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념식이 오늘(26일) 오전 10시 서울시청 광장에서 거행됩니다.
추념식에는 정운찬 국무총리 등 정부 주요인사와 안 의사 유족, 광복 회원 등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와 분향, 추모공연, 추념사 순으로 진행됩니다.
추념식 직후에는 행사 참가자들이 서울시청 광장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1㎞ 구간에서 평화 대행진을 할 예정입니다.
한편, 경기도 파주 출판도시와 부천 안중근 공원에서도 잇따라 안 의사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2005년] 독도 개방 이후 첫 유람선 출항
독도 출입 규제가 풀린 지 사흘만인 26일 오후1시께 일반 관광객 50여명과 언론사 취재진 40여명을 태운 유람선이 처음으로 독도를 향해 출발했으나 파도가 높아 섬에 오르지는 못했다.
애초 유람선은 이날 오전 출항할 예정이었으나 동해상의 파고가 높아 오후로 출항을 연기했었다.
또 이날 첫 토요휴업으로 학교를 쉬게 돼 일반 관광객과 함께 독도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울릉도 저동초등학교 3-6학년 어린이 130여명은 안전사고가 우려돼 승선하지 않았다.
울릉도를 출항한 유람선은 2시간 정도 지난 오후 3시 10분께 독도 동도 접안시설(물량장)에 접근했으나 파도가 높아 수차례에 걸친 접안 시도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독도 주변을 2-3차례 선회한 뒤 울릉도로 돌아왔다.
이날 유람선에 탔던 한 관광객(30)은 "비록 입도는 하지 못했지만 TV화면으로만보던 독도를 멀리서나마 직접 보니 애국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며 "기회가 오면 다시 독도를 찾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독도 유람선은 기상 상태가 좋으면 27일 오전 관광객을 태우고 다시 독도로 향할 계획이다.
한편 7대 종교 대표자 협의체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관계자 16명도 이날 헬기편으로 독도를 찾아 독도 도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과 일본의 사죄를 강경한 어조로 촉구한 뒤 서울로 돌아갔다.
[1990년] 한국-몽골, 국교수립
몽골은 북한과는 1948년, 한국과는 1990년 3월에 각각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은 1992년 외무장관, 1994년 헌법재판소장, 1995년 교육부장관, 서울시장, 1998년 외교통상부장관에 이어, 1999년 대통령 김대중이 몽골을 방문하였다. 몽골은 1991년 10월 대통령 오치르바트가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가졌고 1999년 총리, 헌법재판소장, 국방장관 등이 연이어 방한하였다. 2001년에는 대통령 바가반디가 방한하였고 2001년 다시 방한하였다.
1991년에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 어업협정, 항공협정, 문화협정, 무역협정 등이 체결되었다. 이어 양국은 1992년 이중과세 방지협정, 1993년 세관협력에 관한 상호지원협정에 이어 1999년 형사사법공조조약, 범죄인인도조약, 체육분야 협력 약정, 에너지 및 광물자원 분야의 협력에 관한 협정, 기술협력 약정을 체결하였다.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평화조약 조인
← 이스라엘 총리 베긴
1979년 3월 2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에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교전상태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규정한 이 평화조약을 통해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는 데 동의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한 이래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사실상 교전상태에 있었다. 1967년 이스라엘은 6일전쟁을 통해 이집트 관할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다. 그러나 1977년 11월 이집트의 안와르 엘 사다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78년 9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메릴랜드 주에 있는 캠프데이비드 휴양지에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와 이스라엘의 총리 메나헴 베긴 사이에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알려진 역사적인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1979년에 조인된 평화조약은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1963년] 한국-우간다 국교 수립
우간다는 비동맹 중립주의를 표방, 남·북한 동시수교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한국은 1962년 10월 우간다를 정식 승인하고 1963년 4월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1994년 10월 공관을 폐쇄하였지만 외교관계는 지속되었다. 1985년 총리 겸 재무장관 왈링고, 1990년 제2부총리겸 외무장관 세모게레레, 1992년 상무장관 카이자카, 1993년 상공장관 카이주카, 1997년 외무차관 나베타가 방한하였다. 1986년 양국간에 의료협력 협정이 체결되었다.
