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소문(上疏文)이란?
疎(소)란 글자는
트이다, (글을)적다. 거칠다 뜻을 지닌 자다.
소(疎)는
원래 문체(文體) 양식의 하나였다.
소체(疎體) 형식을 빌어
임금에게 올린 글을 상소라 한다.
왕에게 올리는 각종의 글을
총칭하여 상주문(上奏文)이라 한다.
상주문은
종류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다.
상소는
상주문 중에서도
간언(諫言)이나
의견, 진정 등을 전달하는 글이다.
상소 가운데
짧은 글을 차자(箚子)라고 한다.
箚(차) : 차자, 箚子 : 짧은 상소
상소와 치자를 합해
소차(疏箚)라고도 부른다.
그 밖에
진소(陳疏)· 소장(疏章)· 장소(章疏) 등의 여러 명칭이 있다.
관리들이 임금께 올리는 글을
계(啓) 또는 장계(狀啓)라 하는데
이것들도
때에 따라서는 상소의 역할을 한다.
상소 방법에 따라서도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봉사(封事)· 봉장(封章)은
왕 이외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밀봉하여 올리는 상소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
검은 천으로 만든 자루에 넣어
올리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외에 명칭으로
진소(陳疏)· 소장(疏章)· 장소(章疏)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상소가 많이 있었다.
그증 중종(中宗)때
상소문 하나 들여다 본다.
중종의 조강지처였던
신씨(愼氏) 복위에 관한 상소문이다.
중종(中宗)은
연산군(燕山君)의 이복 동생이다.
1479년(성종 10년)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폐출된 뒤
성종(成宗)은 정현왕후 윤씨를 계비로 앉혔다.
중종은 계비의 소생으로
서열상 둘째 아들이었다.
명칭을
진성대군(眞成大君)이라 했다.
진성대군은
일찌기 신수겸(愼守謙)의 딸과 혼인한 몸이었다.
신수겸은 신수찬의 아들로
누이가 연산군의 계비(繼妃)였다.
신수겸은
연산군의 처남이요
진성군의 장인이었다.
당시
믹강한 세도가였다.
1506년(연산군 12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파멸 위기에 몰린 호남과 경상도에서
진성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에
연산군의 총애로 권력의 중심에 있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위기감을 느끼고
정변을 먼저 일으키려 모의를 가졌다.
그들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이었던
신수근을 끌어들이려 했다.
반정군은 거사에 앞서
신수근의 의향을 타진해 뵜다.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은 할 수 없다.」
일언지하로
거절해 버렸다.
여기서
잠간.
신수근이 승낙했으면
본인은 부워군이 되고
딸은
왕비가 되는 순간이었다.
집안의 역사가 뒤바뀌는
절대절명의 기회였다.
그런데
거절해버렸다.
이것이
조선시대 선비사상이었다.
그로 인해 신수근은
반정군의 척살대상 1호가 되었다.
1506년 9원 2일이었다.
中宗 1년 丙寅(1506) 9월 2일(戊寅)
반정군은
진성대군을 확보하고
궁궐로 진격하던 도중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을 척살했다.
창덕궁에 들어가
연산군을 사로잡아 거사가 달성되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한다.
「잘되면 충신이요
못되면 역적이다」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당일
진성대군은 경복궁 인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조선의 11대 국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지만
부인 신씨는
중전에 책봉받지 못했다.
반정 주체였던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자신들의 손으로 척살한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책봉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이었다.
1506년 9월 9일이었다.
신수근 딸이요
진성대군의 조강지처인
신씨(愼氏)가
폐출되는 날이었다.
실록은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중종 1년(1506) 9월 9일 乙酉 (중종실록 8번째 기사) |
初昏, 愼氏乘轎, 出建春門, 寓河城尉家
轎(교) : 가마. 교자
초저녁
신씨(愼氏)가 교자를 타고 건춘문(建春門)을 나와,
하성위의 집에 우거하였다.
중종은
울며 겨자 먹기로 왕이 되었다.
옥좌를 얻는 대신
아내를 잃어야 했다.
대군으로 있을 때
아내와 금슬이 두터웠던 중종이었다.
「조강지처는 내칠 수 없다」 고
《사기》의 고사를 내세워 버티어 봤다.
