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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지장보살이여, 미래세에 국왕이나 바라문 등이 불탑이나 절에 가서 부처님의 형상이나 보살, 성문, 벽지불 등의 형상에 스스로 마련하여 공양을 올리고 보시하면 이들은 세 겁 동안 제석천왕이 되어 뛰어나고 묘한 즐거움을 받을 것이다.
만약, 보시한 복과 이익을 법계에 회향한다면 이들은 열 겁 동안 항상 대범천왕이 될 것이다.
* 대범천왕·대범왕·범왕이라고도 한다. 대범천은 불교의 색계 초선천의 제3천에 해당하며, 또한 그곳의 주재자를 부르는 명칭이다. 즉 대범천은 대범천왕의 거주처이며 대범천왕 자체의 호칭이기도 하다. 대범천왕은 본래 힌두교의 신이었으나 불교에 선신으로 수용되었으며, 늘 제석천과 짝지어 나타나서 불교를 옹호하는 신이 되었다.
대범천은 사바세계의 주재신으로서 영원토록 불법에 귀의하였으며, 부처가 지상에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나타나 최초로 설법을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 백불을 가지고 다니면서 제석천과 함께 항상 좌우에서 부처를 보좌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수호신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중탱화에서도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조각으로는 석굴암의 대범천왕(아래 사진 참조)이 있다.
* 석굴암 제석천(왼쪽)과 대범천왕(오른쪽)
길라잡이 - 보살이 지금가지 닦은 자리이타의 모든 행과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돌려주는 10 회향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 할 수 없는 것이 대승보살의 입장입니다. 자비로써 표현되는 불타의 본원은 이처럼 회향을 통해서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습니다.
10 회향의 단계는 화엄경에서
1) 일체 중생을 구호하면서 중생이라는 관념을 떠난 회향
2) 깨뜨려짐이 없는 회향
3)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회향
4) 모든 처소에 이르는 회향
5) 다함이 없는 공덕장의 회향
6) 평등에 따르는 공덕의 회향
7) 평등하게 일체 중생을 따르는 회향
8) 진여의 실상으로 향한 회향
9) 속박도 집착도 없는 해탈의 회향
10) 한량없는 법계의 회향
오랜 세월동안 불교는 자비라는 큰 수레를 굴려 인간 세상에 회향하면서 펼쳐온 하나의 큰 강줄기이며 한국 불교 역사에서도 스스로 닦아 얻은 지혜와 공덕을 시간으로 돌리는 행(行)과 원(願)으로 어우러지는 가운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화엄경소’ 를 짓다가 10 회향품에 이르러 스스로 붓을 꺾고 민중 속으로 돌아간 일체무애인 원효의 모습에서도 회향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지장도량을 찾아 크게 발원하여 마침내 지장보살에 감응되는 많은 영험과 함께 이를 다시 세간으로 회향하는 아름다운 사연들이 불교 역사에 많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과 심원사의 석대(石臺)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보개산 심원사(寶盖山深源寺)는 강원도 철원군에 위치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고통받는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고 그 죄업이 소멸할 때까지 성불(成佛)하지 않으리라”
는 서원을 세우고, 뭇 생명이 있는 자들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는 지장보살.
심원사 명주전(明珠殿)의 돌로 만든 자그마한 지장보살의 미소에는 그 의지와 바람이 묻어 있다. 심원사는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기도 도량 본존으로 알려진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가피와 영험을 얻고자 하는 수많은 불자들이 오늘도 줄을 잇고 있는 곳이다.
황금멧돼지와 사냥꾼ㆍ앉은뱅이 이야기ㆍ뱀과 까마귀의 인과 등 수많은 설화를 간직한 지장보살의 이야기는 심원사 지장의 영험과 그 가피의 영이(靈異)함을 보여준다.
황금멧돼지로 화하여 사냥꾼 형제를 살생의 죄업에서 벗어나 출가하게 한 창건설화, 장님과 앉은뱅이의 지극한 대종불사(大鐘佛事) 시주에 감응하여 그들에게 눈과 다리를 줌으로써 견불령(見佛嶺)이라는 고개와 대광리(大光里)라는 마을이름을 남기게 한 설화, 전 재산을 사찰 불사에 내놓은 머슴 박씨를 사또로 환생하게 한 설화 등 심원사 지장보살과 부처님을 둘러싼 무수히 많은 영험설화가 전하고 있다.