[1962년] 한국-뉴질랜드 국교 수립
뉴질랜드는 1949년 7월 한국을 정식 승인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 때에는 육군과 해군 5,350명이 영국 연방군의 일원으로 참전, 1951년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를 저지한 '가평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67년 9월 이를 기념하여 가평에 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 4국 참전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들은 귀국하여 참전용사회를 조직하고 가평전투 기념으로 1976년부터 매년 가평북중학교 학생 1명을 선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1962년 양국간에는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며, 1971년 상대국 수도에 각각 상주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78년 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79년부터 해마다 통상장관회담이 개최되고 있고, 1980년 7월 양국간의 이중과세방지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어 1993년 항공협정, 1994년 사증면제협정, 1999년 취업관광사증협정이 체결되었다. 1993년 5월 총리 J.볼저, 1999년 외교통상부차관이 내한하였다.
[1952년] 미국 조나스 소크 박사, 소아마비 예방접종 백신인 ‘소크 백신’ 개발
← 일명 ‘소크 백신’ 이라 불리는 소아마비 예방접종 백신을 개발한 조나스 소크 박사.
소아마비 혹은 폴리오(Polio)라 불리며 어린이들의 사지를 마비시키는 병은 유사 이래 가장 공포스러운 소아병이지만 인류가 이 병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불과 50여년에 불과하다.
1952년 3월26일, 미국의 조나스 소크 박사가 소아마비 백신(‘소크 백신’)을 개발함으로써 이 날은 세계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날이 됐다.
소크는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 1호로 삼아 성공을 확인한 뒤 곧 공개적인 실험접종에 나선다. 미국에서만 매년 5만 8000여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뉴욕의 한 신문이 신문 1면에 환자수를 매일 게재할 정도로 소아마비가 극성을 부릴 때였다.
1955년 4월12일, 미국의 44개주에서 ‘소크 백신’이 안전하고 유효하다는 결과가 발표되자 패닉현상으로까지 발전했던 부모들의 불안은 열렬한 환호로 바뀌었고 소크는 일약 영웅으로 부상했다. 곧 이어 알버트 사빈도 약독화(弱毒化)한 생균 즉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이용해 백신을 개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소아마비는 눈에 띄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까지는 매년 2000여명의 환자가 발생했으나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부터는 연간 200명 정도로 감소되다가 1984년 이후부터는 한 명의 환자발생도 보고되지 않아 2000년 10월에 소아마비의 종식을 공식선언했다. /조선
[1948년] 바이올린 연주자 정경화(鄭京和) 출생
1948년 3월 26일 태어남 ~ . "음악에는 영적이고 직관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 관계 역시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는 직관적 영역이 있잖아요? 작품과 연주자의 관계에서나, 또는 청중과 연주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동 자체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영역이죠. 서로 영혼이 통해서 느끼게 되는 감동, 그건 음악의 신비에요." - 정경화
정경화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이다. 9세 때 서울에서 멘델스존 협주곡을 연주하며 데뷔했으며, 12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 음악원 예비학교에 다녔다. 1966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2위, 1968년 레번트리트 콩쿠르 1위에 입상했으며, 에디슨상, 그라모폰상, 프랑스 디아파종 황금상 등 여러 음반상을 수상해 세계적인 명연주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뉴욕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세계 유명 교향악단과의 협연을 비롯해 연 100여 회의 연주회에서 열정과 긴장감이 감도는 연주로 청중을 사로잡고 있다. 첼로 연주자인 언니 정명화와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인 동생 정명훈과 함께 '정트리오'로 활동하기도 했다./브리태니커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유럽에 데뷔한 해는 1970년이었다. 영국 런던의 로열페스티벌홀에서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협연했던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D장조’. 이날 쏟아진 열광적인 기립박수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스물두살의 그는 같은 해에 음반사 ‘데카(Decca)’의 스튜디오에서 다시 한번 그 곡을 연주해 음반으로 내놨다. 그것이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데뷔 음반(사진)이다.
40주년 기념음반과 함께 2005년 9월 이후 활동을 중단했던 정경화의 복귀 무대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오는 5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11월에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도 협연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경향
[1930년] 미국 연방대법원 최초의 여성 판사 오코너 Sandra Day O'Connor 출생
결혼 전 이름은 Sandra Day.
1930. 3. 26 미국 텍사스 엘패소~.
