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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 서북주릉과 그 너머 가리봉
솔숲을 몇 리나 걸어왔을까 幾里行松樹
덩굴 사이 비로소 제천 나타나 諸天指薜蘿
두세 산봉우리 하얀빛 눈이 부시니 數峯來雪色
그 얼마나 높은 흥취 일어나는지 奇興欲如何
――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 「한계산을 향하며(向寒溪)」에서
주) 예전에는 대청봉을 포함한 양양군과 속초 쪽의 산, 즉 외설악을 설악산이라 불렀고, 인제
군 쪽의 산, 즉 내설악은 한계산이라 불렀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내ㆍ외설악을 합쳐서
설악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신정일, 『새로 쓰는 택리지』)
▶ 산행일시 : 2020년 2월 2일(일), 맑음, 일기예보는 대기 나쁨
▶ 산행인원 : 2명(악수, 두루)
▶ 산행코스 : 오색→대청봉,중청봉,소청봉,소청대피소,봉정암,영시암→백담사
▶ 산행시간 : 7시간 43분
▶ 산행거리 : 이정표 거리 17.9㎞
▶ 갈 때 : 동서울터미널에서 한계령과 오색을 경유하여 속초 가는 첫차 탐
▶ 올 때 : 백담사에서 셔틀버스 타고 용대리에 와서, 백담 마을로 걸어 나와 속초 출발
원통 경유 수원 가는 버스 타고 원통에 와서, 저녁 먹고 동서울 가는 버스 탐
▶ 구간별 시간
06 : 30 - 동서울터미널 출발
08 : 57 - 오색, 산행시작
09 : 57 - 끝청 남릉 갈림길(850m)
10 : 26 - 설악폭포 위 철교 건넘(오색 2.5km, 대청봉 2.5km)
12 : 05 - 대청봉(大靑峰, △1,708.1m)
12 : 16 ~ 12 : 40 - 중청대피소, 점심
12 : 58 - 소청봉(1,581.0m)
13 : 08 - 소청대피소
13 : 35 - 봉정암(鳳頂庵), 석가사리탑
14 : 18 - 쌍룡폭포
15 : 20 - 수렴동대피소
15 : 38 - 영시암(永矢庵)
16 : 40 - 백담사 주차장, 산행종료
16 : 56 - 용대리, 백담 마을
18 : 00 ~ 19 : 00 - 원통, 저녁
20 : 54 - 동서울터미널, 해산
1. 구곡담계곡 내리면서 바라본 용아장성릉(부분)
▶ 대청봉(大靑峰, △1,708m)
요즘 눈 보기가 어렵고 눈 보러 가기도 쉽지 않다. 이번 주는 눈 좀 보자하고 설악산을 가기
로 했다. 한계령에서 서북능선 올라 대청봉을 들렀다가 공룡능선을 타고 마등령에서 설악동
으로 갈 계획이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한계령 가는 첫 버스를 타고서 말이다. 많은 산꾼들
이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목요일(1월 30일)에 버스표를 예매하려고 했더니 이미 매진이다.
그 다음 버스는 1시간 후인 07시 30분에 있다. 일단 이 표라도 예매하고, 매진된 첫 버스에
혹시 취소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예의 주시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취소가 6장이나 나왔
다. 얼른 2장을 집었다. 버스표는 해결이 되었고, 설악산 적설상황이 궁금하여 설악산국립공
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주릉의 모든 등산로가 폭설
로 통제되었다.
전전긍긍하던 중 2월 1일 04시부로 오색, 대청봉, 소청, 봉정암, 백담사 구간이 뚫렸다. 거기
라도 갈 수밖에. 하루가 지나자 소청, 무너미고개, 천불동계곡이 추가로 뚫렸다. 어쩌면 무너
미고개에서 몰래 공룡능선을 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소청까지 가서 상황을 살
피자 하고 한계령을 경유하여 속초 가는 첫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는 인제까지 논스톱으로 달린다. 인제터미널에 들러 군인들 서너 명 내려주고 원통에 들
러 15분을 휴식한 다음 08시 20분에 출발한다. 원통에서도 군인 서너 명만 내렸다. 문득 어
제 한계령에서 장수대 간다고 한 캐이 님이 궁금했다. 전화를 걸었다. 잘 다녀왔는지. 통제하
여 가지 못하고 화암사에서 신선봉을 갔다 왔다고 한다. 캐이 님이 그럴진대 한계령에서 서
북주릉을 가지 못한다고 조금도 서운해 할 필요가 없다.