그곳의 불단에서 자비의 미소로 중생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장보살은 개금(改金)이나 장식을 거부하며 도금을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칠이 벗겨지고 말아, 중생들의 소망을 가까이 접하려는 듯 더욱 정감이 있는 불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심원사 명주전과 지장보살상
심원사에는 ‘지장영험비’가 있으며, 지장보살의 영험함을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사냥꾼 형제의 출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17년(720) 의 일로 보개산 아래 마을에 산짐승을 잡아 목숨을 이어가던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제는 사냥에 나서 보개산 너머 담터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마침 큰 멧돼지 한 마리가 눈에 띄었고, 순석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마치 금란가사를 두른 듯한 누런 멧돼지는 왼쪽 앞다리에 화살을 맞고 보개산 정상인 환희봉 쪽으로 달아났다.
사냥꾼 형제는 핏자국을 따라 멧돼지가 멈춘 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금빛 멧돼지는 볼 수 없고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돌로 된 지장보살상이 맑은 물이 넘쳐나는 샘물 가운데 상반신만 내놓은 채 있었다. 화살을 뽑으려 했으나 석상은 태산 같은 무게로 꿈적도 하지 않았다. 크게 놀란 형제는 깨달은 바 있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대성(大聖)이시여! 저희들을 죄에서 구해 주시려고 이 같은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계신다면 마땅히 출가하여 수도하겠나이다.”
다음 날 형제가 그곳으로 가 보니 과연 석상이 돌 위에 있으므로 두 사람은 바로 300여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출가하였다.
샘 옆의 숲 속에 돌을 모아 대(臺)를 쌓고 항상 그 위에 앉아 정진하였으므로 그곳을 석대암(石臺庵)이라고 불렀다. 암자에는 자신들의 화살에 맞은 석상을 모셨다. 견불령(見佛嶺)과 대광리(大光里)라는 지명도 지장보살석상의 영험에서 유래한다.
고려 초의 일로 전해지는 이야기로 심원사 아래 마을에 어려서 열병을 얻어 장님과 앉은뱅이가 된 ‘이덕기와 박춘식’ 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심원사 대종불사를 하기 위해 마을에 내려온 화주 스님으로부터
“대종불사에 시주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재앙이 소멸되고, 현생에서 복을 받을 것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화주가 되기로 약속했다.
3년여 동안 이들은 서로의 눈과 다리가 되어 시주를 하였으며, 마침내 대종불사의 타종식 날이 되었다. 첫 타종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앉은뱅이 박춘식은 오색구름을 타고 밝은 구슬을 손에 지닌 지장보살님께서 하늘에서 심원사 쪽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앉은뱅이는
“지장보살님이 보인다”
고 소리치며 장님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자 두 다리가 쭉 펴지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덕기 또한
“어디! 어디!”
하고 소리치며 눈을 비비자 앞이 보였다.
그들은 산마루 위의 오색구름에 쌓여 큰 빛을 발하고 있는 지장보살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절하였다. 마침내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것이었다.
그들이 지장보살님을 본 고개를 견불령, 그들이 살던 마을을 부처님의 큰 광명이 머무르는 동네라 하여 대광리라 불렀다.
그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왕사로 유명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주지로 주석하며 삼창(三創)하고 산 이름을 영주산에서 보개산으로, 절 이름을 심원사로 고쳐 불렀다. 이후 수많은 영험이 생기며 사세가 확장되었으며 근세에까지 금강산 유점사에 딸린 말사(末寺)로 석대암, 지장암, 남암 등의 산내암자와 250칸의 당우, 1609위의 불상, 탱화, 탑이 있었던 대찰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6.25 전쟁의 참화로 본당이 천불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천불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석대암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석대암 지장보살상과 까마귀와 뱀의 설화
신라시대의 일이다. 강원도 철원 땅 보개산 기슭에 큰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먹음직스런 배가 가지가 휘도록 열린 어느 해 여름. 까마귀 한 마리가 이 배나무에 앉아 짝을 찾는 듯 “까악 까악” 울어댔다.