재직 당시 온건한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데이는 애리조나 주 덩컨 근교에 있는 16만 에이커의 가족 목장에서 자랐다. 1950년에 스탠퍼드대학교를 마치고, 1952년에 스탠퍼드법과대학을 졸업하면서, 동창인 존 제이 오코너 3세와 결혼했다. 애리조나 주 메리빌에서 사설 변호사로 일하다가 1965~69년 애리조나 주 법무차관을 지냈다. 그뒤 1969~74년 애리조나 주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상원 다수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1974~79년 메리코파 군에 있는 상급법원 판사를 지냈고, 1979~81년에는 피닉스에 있는 애리조나 주 상소법원 판사로 재직했다. 1981년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의 첫번째 임명자로 데이를 선택했다.
[1923년] 프랑스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Bernhardt, Sarah, 1844~1923) 사망
본명 Henriette-Rosine Bernard. 파리 출생. 콩세르바투아르(국립연극학교)를 졸업하고 1862년 코메디프랑세즈에서 데뷔하였다. 그러나 곧 그곳을 나와 민간극장을 돌아다녔으며 나중에는 스스로 극단을 조직하여 외국에서 순연(巡演)하였다. 1898년부터 테아트르 드 나시옹(지금의 사라베르나르극장)을 본거지로 하여 활약하였다. 호평을 받은 역(役)은 V.위고의 《루이 브라스》 《에르나니》, J.B.라신의 《페드르》, V.사르두의 《토스카》 《테도라》, A.뒤마(아들)의 《춘희(椿姬)》 등이다. 아름다운 ‘황금의 목소리’와 살로메나 시바의 여왕을 연상시키는 요염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매력이었다. 또 《햄릿》 등의 작품에서는 남자역을 맡아서 연기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유분방한 생활태도로도 평판이 높았다. 1914년 한쪽 다리를 절단한 후에도 무대를 버리지 않았으며 파리에서 죽자 국장(國葬) 예우를 받았다. 레잔 ·무네쉴리와 함께 프랑스 19세기 후반을 장식한 대표적 여배우로 흔히 이탈리아의 명여배우 두세와 비교된다.
개요
본관은 제안(齊安). 자는 만강(晩岡). 시인으로 등단해서 뛰어난 단편소설가로, 다시 장편소설가로 거듭 변신하면서 문학세계를 넓힌 작가이다.
생애와 활동
평양 숭덕학교 고등과 교사였던 아버지 찬영(贊永)과 어머니 장찬붕(張贊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1운동 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해 1년 6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하기도 했다. 오산중학교를 거쳐 숭실중학교를 마쳤으며, 1934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제2고등학원에 입학, 재학시절 이해랑·김동원 등과 극예술연구단체인 '동경학생예술좌'를 조직했다. 1935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도쿄[東京]에서 시집 〈방가〉를 펴냈다는 이유로 평양경찰서에 29일간 구류되었다. 1939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생활하다 1946년 월남했다. 서울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7년 경희대학교 문리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80년 정년퇴임 후 명예교수를 지냈다.
문학세계
숭실중학 시절 시 〈나의 꿈〉(동광, 1931. 7)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시창작에 몰두하는 동안은 당시 문단의 큰 흐름이었던 모더니즘 시를 주로 썼다. 시집 2권을 펴낸 다음 1930년말부터 소설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초기 단편들인 〈별〉(인문평론, 1941. 2)·〈목넘이 마을의 개〉(개벽, 1948. 3)·〈황노인〉(신천지, 1949. 9)·〈노새〉(문예, 1949. 12)·〈독짓는 늙은이〉(문예, 1950. 4) 등은 빼어난 서정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섬세한 내면세계와 인간 사이의 교감을 그려내는 휴머니즘이 주조를 이룬다. 또한 시적 정취를 자아내는 간결하고 서정적인 문체는 당시 문체미학의 새로운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8·15해방 후 장편 〈별과 같이 살다〉(여러 잡지에 분재하다가 1950년 단행본으로 펴냄)를 발표한 이후 단편소설보다 장편소설에 주력하여 잇따라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내놓았다. 장편소설을 통해 본 그의 문학세계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카인의 후예〉(1954)·〈인간접목〉(1957)·〈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등은 6·25전쟁 전후의 사회적 혼란과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그려낸 데 반해, 〈일월〉(1962)·〈움직이는 성〉(1972)·〈신들의 주사위〉(1982) 등은 신분적 질곡, 현대사회의 윤리와 전통의 문제, 종교문제 등을 다루어 소설적 주제가 매우 다양해졌다. 이중 〈별과 같이 살다〉는 그의 첫 장편소설이며, 곰녀라는 한 여인의 짧은 생애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사를 그려냈다. 곰녀는 〈카인의 후예〉에 나오는 오작녀와 매우 닮은 인물로,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한 원형을 이룬다. 〈카인의 후예〉는 8·15해방 직후 북한의 토지개혁과정을 통해 인간의 소유욕과 윤리적 패덕에 대한 강한 응징을 보여준 작품이며,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전쟁 체험이 낳은 비극적인 인간성 파괴를 다룬 작품으로 장편소설로서의 진가를 유감 없이 발휘한 문제작으로 꼽힌다.
