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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외교전략 -환경외교의 눈물겨운 현장/기후변화대사 정내권의‘기후담판’
미래의 외교는 환경외교가 중심이다
한국,환경이라도 선진외교 펼쳐야 할 시기
뼈저린 시련 겪은 몬트리올 의정서
우리나라 초대 기후변화대사를 지낸 정내권 석좌교수가 환경외교의 현장의 소리면서도 화두를 던진 저서<기후담판>을 출간했다.(2022년7월/기후변화대사 정내권의 대한민국 탈탄소 미래전략/메디치미디어간/302쪽)
기후담판은 ◾1부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대한민국의 자리 만들기◾2부 우리가 제안한 미래◾3부 기후변화체제의 결정적 장면들◾4부 새로운 지구환경 패러다임,탈탄소를 넘어 지속가능 경제,사회,환경 선순환 발전 모델을 향하여로 편성되었다.
책장을 펼쳤지만 머리말에서 맴을 돌았다. 우리나라 환경외교의 첫발이 어떻게 띄여졌고 세계정세에 무지했던 당시의 한국사회 전반을 회상하고 뼈저린 반성과 내일을 다지는 울림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머리말에 적어간 글들을 담담하게 담아보자
환경외교가 처음으로 국제사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그 시작은 198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합의된 <오존층 보호를 위한 비엔나협약>(전 세계 122개국 가입)과 1987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채택된 <오존층 파괴물질에 관한 몬트리올 의정서>로 우리나라에게는 몬트리올 의정서가 매우 중요했다.
100여개의 인공 화학물질의 생산과 소비를 규제하는 획기적인 다자간 환경협약으로 1987년 9월 15일 채택되고 1989년 1월 발효되었다.(198개 유엔회원국 비준)
의정서의 핵심은 선진국은 프레온가스사용의 단계적 감축,개도국은 1인당 사용량을 0.3kg으로 제한,비가입국에 대한 통상제재(교역금지)였다.
하지만 우리는 몬트리올 의정서 문안을 논의하는 협상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프레온가스의 사용량을 1인당 0.5kg이하로 제한 한 1992년 2월에야 가입하였다 우리나라의 환경외교는 머나먼 미래의 외교였고 남의 나라의 이야기였다.
의정서가 발표되는 시점의 한국은 프레온가스를 사용하는 반도체산업, 에어컨,냉장고등을 생산하는 가전산업, 차량 내의 에어컨을 부착해야 하는 자동차산업등은 졸지에 비상이 걸렸다.
프레온가스가 포함되었거나 프레온가스로 생산된 제품은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의 프레온가스 사용량은 1인당 상한선인 0.3kg을 초과하여 0.6kg에 달했다. 반도체의 세정제로 프레온가스 사용이 급증하여 프레온가스를 사용하지 못할 경우 반도체산업은 중단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우리나라가 환경문제로 수출산업의 발목을 잡힌 첫 번째 국제협약이었다.
1989년 외무부는 경제기구과에서 유엔환경계획을 담당하고 있었다.(87년의 환경청은 환경협력과에서 국제협력(담당 추경호사무관(현 부총리겸 기획재정부장관)을 담당했으며 환경처로 승격한 1990년 1월 기획관리실에 국제협력담당관이 1994년 12월에는 환경정책실에 국제협력관,해외협력과, 지구환경과가 신설되었다.)
국제환경 동향에 둔감한 우리의 뼈저린 반성
고도성장한 한국 최빈개도국으로 최종협상에 참석
가장 아쉬운 점은 우리가 지구환경 동향에 너무 둔감하여 국제동향을 알지 못한 채 국내 자체 기술로 프레온 가스를 개발 생산하기 시작했고 반도체 산업도 비약적인 발전을 하면서 프레온가스 사용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다.
두 번째 아쉬운 점은 몬트리올 의정서를 준비하는 협상 과정에 우리나라는 아무도 참여하지 않아 그 과정에서 우리의 입장을 반영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전문가 회의에 지속적으로 초청장을 받았지만 우리나라는 어느 누구도 참석할 의지를 보이지 못했다. 다만 몬트리올 의정서를 채택하는 1987년 9월 최종 협상회의에 유엔 환경계획 사무국으로부터 출장비를 지원받아 환경청 공무원 1명이 회의에 참관차원에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환경청 故 김형철 차관( 대기보전국장)이 참석했으며 보고서 말미에“우리나라도 산업경제에 문제가 발생될 수 있어서 심도 있게 주시해야 한다.”라고 적었다.)
출장비 지원은 유엔에서 최빈 개도국들을 위해 선진국이 지원하는 출장비로 회의 참가를 독려하기 위함이었다.(당시 한국은 86 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치루며 고도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환경외교에서는 최빈 개도국 대접을 받았다.)