배나무 아래에는 포식을 한 독사 한 마리가 매미, 산새소리를 들으며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이때 까마귀가 다른 나무로 날아가려고 나래를 쪽 펴고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주렁주렁 달린 배 한 개가 독사의 머리에 툭 떨어졌다. 느닷없이 날벼락을 맞은 뱀은 화가 날대로 났다. 독기가 오른 뱀은 머리를 하늘로 쑥 뽑아 사력을 다해 독을 뿜어냈다.
독기는 까마귀 살 속을 파고들었다. 순간 까마귀는 힘이 쑥 빠지면서 온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내가 일부러 배를 떨군 것이 아닌데 저놈의 뱀이 독기를 뿜어대는 구나.”
까마귀는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지면서 죽고 말았다. 뱀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세게 얻어맞은 데다 독을 다 뿜어 죽어 버렸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어처구니없이 까마귀와 뱀이 죽었다. 까마귀와 뱀은 죽어서까지도 원한이 풀리질 않았다.
뱀은 죽어서 우직한 멧돼지가 됐고 까마귀는 암꿩으로 변했다. 멧돼지는 먹이를 찾아 이산 저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알을 품고 있던 암꿩의 모습이 멧돼지 눈에 들어왔다.
“음 전생에 나를 죽게 한 원수 놈이로구나. 저놈을 당장 죽여야지.”
멧돼지는 살며시 등성이로 올라가 발밑에 있는 큰 돌을 힘껏 굴렸다.
암꿩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까마귀를 죽인 멧돼지는 속이 후련했다.
이때 사냥꾼이 그곳을 지나다 죽은 꿩을 발견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꿩을 주운 사냥꾼은 기뻐하며 단걸음에 오막살이 집으로 내려갔다.
“여보, 오늘 내가 횡재를 했소.”
“어머나, 이거 암꿩이잖아요. 어떻게 잡으셨어요?”
“아 글쎄, 골짜기 바위 밑을 지나다 보니 이놈이 알을 품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겠수. 그래 돌을 집어 살금살금 다가가서 내리쳤지, 하하.”
내외는 그날 저녁 꿩을 잡아 실컷 먹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생겼다. 결혼 후 태기가 없던 사냥꾼 아내에게 그달부터 태기가 있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열 달 후 사냥꾼의 아내는 옥동자를 분만했다. 두 내외는 정성을 다해 아들을 키웠다. 이윽고 아들은 씩씩한 소년이 되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활쏘기를 익혔다. 사냥꾼은 아들이 훌륭한 사냥꾼이 되길 바랐다.
“자 이번엔 네가 쏴 봐라.”
“뭔데요, 아버지?”
“저기 저 소나무 아래 꿩말야.”
꿩요? 난 꿩은 안 쏠래요.
“아니 왜?”
“왠지 저도 모르겠어요. 전 멧돼지만 잡고 싶어요.”
“거참 이상하구나. 넌 왜 멧돼지 말만 하면 마치 원수처럼 여기는지 모르겠구나.”
“괜히 그래요. 멧돼지는 전부 죽이고 싶으니까요.”
“넌 아직 멧돼지 잡기엔 어리다.”
사냥꾼은 아들의 기개가 신통하다고 여기면서도 넌지시 일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사냥꾼 부자는 온종일 산을 헤맸으나 한 마리도 못 잡고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아들이 갑자기 외쳤다.
“아버지! 저기 멧돼지가 달려가요.”
“어디?”
사냥꾼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아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는 순간 벌써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화살은 멧돼지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멧돼지가 죽은 것을 확인한 아들은 기뻐 날뛰며 소리쳤다.
“음, 저 녀석이 왜 멧돼지만 보면 정신없이 구는지 모르겠군.”