황순원은 수많은 작가들이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굴복해 일본어로 작품을 쓰거나 친일 작품을 휘갈겨댄 일제말 모국어로 작품 쓰기를 고집하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며 평생 잡문을 쓰지 않은 작가로서 크게 존경받았다.
시집으로 〈방가〉(1934)·〈골동품〉(1936)과 소설전집으로 〈황순원전집〉(1964)·〈황순원문학전집〉(1973)·〈황순원전집〉(1985) 등이 있다.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1년 3·1문화상,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받았다. 2000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단지혈서로 조국 독립에 헌신한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한 안중근 의사는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Kokovtsev, V. N., 1853~1943)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한다.
동지 우덕순과 상의, 승낙을 얻은 안 의사는 다시 이강의 후원을 받아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됐다.
안 의사가 살해한 일본인 곧 초대 통감 이토는, 비록 그 자리에서 막 물러나기는 했지만 한반도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다. 의거 후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진 안 의사는 여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됐고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이날 사형이 집행됐다.
[1892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시인 휘트먼 사망
←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 윌트 휘트먼(1870년대)
프로스트와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 월트 휘트먼이 1892년 3월 26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73세였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인쇄소 직공으로 일하며 주경야독한 그는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와 신문 편집 등에 종사하다 뉴욕으로 이주, 그 곳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1846년에는 브루클린의 미국 민주당계 일간지 ‘이글(Eagle)’의 편집자가 되었으나 1848년 ‘프리 소일(free soil) 운동’을 지지하는 그의 논설이 민주당 보수파의 분노를 사게 되어 사임, ‘프리 소일 운동’의 주간신문 ‘자유민’을 창간해 주필로 활약했다.
1850년대에는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목수일을 도와 독서와 사색으로 지내며 시인으로서의 변신을 시작했다. 1855년에 출간된 그의 대표 시집 ‘풀잎’은 종래의 전통적 시형을 크게 벗어나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표현한 시집으로 평가받았다.
12편의 무제시가 수록된 ‘풀잎’의 초판은 전통적인 시작법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목소리로 새로운 미국의 이상과 현실을 노래했다. 이 시집은 지속적인 수정과 중보를 거쳐 1892년에는 400여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 9판까지 발행했다.
‘카리스마’ 등의 시를 새로이 수록한 3집 발행으로 그는 ‘예언자 시인’으로 자리매김했고, 1867년 발행된 4집에는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북소리’와 링컨 대통령을 추모한 ‘앞뜰에 라일락이 피었을 때’ 등을 수록해 민주주의와 우애에 대한 미국인의 신념을 형상화했다. /조선
[1883년] 신흥우 (한국 정치가) [申興雨] 출생
1883. 3. 26 충북 청원~1959. 3. 15 서울.