糟糠之妻不下堂(조강지처불하당)
칼자루를 쥔
반정군에에게는 어림 반 푼도 없었다.
반정 7일만애
중종 곧 진성대군의 조강지처가 쫒겨 나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했다.
중종은 명색만 왕이었지
반정군의 꼭두 각시에 불과 했다.
중종 당시
반정 1둥 공신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그들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는지는
아래 내용으로도 짐작할 수 가 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이다.
세 공신(功臣)인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에게
중종이 예우하기를 보통과 달리하였다.
조회가 끝나고 그들이 물러갈 때면
중종은 옥좌에서 일어났다가
문을 나간 후에야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어느 나라 법도가 이럴가?
누가 신하고 누가 왕인지 모르겠다.
-연려실기술 제9권 중종조 고사-
공신들은 신씨를 사가로 내친 다음 날부터
중종에게 서둘러 중전을 책봉을 강요했다.
그들의 내심은
자신들이 내정한 여식으로
내명부를 장악해
권력 기반을 다지려는 심산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정현대비(성종의 둘째 계비)는
「중궁 간택은 용모만 보아서는 안 된다.
두세 명의 처녀를 간택하여 후궁에 두었다가
그 행실을 보아 중궁으로 임명하자.」
라고 제안했다.
그녀의 뜻을 공신들이 받아들이면서
곧 숙의 윤씨, 숙의 박씨, 숙의 홍씨가 입궐했다.
숙의 윤씨는 박원종의 조카딸로서
훗날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 윤씨이다.
또 숙의 박씨는 상주 출신으로 경원대군을 낳고 나서
궐내에 숱한 파란을 일으켰던 경빈 박씨이다.
숙의 홍씨는 반정공신이자
훗날 기묘사화를 주도한 홍경주의 딸이다.
1508년(중종 2년) 6월 17일
박원종의 강권에 의해
숙의 윤씨를 왕비로 결정하고,
두 달 뒤인 8월 4일
근정전에서 책봉례를 거행했다.
이처럼
신씨의 폐출이나
장경왕후 윤씨의 책립은
모두 박원종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세월이 흘러, 1511년(중종 6년)에
장경왕후 윤씨가 효혜공주를 낳았다.
3년 뒤인 1515년(중종 10년) 2월 25일에는
원자 이호를 낳아 조정 안팎을 들뜨게 했다.
한데 그녀는 산후병을 이기지 못하고
엿새 뒤인 3월 2일에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중종은
장경왕후의 국상을 마친 뒤
총애하던
숙의 박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려 했다.
그러자 원로대신 정광필이
홍문관 관리들과 함께
박씨 소생의 복성군이
갓 태어난 원자의 자리를 흔들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왕위계승은
적장자 상속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들의 명분론에 공감한 중종은
마음을 바꾸어 새 왕비를 맞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장경왕후의 국상을 치른 뒤부터
조선에는 천재지변이 자주 발생했다.
중종은 과인의 부덕한 소치라 해서
『구언교(求言敎)』를 내렸다.
구안교란
왕이 신하들의 직언을 널리 구한다는 교지(敎旨)이다.
원 말은
구언교지(求言敎旨)라 한다.
구언교지가 내려진 때
상소를 올리게 되면
내용을
문제 삼지 않은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언로 활성화를 위한
조선시대 치국방안 중 하나였다.
이를 기다렸단 둣이
폐비 신씨에 복위 상소가 올라왔다.
일파 만파
파장이 일었다.
그 해(1515년) 8월 8일,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이
상소문을 올렸다.
폐비 신씨를 복위하고,
과거 중종을 위협하여 신씨를 폐출시킨
박원종의 관직을 추탈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세 사람은
일찍이 전라북도 순창의 강천산 계곡에서 회동을 했다.
목숨을 걸고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각자의 관인(官印)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맹세했다.
훗날
그들이 상소를 결의한
장소를 삼인대(三印臺)라고 하고
그 상소를 일컬어
『삼인대 상소』라고 불렀다.
그 무렵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공신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세 사람은
상소문에서 폐비 신씨를 복위시킴으로써
대의를 실현하고
그녀의 원통함을 풀어주어야 하며,
장차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록 원문에 있는 상소문 보기
종실록 22권, 중종 10년(1515) 8월 8일 壬戌 (1번째 기사 ) |
壬戌
潭陽府使朴祥、淳昌郡守金淨, 同上封事, 其疏曰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
순창 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함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소(疏)에 이른다.
