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빙점]
잠
생각했던 만큼 눈이 많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숲속의 눈은 높이 쌓여 있었다. 요코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놓았다. 때때로 소리도 없이 나무 위에서 눈이 흩어져 내렸다. 요코는 걸음을 멈추고 눈이 들이쳐서 한쪽에만 눈이 하얗게 들러붙은 소나무 밑둥에 손을 얹었다.
손발이 싸늘햇다. 간신히 스트로브소나무 숲을 빠져나가자 제방이 나왔다. 요코는 그곳으로 기어올라갔다.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발자국이 눈 위에 찍혀 있었다. 똑바로 걸어온 줄 알았는데 발자국이 이리저리 흩어졌다고 생각하면서 요코는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돌아보았다.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의외로 시간을 끌었다. 집안 식구들에게 들키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숲 저편의 쓰지구치 집에 작별을 고하고 요코는 제방을 내려갔다.
독일가문비 숲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요코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바람이 휘몰아쳐서 단단해진 눈 위에 까마귀가 숱하게 떨어져 있었다. 흰 눈 위에 죽어 있는 검은 까마귀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요코는 숨을 죽이고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주위에 살아 있는 까마귀가 한 마리도 없는 것이 무척 쓸쓸했따. 눈 속에 묻혀서 죽은 까마귀도 있었다. 눈 속의 까마귀를 생각하고,
‘쓸쓸해.’
하고 요코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죽음과 이 까마귀들의 죽음은 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고 요코는 생각햇다. 인간의 죽음이 새의 죽음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쓸쓸한 일이었다.
‘인간은 많은 추억을 안고 죽게 되는구나. 어떤 추억을 몰래 간직하고 죽는다면 그 추억은 싸늘한 송장 속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을까?’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요코는 도오루를 생각했다.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고서도 여전히 부드럽게 대해 준 도오루를 생각하니 요코는 도오루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까마귀의 시체를 피해 가면서 요코는 독일가문비 숲속으로 들어갓다. 눈이 내린 탓인지 컴컴하던 이 숲속도 의외로 환했다. 도오루와 술레잡기를 하면서 이 숲속을 뛰어다니던 날들이 생각났다. 그때 요코는 기타하라를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요코는 도오루의 쓸쓸함을 애처로운 정도로 느낄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놀러 왔기 때문에 추억이 많은 숲이야.’
요코는 한 걸음 한 걸음 눈 속을 걸어오느라 몹시 지쳐 있었다. 간신히 숲을 빠져 나오니 비에이 강의 푸른 물결이 아름답게 보였다. 강바람이 뺨을 때렸다. 요코는 강을 건너 루리코가 죽임을 당했다는 강변에 도달햇다.
요코는 조용히 눈 위에 앉았다. 아침 햇살에 눈이 반사되어 엷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 속에서 죽을 수 있다니.’
요코는 눈을 꽁꽁 뭉쳐서 강물에 적셨다. 그것을 입에 넣자마자 칼모틴을 삼켰다. 몇 번이나 문을 뭉쳐 강물에 적셔서는 입에 넣은 다음 또 약을 삼기곤 했다.
‘얼마나 괴로움을 당하면서 죽게 될까?’
만일 괴로움을 당해 죄가 없어질 수 잇다면 아무리 괴로워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요코는 눈위에 드러누웠다.
도오루는 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상점들이 아직 셔터를 올리지 않아서 그런지 이상하게 서먹서먹하여 자신이 나고 자란 거리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른 시간에 기차를 타고 돌아오고 싶었을까?’
치가사키에서 돌아오는 길에 삿포로에 들러 2,3일 천천히 놀 생각으로 도오루는 어젯밤 삿포로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기숙사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남아 있는 친구들이 몇 사람 있었다. 도오루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이나 푹 자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왠지 불안했다. 흔히 ‘육감’이라고 말하는 그것 때문이었다. 차라리 전화로 가족의 안부를 물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시 바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서 막상 도착해보니 거리는 쥐욱은듯이 고요하고 사람의 그림자도 드문드문 보이자 더욱 발안한 생각이 들었다. 졸린 얼굴의 운전기사에게 말을 거는 것도 귀찮아 도오루는 조바심을 하면서 몸을 곧추세워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7시 50분이었다.
