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24일 [연중 제30주일(전교주일)]
마태오 28,16-20
초대 교회 전교의 패러다임: 특별하면서도 오를성싶은 나무가 돼라!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내가 먼저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좋은 것은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대부분 더 믿는 사람에게서 옵니다.
사제가 이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렇다면 전교는 이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전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요?
믿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을 주려는 것이 전교는 맞지만 바로 믿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납니다.
‘최고의 스타들은 왜 키가 작을까요?’ 『언씽킹』이란 책에 나온 소제목입니다.
2008년 미국에서 수입이 가장 많았던 10명의 배우를 봅시다.
1. 해리슨 포드, 2. 애덤 샌들러, 3. 윌 스미스, 4. 에디 머피, 5. 니컬러스 케이지, 6. 톰 행크스, 7. 톰 크루즈, 8. 짐 캐리,
9. 브래드 피트, 10. 조지 클루니
배우로서 ‘주연’이란 말을 떠올리면 키 크고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여기 거론된 주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은 니컬러스 케이지뿐입니다.
그런데 니컬러스 케이지가 조각 미남인가요? 조각 미남이라 한다면 톰 크루즈나 조지 클루니를 들 수 있겠습니다.
조지 클루니는 178cm이고 톰 크루즈는 176cm입니다.
물론 저보다야 다 크지만, 서양인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키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말론 브랜도, 멜 깁슨, 로보트 드니로, 알파치노, 슬베스터 스탤론, 숀 팬, 맷 데이먼 등의 평균 키는 175cm입니다.
우리나라 BTS 평균 키가 177.3cm입니다. 유일하게 RM만 181cm이고 나머지는 평균 175cm인데 모두가 사랑합니다.
우리나라 배우들도 보면 키가 크면 얼굴이 좀 만만하고 얼굴이 좀 부담스러우면 키가 만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180cm인 송강호 씨는 키가 크지만, 얼굴은 조각 미남이 아니고 이병헌 씨는 미남이지만 키는 좀 작습니다.
여자는 어떤 여자들이 매력 있을까요? 분명 솔직해서 자신을 다 드러내는데 또 뭔가 신비감을 감춘 여자입니다.
그냥 한 번 만났는데 다 알 것 같은 여자는 매력이 없습니다.
남자도 특별한 것을 꿈꾸고 누군가를 만날 때 특별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신 부담스러우면 안 됩니다.
오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면이 있으면서도 백치미까지 있다면, 그래서 ‘가능할 거 같은데?’라는 마음을 주는 여자가 가장 매력 있습니다.
종교는 분명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르지 못할 나무만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오르지 못할 나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만 강조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것만 강조한다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불친절한 복음 전파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살기 부담스러운 나라에서 내 아이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특별합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화해서 우리나라에 살려면 어떨까요?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게 낫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기 부담스럽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스스로가 엄청난 경쟁을 시키며 한국인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이상한 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열등감이 있으면 자신 안에 있는 하나의 특징만을 강조하며 그것만을 부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 매력적으로 되려면 그냥 큰 사고 안 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부자가 아니면 무시당하는 문화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력적인 나라가 되면 자녀도 많이 출산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냥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그냥 어울려 사는 것을 ‘친교’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럽지 않은 공동체가 무엇일까요? ‘가족’입니다.
가족이 부담스러우면 그 사람은 어디에도 속할 용기를 얻지 못합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이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리만치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아버지!”란 믿음만 강조할 게 아니라 우선은 모든 사람이 어울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어머니, 형제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것이 오를성싶은 나무가 되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서로 친교를 이루며 사랑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 사람들은 성체성사를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가진 것을 나누고 주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 했을까요?
성경에서 초대 교회 선교모델을 한 번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43-47)
일단 성직자들이 ‘놀라운 일과 기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물론 성사 거행보다 더 큰 기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친교’여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을 모아 친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사제들의 몫입니다.
그 친교는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이 바탕이 됩니다. 이를 위해 성사가 존재합니다.
성사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기 피를 흘리게 해줍니다.
이런 친교의 행복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맺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세상에 ‘매력을 발산’합니다.
누구나 친교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겸손해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보고 들어와 ‘신도들의 모임이 커집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전하는 선교 방법이었습니다.
현재 성당에서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형제들 간의 친교를 이루는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교적 인원에 비하면 매우 작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냉담자를 말할 때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한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고해성사하고 성체성사 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기적을 통해 ‘친교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사의 목적이 친교입니다. 형제간의 친교를 지향하지 않는 성사는 어쩌면 방향을 잃고 무조건 달리는 자동차에 기름을 계속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전교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듯, 믿는데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서 형제간의 친교로 참으로 행복하고 그 공동체가 구원의 백성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너지를 채우는 것에만 목표를 두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면 열심히는 하는데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먼저 특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성사입니다.
