 잡아서 곽 속에 가두어 주사위를 만든 것이 언어일진대, 그나마도 사전이라는 그물에 걸려 버리면, 그 말은, 원형질은 이미 분화되어 흩어지고 섬유질만 질기게 남게 된다.
결국, 한 낱말이 주는 울림과 말의 부피, 독특한 맛과 빛깔, 혹은 개인의 삶이 묻어 있는 기억의 지문(指紋)과 체온 같은 것들은 가차없이 걸러 버린 쭉정이가, 사전에 적힌 풀이이다.
언어의 불가시광선(不可視光線)이 뿜어내는 신비로운 기운은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가시광선 스펙트럼의 보랏빛 바깥쪽에 어리는 언어의 전자파는 다만 번거로운 군더더기로 처리된 채, 간단한 액면의 화폐로 환산되어 버린 언어만이 명쾌하게 한 줄로 웃고 있는 책. 거래하기 편리하도록 언어를 정리하여 기록한 장부가 바로 사전이 아니랴.
'어머니'를 오로지 '자기를 낳은 여성'이라고 잘라서 정의한 사전이, 그러나 그와 그녀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였던 것이다.
이 삭막한 수단을 통하여서만 그와 그녀는 서로 오고갈 수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서투르게, 더듬거리면서.
오늘 밤에는 달이 얼마나 크요!
저녁에 나는 항상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왔어요. 왜냐하면 달을 구경했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창 밖에 있는 저 달은 아직 크고 밝아요. 흰 달은 맑은 물 같은 빛을 안고 나를 봅니다.
나는 당신을 생각하며 슬프고요.
집에 오니까 함께 사는 친구는 당신이 보낸 편지를 나한테 주었어요.(슬픈 바람 하늘에서나를 위해 불어온다)는 詩 알아요? 나는 편지를 받고 그 생각을 했습니다.
내 친구가 잠이 들은 후 기다리다가 나는 당신의 편지를 봐요.
당신의 편지는 너무 아름답구나!
정말 당신의 편지를 보다가 울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으니까요. 글씨들이 꼭 가까이 모여 앉은 당신인 것만 같아요.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나도 모르겠어요.
한국에 온 후, 나는 살면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느낀 충직한 友精과 사랑을 처음 받았어요. 아!
당신은 靈이 가득한 여자예요.
정말 이런 복잡한 사회에 당신처럼 여자는 별로 많지 않아요.
美貌와 肉體가 시간이 가는 것에 따라 사라질 수 있는 것인데, 착하고, 순진하고, 아름다운 마음은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마음으로 된 당신.
대만에 이런 말이 있어요.
(사랑은 점유가 아니라, 사랑은 상대에게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아깝지 않지만, 당신은 나에게서 필요한 것이 있으신가요? 없으신가요…….
쓰고 싶어도, 못 써서, 답답하여, 당신이 말을 써준 노트를 보며 처음부터 하나씩 읽어보았으나, 내 마음은 없어요.
달빛이 마음을 만져 주어요.
당신으로 가득 차니까 나는 쓸쓸하다.
편지는 쓰다 만 것처럼 끝났다. 그리고, 그 대신에 가을물이 곱게 든 단풍나무 아래서 허리에 손을 얹고 하늘을 보며 웃고 있는 사진이, 편지지의 접힌 자리에서 펄럭 떨어졌다. 흡사 나뭇잎과도 같이. 사진은 그녀의 무릎 위에 소리없이 가벼웁게 내려앉았다.
그 가벼움은 이상하게도 그를 멀고 비현실적인 존재로 느끼게 하였다. 마치 영혼이 인화(印畵)된 감광지(感光紙)를 받아든 것 같은 미묘한 전율에, 무엇인가를 속으로 생각하며 미소를 머금은 그가 웃고 있는 모습이 그녀를 사무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사진의 뒷면을 뒤집어 보았다. 비뚤비뚤한 글씨로,
<말로 못 써서 내가 직접 가려고요. 당신에게.>
라고 거기에는 씌어 있었다.
그녀는 편지를 손에 든 채로 마당을 내다보았다.
귀뚜라미와 풀벌레들이 애끓는 소리로 울며 풀밭에서 달빛을 짜고 있었다.
가슴 복판에서 자지러지게 높은 소리 한 줄이 날카로운 금을 그었다. 그녀는 살을 베인 듯 가슴을 오그리었다.
내가 갈께요. 거기 가만히, 지금 내가 갈께요.