1899년 배재학당을 거쳐 1911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1930년 동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11년 귀국 후 배재학당의 학감이 되었으며 이듬해 최초의 한국인 학당장이 되었다. 1919년 5월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참석하여 3·1운동의 실상을 전세계에 알렸으며 이를 〈한국의 갱생 The Rebirth of Korea〉이란 책으로 출판했다. 1912년 중앙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임명되어 기독교를 통한 청년운동과 농촌운동에 적극 힘썼다. 1923년 일본 YMCA로부터 한국 YMCA를 독립시켰으며, 다음해 스위스에서 열린 YMCA 세계동맹에 한국 YMCA를 정식으로 가입시켰다. 1927년 이상재 등과 함께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앞장섰으며 장로교와 감리교의 지도자를 규합하여 '적극신앙단'을 조직, 사회개혁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기도 했다. 1948년 7월에는 영자신문 〈The Union Democrat〉를 창간했고, 같은 해 제4대 대한체육회장, 1950년 일본 주재 특명전권대사 겸 일본 주재 대표부 대사를 지냈다. 195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1957년 7월 민주당에 입당하여 언론을 통해 민주주의 옹호와 농업개발정책 등에 관한 내용을 제시했다. 기독교도이면서 정치가로서 민족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879년] 독립운동가 유동열(柳東說) 출생
1879. 3. 26 평북 박천~?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춘교(春郊). 이명은 동열(東悅)·동렬(東烈)·청송(靑松). 1894년(고종 31)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쇼 학교[成城學校]를 거쳐 190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기병과에 진학하여 1903년 11월 졸업했다. 그해 12월 일본 육군기병대 견습사관으로 근위사단에서 실무를 익히던 중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했다. 이후 서울의 일본군 6군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그해 8월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귀하여 무관학교 교관, 시위대 기병대장, 참모국 제2과장을 역임했다. 1906년 10월 이갑(李甲)과 함께 평안도·황해도 출신의 지식인·계몽운동가들과 함께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안창호(安昌浩)·이갑·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표면적으로는 서우학회가 확대·개편된 서북학회(西北學會)를 통한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1909년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안창호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이후 신민회의 사업을 추진하던 중 1911년 8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1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여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뒤 만주로 건너가서 1915년 3월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결성했다. 1917년에는 김립(金立)·문창범(文昌範) 등과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를 결성하여 노령 방면의 한인 동포들의 규합에 주력했으며, 이듬해에는 서일(徐一) 등이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에 가입했다. 1918년 1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김동삼(金東三)·손일민(孫一民)·김좌진(金佐鎭) 등 만주지방 민족지도자 들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한성 임시정부의 참모부 총장, 노령 대한국민 회의정부 참모총장에 각각 선임되었으며,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일원화되자 상해 임시정부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1919년 7월 동삼성(東三省) 관내의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지린[吉林]으로 건너가, 여준(呂準) 등과 더불어 길림군사독판부(吉林軍事督辦府)를 조직하여 참모총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제1차 고려공산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6월 갈난다라시윌린·최고려(崔高麗)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을 이끌고 자유시로 들어갔으며, 고려혁명군정회 산하의 무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자유시사변을 겪고난 후,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오하묵(吳夏默)을 단장으로 하는 자유대대에 참가했으며 이후 병원과 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주력했다. 1929년 3월 지린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임시정부로 복귀하여 1944년까지 수차에 걸쳐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1935년 7월 난징[南京]에서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의열단·대한인독립단 등 5개 독립운동단체가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공동 발기해 민족혁명당을 조직했을 때, 조선혁명당의 대표로 참여해 반일 민족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통일전선운동이 와해되고 좌우익이 분열되자 회의를 느끼고 다시 임시정부의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주석지도체제로 전환된 후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창설에 주력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지청천(池靑天)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가 성립되었으며, 그는 김구(金九) 등과 함께 최고통수부에 임명되었다. 1945년 2월에는 충칭에서 최동오(崔東旿)·홍진(洪震)·안원생(安原生)·김붕준(金朋濬)·신기언(申基彦)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참모총장을 지냈다. 8·15해방 후 귀국하여 미군정 초대 통위부장(統衛部長)이 되어 국군창설에 힘썼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875년] 한국 대통령·독립운동가 이승만(李承晩) 출생
1875. 3. 26. 황해 평산~1965. 7. 19 미국 하와이.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