이는 선진국의 배려라기 보다 다수의 개도국들이 불참하면 선진국 위주로 국제협약을 일방적으로 체결하여 추후 개도국들이 자신들의 참여 없이 체택된 협약은 효력이 없다고 부인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다.
협상과정에서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오존층 파괴 대체물질 기술을 확보한 선진국에 대해서는 1인당 프레온가스 사용량의 제한을 두지 않으면서 향후 10년간 사용량을 절반 수준으로 줄여나가도록 규정했다. 반면 개도국에게는 프레온가스 사용 한도를 1인당 0.3kg으로 규정하고 위반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교역 금지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1989년 한국의 1인당 사용량은 0.6kg이었다)
선진국들은 몬트리올 의정서의 세부 사항을 논의하던 1986년 한국의 1인당 사용량인 0.3kg을 기준으로 개도국의 사용량을 설정하여 더 이상 사용량을 증가하지 못하게 규정했다.
또 다른 아쉬운 점은 1950년대부터 프레온가스를 다량으로 사용하여 오존층을 파괴한 선진국들은 어떠한 타격도 받지 않았지만 1970년대서야 프레온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1989년까지도 선진국에 비해 사용량이 미미하고 선진국에 비해 3분의 1이나 4분의 1도 되지 않은 한국만 타격을 받았다는 점이다,(프레온가스 사용량은 선진국 중심으로 1950년대 20만톤/1960년대 60만톤/80년대 말 100만톤-130만톤 사용, 90년대까지 약 2천만톤 소비/ 1986년 현재 연간 사용량 일본 16만톤,유럽 36만톤, 미국 50만톤, 1인당 사용량 1.3kg-2.1kg,한국 9천톤, 1인당 0.28kg)
몬트리올 의정서가 프레온가스 사용규제를 위반하는 국가에 대해 교역금지와 같은 강력한 재제 규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를 더욱 당혹하게 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국제협약은 협약에 서명 비준한 당사국 간에만 효력이 발생하지만 몬트리올 의정서는 서명 비준하지 않은 비당사국에도 무역제재를 하도록 규정했다.
1990년대 초 우리나라는 제조공정에서 프레온가스를 사용하거나 제품에 포함하는 전자 및 가전제품,자동차 등의 수출이 급증하던 시절이라 무역제재 조치는 우리 수출산업의 근간을 흔들었다.
나는 선진국들에게는 1인당 사용량에 제한을 두지 않으면서 개도국에 대해서는 1인당 사용량을 제한하고 무역제재까지 규정한 몬트리올 의정서의 불공정함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수년간 지속된 의정서의 문안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던 책임은 우리에게 있었다. 의정서 문안이 불리하게 작성되었어도 어디에 하소연 할 수가 없었다.
의정서에 의한 어려움은 전 세계에서 경제발전이 가속화 되고 있었던 우리나라만 해당되지 다른 개도국들은 프레온가스의 사용량이 미미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선진국 정부는 개도국의 프레온가스 사용제한을 강화하고 선진국 기업들은 대체물질 기술을 이미 개발하였다.
개발된 기술에 대해 기술사용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대체물질을 사용할 경우 프레온가스 가격의 20배에 달하는 독점가격을 요구했다.
선진국 정부와 기업이 공모하여 오존층을 자신들만의 독점이윤 극대화에 이용했다.
이러한 사례는 지구환경문제에 한국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은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독자적으로 자기 자리를 찾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프레온가스 업무는 상공부였으며 상공부와 타 부처와 산업계에서는 외무부가 외교협상을 통해 해법을 찾아주길 갈망했다.
나는 의정서 문안을 검토하면서 프레온가스의 대체물질 생산기술을 개도국에 이전하는 조항여부와 1인당 프레온가스 사용량이 이미 0.3kg을 넘긴 우리나라가 무역제재를 피할 방법은 없는지 분석했다.
기술이전은 규정하고 있으나(5조2항) 일단 의정서를 비준하여 회원국이 되어야 하고 1인당 프레온가스 사용량을 0.3kg이하로 감축하여 개도국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했다.(한국은 0.6kg이었다)
마침내 의정서 10조 2항에 회원국과 의정서 문안에 서명한 서명국가도 기술이전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을 찾아냈다.
몬트리올 의정서는 의정서 문안이 합의 채택된 1987년 9월16일부터 1년이 경과되는 1988년 9월15일까지 서명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조항을 발견한 것이 1989년 9월로 이미 서명 개방 시한이 1년을 경과한 뒤였다.
다시 찾아낸 것이 2조 6항에 규정된 경과 규정으로 이 조항은 1990년 12월 31일 이전까지 완공되는 프레온가스 생산시설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1인당 사용량을 0.5kg까지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울산화학에서 개도국 중에는 유일하게 자체 기술로 프레온가스를 생산하고 있었다.
