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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사도행전 7:29~30
오늘 본문 말씀은 시내산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찾아오셔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내라는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몇 가지의 영적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인생 길이 나그네 길이라는 점입니다.
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모세는 나이 사십 세에 동족을 구원하려는 굳은 결심이 섰을 때 행동에 나섰던 바 있습니다. 그래서 공사현장에서 애굽 공사 감독에게 학대를 받는 이스라엘 형제를 보고 분노하여 그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모래 속에 파묻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또 다시 그 공사장에 갔다가 이스라엘 형제 둘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말리고 화해시키려 했다가 그 형제를 치는 자가 모세를 밀치면서 “언제 우리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과 관리로 세웠느냐?”라고 따지면서 전날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죽인 것을 들춰냈습니다. 일이 탄로되고 바로 왕에게 잡힐 위험을 느낀 모세는 그 직후에 도망을 쳐서 멀리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까지 도착하여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첩 그두라의 자식들 중 하나인 미디안 족속 중 한 사람인 이드로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이드로는 미디안 제사장이었으니 아마도 그는 그의 조상 아브라함이 섬기던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선민의 족보는 아니었으나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이드로 역시 섬기던 중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 이드로의 딸 중 장녀인 십보라를 아내로 맞아 두 아들을 낳고 기르면서 장인의 양을 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여기서 보면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았다고 하였는데, ‘나그네’라는 말은 애굽에서 나와 정처 없이 떠도는 그의 방랑 생활을 지칭하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그네’라는 이 단어는 스데반의 설교에 보면 일찍이 사도행전 7장 6절에서도 한번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사백년 동안 살았지만 그곳에서 항상 나그네로 지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나그네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제 모세도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로서 지나게 되었노라고 스데반 집사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모세가 자신이 나그네라는 자의식을 갖고 살았는가 하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는데, 모세는 본인 자신도 자기를 나그네로서 인식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낳은 첫째 아들 게르솜의 이름의 뜻이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모세는 과거 애굽 왕자로서 궁중의 화려한 생활의 주인공이 되어 살았습니다. 온갖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누린 바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은 마음껏 가져보았고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총애를 받았고 창창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알아주는 이 없는 미디안 광야에서 그는 이제 백성의 왕자로서 환호 소리 대신에 양들과 염소떼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리 저리 불어대는 바람만이 유일한 친구인 고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국사를 논하고 전쟁터를 달리며 전쟁의 승리를 경축하며 화려한 연회 가운데 술과 노래에 취하던 옛 생활은 저 멀리 꿈결처럼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여우에게 끌려가는 양을 쫓아가 건져내고 길 잃고 처량하게 울고 있는 염소를 찾아 관목과 바윗돌 우거진 돌 산을 헤매고 집에 가면 칭얼대는 아이들을 안고 달래주는 평범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부풀었던 꿈도 가라앉고 자기 형제와 육신의 부모도 찾아갈 수 없이 한 해 두 해 세월만 흘러갔스비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머리는 희어지고 고왔던 손과 발은 투박하게 변했습니다. 모세의 건장했던 어깨와 튼튼했던 팔은 약해지고 어느덧 지극히 평범한 노인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모세는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요 세상의 중심이 바로 자기라고 굳게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젊은 시절의 자아가 하나씩 깨뜨려가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요 뭐든지 자기가 생각하면 다 된다고 하는 자신감이 하나씩 깨뜨려졌습니다. 그는 이제 광야의 학교에 입학한 학생으로서 서서히 자기는 무력한 인생이요 이 지상에서 자신은 한낱 나그네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갑니다.
