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두 편___김명환
붉은 입 외 1편
김명환
아우는 손이
고왔다 주물일은 배워도, 나중에 기름밥은 먹기 싫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도망쳐온 아우는
구로구 가발공장에 다녔다 꽃이 피건, 눈이 내리건, 출근이던, 퇴근이던, 도무지 말이 없다 가끔 라이터를 꺼내 불빛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훅훅 불다가 깊은 눈으로 웃었다.
아우가 애기똥풀
같은 여자를 만난 건 스무 살을 넘긴 첫 봄이었다 여자는 잘 웃고 키가 컸다 여자는 많이 배워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며 야간학교를 졸업했다 둘은
동거를 하기로 약속하고 침대만큼은 메이커로 사야 한다며 보르네오 가구점에서 침대를 예약하고 기다렸다
구로구九老區의
스산한 겨울과 바짓단을 적시는 매연이 싫다고, 자장면 곱빼기를 먹으며 날마다 해야하는 잔업이 싫다고
여자는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 여자의 편지는 아우의 지갑 속에 들어가 어두운 알을 슬었다 침대가 배달되었고 아우는 침대를 비닐도 벗기지 않고 창가에
세워두었다 얼마 후 여의도 큰 회사의 경리로 갔다는 키 큰 여자의 소문을 들었다 공장 담벼락 장미넝쿨에서 넓적배암사마귀가 등 뒤의 수컷을 머리부터
잡아먹고 있는 초가을 이었다
아우가 찾아왔다
밤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인천행 전철을 탔다 그는, 전철 안 사람들이 자기가 가발공장에 다니는걸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대답대신 창 밖으로 휙휙 지나는 집들에게 현기증을 떠넘겼다 아우는 월미도 선착장 난간에 위태롭게 서서 떠다니는 부유물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아래로 내밀고 머리칼을 훅훅 불었다
다음날 친구에게
연락을 받았다 아우가 질척이는 뚝방을 건너갔다고 울먹였다 친구와 나는 벽제화장터에서 화장하고 한탄강 상류에 뿌려주었다 친구는 자꾸 돌밭에서 미끄러졌다
소나기 같은 장례가 끝나던 밤, 빌린 트럭에 침대를 실으며 친구는 욕을 했다 한번 와 보지도 않는다며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침대는 김포 수로 변에서 불태웠다 시트의 비닐이 도미노처럼 녹아들었다 공항을 이륙하는 비행기가 우웅 통곡을 했다 술
한 잔을 뿌리자 타고 있는 침대 위에서 붉은 입 암사마귀가 너울너울 솟아올랐다
초판인쇄
지친 걸음으로
한 발,
깨진 화병을
딛고 한 발,
가시를 뽑듯
이름을 떼고
다리 밑으로
왔어
누운 바다를
따라
뿍뿍 배들이
울며 드는 밤
갑판 위에 얼룩진
물고기 눈물을 닦던
삼십대 뱃놈이
다리 아래로 다가 와
어디가서 밥이라도
먹자고 말을 걸어왔지
저녁을 먹다가
취했고
불빛을 얼굴에
찍으며
어두운 방으로
들었지
작가작가작가
스프링소리가
낮선 영사기에서
들렸지
갖은 포즈를
요구하던 앵글이 멈추고
창가로 가서
눈물을 마중했지
물고기 눈물은
비려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어
비린내, 비린내, 비린내 빌어먹을
발행이 미뤄진
똑딱 단추처럼
살았던 어제를
질퍽한 파도가
몰아가라고 주문했어
잇몸을 드러낸
개펄이
비스듬히 안개를
품어안고
이따금 자동차
전조등이
바다로 뛰어드는
착시를 느꼈어
이어폰 볼륨을
맥스로 올리고 맨발로 걸었지
활자가 일으키는
짧은 경련들,
걸음마다 발목이
잘려나갔지
길고 무서운
새벽이었어
첫 페이지가
찍혀지던 날은
김명환 /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2009년 『문학21』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