나는 몬트리올 의정서 사무국과의 교섭을 통해 우리의 1인당 사용량을 0.5kg으로 상향하는 인정을 받아내고 국내법의 도입을 마련토록 하면서 직접적인 무역제재를 피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나라는 <오존층 보호를 위한 특정물질의 제조규제 등에 관한 법률>을 1991년 1월 제정공포하고 1인당 사용량을 0.5kg으로 규제했으며 1992년 2월 몬트리올 의정서에 가입하였다.(환경부 환경30년사에는 1992년 5월에 가입한 것으로 표기)
선진국은 우리나라의 특허기술을 총력 저지
제한적 영업횡포를 막아야 한다,미국에 도전장
다급해진 상공부는 1995년까지 약 100억원을 기술개발에 투입하였으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도 3년간의 연구로 1993년 7월 대체물질의 일부를 개발했다. 그러나 선진국 기업들은 우리 기업의 특허 사용 요청을 거부하였고 자신들의 기술특허를 우리나라에 경쟁적으로 등록하여 우리의 자체 기술개발제품에 대해 총력적으로 저지하며 독점적 이윤을 극대화했다.(몬트리올 의정서 채택 후 일본 기업은 1988년 3건, 93년 38건, 96년 97건, 프랑스 아토켐 37건, 듀퐁 26건, 일본 다이킨 9건, 쇼와덴코 5건,아사히 글라스 4건, 이탈리아 오시몬트 8건, 영국 ICI 5건,벨기에 솔베이 4건이 우리나라에 등록, 한국 기업의 특허는 96년 KIST 21건,한국신화 3건, 울산화학 1건등 25건)
그러나 이같은 선진국 기업들의 제한적 영업관행이 지구환경 보호를 위한 기술 특허까지 남용해서는 안되며 제한적 영업관행은 오존층 지구환경보호에 오히려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다.(대부분의 우리나라 행정담당이나 정치권등은 관례상으로 이뤄지는 행위는 의문이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 구조였다.)
이같은 문제는 1992년 리우 지구정상회의 협상장에서 지구환경 규범<의제 21>에 선진국들이 반대하는’특허의 강제실시‘조항을 들고 마지막 준비회의에서야 겨우 참석했다.
발언요지는 “지구환경이 더 이상 소수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독점이윤 추구의 기회로 악용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으로 특허의 강제실시 조항은 반드시 필요하다. 특허의 강제실시는 이미 1883년의 공업소유권 보호를 위한 파리 협약 5조에 규정되어 있어 새로운 주장이 아니고 재확인 하는것인 만큼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라고 발언했다.
미국 대표단은 당혹했으며 반론을 한마디도 제기하지 못했다.
의장(말레이시아 라잘리 이스마일 대사)의 지시에 따라 열린 비공식회의에는 미국등 10여 개 선진국 대표와 고문변호사등 20여 명과 개도국에서는 중국,아르헨티나,브라질,한국(정내권)등 4명만 참석했고 회의 말미에는 브라질과 한국만 남았으나 브라질 대표는 단 한마디도 발언하지 않아 결국 1대 20으로 단기필마로 싸워야 했다.
특허 남용 사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정당성을 재차 강조하자 결국 미국등 선진국들은 특허의 강제실시 자체를 삭제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고군분투 끝에 힘들게 합의한 문안이 바로 <의제 21> 34장 ’ 환경적으로 건전한 기술의 이전,협력과 능력배양‘중 ’정책수단‘ 파트의 ’기술에의 접근과 이전의 지원과 장려‘항목이 포함되었다.
최종적으로 문안이 합의되자 브라질 대표는 미국이 지난 100년 이래 국제적으로 특허의 강제실시에 합의한 최초의 사례라고 환호했다.
이처럼 선진국들의 특허권 남용만 없었으면 우리나라도 대체물질 기술로 오존층 보호에 일찍 동참할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몬트리올 의정서는 한 국가의 기간산업을 송두리째 위기에 빠지게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주었으며 지구환경외교 동향에도 눈을 뜨게 했던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진행되던 지구환경 협상의제들 중에는 생물다양성협약과 같은 생물자원의 보호에 중점을 두기도 했지만 기후변화협약처럼 경제발전과 산업생산의 기본이 되는 에너지 사용을 직접 제한하는 협상도 있었다.
기후변화 협상에 우리가 제대로 대비하지 않는다면 이같은 기간산업의 타격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미래의 외교는 환경외교가 될 것이다‘라고 독일 헬무트 콜 총리 내각 시절의 클라우스 퇴퍼 환경부장관의 말은 매우 의미가 큰 미래의 국제관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정내권의 ’기후담판‘은 빈약한 우리나라 외교력에 있어서 특히 환경외교는 전문성과 정보력이 중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의지력,국가관,통찰력, 분석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다. 환경경영신문에서는 ’대한민국 환경외교/ 중간에 낀 나라의 고민‘을 담아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환경국제전략연구소 소장,환경경영학박사,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