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를 둘러싸고 애플과 삼성이 한바탕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휴대전화기술이라니,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도 내 전화가 그런가 싶어 궁금한 것이 당연하다.
특허 분쟁뿐 아니다. 지금 한창 지역을 돌며 대통령 후보 경선을 하고 있는 제1야당은 모바일투표 때문에 시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진보 정당의 분란에도 온라인 투표가 큰 몫을 했다.
몇 가지 단편적인 예를 들었지만, 이제 우리의 삶은 정보통신 기술을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세대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상이 된 것이다. 이 글만 하더라도 인터넷 형태로만 전달되는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정보통신 기술뿐 아니다. 과학기술은 근대적 인간의 삶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세탁기든 인터넷이든, 크기와 분야는 다를지언정 과학기술 덕분에 근본적으로 바뀐 게 많다.
이 때문에 과학기술은 '발전'이라는 사회적 비전과 강한 친화성을 가진다. 물론, 때로 핵무기처럼 과학기술이 재앙으로 묘사된 예도 있었다. 그러나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사건(그리고 그 이후)에서도 보듯이 기술이 가진 발전의 '신화'는 강고하다.
신화에서 완전히 놓여나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과학기술이 중립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새삼스럽다. 굳이 많은 예를 들지 않더라도 과학기술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가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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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생명은 다 같은 값을 가지고 질병의 고통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지만, 여기에 대처하는 의료 기술은 다르다. 사람을 가리고, 또 그렇다는 점에서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다.
흔히 '소외된 질병(neglected disease)'이라고 부르는 몇 가지 전염병의 예를 드는 것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을 병들고 죽게 만들지만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치되는 질병에 이런 이름을 붙인다. 당연히 후진국, 개발도상국에 많다.
치료법이 있지만 재정 사정 때문에 널리 사용되지 않는 것도 있고, 투자가 되지 않아서 아예 기술이 개발되지 않은 것도 있다. 기술의 개발과 활용 어느 쪽이든 경제적 이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소외된 질병은 의료 기술의 구조적 불평등성을 그대로 나타낸다. 이른바 '10/90의 법칙'이 적용되는 한 가지 사례라 해도 좋겠다. 이 법칙은 (가난한 사람이 앓는) 전 세계 90퍼센트의 보건 문제를 연구하는 데에 투자되는 재원이 전체의 1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에서도 이런 종류의 불평등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뭉뚱그려서 과학기술 투자니 연구 개발(R&D)이니 하는 것을 국가적 과제로 말한다. 그러나 그 안에 버티고 있는 불평등의 완고함이란.
소외된 질병처럼 막상 필요하지만 돈은 안 되는 분야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까 의심스럽다. 당장 약품만 보더라도 그렇다. 전염병에 쓰이는 항생제나 백신은 연구 투자도 기술 개발도 부진하다.
한 발 더 나가서 인력이나 시설 같은 것까지 의료 기술의 범위에 포함하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돈이 되지 않는 분야는 인력이나 시설이 제대로 설치되고 운영될 리 만무하다. 거의 전적으로 시장 논리에 포섭된 온갖 구조 안에서 의료 기술의 불평등은 차라리 필연적이다.
이보다는 좀 더 천천히 진행되고 잘 드러나지 않는 불평등도 있다. 앞에서 말한 정보통신 기술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정보통신 기술의 활용이나 가치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건강 '산업'이다. 그러니 구조적 문제를 드러낼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
사실 정보통신 분야에서 건강과 보건, 의료가 주목을 받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발전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분야로 꼽혀 왔다. 기억할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도 역사가 벌써 20년에 가깝다.
초기에는 주로 원격 진료나 원격 의료로 불렸다. 그 사이 뚜렷한 성과가 없었지만, 여전히 혁신의 대표 선수처럼 꼽힌다. 비슷하게 또 다르게 이헬스(e-health), 유헬스(u-health), 엠헬스(m-health)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진화(때로는 혼란)를 거듭하는 중이다.