그는 인생이 한 줄기의 바람이요 저녁 들판에 서서히 사라져가는 굴뚝의 저녁 연기에 불과함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세상 자랑도 잠시요 재물을 얻고 권세를 얻고 내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한여름밤의 꿈처럼 허망한 것임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성공의 정점에 있다가 순식간에 평범한 목자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삶의 체험을 통하여 모세는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부귀와 공명이 얼마나 뜬 구름 같은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인생은 잠시 잠깐의 나그네 길임을 깊이 절감했습니다.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가는 여관집 손님과 같은 것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금 자기가 꿈을 꾸는 것인지 현실인지 모르던 숱한 경험을 겪으면서 과거의 자신의 헛된 모습을 다 떠나보내고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조금씩 자기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게 되어갑니다. 그의 둘째 아들 이름이 ‘엘리에셀’입니다. 엘리에셀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삶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분명 나이 사십 세에 근본적인 결단이 있었습니다. 노예 생활하는 동족 이스라엘을 애굽의 쇠사슬로부터 건져내겠다는 거창한 꿈이 있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확실한 소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일을 도모할 때 오직 자기의 권세와 지혜,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술수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무력한 패배자로서 지내면서 생각해보니, 자기가 얼마나 교만했고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그의 인도하심을 구했어야 하는데, 너무 서둘렀고 교만했고 무모했음을 깊이 자각한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광야 한쪽 떨기나무 그늘 아래에 자주 앉아 쉬면서 과거 그의 혈통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종종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조용히 묵상해보곤 했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그 광야의 신학교에 40세에 들어와서 한 해 한 해 시간이 흘러 그의 나이 50세, 60세, 70세, 80세에 이르면서 그의 마음속에 물들었던 세상 물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그 대신 하나님의 사람으로 조금씩 무르익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와 같이 앞서 갔던 믿음의 조상들이 걸었던 같은 길을 우리도 걸어갑니다. 젊은 시절 우리도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열정과 우리의 애정과 우리의 청춘을 다 쏟습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나 스스로인 것으로 철썩같이 믿고 그렇게 우리의 열정을 쏟아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어느 순간에 패배자로 만들어버립니다. 인생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보다 큰 분, 하늘에 계신 절대자가 있음을 체험하게 만듭니다. 하늘을 날던 우리들을 추락하게 만들고 땅바닥을 기게 만듭니다. 진흙탕 물 속에 쳐박히고 땅속까지 깊이 처박히고 깊은 좌절감을 맛보게 합니다. 우리 자신이 실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라는 것을 절감하게 만듭니다. 뼈속까지 자신이 죄인임을 자인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인생과 미래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만듭니다. 설령 우리가 원하는 바를 다 얻었다 해도 우리가 바라는 성공을 쟁취했다 해도 사실 그 성공이라는 것이 무익한 일이요 헛된 희망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만듭니다. 우리가 얻은 것은 잠깐의 만족과 행복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영원한 행복도 아니요 스스로 속는 것이요 오히려 세상 것을 얻음으로 더 큰 공허와 더 깊은 절망을 얻는 것임도 깨닫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들에게 인생의 광야 신학교에 우리를 부르시어서 서서히 세상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영원한 것을 찾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진정한 성공은 세상 것들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루 하루 신실하게 쌓아가는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의 정을 다 쏟을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성을 쌓고 우리의 기념비를 세울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과 소망을 다 쏟을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비록 외롭지만 혼자는 아닙니다. 우리는 나그네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 나그네 길을 동행해주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나그네로서 살았습니다. 야곱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애굽 왕 바로가 묻기를
“네 나이가 얼마냐”
고 하였을 때 야곱이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147년의 지상의 나그네 길을 마치고 그의 사모하는 하나님 나라 하늘 본향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윗도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고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아 40년을 보낸 바 있었지만 그의 임종을 앞두고 백성들 앞에서 고백하기를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역대상 29:15)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입니다. 하룻밤 머물다 가는 여관과 같은 곳이 이 지상의 삶입니다. 세상 모든 권력과 영광과 부와 쾌락을 다 가져보았던 모세와 다윗이 고백한 바 이 깨달음을 우리도 깊이 마음에 새깁시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이요 나그네입니다만 그러나 홀로 가는 여행 아니요 하나님이 함께하는 여행이요 또한 가야 할 곳이 없는 방황의 길이 아니요 가야 할 최종 본향이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저 천국 우리 주님 계신 하늘의 본향에 이를 때까지 잠시 머물다 가는 지상 나그네들로서, 육신의 것들, 세상의 것들, 반짝거리지만 우리의 눈과 마음을 잠시 빼앗아 영원한 것, 영원한 본햐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날마다 하룻길, 믿음의 순례 길을 소망과 찬송 중에 걸어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찾아오시는 때를 묵묵히 기다려야 합니다.