국기를 단 집이 한 집 있었다. 오늘이 ‘성인의 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 집을 2백 미터쯤 자나쳤을 때였다. 축제일이어서 거리의 아침이 늦은 것이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의 그림자가 뜸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도오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축제일이라면 우리 집도 8시가 넘도록 자겠군.’
그러나 요코만은 일어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성인의 날인 줄 알게 되자 어젯밤부터 느껴 온 불안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도오루는 요코에게 주려고 햇던 반지를 떠올렸다. 그는 여행 가방에서 반지가 들어 잇는 작은 상자를 꺼내 윗도리 호주머니에 넣었다.
요코가 기타하라를 사랑하여 행복해질 수 잇다면 그 행복이 영원한 것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길에서 그는 기타하라와 요코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힘이 되어 주기로 생각하게 되었다.
자시닝 아니면 요코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을 도오루는 부끄럽게 여겼다.
‘기타하라 쪽이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인간이야. 설사 요코의 출생을 알게 되더라도 기타하라라면 요코를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잇을 거야.’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쓸쓸한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요코를 생각하면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엾게도 얼마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애인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요코가 더욱 가엾어졌다.
‘기타하라와 행복하게 살 날이 올 테니 앞으로 2,3년만 더 참아.’
돌아가서 이렇게 요코를 격려해 주고 싶었다. 집 앞에 이르자 도오루는 차에서 내려 약간 언짢은 생각을 하면서 자기 집을 바라보았다.
뒷문은 열려 있는데 집안은 조용했다.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난로도 지펴져 있지 않았다.
도오루가 코트를 걸친 채 난로의 재를 떨어뜨리자 불은 곧 소리를 내며 타기 시작했다.
도오루는 코트를 벗고 부모님 침실 앞으로 갔다.
“어머니, 일어나셨어요?”
“어머, 도오루니?”
나쓰에는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서 들어와. 일찍 왔구나. 엄마도 지금 일어나려던 참이야. 벌써 8시가 됐구나.”
도오루는 침실 미닫이를 열었다. 나쓰에가 이불 위에 일어나 앉아 도오루를 쳐다보았다.
“웬일이냐? 이렇게 일찍.”
게이조가 누워서 말햇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치가사키에서 선물을 잔뜩 갖고 왔어요.”
도오루는 방에서 나왔다.
“모두 별고 없으시든?”
나쓰에가 미닫이 너머로 물었다.
“할아버지는 갈수록 젊어지시는 것 같아요.”
도오루는 이렇게 말하고 복도를 돌아 요코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요코, 잘 잤니?”
대답이 없었다.
“요코.”
‘오늘 따라 웬 늦잠이지?’
하고 도오루는 생각했다. 요코는 언제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요코.”
역시 대답이 없었다. 도오루는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활짝 열었다. 요코는 방안에 없었다. 지금까지 거기 있었다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방안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도오루의 눈은 책상에 못 박혀 버렸다. 흰 봉투가 세 개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오루는 자신도 모르게 얼른 다가갔다.
보모님과 기타하라, 자신에게 남긴 봉투였다. 도오루는 자기 앞으로 되어 있는 봉투를 찢어서 펴 보앗다. 손이 떨렸다.
‘죽어서 미안해요’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요코가, 요코가.”
도오루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복도로 달려 나왓다.
“왜 그래?”
게이조가 잠옷 바람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요코가 자살했어요.”
도오루는 목이 메어 외쳤다. 게이조는 허겁지겁 요코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요코가 방에서 죽은 줄 안 모양이었다. 나쓰에도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달려왔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멍청히 있던 도오루는 이윽고 요코의 유서를 손에 움켜 쥔 채 복도의 벽에 쓰러지려고 했다. 다시 뛰어 돌아온 게이조가,
“도오루 정신차려!”
하고 외치며 갑자기 그의 뺨을 때렷다. 기절할 것 같던 도오루는 확 정신이 났다. 게이조는 이미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쓰지구치야. 그래, 원장 쓰지구치. 간호사 두 사람하고 위 세척기, 비타 캠퍼, 링거, 안티바르비. 응, 그래 해독제야. 이상. 급히 우리 집까지 부탁해.”
게이조의 긴장된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었다.
“살 수 있어요, 아버지?”