아버지는 혼잣말로 뇌이며 아들의 거동을 유심히 살폈다. 아들은 장성할수록 더욱 멧돼지를 증오했다. 세월이 흘러 사냥꾼은 사냥도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청년기를 지나 중년에 이른 아들은 아버지 뒤를 이어 여전히 사냥을 계속했다.
어느 날 보개산으로 사냥을 나간 아들은 그날따라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이상한 멧돼지를 발견했다.
그 멧돼지는 우람할 뿐 아니라 온몸에서 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상한 놈이구나. 저놈을 단번에 잡아야지.”
그는 힘껏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적중했다. 그러나 금 멧돼지는 피를 흘리면서도 여유 있게 환희봉을 향해 치닫는 것이 아닌가.
그는 멧돼지가 숨어있을 곳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금 멧돼지는 간 곳이 없고 돼지가 숨어있을 만한 자리에는 지장보살 석상이 샘 속에 몸을 담그고 머리만 물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아니 이건 내가 쏜 화살인데?”
지장보살 석상의 어깨엔 그가 쏜 화살이 꽂혀 있었다.
이 석불이 멧돼지로 화신한 것일까.
묘한 광경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까마귀와 뱀의 인과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처님께서 멧돼지로 화현하여 화살을 맞은 까닭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물속에 잠긴 작은 석상을 꺼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석상은 보기보다 의외로 무거워 끄덕도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둡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그 자리를 다시 찾은 그는 또 한 번 놀랐다. 어제 분명히 샘 속에 잠겼던 석불이 어느새 물 밖으로 나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그는 무릎을 쳤다.
그리고는 석불 앞에 합장을 했다.
“부처님이시여!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키 위해 보이신 뜻을 받들어 곧 출가하여 도를 닦겠습니다.”
그는 곧 출가하여 3백 여 무리를 동원, 절을 짓고 그 석불을 모셨다.
그리고는 숲속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앉아 정진하여 높은 도력을 얻었다.
지금도 강원도 철원 보개산에 가면 신라시대 ‘이 순 석’ 이란 사냥꾼이 지었다는 절 석대암이 있다. 이 절의 주불 지장보살은 석자 만큼의 앉은키에 왼손에는 구슬을 들고 있으며 왼쪽 어깨에는 사냥꾼의 화살이 박혔던 자리라고 하는 한치 가량의 금이 뚜렷이 남아있다.
* 청호 스님과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 청호스님의 선행을 보도한 동아일보.
심원사 석대를 찾아 인간구원의 대의를 깨우친 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근대에 청호 스님(1875-1934)은 부모님이 석대에서 18년 지장기도를 하여 태어났으며 뒷날 큰 자비를 세간으로 회향하여 많은 인간을 구제하는 용맹심을 발휘하였습니다.
을축년 대홍수에서는 물에 휘말려 더내려가는 708명의 인명을 구제하여 당시 생불, 살아있는 지장보살로 추앙받았으며, 그는 석대 지장보살상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읊조린 글이 불괴비첩(不壞碑帖)에 기록이 있습니다.
많은 봉우리는 한 족의 병풍으로 둘렀는데
석대는 우둑하니 속세를 더났구나
사냥하던 순석이 처음 찾은 땅이요
산돼지로 화현하던 지장보살의 노닐던 곳이네
지난 날 나의 아버지는 대성에게 기도했는데
지금 나는 여기 와서 존상 앞에 예배드린다.
중의 길 가르침은 마음속에 남아 있어서
세간 버린 지난 일을 되새겨 보네.
지장경 10-5에서
보시한 복과 이익을 다시 세간으로 회향하여 돌리면 10겁 속에서 항상 대범천의 임금이 되리라.
하였습니다. 석대의 지장도량에서 펼쳐지는 가지가지의 불가사의한 이야기는 바로 그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한국 불교사 속에서 회향하는 마음이 그대로 숨 쉬고 있는 사연이기도 합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
아이구
유래가
대단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아미타불
♡♡♡
항상..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늘 좋은 사진이랑 글이랑... 정성껏 올려주시는 것을 보면서 많은 공부를 합니다
봉사도 바삐 다니시는데...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무한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지장보살님의 위신력, 서원의 힘이 아니면 어떻게 중생이 구제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