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 마지막 제5권, '재침 그리고 기이한 화평'입니다. 1597년 1월 13일, 정유재란이 발생합니다. 1592년 4월 13일에 시작된 임진왜란이, 명나라와 일본간에 지루한 협상 줄다리기가 실패하자, 일본은 철군을 중지하고 재침을 한 것입니다.
'왜놈은 얼레빗, 떼놈은 참빗'이라는 말이 백성들 사이에 돌았습니다. 왜놈 군사의 피해도 피해지만, 명나라 군사의 피해는 더욱 심했습니다. 왜놈에 당한 것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떼놈에 또 당하고, 조선 3천리 강토는 그렇게 백성들의 신음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강토를 분할하려고 밀서가 오고갑니다.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이순신 수군이 바다를 장악해 간신히 조선의 목숨이 붙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순신이 죽을 고문 끝에 백의종군하고,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에 전멸당하자, 임진왜란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전라도와 충청도가 함몰 위기에 처했습니다. 명나라는 이여송 부대를 파견했으나 전투에 소극적인 가운데,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된 이후 1597년 재침으로 남해안 지역 백성들이 물 밀듯이 도륙을 당했습니다. 전라도와 충청도로 진출한 왜군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합니다.
1598년 8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왜군을 철수하라는 유언과 함께 사망합니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노량 앞바다에서 철수하는 일본 수군을 격퇴하다,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칩니다. 23전 23승 신화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났습니다.
일본은 11월 25일 부산에서 완전히 철수합니다. 명군은 전쟁이 끝난지 1년 10개월 만인 1600년 9월 조선을 떠납니다. 드디어 조선땅에 들어왔던 왜군과 명군의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15년이 지난 1606년 6월 6일, 조선과 일본은 국교를 회복합니다. 쓰시마 도주의 교류 청원에 선조의 명을 받고 일본에 간, 사명대사의 외교역할 덕분입니다. 조선 백성 1만 8천여 명도 귀국합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저자 김성한은 <7년전쟁> 소설 제5권을 마무리하면서, 작가노트에서 무명의 애국자들과 이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우리 민족은 거족적으로 항전하였다. 공명도 이익도 탐하지 않고 어느 골짜기에서 적과 싸우다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아마 이들의 사적은 영영 알 수 없고, 개중에는 잘못 전해내려오는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이순신이라면 제1급의 명장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해외에서도 최소한 해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만 해도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 일 년 전까지 그는 전라도 정읍현감이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고을의 군수라고 생각하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를 전라도좌수사로 천거한 것은 당시의 류성룡이었다. 류성룡은 이보다 11년 전에 돌아간 이순신의 형 요신(堯信)과 동갑 친구로, 두 집은 서울 남산 기슭의 같은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서로 아는 처지였다. 이때 전라좌수사의 자리가 비었는데, 마침 류성룡이 좌의정이면서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판서를 겸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연과 우연이 맞아떨어져서 이순신은 좌수사의 직책을 맡고 전라고 여수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수사라고 대단한 벼슬은 아니었다. 요즘으로 치면 변방을 지키는 연대장 정도의 직책이나, 이때까지도 그는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못 되었다.
수군 자체도 크게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한때 조정에서는 변변치 못한 수군을 없애고 그 대신 육군을 강화하자는 논의가 나올 지역이었다. 우리 스스로 이런 형편이니 적도 조선 수군은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전쟁을 계획하였다. 개전 초기에 경상도 수군이 싸우기도 전에 무너져버린 것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무명의 이순신이 아무도 기대를 걸지 않던 수군을 이끌고 그처럼 위대한 공을 세우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육지에서 의병들이 아무리 잘 싸워도 바다에서 수군이 적의 수군을 격파하고 해상 수송을 차단하지 못했다면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북사도 전란과 남군산 병겁이 소리소문없이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강생원집 잔치가 벌어지려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소문으로만 떠돌던 왜침 소식을 정탐하러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 건너갑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그들의 왜침에 대한 정보에 대한 판단이 엇갈려 준비에 소홀하다가, 삼천리 강토가 시체로 뒤덮였습니다.
'지천하지세자는 유천하지생기하고 암천하지세자는 유천하지사기'라고 했습니다. 천하의 대세에 어두우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맙니다. 유비무환 무비유환입니다. 천하가 도탄에 빠지면 도로써 구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태을도 의통뿐입니다. 왜침을 막아냈던 이순신 장군과 무명 애국자들의 음호가 태을도인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하루는 차윤경(車輪京)에게 일러 가라사대 "저녁에 여덟 사람을 얻어서 너의 집에 모아놓고 나에게 알리라." 윤경이 명하신 대로 여덟 사람을 약속하여 집에 모이게 하였더니 문득 아홉 사람이 모이게 된 지라. 윤경이 상제님께 사유를 고하니 가라사대 "무방하니 한 사람은 나의 시종으로 쓰리라." 하시고, 윤경의 집에 이르사 등불을 끄신 뒤에, 상제님께서 한 사람을 데리고 중앙에 서시고 여덟 사람을 팔방으로 벌려 세우신 뒤에, "건감간진손이곤태(乾坎艮震巽離坤兌)" 를 외우게 하시고, 방관한 종도 이십여인으로 하여금 각기 정좌케 하여 따라 외우게 하사 밤이 깊어서 그치게 하신 뒤에 불을 켜시고 그 사람들에게 각기 훈계하신 뒤에, 한 편(쪽) 눈이 먼 차공숙(車公淑)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통제사(統制使)라. 연중 360일을 맡았나니, 돌아가서 360인을 구하여오라. 이 일은 곧 팔봉(八封)을 맡기는 공사니라." 공숙이 명을 받들고 돌아가서 수일 후에 한 사람을 데리고 오거늘, 상제님께서 그 직업을 물으시니 농사에 진력하여 다른 출입이 없고 다만 추수후에 한 번 시장 출입이 있을 따름임을 아뢴 데, 가라사대 "참으로 순민(淳民)이로다." 하시고 정좌하여 "잡념을 두지 말라." 하신 뒤에, 윤경에게 "밖에 나가 구름이 어느 곳에 있는가 보라." 하시니, 윤경이 나가 살핀즉 하늘이 맑고 오직 상제님 계신 위에 돈잎만한 구름 한 점이 떠 있을 뿐이어늘, 윤경이 그대로 아뢰니 가라사대 "다시 나가서 그 구름이 어디를 향하여 펴이는가 보라." 윤경이 다시 나가보니 벌써 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북쪽 하늘만 조금 터져서 가리우지 못하였는지라. 그대로 아뢰니 가라사대 "그곳이 조금 터졌다고 안될 리 없으리라." 하시고 두어 시간 후에 그 사람을 돌려보내시니라. (대순전경 pp270-272)
첫댓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대마도 사람들을 통해서 왜군의 침략정보가 사전에 조선으로 전해졌었다고 합니다.
병겁 발생 전에 급살병 소식이 천지부모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태을도인들이 급살병 소식을 전하는 중심이 되어야겠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무명 애국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400여년이 흐른 지금, 통제사 팔봉 60법장 60만 의통군이 세상을 구합니다.
유비무환의 정신을 놓지않고 매사에 임하
겠습니다
조은말씀 감사합니다
태을도인들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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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즉생
하늘을 감동시키고 인간을 감동시켜서
백성과 나라를 구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