버스 기사님은 장수대를 지나면서 내리실 분 있느냐고 몇 번이고 묻는데 아무도 없다. 비로
소 여태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설국에 입국한 것이다. 좌우로 흰 눈을 가운인양 두르고 도
열한 침봉들을 사열하며 들어간다. 이렇듯 차창 밖 설경 구경하는 것 또한 한 등산이다. 한계
령에서도 버스 기사님은 내리실 분이 있는지 묻는다. 아무도 없다. 전에 없는 일이다.
모두 한계령이 통제구간이라는 것을 알았나 보다. 그래도 혹시 나는 국공직원이 출근하기 전
이라서 그 틈을 이용하여 용감하게(?) 월담하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다면 나
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과 함께 행동할까, 퍽 고민했다. 서북주릉에서의 전후좌우 망망한
조망이 아른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오색 가는 길. 흘림골도 막았다. 차창 밖 등선대이며 칠형제봉이며 그 너머로 점봉산이며, 설
산으로 가경이다. 버스 승객은 오색에서 다 내린다. 안내산악회 단체 등산객 같다. 공단직원
이 나와 산중에는 눈이 80cm가량 내렸으니 부디 겨울산행 준비를 잘 하고 다녀오시라 응원
한다. 씩씩하게 오색(남설악탐방지원센터) 카운터 기를 지나 입장한다.
이 길을 실로 오랜만에 간다. 오색에서 대청봉까지 이정표 거리 5.0km. 줄곧 오르막이다. 시
간이 얼마나 걸릴까? 예전에는 여기 걸리는 시간으로 그 사람의 산행능력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산행안내에 따라 소요시간을 3시간 30분에서 4시간 30분까지 견적한다. 한때 나는
2시간 30분에 끊기도 했다. 1시간에 주파하는 사람을 보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우리가 걸린
시간을 미리 말하자면 3시간 8분이다. 많이 삭았다.
2. 오색 가는 차창 밖으로 바라본 칠형제봉
3. 오색에서 대청봉 가는 길에 뒤돌아본 점봉산
4. 점봉산
5. 멀리 맨 오른쪽은 오대산 호령봉, 맨 왼쪽은 동대산, 그 앞은 두로봉
6. 멀리 가운데는 오대산 연봉, 맨 오른쪽은 계방산
7. 중청봉
8. 끝청
9. 점봉산 그 뒤는 방태산, 점봉산 오른쪽 뒤는 망대암산
10. 멀리는 방태산 연봉, 맨 오른쪽은 깃대봉
11. 대청봉 가는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12. 앞은 끝청 남릉, 그 너머는 가리봉
독주골 갈림길 지나고부터 가파른 돌길 오르막이다. 그간 내가 오색 들머리를 너무 무심했구
나 자책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긴다. 바람 없고 푹하니 비지땀 쏟는다. 겉옷 벗는다. 숨이 차
면 가다말고 발아래 깊은 설원을 굽어보다 뒤돌아 수렴 들추고 묵묵한 점봉산을 들여다본다.
맨땅 돌길은 눈에 덮이고 발바닥이 간지럽다. 두루 님은 진작 아이젠 맸으나 나는 아직 버틴다.
끝청 남릉 갈림길. 눈길이 조용하다. 안도한다. 끝청 오르는 선답의 발자국이 났더라면 나 또
한 망설였으리라. 설사면을 돌고 돈다. 가파른 비탈인 설벽은 데크계단이 덮었다. 설악폭포
위 계곡을 철교로 건넌다. 오색에서 대청봉까지 정확히 중간지점이다. 등로 옆 눈밭 다진 공
터에 배낭 벗고 첫 휴식한다. 자연스레 냉장된 탁주로 마른 목 추긴다.
사면 돌계단 길은 슬로프 설벽으로 변했다. 붙잡을 잡목이 드물어 휘청하는 스틱 부축 받아
기어오른다. 등로를 벗어나면 무릎까지 차는 눈이라 그저 선답의 자취 따른다. 능선에 올라
서도 가파름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데크계단 연속하여 오르고 발돋움하여 건너편 세상
에도 눈 돌린다. 점봉산 뒤로 가물거리는 연릉은 방태산이고 그 왼쪽 멀리는 오대산 연봉이
고 이어 노인봉과 황병산이다.