초명(初名)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가난한 선비 이경선의 외아들로 태어나 한문을 배운 이후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 이듬해 8월에 졸업하고 모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일본인이 명성왕후를 학살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한 사건에 관계되어 지명수배를 당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후 그리스도교도가 되고 개화사상에 심취해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협성회보 協成會報〉의 주필로 재직중 날카로운 필치로 정부를 비판했다. 독립협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정부전복 혐의를 받고 1898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04년 민영환의 감형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그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 미국의 대통령 T. D. 루스벨트에게 일본의 한반도 침략 저지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귀국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12년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건너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서구열강 특히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독립외교론을 주장했다. 이런 외교론은 박용만 등이 주장하는 무장투쟁론과 대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민 사이의 반목과 분열을 빚게 되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되었다. 이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스스로 대통령 행세를 하다가 1920년 상하이로 돌아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전횡적이고 독선적인 행동으로 1922년 6월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불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결정에도 상관하지 않고 임의로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으며 워싱턴과 하와이 등지에서 외교론을 전개하는 등 기회가 올 때마다 외교교섭을 벌였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1945년 8·15해방 이후 같은 해 10월에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 총재에 취임했으며 미국의 지지를 얻어 우익세력의 연합조직체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를 역임하는 등 우익의 지도자로 각광을 받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5개년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찬탁을 주장하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세력을 제압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45년 3월부터 시작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1946년 6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한 이른바 '정읍발언'으로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졌으며, 자신의 단독정부수립 계획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호소했다. 1948년 5·10선거 이후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이 제정·공포되어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철저한 친미·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를 분쇄하는 데 앞장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다졌으며, 공공연히 북진발언을 하기도 했다. 6·25전쟁중 1952년 부산의 국회에서 재선이 어렵게 되자 헌법을 대통령직선제로 개정하여(이른바 발췌개헌)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 방식에 반발, 국제연합(UN)군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954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연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했고,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8년 자신을 반대하는 사회정치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해 야당과의 첨예한 정치파동을 낳기도 했다. 1960년 3월 15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는 대대적 부정선거로 그는 비록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이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원인이 되어 4·19혁명이 일어나자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후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망명생활 중 사망했다.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독립정신〉·〈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1874년]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출생
1874. 3. 26 미국 샌프란시스코~1963. 1. 29 보스턴.
개요
일상적인 언어와 익숙한 리듬, 평범한 생활에서 취한 상징을 사용하여 뉴잉글랜드 지방 생활의 평온함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
아버지 윌리엄 프래스콧 프로스트 2세는 뉴잉글랜드 출신으로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루이스타운의 한 사립학교 교장으로 일하다가 스코틀랜드 태생의 교사 이자벨 무디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가 그곳에서 신문기자가 되었다. 1885년 그가 폐결핵으로 죽자 미망인과 두 아이들(여동생은 1876년에 태어났음)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매사추세츠의 로렌스까지 가야만 했다. 그후 가난했던 프로스트의 어머니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매사추세츠와 뉴햄프셔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돌보았다. 그녀는 아들 로버트의 성격과 문학 발전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어머니의 스코틀랜드인다운 성실함과 강한 신앙심이 실용성과 신비주의를 혼합한 프로스트의 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된다.
어린시절 프로스트는 야구와 축구를 무척 좋아했고 책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의 열성으로 그는 뉴햄프셔의 세일럼 그래머 스쿨을 가까스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렌스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의 태도는 바뀌어, 1892년 그 학교를 졸업할 때는 후일 그가 결혼하게 된 엘리노 미리엄 화이트와 함께 졸업식 고별사를 할 만큼 뛰어난 학생이 되었다. 시에 대한 관심은 그가 편집인이던 학교신문에 이미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던 사실에서 잘 드러나며, 졸업식 고별사에서도 그는 시인의 경험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프로스트의 할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고 졸업하던 다음 해 가을 그를 뉴햄프셔의 하노버에 있는 다트머스대학으로 보냈다. 그러나 단조로운 학과 공부에 적응하지 못한 프로스트는 한 학기가 채 못 되어 학교를 떠났다. 그뒤 몇 년 간 로렌스에 있는 집에서 시를 쓰며 때로 학교교사, 방적공, 신문기자로 돈을 벌면서 지냈다. 1895년 결혼한 뒤 2년 동안 그와 그의 아내는 어머니를 도와 조그마한 사립학교를 운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잡지 등에 시를 기고했으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그가 처음으로 시를 써주고 원고료를 받은 것은 1894년 주간 문학잡지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에 실린 〈나의 나비 : 비가 My Butterfly : An Elegy〉였다.