성사 때문에 교회는 특별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4일 [연중 제30주일(전교 주일)]
이사야 2,1-5
로마 10,9-18
마태오 28,16-20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이제는 모든 고통도 상처도 다 내려놓으시고, 주님 제단 앞에 편안히 누워계신 모예수 신부님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다가, 펄펄 날아다니시던 시절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하나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모신부님께서는 스페인 출신의 선교사들이 대체로 그러셨던 것처럼, 그분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심,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효심, 불타는 복음선포의 열정, 이단을 향한 강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번은 전철역을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모신부님의 예리한 레이더에 한 남자가 포착되었습니다.
계단끝 출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행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분이었습니다.
평소 틈만 나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강조하시던 신부님의 거룩한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했습니다.
한번에 두 계단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신 신부님은 피캣을 확 뺏들고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들,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모신부님께서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기 위해 입당하실 때, 입당성가가 울려퍼졌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입당성가가 끝나고 제대 위에 서신 신부님께서 수녀님들 향해 크게 외치셨습니다.
“거짓말!” 그러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 입술로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하지 마십시오.
아름다운 성가 가사를 노래로만 부르지 마시고, 삶과 행동으로 실천하십시오.”
돌아보니 모신부님의 신앙이 참으로 깊었으며, 마치 스페인 검투사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습니다. 당신의 깊은 신앙을 내면에만 간직하지 않으셨고,
말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물론 때로 너무 지나쳐서 옆에 있던 형제들이 무안해질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그 적극성을 통해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저희 후배들의 신앙에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모신부님은 미사나 강의, 고백성사 등을 통한 복음선포의 기회가 당신께 주어 그렇게 행복해 하셨습니다.
말씀 선포를 위한 준비에 최선을 다하셨고,
큰 제스처와 흥미로운 말씀으로 신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선포를 향한 그분의 발걸음은 언제나 밝고 경쾌했습니다.
첫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외칩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서 10장 14~15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지상 과제 하나를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복음 28장 19~20절)
다시금 맞이한 전교 주일, 그리스도 신자로서 함께 깊은 반성과 성찰의 기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매일 우리 앞에 놓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매일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선물이요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생명수같은 축복의 말씀을 이웃들, 가장 가까운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나누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0월 24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알려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들 중 더러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열외로 내치지 않으시고 함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이미 주님께 믿음을 굳힌 이들과 달리 그들은 사명을 수행해 나가면서 믿음 또한 키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들었던 수 차례의 수난 예고와 실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스승을 따르는 길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깨달았을 터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로마 지배층과 유다인들이 새로운 길에 적대적이니 '세상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 큰 부담일 수 있지요. 자기들에게 여전히 신앙과 지혜가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동행 약속이 얼마나 든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은 당신 현존의 기간을 세상 끝 날까지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시어 제자들 곁으로 돌아오신 이 순간부터 앞으로 계속, 이 세상이 끝나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부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어느 한 시기를 살다 떠난 어느 위인 정도가 아니시지요. 그리스도교는 박제화된 과거를 전하는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존하시는 주님을 전하며 살아계신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지붕 아래로 모여 들 평화의 날을 노래합니다. 그때에는 서로 대립할 일도 싸울 일도 없을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사 2,3)으로 모든 이가 깨우치고 위안을 받으며, 살상 무기들은 생산을 위한 도구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닫힌 마음들을 열고 무기들을 녹이며 어둠을 밝힙니다. 제자들을 통해, 제자의 제자, 그 제자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이 모든 이들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모성을 흔들어 깨워서, 사랑과 자비를 되살려내고 충만하게 키워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난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닮고 그분과 하나 되려는 열망을 심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빛 속을 걷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한 존재 안에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간결히 전합니다. 먼저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이와 듣는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포된 말씀께서 듣는 이의 마음 안에 믿음을 형성하십니다. 말씀께서 그이 안에 거처하기 시작하신 겁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정해진 날수가 계속되는 날까지 지속될 약속이지요.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겁니다.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 위안이고 용기이며 힘이 되어 주십니다. 설령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어둠과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는 듯해도 우리는 이성과 감각을 뛰어넘어 이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언어와 문화, 인종과 종교, 민족과 신분을 넘어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한 자녀입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과 기도로 사심 없이 전하는 사랑의 복음이 모든 이에게 빛이 되고 평화를 선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실 겁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