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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지중해서 고대 이집트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 발견
프랑스-이집트 합동 발굴단이2000년6월
3일 그리스 고전문헌을 통해서만 알려졌
던 고대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
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시에서 약 6㎞ 떨어진 해저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발견은 역사적 가치와 보존상태 등에서 이집트 투탕카멘 왕릉에 비견되는 고고학적 대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굴 책임자 프랑크 고디오는 이날 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15m의 이시스 여신
상을 공개했다.
➡️2015년애국지사 최도균 선생 별세
➡️2010년유창순 전 국무총리 별세
➡️2008년 과테말라시에서 송민순 외교통상부장관과 게르트 로젠탈 안드라데 파야(Gert ROSENTHAL Andrade Falla) 과테말라 외무장관 간에 서명된 “대한민국 정부와 과테말라공화국 정부 간의 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에 관한 약정(교육정보화사업)”이, 양국이 발효에 필요한 국내절차가 완료되었음을 상호 통보한 날인 2008년 6월 3일에 발효
➡️2008년 버락 오바마 미국 상원의원. 민주당 대선 후보 확정(사상 첫 흑인 대통령 후보).
➡️2009년원로배우 도금봉씨 별세
➡️2005년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 대 우즈베키스탄 경기
➡️2005년 이미나 선수, LPGA투어 HSBC 여자월드 매치플레이챔피언십에서 준우승
👉🏿 LPGA 신인 이미나(23)가 아쉬운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미나는 4일(한국시간) 미국 뉴저지주 글래드스톤의 해밀턴팜스골프장(파72)에서 열린 HSBC 월드매치플레이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콜롬비아의 마리사 바에나에 1홀차로 져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러나 LPGA 데뷔 이래 최고인 30만달러를 준우승 상금으로 받은 이미나는 상금랭킹 톱10에 진입했다.
세계 64걸이 겨루는 월드매치플레이챔피언십에서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 등 상위 랭커들이 줄줄이 탈락한 가운데 이미나와 바에나의 결승 격돌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47번 시드를 받은 이미나와 60번 시드 바에나의 결승전. 두 선수는 홀마다 승패를 주고 받는 난타전을 벌였다.
시소게임을 벌이던 이미나는 바에나가 13번홀을 가져간데 이어 14번홀에서 버디를 잡아내는 바람에 3홀차까지 뒤져 패색이 짙었다.
이후 이미나는 3개홀을 연속 1퍼트로 홀아웃하는 집중력을 발휘, 바에나에 1홀차로 추격하는 뒷심을 발휘했지만 결국 승부를 뒤집지는 못했다.
준결승에서 웬디 워드(미국)를 1홀차로 꺾고 결승에 진출한 이미나는 2002년 국내 투어에서 상금왕, 신인왕, 최고선수상을 휩쓴 실력파. 이미나는 2003년 미국에 건너가 2부 투어에서 뛰다 올해 처음 LPGA 무대를 밟았다.
지난 5월 코닝클래식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이미나는 이번 대회 준우승으로 LPGA 한국낭자 군단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바에나 역시 98년 처음 LPGA 투어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해 투어 카드 상실과 퀄리파잉스쿨 응시를 거듭했던 선수.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상금랭킹 5위 나탈리 걸비스(미국)와 박지은(26.나이키골프), 투어 대회 2승을 거둔 제니퍼 로살레스(필리핀)를 연파한데 이어 준결승에서 명예의 전당 회원 카리 웹(호주)마저 꺾고 결승에 올라 우승,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2004년 제2차 남북 장성급 군사 회담이 설악산에서 열림
➡️ 2001년영화배우 앤서니 퀸 사망
👉🏿 1915년 4월 21일 멕시코 북부 치와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토니오 루돌포 옥사카 퀸(Antonio Rudolfo Oaxaca Quinn)이다. 판초 비야(Pancho Villa)의 혁명군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혁명세력이 와해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농업노동자로 전전하다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10세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소년 가장이 되어 구두닦이, 신문팔이, 공사장 심부름꾼, 내기 권투선수 등을 전전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는 힘겨운 소년기를 보냈다.
그가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발음을 교정하기 위해서 배우학원에 잡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등록한 그는 연기의 세계에 빠져들어 18세에 《깨끗한 침대》라는 연극으로 무대에 처음 섰다. 1936년 패러마운트픽처스의 단역배우 모집에 응모하여 루 랜더스(Lew Landers) 감독의 《Parole》에 출연함으로써 영화에 데뷔하였다. 이 해에 세실 B.더밀이 감독한 《평원아 The Plainsman》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다가 더밀의 양녀인 캐서린과 결혼하였다.