3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십년이 차가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사십년이 차가매”라는 말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지났을 기한이 다 찼다는 것입니다. 이 헬라어 원문은 수동형 분사로 되어 있는데, 이 헬라어 수동형 분사 형태는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의 광야 기간을ㄹ 정해놓으신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화려한 사람들의 아첨과 권모술수가 가득찬 애굽 궁정에서 빠져나와서 이름 모르는 광야에서 나그네로서 초야에 묻혀 바람과 별과 태양과 모래 사이에서 하나님을 배우게 하는 광야 신학교에 사십년 기간을 배정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훈련시키고자 그에게 광야 학교의 연단의 세월을 사십년으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그 기한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훈련을 잘 마쳤노라고 졸업장을 주심과 더불어 임지로 떠나보내는 파송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에게는 사십 년의 이러한 긴긴 침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 사십 세에서 시작된 광야 훈련이 무려 팔십 세가 되어서 끝이 난 것입니다. 그의 사명이 크고 영광스럽고 그의 사역이 무거웠기 때문에 그만큼 그의 훈련 과정도 길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처럼 묵묵히 지내면서 광야 기슭 어느 한쪽에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가스 떨기나무처럼 그렇게 초라하고 볼품없이 눈에 뜨지 않는 존재로 하나님 안에서 속으로, 영으로 알알이 영글어가기 위해서 그만큼의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모세는 나이 사십 세에 소명을 받았을 때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단했습니다.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동족을 구원하려고 나섰으나 실패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적어도 말씀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인도해주시며 힘을 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그를 조용히 지켜만 보셨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집에서 한낱 데릴사위처럼 조용히 자기 소유도 없이 그냥 조용히 양이나 치는 광야의 목자로서 한 아내의 평범한 지아비로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조용히 들풀처럼 살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사십 년을 그렇게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런 예가 많이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외갓집 밧단아람에서 교활하고 인색한 외삼촌 라반 밑에서 20년 동안 훈련받았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 17살에 노예가 되어 끌려간 애굽에서 13년을 밑바닥에서 훈련받았습니다. 다윗은 어린 홍안 소년 때부터 거의 15년 동안을 목숨을 건지려고 두렵고 외로운 도망자의 삶을 살다가 나이 삼십 세에서야 유다의 왕이 되었고 22년이 되어서야 이스라엘 전체 지파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바울도 아라바 사막에서 삼년, 자기 고향 다소에 물러가서 십 여 년을 은둔자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창 사역하던 황금 같은 시절에도 종종 감옥에 갇혀서 푹푹 썩어야 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감옥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고 로마 감옥에서도 다시 이년 동안이나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신 것과 같은 그러한 긴 침묵의 시간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생 초반이나 중반이나 노년까지도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침묵의 시간에는 그에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그냥 세월만 보내는 듯한 무료한 시간처럼 보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가 가진 것들이 하나 둘씩 낡아져가고 빛이 희미해져 갑니다. 우리의 힘도 약해지고, 우리이 지인들은 곁을 하나 둘씩 떠나갑니다. 우리의 기억력도, 총기도 떨어지고,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도 옅어지고 하나님은 저쪽 멀리에 조용히 지켜보시는 듯 말씀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일에 대하여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말씀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침묵의 기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러한 기간을 맞이하게 될진대, 이상히 여기지 맙시다. 서두르지 맙시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침묵의 기간 동안에 묵묵히 순종하며 기다리는 자가 됩시다. 이사야 30:15,18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25,26 말씀에도 이르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모세, 다윗, 엘리야, 바울과 같이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광야 학교의 입학 통지서가 배달될 때가 있습니다. 입학 일자는 있는데, 졸업 일자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퇴소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묵묵히 광야의 신학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길에서 배워야 하는 영적 수업을 베푸실 때에 한 학기, 두 학기, 세 학기, 네 학기 충실하게 공부하다보면, 어느 때가 되면 월반을 시켜줍니다. 다른 과목을 또 배우도록 승급을 시켜줍니다. 태권도 배우는 우리 아이들처럼 도장에서 계속 연마하다 보면, 진급 시험을 하나씩 통과하다 보면, 흰 띠에서 파란 띠로, 파란 띠에서 검은 띠로 하나씩 진급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 보면, 어느 때가 되면 광야 학교에서의 훈련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졸업장을 주시며 일하도록 부르시는 사명장을 주시는 그 날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두르지 마십시오. 길고 긴 영적 침묵의 오랜 시간을 경험할 때에 아무리 외롭고 괴롭고 두렵고 힘들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맞서지 마십시오. 누가 강한 자와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전도서 6:10)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는 묵묵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전도자가 한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펴겠느냐”(전도서 7:13)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때까지 조용히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을 쳐서 부서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하고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자기에게 할당된 인격 수업과 신앙 수업을 한 공과 한 공과 잘 받아야 합니다.