무엇이라 부르든, 정보통신 기술을 건강과 보건의료에 적용하는 것은 환상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맞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 광고에 등장했던 원격 진료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효자 아들 덕분에 독도의 집에 앉아서 혈당을 잰다니.
그러나 배후에 있는 것은 효도도 건강도 아니다. 수십 년째 그래왔고 지금도 되풀이되는 비슷한 논리, 때로는 설득과 마케팅의 근거가 되는 '성장 동력'론이 숨어 있다.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한국의 정보통신 기술에 폭발하는 건강과 보건의료 수요를 붙인다? 누구라도 단번에 넘어갈 꿈이 쉽게 그려진다. 부가 가치가 높은 새로운 기간 산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장 동력의 논리가 등장하는 것은 원격 진료나 이헬스 이외에도 많다. 익숙하기는 영리법인 병원이나 의료 관광이 한 길 위다. 그러나 원격 진료나 이헬스는 과학과 의료 기술 발전이라는, 겉으로 보기에 중립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신화가 되기에 더 적당하다.
원격 진료나 이헬스를 비롯한 정보통신 기술이 삶의 질을 올리는 데에 잠재력이 큰 것은 사실이다. 의사가 없는 남해안의 어느 섬에서 찍은 방사선사진을 서울에서 판독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스마트폰을 활용해서 (더 적은 돈과 노력으로) 환자교육을 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 진료 일정을 알려주고 결과를 통보해 주는 것도 이미 많은 병원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앞으로 기술은 더욱 정교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아니다. 한 때 우리 사회에서도 '디지털 디바이드'이라는 어려운 말이 유행했던 것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우리말로는 정보 격차쯤 될까.
이제 정보 기술의 발전은 한층 더 벌어진 격차를 예고한다. 이전의 격차가 주로 물리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차라리 간단했다. 휴대전화나 팩스가 있나 없나, 또는 인터넷에 쉽게 접속할 수 있나 같은 것이 기준이었다.
그러나 원격 진료와 이헬스의 모든 과정은 더 큰 심각한 불평등에 노출되어 있다. 단순히 정보에 접근하는 단계가 문제가 되는 시기를 지났기 때문이다. 지식과 정보를 얻고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는, 말하자면 소프트웨어의 불평등은 훨씬 뿌리가 깊다.
더 중요한 것은 정보통신에 기초한 의료 기술 역시 성장 동력이라는 시장 논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에서의 가치 생산을 기술의 동력으로 하는 한, 구매력에 따른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처럼 의료 기술의 불평등 구조는 때로는 직접적으로, 또 다른 때에는 좀 더 간접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시장 그리고 이윤의 극대화라는 논리가 배후에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의료 기술 역시 사회경제적 문제로 이해해야 맞다.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고 불평등을 줄이는 데에 기여하는 기술,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의료 기술은 어떻게 가능할까. 지난 5월 세계은행이 낸 보고서(☞바로 보기)는 시장에서 살아남아 지속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의료 기술(모바일 의료 기술을 중심으로 했지만)이 후진국 빈민들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인정하면서도 이 보고서는 시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 셈이다. 모르긴 해도,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이 벌였던 통신 사업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은행이 농촌의 여성 인력을 활용하여 휴대전화 사업을 했던 것은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 생각은 다르다. 시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리고 시장의 법칙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리가 기술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에 완전히 통합되는 한 도덕적 규범만으로 기술이 인간적 가치에 봉사할 여지는 매우 좁다.
이런 맥락에서는 국가와 시민 권력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의료 기술의 민주적 공공성이 강화되는 것이 핵심이다. 기획과 정책, 투자, 연구 개발, 활용, 평가 등 의료 기술의 전체 과정에서 공공성이라는 가치가 중심에 놓여야 한다.
당장의 과제는 더욱 명료하다. 의료 기술과 관련된 모든 과정에 공공성이라는 잣대를 견주어 보는 일이다. 일차적인 책임은 당연히 정부에 있다. 정책 기획과 투자의 가장 중요한 주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