도오루는 불안한 듯이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집으로 운반된 후에도 요코는 창백한 얼굴로 계속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약을 먹은 시간을 알면.......”
게이조는 말을 얼버무렷다. 병원 차가 도착하여 위세척을 한 것은 8시 40분이 지나서였다. 게이조는 약을 먹은 후 두 시간 이내라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야 하는데.’
오직 이 한 가지 생각만이 지금 게이조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게이조는 살짝 요코의 맥을 짚어 보았다.
“괜찮아요, 아버지?”
하고 도오루가 물었다.
“심장은 괜찮아. 하지만......”
게이조는 괴로운 듯이 입을 다물었다. 간호사 두 사람은 요코의 발치에서 앉아 게이조를 주시하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쓰에가 미닫이를 열고 들어왔다. 도오루는 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나쓰에의 뒤를 따라 다쓰코가 들어왔다. 다쓰코는 말없이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요코를 지그시 바라보고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목숨을 건질 수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나쓰에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굳이 죽을 것까지는 없는데’
자신에게 반항이라도 하려는 듯이 약을 먹은 요코를 나쓰에는 마음속으로 탓하고 있었다. 가엾다고 여기기보다는 ‘내 입장을 헤아려 줘야지’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할까?’
나쓰에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뭐 써놓은 거라도.....?”
한참 후에 다쓰코가 나직한 소리로 게이조에게 물었다. 게이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없이 자기들 부부 앞으로 남긴 유서를 다쓰코에게 넘겨주었다.
다쓰코는 엄숙한 표정으로 유서를 읽었다. 다 읽고난 그녀는 길다란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눈물이 주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자 도오루는 비로소 비통한 생각이 복밭쳐 올랐다. 참을 수가 없어 방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갑지가 현관 쪽이 떠들썩했다. 다쓰코가 슬그머니 일어나 나갔다.
현관에서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약을 먹었어요?”
복도를 달려오면서 말하는 다카기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게이조와 나쓰에는 흠칫 놀라 얼굴을 쳐들었다. 미닫이가 확 열렸다.
“...........”
다카기의 커다란 몸집이 입구를 막고 섰다.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다카기가 뭐라고 욕을 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카기가 무너지듯이 주저앉더니 양손을 짚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카기의 뒤를 따라 기타하라가 들어왔다. 기타하라는 요코의 베갯머리에 앉자마자 잠들어 있는 요코 앞에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놓았다.
“역시 제가 생각한 대로였어요. 이 사람들이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기타하라가 내놓은 사진으로 쏠렸다. 사진을 보자마자 게이조도 나쓰에도 도오루도 다쓰코도 일순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사진은 요코를 그대로 그린 것처럼 요코와 꼭 닮은 여성과 눈썹이 근사하고 지적인 기모노 차림의 청년이 함께 찍은 것이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네.”
다카기는 또다시 일허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윽고 그는 머리를 들고,
“언제 먹었어?”
하고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침일 거야.”
“그래? 소변은?”
“별로 시원치 않아.”
다카기는 요코의 손을 잡고 맥을 짚어 보았다.
“맥은 나쁘지 않군.”
“응. 심장이 튼튼해서 다소 희망이 있긴 한데.......”
지금 게이조에게는 사진보다는 요코의 목숨이 소중했다.
“위 세척은 언제 했나?”
다카시는 시계를 보았다 12시 30분이었다.
“8시 40분이 지나서.”
“네 시간 지났나? 너무 오래 자는걸.”
다카기가 불안한 듯이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음.”
게이조의 목소리도 무거웠다.
“이 사람을 알고 있지?”
다카기는 기타하라가 내놓은 사진을 집어 들어 게이조 앞에 놓았다.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학부에 다니던 나카가와 미쓰오야.”
“아, 나카가와 미쓰오?”
학부는 달랐지만 나카가와 미쓰오는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잇을 정도로 유명한 수재였다. 나카가와는 하숙집 주인인 미쓰이 게이코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당시 게이코의 남편은 출정 중이었다. 종전이 되어 남편이 돌아올 무렵 게이코는 나카가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다카기에게 의논하러 왔다. 그 당시는 간통죄가 있던 시대였다. 낙태를 해도 징역을 사는 시대였다. 미쓰이 게이코가 다카기가 아는 산부인과의 별채에 몰래 숨어산 지 다섯 달 만에 태어난 것이 바로 요코였다.