할리우드 실력자의 사위가 되어 차츰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넓혀가던 그는 1940년대 말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자, 동료를 '빨갱이'로 고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할리우드를 떠나 뉴욕의 연극무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엘리아 카잔의 눈에 띈 그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말론 브랜도가 맡았던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고, 1952년 카잔이 감독한 《혁명아 사파타 Viva Zapata!》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서 사파타(말론 브랜도)의 동생 역을 맡아 혁명의 조력자에서 술주정뱅이로 타락하는 연기로 1953년 아카데미상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1954년 네오리얼리즘으로 세계 영화의 중심에 있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에서 차력사 잠파노 역으로 출연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56년 《열정의 랩소디 Lust For Life》에 고갱 역으로 8분간 출연하여 주인공 고흐 역의 커크 더글러스보다 빛나는 연기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으며 두번째 아카데미상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1958년에는 율 브리너(Yul Brynner)가 주연을 맡은 《해적 The Buccaneer》을 직접 감독하였으나 비평과 흥행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64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희랍인 조르바 Zorba The Greek》에서 그리스인 특유의 낙천성으로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농부 조르바 역을 맡아 절정의 연기를 보였다. 그는 "내가 바로 조르바"라고 말할 정도로 조르바라는 인물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으며, 1983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동명의 뮤지컬에서 다시 이 역을 맡기도 하였다.
《노트르담의 곱추 The Hunch Back Of Notredame》(1957), 《나바론 요새 The Guns Of Navaron》(1961), 《헤비급 선수를 위한 진혼곡 Requiem For A Heavyweight》(1962), 《바라바 Barabbas》(1962),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25시 The 25th Hour》(1967), 《산체스의 아이들 The Children Of Sanchez》(1978), 《사막의 라이온 Lion Of The Deser》(1981) 등을 비롯하여 150편이 넘는 영화에서 거친 남성적 캐릭터로 선 굵은 연기를 보여 영화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그에게 1987년 아카데미상은 평생 공로상인 세실 B.더밀상을 헌정하였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노년에는 회화와 조각에 몰두하여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8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선포 4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에 그의 그림이 실렸으며, 1998년 말에는 조각가인 아들 로렌조와 함께 방한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작품전을 열기도 하였다. 《원죄》와 국내에서도 출간된 《원맨 탱고》등 두 권의 자서전을 남겼으며, 세 번 결혼하여 9남 4녀를 두었다. 보스턴에서 폐렴 등의 증세로 치료를 받다 호흡곤란으로 사망하였으며, 2001년 4월부터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등과 함께 공연한 《어벤징 안젤로 Avenging Angelo》가 유작이 되었다.
➡️2001년 페루 첫 원주민 대통령 출생.
➡️200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러교수 사망.
➡️2000년 미국-러시아, 플루토늄 34t씩 폐기합의.
➡️2000년 지중해서 기원전 7~6C 이집트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 발견
➡️1998년독일 고속열차 탈선으로 100명 사망
➡️1995년세계최초 컴퓨터 `에니악`을 개발한 프레스터 에커트 사망
👉🏿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세계 최초 컴퓨터의 이름은 무엇일까? 집채만 한 크기에 엄청나게 많은 진공관으로 만들어진 에니악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저 역시 어렸을 적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에니악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에니악이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는 명예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에니악이 컴퓨터의 어원인 단순히 계산하는 사람을 넘어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대적인 의미 고위 '범용' 컴퓨터였기 때문이다.
1946년에 개발된 에니악 이전의 컴퓨터로는 1941년 개발된 Z3, 1944년 개발된 하버드 대학의 마크I이 있었지만 이들은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이었다. 그리고 1942년 아이오와 대학에서 개발한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 ABC가 있었지만, 이것은 프로그래밍이 불가능한 단순한 계산기였고, 1944년에 제작된 콜러서스는 암호 해독에 특화된 특수 목적용 컴퓨터였습니다.