그녀는 차 오르는 이 한 마디를 토해내려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편지 봉투의 겉봉에 쓰인 주소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앞을 가로막는 캄캄한 어둠을 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침묵의 덩어리였다. 말없는 별들의 인광, 차고 푸른 달빛, 달빛에 젖는 지붕 아래 삼층 건물은 시커멓게 몸을 세우고, 창문들은 잠들어 있었다.
대문 안에 국화밭이 있는가.
향기에 울컥, 눈물이 쏟아져 그녀는 담벽에 이마를 기대며 숨을 죽였다. 몸 속에 갇힌 울음이 굽이를 치며 솟구쳤다. 갇힌 눈물은 발등으로 배어나 구두에 젖어들었다. 축축한 발이 무거웠다.
내가 여기에 와 있는데요. 이렇게 당신의 방문 앞에 담벼락을 두드리며 울고 있는데요. 당신을 부르고 있는데요. 당신은 보이지 않아요. 어둠 속에 있어요. 불러도 들리지 않을 곳에서, 당신은 어찌하여 나를 이 어둠 속의 골목에 서 있게 하시는 가요. 나를 보아요. 내게 대답해 주어요.
그때.
완강한 침묵으로 절벽같이 우뚝 선 집채가 물살에 출렁이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달빛이 그렇게 뒤채이며 집채를 침몰시키는 것 인가도 싶었다. 국화 향기가 밀물쳤다.
그것은 골목어귀에서 낭랑하게 터지는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무언지 약간 들뜬 듯한 젊은 청년들의 호기로운 소담(笑談)이, 고여 있던 공기를 투명하게 흔든 것이다.
서너 사람의 그림자가 담벽 아래 그녀의 등 뒤에서 멈추었다.
아직도 그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듯 했다.
그녀는 담벽의 그늘에 가리워져 언뜻 뜨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젊은 그림자들이 충만한 즐거움을 넉넉하게 드러내며 웃는 소리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역력히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유창한 중국어, 그의 모국어였다. 지금껏 그를 만난 이후에 단 한번도 본 일이 없고 들은 일도 없는, 그의 방창(方暢)한 달변은 그녀를 질리게 하였다.
일찍이 중국어가 그렇게도 감각적인 관능미를 가지고 있다고는 감히 짐작조차 해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휘황하였다.
마치 막힌 봇물이 터진 듯 콸콸콸 한꺼번에 달빛처럼 쏟아지는 그의 목소리. 거기서 울리는 모음과 자음의 그 투명하고도 장쾌한 유려함이라니. 그가 바로 음악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자기네 나라 사람끼리 자기네 나라 말을 하는데 왜 그렇게 강렬한 느낌을 받았을까. 그녀를 훑어내린 것은 전율이었다. 그는 놀랍도록 싱싱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의 그는 거의 완벽하도록 아름다웠다. 그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홀리었다.
"아."
한 그림자가 그녀의 발치에 머물며 달빛에 물든 얼굴을 드러냈다. 함께 오던 그림자들은 그의 등을 치며 아마도 음담패설이 분명한 중국어를 남기고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담 벽의 그늘 속으로 스미듯 숨어들어 그녀와 함께 어두워져 버리고 말았다. 담벽의 어둠은 그와 그녀의 그림자를 부드럽게 섞어 주었다.
"어더케 왔어요……여기까지."
"만나려고."
"당신이 오니까……꿈만 같구나!"
"아무 말도."
"그래요. 아무 말도. 그렇지만, 이럴 때……엄마나 엄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내가 마음을……말이……."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 안타깝게 말을 더듬었다. 바로 조금 전에, 그처럼 폐장을 뚫고 솟구치는 모국어로 그녀를 황홀하게 사로잡던 그가 이미 아닌 그는, 더 말을 잊지 못하였다.
그녀는 온 몸이 터져나갈 것처럼 뜨겁게 출렁이던 격랑이 한 순간에 가라앉으며 식어내리는 것을 느끼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어눌한 외국어로 더듬거리며, 자신의 심정을 번역하려 애쓰는 그의 모습이 꼭두각시의 몸짓처럼 야릇하게 보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흰 가면을 쓰고 있는 종이인형과도 같았다.
"정희."
라고 그가 거의 정확한 한국식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숨결이 끊어지는, 입김으로 뭉친 이름이 귀를 문다.
"내게도 중국어를 가르쳐 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였다.
"안 해도 돼. 내가 한국말을 배우면 되니까요. 나는 웬만큼은 말할 수 있으니까. 그게 더 쉬워요."
"나는 당신의 육성이 듣고 싶어요. 정말 목소리. 당신의 한국말은 가성(假聲)이에요."