나카가와는 아기가 태어나면 자기가 맡아서 기르겠다고 했으나 요코가 태어나기 보름 전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어버렸다. 그 사이 게이코의 남편으로 부터 돌아온다는 전보가 왔다. 미쓰이 게이코는 어쩔 수 없이 요코를 유아원에 맡기게 되었다.
“마침 그 무렵이었네, 자네가 범인의 자식을 맡아 키우고 싶다고 말한 것이. 쓰지구치 자네는 그때 나쓰에 씨한테는 범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키우게 하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네. 그리고 자네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일생의 과제로 삼겠다고 했네. 기억하고 있나, 쓰지구치?”
기억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게이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자네의 그 말을 믿었네. 자네와 같은 군자라면 정말 실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렇다면 범인의 자식이 아니라 누구의 자식이라도 사랑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도오루는 날카로운 시선을 게이조에게 돌리고 다카기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쓰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나쓰에 씨가 가엾었네. 이렇게 상냥한 사람이 범인의 자식인 줄도 모르고 귀여워하면서 키울 것을 생각하니 쓰지구치 자네가 잔인한 놈으로 여겨졌네.”
게이조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래서 갈 데 없는 요코를 나쓰에 씨한테 키우게 하려고 생각했던 걸세. 나는 쓰지구치 자네가 미웠네. 나쓰에 씨에게 나는 반해 있었으니까.”
나쓰에의 울음소리에 다카기는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요코를 범인의 자식이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까?”
아까부터 요코의 옆에서 기가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던 기타하라가 얼굴을 들고 말했다.
“다카기를 믿었기 때문이었지.”
게이조의 목소리는 까칠했다.
“나도 쓰지구치라는 사나이는 범인의 자식이라는 말을 나쓰에 씨에게도 하지 않고 정말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할 사나이라고 믿고 있었네. 인간이란 믿을 수 없는 존재인 줄 알면서도 쓰지구치만은 믿고 있었던 거야.”
‘서로 믿는 것까지도 비극이 될 수 있구나.’
게이조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서로 신뢰하면서도 결국 다카기와 자신은 서로를 기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자, 게이조는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뭔가 잘못되었다.’
신뢰란 이런 것이 아니라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인간끼리는 마음속까지는 들여다볼 수 없으니까, 그것이 만일 신 앞이었더라면.......’
결국 다카기와 자신은 신 앞에 설 줄을 몰랐던 것이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으니까.’
게이조는 말없이 요코의 손을 잡았다.
‘자기 자신까지 속여 온 것이 바로 나다.’
여기에 자신을 속이지 않고 엄격하게 바라본 인간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약간 벌린 요코의 입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용서해줘, 요코.”
하고 나쓰에가 요코를 흔들면서 외쳤다. 다쓰코가 나쓰에의 어깨를 껴안고 데리고 나가려 했으나, 나쓰에는 요코의 이불에 매달려 마냥 울었다. 범인의 자식도 아닌데 그런 줄도 모르고 줄곧 미워만 했던 일을 생각하니 나쓰에는 요코도 자신도 가엾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도 사이시도 나쓰에도 무라이도 다카기도 그리고 나카가와 미쓰오도 미쓰이 게이코도 모두 요코를 죽음으로 몰아붙인 셈이 되었다.’
인가느이 존재 자체가 서로 뜻하지 않게 깊이 뒤얽혀 상처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두려움을 느꼈다.
나쓰에가 다쓰코의 부축을 받은 채 방에서 나가자 다카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조는 마음을 다잡아먹은 듯이 다카기에게 유서를 내밀었다. 그는 심판이라도 받는 듯한 심정이었다. 기타하라에게 남긴 유서도 요코의책상 속에서 꺼내 기타하라 앞에 내놓았다.
다카기와 기타하라는 각각 유서를 읽고 있었다. 도오루는 요코의 맥을 짚어 보았다. 게이조는 유심히 요코를 지켜보았다.
‘요코는 아무도 탓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탓하며 약을 먹었다.’
게이조는 그런 요코를 생각하며 고통을 느꼈다.
‘나만 처음부터 나쓰에를 용서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정말 가엾군.”
다카기는 유서를 다 읽고 나서 손에 든 채 중얼거렸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햇다.