하지만 에니악은 수소폭탄의 설계, 사격 거리 측정, 교각 설계, 기업의 회계 관리 등 다양한 목적에 활용할 수 있는 최초의 범용 컴퓨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컴퓨터 개념에 가장 부합하는 에니악을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니악은 17,468개의 진공관을 사용하였는데, 사격의 궤적을 계산하는데 기존의 계산기가 40시간이 걸린데 비해. 에니악은 10초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당시로는 획기적인 기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범용 컴퓨터인 이 에니악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존 윌리엄 모클리와 존 프레스퍼 에커트입니다. 모클리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어시너스 대학에서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모클리는 주로 에니악의 설계를 담당했고, 에커트는 타고난 공학자의 기질로 에니악의 실물을 제작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모클리는 풍부한 데이터를 잘 활용한다면 기상 예측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기상 예측이 가능한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펜실베니아 대학의 전자 기술 강좌에 참석하면서 에커트를 만났고, 교수직 제안을 받으면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기상예측을 위한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꿈을 펼쳐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교수 활동을 하던 중, 골드스타인이라는 군 장교를 만나 전쟁에 사용될 사격표를 제작하는 기계를 만드는 일을 맡게 되었고, 이것이 에니악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한편, 존 프레스퍼 에커트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동산 사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하였지만 후일 공학으로 전공을 변경하였습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무어스쿨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였는데, 대학 재학 중에 진공관을 이용하여 레이더 장치를 개조하는 일을 해낼 정도로 공학자로서의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모클리 교수를 만나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군에 납품할 고속 계산 장치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에니악 개발에 착수합니다. 그렇게 1943년부터 개발을 시작하여 1946년 2월에 드디어 세계 최초의 범용 컴퓨터인 에니악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행보에는 상당히 험난한 일들을 많이 겪게 됩니다. 두 사람은 에니악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이 컴퓨터의 단점을 보완한 에드박이라는 컴퓨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속 개발을 계획하고 있던 중 제삼자에게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뺏기고 만 것입니다.
현대 컴퓨터의 아키텍처, 즉 구조를 개발한 사람은 공식적으로 폰 노이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니악은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범용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최초의 컴퓨터였지만, 그것을 기계 외부에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조작해야 한다는 큰 단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컴퓨터가 발전을 한 이후의 시점에서 그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었을 뿐, 당시로는 당연한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개선책을 모클리와 에커트는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적용한 후속 컴퓨터로 에드박 제작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클리와 에커트의 아이디어는 스위치와 케이블을 일일이 조작해서 프로그램하는 방식을 개선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메모리에 저장해서 읽어내는 방식으로 컴퓨터를 제작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2월에 이러한 아이디어를 기록해두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방식을 스토어드 프로그램 방식이라고 부르는데, 이 방식으로 인해서 컴퓨터의 속도가 현저히 빨라졌고 물론 작동 방식도 매우 간편해졌습니다. 현대 컴퓨터는 모두 이러한 프로그램 내장 방식의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폰 노이만이 개입하게 되었고, 이러한 컴퓨터의 구조는 지금도 폰 노이만 구조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폰 노이만에 대해서 살펴보면, 에니악이 출시되기 전 모클리나 에커트가 무명의 교수와 석사 과정 학생에 불과했다면 폰 노이만은 이미 대단한 천재 수학자로 엄청난 명성을 얻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존 폰 노이만은 190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수학자의 능력을 가진 것으로 많은 일화들을 남겼습니다. 예를 들면 폰 노이만의 아버지가 전화번호부를 펼쳐서 폰 노이만에게 보여주면 그것을 한 번에 암기했고, 아버지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손님들 앞에서 전화번호와 주소를 읊었다고 합니다. 8살에 이미 미적분을 알았고, 그리스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기 때문에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천재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폰 노이만은 영국을 다녀오던 중, 에니악에 관한 소문을 듣고 1944년 가을 자문단의 자격으로 펜실베니아의 에니악 개발팀에 합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에드박에 관한 보고서 초안'이라는 문서를 일방적으로 골드스타인에게 보냈는데 이 문서에는 폰 노이만의 이름밖에 없었습니다. 골드스타인은 이례적으로 이 문서를 학자 일반에게 공개하였고, 심지어 이것은 영국으로까지 건너가게 됩니다. 영국의 월키스 교수팀은 이 문서를 바탕으로 에드삭이라는 컴퓨터를 개발하게 되었고, 이후 이러한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 구조는 폰 노이만 구조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 때문에 폰 노이만의 컴퓨터 구조에 대한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역사적인 논쟁거리로 남게 되었지만, 이 외에도 폰 노이만이 인공지능의 단초가 되는 연구를 수행하고, 컴퓨터 알고리즘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는 등 컴퓨터와 관련한 그의 기여도 상당했다는 것도 물론 인정받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설상가상으로 1946년 대학으로부터 에니악에 대한 특허를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게 된 모클리와 에커트 두 사람은 명성도 뺏긴 채 대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모클리와 에커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컴퓨터를 제작하는 EMCC라는 회사를 창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유니박이라는 컴퓨터는 다행히 상업적으로 상당히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가져야 마땅할 에니악 기술에 대한 특허의 소유권 때문에 두고두고 고생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불운을 겼긴 했지만 1980년대까지 컴퓨터 회사를 운영하면서 최초의 내장형 프로그램 컴퓨터를 설계한 공로에 덧붙여 컴퓨터 상업화의 길을 개척한 인물로 두 사람의 업적은 역사 속에서 조금씩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성공적인 사업가는 아니었습니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학자와 사업가의 길이 병행하기 어렵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오랜 노력과 열정으로 인류에게 남긴 유산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컴퓨터가 존재하는 한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들의 삶이 위대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어느 누군가는 기억할 것입니다.