"당신의 모국어잖아. 그런데 왜."
"내게는 그렇지요 하지만 당신의 한국어는 내게도 외국어예요. 체온이 없는 말이니까. 화폐 같은 환전 가치만 있으니까요."
"어려워. 당신은 사상적인 여자예요. 생각적인. 서로 마음을 만날 수 있으면 되잖아요. 말은 징검다리일 뿐이니까요."
"나는 육성이 듣고 싶어요. 당신의 모음과 자음의 살 속에 스며있는, 추억이 실린 음색, 천연의 목소리, 그냥 자연(自然)인, 저절로 우러나는, 여과 없는, 본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그는 다만 한숨지었다.
그리고 언제인가는, 그가 보고있던, 한자(漢字)로 빼곡이 들어차 새까만 책을 곁에서 넘겨다 보며
"여기 좀 읽어주세요. 당신네 나라말로."
라고 무심코 한 구절을 짚어내렸다.
"안돼, 어려워요. 당신한테는 필요 없는 글이에요."
"그냥 읽어만 주세요. 알아들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정을 당신을 느끼고 싶어요."
당신의 원시(原始)를.
그러나 그는 마치 교과서를 읽는 아동처럼 겨우 몇 자 읽다가
"됐지요?"
묻고는 책을 덮고 말았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한국어로 그녀를 부르고 있다.
"중국어로 당신네 나라말로 나를 부르세요. 아까처럼. 친구들이랑 웃을 때처럼. 내 이름을 중국말로."
"안돼요. 당신은 중국말을 몰라. 내가 한국말 하는 편이 더."
"괜찮아요. 그냥 속에서 터지는 대로 이야기하세요. 그냥, 내가 못 알아들어도……. 제발, 그것이 훨씬 정직한 언어예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모국어의 홍수 속에서 나는 흥건하게 완전한 당신을 읽을 것입니다. 말의 속박을 풀고 당신을 놓아버리세요. 그리고 외마디 비명처럼 나를 뚫고, 나한테로 넘쳐 오세요. 그러면 나는 굽이치는 물살에 떠내려 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이국어의 방파제 위에 올려놓고, 눈금 아래 저 만치에서 물결치는군요. 해일이라면 그러할까요.
그러니, 당신은 끝내 끓어오르지 못할 눈금이 아직은 남아있는 거예요. 비등(沸騰)의 온도가 아닌 것이지요. 그 눈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넘어설 수 있는 것일까요.
그녀는 순간, 서글픈 느낌에 손끝이 굳어졌다. 자신이 그의 손을 어루만지고, 검푸른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번역된 중국어로 애틋한 심정을 속삭이는 모습을 생각한 것이다. 아무래도 그것은 부족함 혹은 모독이었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감정이 진정으로 폭발한다면 어떻게 이국어로 자신을 무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까짓 이성(理性)의 껍질 한 겹을 찢지 못하는 씨앗의 싹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한국어로 말한다 해도, 그녀가 중국어로 소근거린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비닐막(膜) 한 꺼풀은 그들의 전신을 덮어 씌우고 있는 것이다. 투명하게 보이면서도, 손을 마주잡고, 끌어안을 수 있으면서도, 결국 그것은 살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안타깝게 그녀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질기게 기다렸다. 그가 드디어 한국말을 놓아버리고 제 속에서 솟구치는 자기의 모국어를 숨막히게 토해내기를. 그것만이 진실의 알몸일 것이므로. 비닐막을 찢어내는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목메인 갈증을 풀어주기를, 그녀는 애가 타게 바라고 있었다.
그는 끝까지 한국어로 그녀를 아꼈다.
"아이고……어쩌끄나."
그것은 가슴 복판에서 울리는 어머니의 무거운 탄식이었다.
그녀의 눈앞에 어린 날의 여름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그것은 담장의 먹물 머금은 그늘 바로 저쪽 발치에 서리 내린 물소리로 출렁거리는 달빛인지도 몰랐다.
"그렁게 내가 머라고 그러디야? 자다가 암만 손톱이 애리드라도 기양 참고 전디라고 안 그랬냐아. 이렇게 잠결에 아무 디로나 뽑아 내던져버리먼 옷 베린다고 신신당부를 헝게는. 이것 좀 봐라……엄마 적삼을 못 쓰게 맨들어부럿다."
어린 그녀는 놀라서 일어나 앉으며 어머니의 적삼을 보았다. 돌아앉아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 어머니의 등판에 꽃물이, 선연한 핏자욱처럼 물들어 있었다. 붉은 주황이었다.