요코는 여전히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언제까지 잘 셈인가?’
맥박이 약간 약해진 것 같았다.
“비타칸”
게이조의 목소리에 도오루와 기타하라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간호사가 주사침을 꽂아도 요코의 얼굴에는 반응이 없었다.
“몇 알 먹었나?”
다카기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백 알쯤 먹은 것 같아. 평소에도 가끔 먹은 모양이야. 잘은 모르지만.”
“거 참.”
다카기가 걱정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하루만 더 빨리 왔더라도 요코 씨는 자살하지 않아도 되었는데.....유감천만이에요.”
기타하라의 목소리도 무거웠다.
“요코는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든 언젠가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다카기는 방금 읽은 유서를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럴까요?”
기타하라는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을 했다.
“아마 그럴 걸세. 죄를 이렇게 엄격하게 의식하는 인간은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던 결국 같은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아주머니가 그런 심한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기타하라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언젠가는 같은 죄의식을 느끼게 될 거야, 요코는.”
다카기는 이렇게 말하고 게이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럴지도 몰라. 나는 저지른 죄를 문제삼고 있지만, 요코는 죄의 근본에 대해 고민했어. 간통에 의해 태어났다는 것을 알아도 괴로워햇을 것이고 아무 문제없이 자랐어도 마찬가지로 괴로워햇을지도 몰라.’
게이조는 자신이 거기까지 괴로워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녁때가 되어도 요코는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차음 모두들 말수가 줄어들었다. 식탁 앞에 앉아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혼수 상태에 빠진 채 요코가 누워 있은 지도 사흘째에 접어들었다. 산소 호흡을 하는 소리만 들렷다. 이틀 밤을 한잠도 자지 못하고 요코를 간호하면서 울기만 하던 나쓰에도 지금은 다만 멍청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기타하라와 다카기도 오늘 아침까지 자지 않고 지켜보았으나 날이 새자 별실에서 잠들어버렸다. 도오루는 때때로 꾸벅꾸벅 졸면서도 요코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다쓰코는 눈 아래 검은 그림자가 생겨 잇엇다. 이미 저마다 지칠 대로 지쳐 있엇다.
게이조는 요코가 의식을 되찾기만을 바라면서 줄곧 지켜보고 있엇다. 그러나 요코는 계속 잠만 자고 있엇다. 게이조와 다카기가 의사이지만 지금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았다.
“틀렸는지도 몰라.”
하고 중얼거리는 게이조의 말에 도오루가 얼굴을 들었다.
“틀렸다고요?”
도오루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음,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나 주었으면 좋겠는데.”
게이조의 말에 도오루는 호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눈물이 요코의 팔을 흥건히 적셨다. 도오루는 살며시 요코의 손을 잡았다.
‘요코가 누구를 제일 그리워하고 있는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어요.’
유서에 적혀 있던 말을 상기하면서 도오루는 오팔 반지를 요코의 창백한 손에 끼워 주었다.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밤이 되었다. 여전히 요코의 목숨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사흘 밤째가 되니 나쓰에와 도오루도 몹시 졸렸다. 꾸벅꾸벅 졸다가도 무엇에 덜미를 잡혀 끌리듯이 흠칫 놀라며 깨어나곤 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요코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요코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현실감을 수반하지 않아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이 기타하라와 다카기는 약간 생기를 되찾았다. 게이조는 비실비실하면서도 요코의 베갯머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할 도리는 다했다. 더 무엇을 해야 할지 기진맥진해 있었다.
“오늘밤일까요?”
게이조가 중얼거렸다. 차를 날라 온 다쓰코는 요코의 얼굴을 살짝 만져 보았다.
“잘 만큼 잤으면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전혀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다쓰코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간호사가 네 시간 마다 폐렴 예방을 위해 페니실린 주사를 놓았다. 그 순간 게이조는 깜짝 놀랐다. 주사침을 꽂자 요코의 얼굴이 괴로운 듯이 일그러졌기 때문이었다.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몰라!’
게이조는 요코의 맥을 짚어 보았다. 가녀렸으나 정확한 맥박이었다. 다카기도 얼른 손을 뻗어 맥을 짚어 보았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게이조와 다카기는 얼굴을 마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조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요코의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유리창이 덜거덕거렸다. 숲에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또 눈보라가 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