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컨디션이 제로입니다. 허리가 어찌나 아픈지 일어나 20분 쯤 멍때리고 앉아있었는데 이번엔 고개가 돌아가지 않아 스트레칭을 해봅니다. 생물학적 죽음의 징조 중 하나는 몸이 굳어지는 것만은 분명해졌어요. 온도가 확 떨어졌다는 것을 체감했고 벌떡 일어나 마가복음을 읽었어요. 변화산 본문입니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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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가톨릭 사제의 강의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내 나이 정도 된 것 같아요. 나도 저렇게 살고 싶을 만큼 자유로워 보이더이다. 다만 천국을 죽어서 가는 나라로, 은하계 어느 곳이라고 장소적 천국을 너무나 당당히 설파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얼굴에 광채가 나더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해서 동생 생각이 났고 야코가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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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자신이 천국이고 이미 직접 몰고 오셨는데 내가 죽어서 가야한다니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 아닙니까? 산 위에서 변화된 예수님은 앞으로 권능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여줍니다. 이미 그 나라는 예수와 함께 임했지만,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그 나라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를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변화산의 영광이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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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산악인은 아니지만 한5년 정도 산을 탔는데 지금도 왜 내려올 산을 올라가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평생에 한 번 히말라야에 가보는 것이 숙원사업이라고 합디다. 모르긴 해도 산악인들은 7000m이상 되는 14개의 산들을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꼭 한번 가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산악영화"버티칼 리미트”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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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태가 난다고 해도 올라가는 산악인들을 보면서 산악인의 스피릿인지, 객기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있어서 왔든, 사투를 벌이 면서 정상에 올랐든 그들이 정상에 설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미만입니다. 산소가 희박해지고 기압이 높아서 그 이상은 버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지 않으려면 거지같은 와신상담은 버려버리고 내려와야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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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산 본문에서, 내려와야 하는 산에 오른 예수님과 제자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 제자(베드로, 요한, 야고보)들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없는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의 순간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을 정도로 신앙의 절정인 듯 보이는 순간을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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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의미는 예수님에게는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격려이고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돕기 위한 배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 역시 예수님이 새 출애굽을 통해 모세의 첫 언약을 성취하시고 새로운 모세로서 새 언약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심을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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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1).”고 하셨으니 십자가 이후 기다리고 있을 부활의 영광을 미리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판타스틱인지 유토피아인지 베드로는 그 영광의 의미는 모른 채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자는 제안을 합니다. 집 없이 산 지 3년 정도 되었습니다. 누가 40평 아파트 한 채 툭 던져 준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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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과잉 충성은 늘 핀트가 맞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지난번에는 주님을 꾸짖질 않나, 이번엔 십자가 없는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제안에 하늘이 대답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변화산은 내려가야 할 산입니다. 갈보리 산으로 갈아타서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지 않으면 그 영광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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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몸소 하나님 나라이십니다. 산 위에서 변화된 예수님은 그분의 존재만 아니라 권능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십자가를 앞둔 아들 예수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였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나와 같은 선지자”의 출현을 예고한 사람이며, 엘리야는 언약의 사자 예수가 오기 전에 먼저오리라던 그 예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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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길에 예수님을 감싸던 영광은 사라졌지만 제자들에게는 진한 여운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면 그 전에 와야 한다던 엘리야는 언제 오느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이미 엘리야가 왔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본 것이라고 하십니다. 메슬로라는 분이 쓴 '자기 초월'에 대한 아티클을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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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초월'이란 자신의 진심에 집중하며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는 삶을 넘어서서 이타심, 영적 각성, 서로 하나 됨 같은 '나를 초월'하는 가치에 집중할 때 다다를 수 있는 경지, 즉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를 찾은 후에 오는 심지어 나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야말로 진정한 초월에 이르는 말입니다(지나영. 마음이 흐르는 대로. 다산북스.296-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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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슬로는 인간이 지닌 최상의 욕구가 자신이 지닌 최고의 가능성에 다다르는 '자기 실현'이라고 했지만, 말년에 그 생각을 전환합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사람이 마침내 위버맨쉬가 된 상태에 도달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허전했다는 겁니다. 자기 실현이 행복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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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실현'은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은 될 수 있지만 행복의 종착역은 아니라고 해요. 진짜 행복은 '자기실현'에서 '자기 초월'로 이동할 때 찾아온답니다. 그런데 나를 초월하려면 타자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환대는 타자에게 나의 공간, 시간, 물질을 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은 자기 실현이 아닌 자기초월(타인)입니다.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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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자기초월'로 이동하는 십자가를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기실현을 고집했지요. 사탄은 신자를 어떻게 유혹할까? 자기 실현에 안주하게 만들고 자기실현을 온전한 행복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십자가 뒤의 영광을 아는가? 예수님의 존재와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모습인가? 니체의 위버맨쉬를 자기초월의 십자가로 봐도 될까?
Who do you call me?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024.3.4.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