순간 그녀는 얼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새끼손톱이 맨 몸 그대로 드러났다. 다른 손톱들은 아직까지도 아주까리 잎사귀로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초록으로 죽은 잎사귀를 동여매고 있는 실에도 푸른 물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울먹였다. 겁이 난 것이다. 아마 잠든 사이 저도 모르게 뽑아버린 봉선화쌈이 어머니의 자리, 등 밑으로 들어가 눌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차마 잘못했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조그맣게 주눅이 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니는 적삼을 벗어 등판에 물든 꽃물 자리를 쓸어보았다.
그것은 흡사 어루만지는 것처럼도 보였다.
"내비두어라. 한 번 그런 것을 어쩌것냐……그렁게 손톱에 물딜이는 것이 쉬운 일 같어도 안 그렁 것이여. 그것도 여러 사람이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어머니는 적삼을 접으며 웃었다.
그녀는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옷을 하나 못 입게 되었는데도 어머니는 왜 나무라시지 않을까. 오히려 그녀는 바로 꾸중을 들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맞을 매를 기다리는 것처럼 목에 까르륵 침이 넘어갔다. 마른 목에 걸린 침이 아팠다.
"어디? 물 잘 들었냐? 한 번 풀어보자. 그래도 밤새도록 참니라고 애썼다. 쪼깐헌 것이."
아직도 조마조마하여 선뜻 손가락을 내밀지 못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실의 홀 맺힌 자리를 찬찬히 찾아내던 어머니는 웬일인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웃음은 어머니의 손끝까지 밀려 내려와 그녀의 손톱을 풀어냈다.
"엄마도 말이다, 전에 에렸을 때, 봉숭아물 딜인다고 외할머니 적삼에다가 너맹이로…… 아이고오, 예쁘게 들었구나."
어머니는 그녀의 손등을 쓸어주며, 조그만 손톱을 들여다보고, 들어올려 보고, 다시 한번 어루만져주고 하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그것은 혹시 저 옥양목 같은 달빛 속에 감겨서 푸르게 비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의 적삼 빛깔이 저러했었는데. 흰 무명적삼은 그 뒤로 어찌 하셨는지 모르겠다. 장롱 속에 개켜서 넣어 두시었는지 아니면 버리었는지.
그녀는 흰 적삼의 들판에 붉은 꽃물이 번지듯, 심정의 복판에 애타운 눈물이 번지는 것을 느낀다.
"素絹과 만나서는 중국어로 이야기하나요?"
"바보. 당연하잖아요? 그 여자는, 절강성 사투리도 다 알아요. 자기 아버지한테서 배웠거든. 아버지들끼리는 표준말 안하고 사투리로만 말을 써요. 고향 말이니까요. 우리 아버지 말은 요즘 젊은 사람들, 학생들 말하고는 달라요."
"당신도 素絹이랑은 아버지의 사투리로 이야기 할 수 있겠네요?"
그는 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모은다.
"잠깐.……이랑은……무슨 말?"
이번에는 그녀가 눈썹을 모은다.
"다시 한번 말해보아요. 천천히."
"아까, 素絹이랑은……그랬잖아요? 그 말, 무슨 뜻?"
"아, 그 말은요……과……함께……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왜 이랑은, 그래요? 어느 때 '과' 쓰고, 어느 때 '같이' 쓰고, 어느 때 '함께' 쓰고.
어느 때 '와' 쓰요?"
"나중에."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조금 고개를 기울이고 끄덕였다.
"중국어로 이야기 해보세요. 素絹한테 하는 말 그대로요. 아버지 사투리로요."
"안돼요. 못 알아듣는 말."
"素絹은 다 알아듣지요?"
"그럼."
"아름답군요."
담장 안의 마당에서 국화 향기가 밀려나왔다. 마당에 가득찬 달빛이 담장 위로 넘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삼층의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없던 형광등 불빛이 네모지게 눈을 뜨고 있었다. 아마 여기 와 있는 자기네 유학생끼리 즐거운 저녁이라도 나누고 온 것일 테지. 유리창 안의 환한 불빛 저쪽에서는 아직도 낭랑한 웃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 같기도 하였다. 아니면 이상한 나라의 카드 한 장, 어둠 속에 달빛을 받으며 떠 있는 그 카드는 해독할 수 없는 암호로 서럽게 은성하였다.
그녀는, 그가, 자기 앞이 아니라 저 유리창 안의 불빛 속에 그 아름다운 웃음소리로 넘치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득하였다. 그녀의 앞에 선 그는 유리창에 얼핏 비친 그의 그림자인가 싶었다.