주님을 꼭 붙들고 그 침묵과 어둠의 시간에 한걸음씩 하나님과 더불어 믿음으로 발을 내딛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이사야 50:10,11 말씀에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 안에 빛이 보이지 않고 우리 앞에는 캄캄한 흑암이 가득하고 아무 것도 보장된 미래가 없고 현실에는 아무런 기약이 없는 시련이 계속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합니다. 그의 약속 말씀을 굳게 붙들고 우리 앞의 깊은 어둠 속으로 한걸음씩 한걸음씩 내디십시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의 인간의 꾀와 술수와 헛된 희망의 환한 불꽃을 피우고 그 어둠을 밝히고 하나님 없이 달려가는 자보다 낫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며 어둠과 맞서서 믿음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자는 끝내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참된 평안과 축복과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 어둠을 밝히려고 횃불을 피운 자는 결국 그 불은 꺼지게 되고 자기가 피운 횃불 가운데 어둠 속에 길을 잃고 그의 삶이 소멸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두르지 마십시오. 길고 긴 침묵의 시간에 조용하고 차분하십시오.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그의 때가 되면 그가 일어나실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모세의 사십년이 찼을 때 하나님이 그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마침내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에게 정한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셋째로,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나무가 타지 아니한 바의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눈을 들어 보니 주의 사자 곧 우리 주님께서 모세를 만나시려고 떨기나무에 불꽃 중에 임하셨을 때에 마치 떨기나무가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아니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라고 떨기나무에 가게 됩니다.
이렇게 광야의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아니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찾아오시면 우리 인생이 망할 것 같지만 망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애굽에 있을 때 그의 나이 40세에 사명을 자각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동족 구원을 위하여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실패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서 양을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 인생이 망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는 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난 자가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자요 하나님이 함께한 자요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가 된 것뿐 아니라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지상의 역사 속에 그 이름이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이철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세상적으로 인생이 망친 것 같을 수 있습니다. 잘 나가던 세상 이력이 끝이 나고 무명의 침묵의 시간이 그를 끌어갑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하찮게 보이는 나락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요 하나님께서 알아주는 삶이요 영원한 영광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 불이 붙었지만 불타지 않는 그의 삶이 영원하신 자, 진정한 영광의 하나님이 함께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시 떨기나무에 임재하셨으나 그 나무가 타지 아니하고 그대로였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오실 때 우리의 개인적인 인격의 특징, 기질, 삶의 생각, 기억 등을 여전히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게 하셨고 모세를 딴 사람으로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격 그대로 두신 것입니다. 모세를 천사처럼 만들거나 모세를 기계적 존재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함께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함께하시며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불꽃으로 우리에게 오실 때에 우리는 더욱 또렷하게 우리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진실하고 참된 내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내가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쓰임받는 주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 완전히 사람이 딴 사람처럼 변하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입신하고, 황홀하고 천국 지옥 매번 왔다갔다 하고, 어떤 영과 접촉하고, 천사의 소리를 매번 듣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예외적으로 그러한 현상을 경험하는 경우를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산당에서 내려오는 예언자들의 무리와 만나 영에 사로잡혀 마치 이성 잃은 것처럼 잠시 예언하는 황홀경에 빠진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사울이 사무엘의 고향 라마나욧에 갔다가 영에 사로잡혀서 벌거벗고 사흘 동안 누워서 예언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는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영적으로 미숙한 경우입니다. 영적으로 깊어지고 성숙한 경우는 마치 모세가 성막에서 하나님과 친구처럼 인격과 인격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으로, 영으로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가까이 접하는 것이요 우리 인격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있어 그의 말씀을 들으며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르익어가는 것입니다. 그를 두려움으로 사랑하며 떨면서 즐거움으로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차분히 맺어가는 것입니다. 가시떨기나무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감동할 때 이러한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이 붙었으나 우리는 불타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가 황홀경에 빠져 인사불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서서히 무르익어감으로써 그를 전인격적으로 사랑하며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우리도 앞서간 믿음의 조상들처럼 이 지상의 순례 길을 지날 때 하나님과 함께 가는 나그네로서 살아갑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배정된 광야의 학교에 부르실 때에는 묵묵히 그 훈련들을 받읍시다. 그 광야 신학교에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 인격이 무르익어가는 복된 학생이 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꽃으로 우리에게 임하실 때가 올 것인데, 그 때 그 불꽃 가운데 우리가 더욱 우리 되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모세처럼, 다윗처럼, 바울처럼 더욱 온전해져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우리 구주 예수님을 섬기며 주의 백성들을 섬기는 자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