伏以,
帝王繼天立極之道, 莫不以正始爲本是故
「삼가 생각하건대,
제왕의 하늘을 이어 극(極)을 세우는 도리는
처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지 않음이 없습니다.
造端凝始者, 出乎正,
이러므로,
단서를 만들고
처음을 접하는 것이
올바른
데서 나오면
則大綱大源, 井井然光明,
큰 기강과 큰 근원이
질서 정연하게 빛나고,
動盪于上, 而達之于萬事、萬化者,
위에서 움직이면
만 가지 일과
만 가지 교화에 미치는 것이
如影之隨形; 如響之應聲,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듯 하여
無往而不一于正矣。
무슨 일을 하든지
한결같이 올바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反乎是而求化之成,
이와 반대로 하면서
교화의 성취를 바라는 것은,
比猶溷其源, 而望流之淸,
비유하면
그 근원을 흐려 놓고
흐름이 밝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不亦難矣哉?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하 생략
중간부문
謂殿下惟其所爲, 而莫敢違拂,
전하께서 자기들의 소위(所爲 : 하는 짓)를
감히 이기지 못할 것이라 하여,
서
刦制君父,
군부(임금)를 겁박하기를
[如弄諸股掌之間, ]
股(고) : 넓적다리 정강이
마치 자기들의
다리와 손바닥 사이에 놓고
희롱하듯 하고,
放逐國母 有同抛雛
抛(포) : 던지다. 雛(추) : 병아리
국모(國母)를 내쳐 쫓기를
병아리새끼 팽개치듯 하였습니다.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이런 일을 차마 하였거늘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推其心, 則雖至董、曺, 亦何所憚哉?
그 마음을 미루어보면
비록 동탁(董卓)· 조조(曹操)의 소행까지도
뭐 꺼리겠습니까?
人臣無將, 將而必誅, 《春秋》之義,
인신(人臣 : 신하된 자)은
난역(亂逆 : 반역)하지 아니 하여야 하며
난역하면 반드시 베는 것은
[춘추(春秋)의 의리이니,
若以愼氏, 罪人之出, 不可以配至尊,
이는 만약,
신씨(愼氏)가 죄인의 소출이어서
지존(至尊)을 짝하고
而主宗祧 以是而諉焉,
종조(宗祧 : 종묘)를 주장하게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으로써 핑계한다면,
則守勤之罪, 固非關於宗社,
수근(守勤)의 죄가
본디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何足以累乎妃?
어찌
족히 이로써 왕비를 연루시킬 수 있습니까?
就使得罪于宗社而受誅,
가사, 종묘·사직에 죄를 얻어
벌을 받았다 하더라도
妃無與聞之故,
왕비는 참여하여
들은 일이 없으니,
則又非所以爲尤而及之也。
또한 이것을
허물로 삼아 미칠 바가 아닙니다.
이하 모두 생략
상소를 올렸던 세 사람은
남평과 보은으로 유배형이 처해젔다.
사림파의 수장 조광조는
구안교지에 의한 상소인 만큼 면책을 주장했다.
1516년 5월에 박상 김정 유엄은
죄를 용서받고 유배가 해제 되었다.
그들은 사림파으로부터
『사유가상지인(師儒可當之人)』으로 불리며 존경 받았다.
신씨의 복위 :
1739년(영조 15년)에 이루어짐.
시호가 단경(端敬)
능호가 온릉(溫陵)
폐비 신씨는
궁궐에서 쫓겨난 지 232년 만에
단경왕후(端敬王后)라는 왕비의 칭호를 받음.
첫댓글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이었던 신수근을 끌어들이려 했을 때 반정군은 거사에 앞서 신수근이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은 할 수 없다.」 일언지하로 거절해 버렸다.
신수근이 승낙했으면 본인은 부워군이 되고 딸은 왕비가 되는 순간이었다.
신수근의 선비정신을 가상하나 그 정신으로 목숨을 걸거 연산군의 폭정은 막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수근이
반정군 동참 요청에
반대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결현이 "아니요"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세태를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感謝합니다
고맙습니다.
운장님
좋은 시간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