"오늘의 공부는, 끝?"
그가 묻는다. 펼쳐놓은 노트 위에는 어느새 다시 은행잎이 노랗게 덮여 있었다. 내려앉은 이파리에 가리어 글씨들은 가뭇가뭇 숨바꼭질을 한다.
시, 다.
은행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글자가 이쪽과 저쪽에서 엇비슷하게 마주친다. 입 안에 신물이 떫게 고인다. 백반, 봉선화의 꽃물이 선연한 손톱.
"素絹이 손톱에 물 들인 것을 본 일이 있나요?"
"매니큐어."
"아
그녀는 웃는다. 손에 한줌이나 되는 은행잎을 노란 꽃송이처럼 쥐고 있는 그가 노트 위의 이파리 하나를 줍는다.
리.
드러난 자리에서 글자가 떠오른다.
시, 리, 다.
"참, 가슴이 시리다는 말, 아까 일러 드렸던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푸르게 엉긴다. 그가 고개를 젓는다. 이번에는 그녀가 손을 공중으로 들어올린다. 그리고 손가락을 붓대처럼 세운다. 아까 그가 素絹의 이름을 새기던 자리는 어디쯤이었던가, 눈으로 어림하며 비스듬히 비키는 그녀의 붓끝에, 꽃물이 어린다. 서쪽으로 기울어 넘어가는 노을이 붉다.
노을은 소맷자락을 적신다.
고궁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스민다. 문 닫을 시각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계집아이 하나가 어른의 손을 잡고 무어라고 재재거리며 그들의 옆을 지나간다. 그 뒤에 한 패의 남학생들이 화구를 메고 뒤따르며 저희끼리 웃는다. 선생인 듯한 남자가 까치머리를 쓸어넘기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타오르는 저녁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렇게 지나가면서 하는 말도 다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사람들이 사라지는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다만 손을 들어올리고 있을 뿐.
어쩌면 그녀는, 존재의 원시를 그대로 부둥켜안으며 자유로운 언어로 울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그리고 제 속에서 저절로 익어 고이는 말로 사랑할 수 있는, 그 무슨 이름인가를 이렇게, 하늘의 갈피를 뒤적이며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도 싶었다.
그녀의 손끝은 그저 가본일 없는 먼 하늘 너머를 가리키고 있는 것도 같았고, 누구를 간절히 부르려고 하는 것도 같았다.
아니라면 누구에게인가 조용히 손을 흔들고 있는 것도 같았다.
무슨 말을 쓰려는 것인지 헤아려보는 표정으로 그가 그녀의 손가락 끄트머리를 바라본다.석양빛이 부서지는 손톱 너머로는 비행운 한 줄이 흐르듯 번지고 있었다.
소맷자락에 바람이 스민다.
계몽사. 199x. 우리시대의 한국문학 제 25권
p11~44
이 책에는 최명희, 서영은, 오정희, 김지원, 김채원, 양귀자, 곽의진, 강석경, 김민숙의 글이 실렸다.
책의 뒤에는 김훈의 글이 있다,
이렇게,
여기에 모인 이른바 사랑의 이야기들은 <너>에 대한 절망적인 차단을 말하거나 너와 나의 접면의 쓸씀함을 말하거나 또는 너에게로 가는 길의 험난함을 말한다. 혹은 제도화되고 사회화된 너와 나 사이의 접면을 쳐부수거나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음모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너와 나가 너의 상처와 나의 성처를 서로 바꾸어 가짐으로써 너와 나의 합일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한 성찰도 있다. 너의 무너짐 위에 나의 무너짐을 부축해 일으킬 것인지, 나의 무너짐이 너의 무너짐을 받아내고 감당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들어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은 또 다시 당신들의 무의식과 삶의 파편들을 통과해 나오지 않으면 안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과해 나온 이야기들은 작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내가 붙여보면 이렇다.
김훈의 해설을 보면 말은 그럴 듯 한데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
해설을 보면 소설을 전혀 보고 싶지 않다.
말을 쉽게 “이건 시중의 사랑이야기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사랑이야기이며, 드라마 만큼 재미는 없다. ” 하거나 “ 여자들의 사랑이야기는 나 홀로 사랑의 착각이라던지.”
분명한 가락은 없다.
최명희씨의 소설은 상당히 재미가 없다. 다소 지루하고 권태롭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없다. 어딘가 소녀 취향이고, 바탕 고운 얼굴에 화장을 덧칠한 문체가 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