1897년 가을 프로스트는 고등학교 수준의 라틴어와 그리스어 교사가 되기 위해 하버드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이들 과목에서 훌륭한 성적을 얻었으나 병 때문에 2년이 채 못 되어 공부를 중단했다. 결핵일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듣고 그는 생활방식을 철저히 바꾸어 매사추세츠 머슈언에서 가금(家禽) 사육사가 되었다. 이런 모험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1900년 할아버지가 그를 위해 사두었던 뉴햄프셔 데리의 한 농장으로 이사했다. 프로스트의 첫 아들은 1896년에 태어났으나 그가 이사하기 전에 죽었고, 2번째 아이인 딸은 당시 1세가 채 안 된 때였다. 데리에 살면서 4명의 아이가 더 태어났고 농부로서 실패한 프로스트는 다시 교사가 되었다(1906~12). 프로스트의 훌륭한 걸작시 대부분은 그가 데리에 있을 때 씌어진 것이지만 그때는 어느 편집자도 그의 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11년 프로스트는 1901년에 죽은 할아버지로부터 농장을 물려받았지만 즉시 농장을 팔고 그 다음해에는 시작(詩作)에만 전념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갔다. 그는 버킹엄셔의 비컨스필드에 정착한 뒤 데리에서 썼던 서정시를 모아 정리했다. 이 원고는 런던의 한 출판업자에 의해 1913년 〈소년의 의지 A Boy's Will〉로 출간되었다. 그 다음해 같은 출판업자에 의해 이야기체 시모음집 〈보스턴의 북쪽 North of Boston〉이 나왔다. 영국 비평가들의 열렬한 찬사가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출판업자 3명이 출판의뢰를 해올 정도였다. 영국에서는 E. 파운드, E. 토머스, W. W. 깁슨, T. E. 흄, L. 애버크롬비 등과 친교를 가졌다. 전원으로 오라는 조지아의 시인 깁슨과 애버크롬비의 권유를 받아들여 1914년 글로스터셔의 시골로 이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 1915년 2월 프로스트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그무렵 그의 시집 2권이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그후 뉴햄프셔의 프랭코니아에 한 작은 농장을 샀고, 그의 시가 미국인들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되자 그의 무명시절도 막을 내렸다. 그는 암허스트대학의 영문학 교수(1916~20), 미시간대학교의 시학 교수(1921~23), 애머스트대학(1923~25), 미시간대학교(1925~26)의 교수로, 그후 1938년까지는 애머스트대학의 시간강사로 일했다. 1939~43년 하버드대학교의 랠프 왈도 에머슨 펠로, 1943~49년에는 다트머스대학의 인문과학교수로, 1949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애머스트대학에서 심프슨 렉처러로 한직(閑職)을 유지했다.
생애와 활동
프로스트는 지극히 복잡한 사람이었다.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인정이 많고 적극적이며, 남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이런 우애관계는 1909년 프로스트가 뉴햄프셔 데리빌리지의 핑커턴 아카데미에 있을 때 그의 제자였던 존 바틀릿과 맺은 친교가 대표적이다. 이 우애는 바틀릿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마거릿 바틀릿 앤더슨의 〈로버트 프로스트와 존 바틀릿 : 그 우정의 기록 Robert Frost and John Bartlett : The Record of a Friendship〉(1963)에 기록되어 있다. 데리의 농장시절에도 프로스트는 자질이 별로 없는 농부였다. 그후 그는 자기가 너무 게을러 농부로 성공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데리의 농장으로 가기 전에 이미 그는 열정적인 식물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결과 농장경영보다는 농장에 심었던 각종 식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이들이 식물학에 관한 흥미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자라자, 그는 산책 길에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 농장보다 더 먼 곳까지 다녀오곤 했다. 〈소년의 의지〉에는 농사보다는 식물에 관심을 보인 시가 더 많다. 프로스트는 계속 농장 일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농사일을 직접 하는 것은 잘 하지 못했으나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또 뉴욕에서 출간된 2권의 시집에는 농부다운 목소리로 노래한 시들이 많다. 그러나 프랭코니아에 농장을 산 지 몇 개월이 못 되어 그는 애머스트대학의 교수직을 받아들였고 가족과 함께 매사추세츠로 이사했다. 그후 수년 간 프랭코니아의 농장은 별장일 뿐이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 타관을 떠돌면서 시 낭송회를 열 때도 시와 연설에서 자신을 뉴잉글랜드의 농부라고 소개하기를 좋아했다. 비록 프로스트가 농사일을 잘하는 농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농부가 되고자 했던 그의 욕망만이 시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지으면 안 된다. 농장은 그의 동료 교수들과 그의 독자들과의 사교에 별장 이상의 역할을 했다. 프로스트에게서 자연은 종교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는 매일 넓은 풀밭을 건너고 농장의 숲을 지나, 때로는 그보다 더 멀리 친구의 농장까지 돌아다니기를 좋아했고, 그의 이웃들은 프로스트가 그들 농장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산책이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새로운 시를 발견하게 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식물학자와 꼭 같았고, 그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들꽃의 이름을 댈 수 있었다. 1939년 부인이 죽던 해에 그는 버몬트 립턴의 브레드로프 영어학교 근처에 상당한 규모의 농장을 샀다.
