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시원한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경기도 여주시에 도착하게 된다. 천진암과 함께 초기 천주교
수용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주어사(走魚寺)가 있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태어나고 순교한 이 땅이야말
로 ‘순교자의 땅’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장소이다.
용인대리구 여주본당(주임 조한영 신부) 옆에는 성모동산과 함께 순교자현양비가 서있다. 현양비에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 교회에 밀사로 파견됐다가 1795년 을묘박해 때 한양 포도청에서 매를 맞고
순교한 윤유일을 비롯해 1801년 신유박해 때 여주 관아에서 남쪽으로 1리 떨어진 대로변에서 참수형
으로 순교한 이중배, 원경도, 최창주 등 여주 출생의 순교자 총 17위의 이름이 적혀있다.
본당 옆 중앙로 상가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순교자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순교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세워진 순교 치명 기념비를 만날 수 있다. 화강석과 오석으로 제작된 비석에는 20위의 명단과 순교자
찬가가 새겨져 있다.
시복이 결정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중 여주성지와 관련된 순교자는 이중배
(마르티노), 최창주(마르첼리노), 원경도(요한), 정순매(바르바라), 정광수(바르나바), 이현(안토니오),
최(바르바라)다.
이중배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사촌인 원경도와 함께 김건순과 어울리며 살았다.
김건순이 주문모 신부를 만난 뒤 천주교에 입교하자 이중배도 그를 따라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부친과
아내에게 교리를 전하고 교회의 지시에 따라 신주를 없애고 제사를 지내지 않던 이중배는 1800년 부활
대축일에 원경도와 함께 동료 정종호의 집에 가서 음식을 나누고 성가를 부르다 체포됐다. 이중배와 동
료들은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형벌을 당했지만 신앙을 굳건히 지켰고 1801년 4월 25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이중배와 함께 순교한 최창주는 천주교 전파 초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돼
남한상성으로 붙잡혀 갔다가 배교하고 풀려났다. 배교한 죄를 깊게 뉘우치던 최창주는 사위 원경도가 체
포되었다는 소식들 듣고 서울로 피신해 가다 그날로 되돌아왔으며 체포돼 여주 감옥에 갇히게 됐다.
최창주는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하면서 신앙을 증거했고 사위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
했다.
원경도는 최창주의 둘째 사위이며 이중배와 사촌이다. 6개월 이상 감옥에 갇히고 혹독한 심문을 받았지만
동료들과 서로 격려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켰고 순교했다.
정광수는 경기도 여주 부곡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1791년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아내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 서적을 필사해 신자들에게 배포하고 상본이나 묵주 같은 성물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팔고, 함께 교리공부를 하던 정광수는 박해가 심해지자 피신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체포되고 수사
망이 좁혀들자 스스로 포도청을 찾아갔고 혹독한 심문을 받았으나 굳건히 신앙을 증거했다. 1802년 1월
29일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여주로 이송돼 다음 날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정순매는 오빠 정광수와 올케 윤운혜(루치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고, 1800년 10월에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그는 과부로 행세하며 오빠 부부를 도와 교회 서적과 성물을 신자
들에게 보급하는 일을 맡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그 해 7월 4일 고향 여주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
교했다.
이현은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하느님의 종 홍익만(안토니오)의 사위이며, 홍필주(필립보)의 동서다.
1797년 가을부터 김건순에게 교리를 배웠으며 1801년 신유박해 중에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잠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겠다고 대답했지만 형조로 이송된 이후로는 이전의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신앙을 굳게 지켜 배교를 거부했고, 1801년 7월 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최(바르바라)는 최창주의 딸이며, 하느님의 종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했다. 결혼 후 얼마지 않아
남편을 잃고, 시아버지 곁에 머물면서 그를 부양하던 중 1827년 정해박해 때 시아버지와 같이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그 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를 자주 찾아갔고, 그곳에 있는 천주교인들을 위로하기
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전라도 광주에 있는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 은신했다가 기거하고 있던
신자들과 함께 붙잡힌 그는 1840년 1월 4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순교했다.
여주본당은 2004년 「순조실록」과 「한국천주교회사」, 「조선 순교 사료 참고집」 등을 근거로 1800년대
서울과 여주 등지에서 순교한 여주 지역 순교자 11명에 대한 사료들을 종합, 정리한 「여주와 순교자」를
펴내고, 현양비를 세우는 등 지역순교자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