➡️1992년유엔환경개발회의 리우회담 개최
➡️1991년정원식 총리 폭행사건
➡️1989년이란 지도자 호메이니 사망
👉🏿 지난 1979년 회교혁명 이후 신정체제를 굳혀온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루훌라 호메이니옹이 1989년 6월 3일 테헤란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02년 수도 테헤란 남쪽 오아시스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이미 코란을 암송할 정도였고 19세때 시아파 중심지인 콤시에서 성직자가 되었다. 1963년 팔레비 국왕에게 공개적으로 죽음을 경고하는 투쟁을 벌이다 추방되었으나, 1978년 7월 계엄령속에 시민 수천명이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검은 금요일’ 이후 혁명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팔레비 독재왕정을 무너뜨리고 최고권자에 오른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도덕적 회교 원리주의국가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해왔으나 이란-이라크전 때문에 대부분의 집권기간을 전쟁속에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뒤로하고 오늘날 세계는 그를 회교정신을 부흥시킨 탁월한 종교-정치적 지도자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의 기존질서를 위협한 인물로서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다.
➡️1978년방글라데시 대통령 라만 당선
➡️1975년도피성이민 우려있는 명사 84명 출국규제
➡️1973년소련 초음속항공기(TU144) 파리에 추락
➡️1972년서독 폴란드 수교
➡️1971년김종필 제11대 국무총리 취임
➡️1969년호남 정유공장 준공
➡️1965년미국 제미니4호 발사. 애드화이트 소령 미국 최초로 21분간 우주유영
➡️1964년학생시위 격화-계엄령 선포
➡️1963년로마 교황 요한23세 서거
➡️1963년시인 오상순 사망
➡️1962년프랑스 여객기 파리공항 추락 1백30여명 사망
➡️1961년미국, 소련 비엔나에서 회담
➡️1959년싱가포르, 영연방자치국 독립선언
➡️1957년미국 중동조약기구(METO)에 가입
➡️1957년흐루시초프, 신스탈린파 말렌코프, 몰로토프 등 숙청
➡️1955년프랑스 보호령 튀니지에 자치권 부여 협정 조인
➡️1955년미국-이스라엘 원자력쌍무협정에 조인
➡️1950년프랑스 등반대, 안나푸르나 최초등정(리더 모리스 에르조그)
➡️1949년국회, 전국무위원 인책사임안 가결
➡️1948년파라과이 쿠데타 발생
➡️1948년미국, 캘리포니아 팔로마산천문대 개소식, 200인치 망원경 설치
➡️1947년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안 발표
➡️1947년군정청, 산하 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
➡️1946년이승만,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시사하는 `정읍 발언` 연설
➡️1946년이범석 장군 및 광복군 5백여명 귀국
➡️1943년알제리에서 드골지휘하에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결성
➡️1936년총독부 발행 조선민력에 음력이 폐지됨. 양력 발행을 결정
➡️1936년이디오피아 황제 영국에 망명
➡️1929년스위스의 세균학자 아르버 출생 - 197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1929년칠레.페루 국경분쟁 해결, 미국중재
➡️1924년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사망
➡️1921년소설가 유주현 출생
➡️1917년알바니아 독립 선언
➡️1916년미국, 국가방위법 제정
➡️1915년파리서 제1회 연합국전쟁
경제회의개최, 경제적공동체제수립 결정
➡️1911년사찰령 공포1905년국어학자 일사 방종현 출생
➡️1902년산돌 손양원 목사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