평가
프로스트의 시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층의 독자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이는 그의 시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어 읽는 사람마다 그의 시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20세기의 여러 시인들이 시도했던 실험적인 방법을 피했고 '새로운 옛 방법'에 만족한다고 거듭해서 말했다. 그는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로부터 일상생활의 사건이나 상황, 그리고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것에 가까운 언어를 서정적인 시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는 그의 시를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행하던 감성적인 시와는 달리 '시적이지 않은 시'가 되게 했다. 또 19세기의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에게서 극적인 독백과 대화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고대 그리스와 라틴 작가들 중 특히 테오크리토스와 베르길리우스를 공부했으며 그결과 대화체 전원시, 즉 에클로그의 목가적인 전통을 세웠다. 프로스트를 읽는 이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자연적인 대상의 외양과 시골 사람들의 행동을 정확하게 관찰한 그의 기록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시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관찰 그 이상이다.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 그는 그가 상상하는 시골풍경에 상징적·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결과 그의 대표적인 시들은 그의 외적 자아와 내적 자아의 관계, 또한 타인·자연·우주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뛰어넘어 심오한 종교적 신념에 바탕을 둔 가치를 설명한다. 폭넓은 그의 시에는 공포와 두려움의 분위기를 지닌 것도 있지만 확신이 주류를 이룬다./브리태니커
[1871년] 파리 코뮌 자치선거 혁명파 승리
← 티에르, Leon Bonnat가 그린 초상화(1876), 파리에 있는 Musee du Louvre 소장
1871년 3월 26일 파리 코뮌 자치선거에서 혁명파가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코뮌 정부의 틀이 갖추어졌다. 프랑스 정부에 대항해 일어난 파리 코뮌 봉기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1871년 2월 프로이센과 평화조약을 맺을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국민의회는 지방의 보수성향 때문에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했다. 공화주의적인 파리 사람들은 베르사유에서 열리는 국민의회가 왕정을 부활시키지 않을까 염려했다. 임시 국민정부의 행정 수반을 맡고 있던 아돌프 티에르는 파리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방위군을 무장해제시키기로 결정했다. 3월 18일 시(市) 수비대의 대포들을 치우려 하자 파리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3월 26일 수비대 중앙위원회가 조직한 자치선거에서 혁명파가 승리했으며, 이들은 코뮌 정부를 수립했다.
그밖에
2009년 정동호 전 국회의원 별세
2009년 안광구 전 통상부장관 별세
2009년 민주당 이광재 의원 구속수감
2003년 천안초교 축구합숙소 화재로 25명 사상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 이라크전 반대
2002년 정부, 범부처 공동 전산환경을 구축하기로 결정
2002년 제11대 조계종 종정에 법전스님 추대
2001년 한국,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가입
2000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블라디미르 푸틴 당선
1999년 북한 원로 여배우 문예봉씨 별세
1997년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광주 등 6대도시 시내버스 파업
1992년 정부, 통신위원회 구성
1991년 기초지방의회 의원 선거(시-군-구의회 의원선거) 실시
1991년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참가
1991년 개구리소년 실종
1983년 중국통일학술회의에 중국과 대만학자 참가
1983년 장정구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2년 광양만 산업기지개발 구역 지정
1982년 일본, 우라늄 공장 첫 가동
1982년 일본군의 2차대전 중 생체실험 폭로
1980년 차드 내전 격화
1980년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 사망
1976년 한국-과테말라, 무역협정
1975년 세균무기(생물무기) 및 독소무기의 개발, 생산 및 비축의 금지와 그 폐기에 관한 협약(BWC) 국제적으로 발효
1975년 남북적십자 제9차 실무자회의 개최
1973년 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 구속
1971년 티토, 교황청 방문
1970년 영국 증기선 미국 도착
1969년 소련, 기상위성 메테오르 1호 발사에 성공
1967년 한-미 위성중계 직통전화 개설
1962년 전국 10개 교육대학 개교
1962년 한국-뉴질랜드 국교 수립
1959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대표적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 사망
1916년 박중빈, 원불교 창설
1911년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출생
1884년 독일 피아니스트 바카우스출생
1881년 루마니아왕국 성립
1827년 독일 작곡가 베토벤 사망
1279년 남송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