장의자 놓인 제2쉼터(1,300m). 더는 못 참고 아이젠 맨다. 이리 자유로운 발걸음인 것을. 이
제 함부로 간다. 아마 경점일 것이라 등로 벗어나 눈길이 뚫린 데는 꼬박 들른다. 그리고 펼
쳐지는 가경에 거친 숨 돌릴 겨를 없이 신음한다. 오종종한 바위에 교대로 올라 바라보는 끝
청과 중청의 너른 품은 참으로 장관이고 대관이고 기관이다.
숲속 눈길도 심심하지 않다. 일목일초가 기화이초이거니와 고개 들면 파란하늘 배경한 분비
나무의 채 지지 않은 눈꽃이 눈부시다. 설원 가로질러 오르니 눈밭으로 변한 대청봉이다. 명
실상부한 설악 제1의 경점이다. 장쾌한 서북주릉 따르다 돌연히 솟은 귀때기청봉은 항상 당
당하고 저만치서 설악의 일원임을 다투어 주장하는 점봉산과 가리봉은 겨울이 그 빌미인 듯
하다.
흰 눈 인 향로봉, 칠절봉, 마산, 상봉, 신선봉, 황철봉, 마등봉, 나한봉, 1,275m봉, 신선대. 소
청, 중청. 눈이 시리다. 몇 번이고 사방팔방 둘러본다. 대청봉 내려 중청 가는 길 또한 걸음걸
음이 경점이다. 너덜은 그 사이를 눈이 메꾸어 걷기에 좋다. 북사면의 설원에 핀 눈꽃 감상하
다 발아래 기경인 울산바위와 화채봉, 만물상 들여다본다.
중청대피소. 한산하다. 함께 오르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느새 다 흩어졌다. 양광 가득한 노천
탁자에 앉아 점심밥 먹는다. 대기가 차디차다. 이때는 겉옷 껴입는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
중한 설악 대청봉이 반주의 가효다. 스위스 융프라우 가는 길에 클라이네 샤이데크 근처 테
라스에서 아이거 북벽을 바라보는 그런 풍경과 데자뷰로 비슷하다.
중청봉 오른쪽 사면을 슬로프로 변한 계단을 돌아 오르며 뒤돌아보는 대청봉은 또 다른 준엄
한 모습이다. 주릉에 올라 황량한 눈길을 한참 내리면 소청봉 정상인 헬기장이다. 희운각, 공
룡능선, 혹은 천불동계곡은 진작 내려놓았다. 아까 캐이 님과 통화할 때, 캐이 님이 일단의
등산객(14명)들이 무박으로 공룡능선을 간다니 나더러 그들의 러셀자국을 쫓으면 무난하지
않겠느냐고 하여 잠시 마음이 동하였으나 이내 고쳐 잡았다.
13. 점봉산, 멀리는 방태산 연봉
14. 대청봉 주변의 눈꽃
15. 대청봉 주변
16. 멀리 왼쪽부터 황병산, 노인봉, 동대산, 상왕봉, 비로봉, 호령봉
17. 귀때기청봉
18. 앞은 서북주릉 끝청
19. 화채봉
20. 대청봉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21. 멀리부터 향로봉, 칠절봉, 황철봉, 그 오른쪽 뒤는 신선봉
22. 신선대
23. 앞은 중청봉 북사면, 그 뒤는 점봉산
24. 귀때기청봉, 그 오른쪽 뒤는 안산
25. 용아장성릉
▶ 봉정암(鳳頂庵), 석가사리탑
만약 그들이 가지 않았다면-눈이 워낙 깊어 섣불리 덤빌 일이 아니다-나로서는 낭패가 아
닐 수 없고, 한편으로는 봉정암 석가사리탑에 들러 용아장성릉의 겨울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다만, 희운각 가는 가파른 계단 길을 잠깐 내려 범봉을 먼발치로나마 알현한다. 이
제 막 뚫린 눈길이라 절반은 내가 러셀하여 내린다.
소청대피소 가는 길은 숲속 슬로프다.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아이젠 제동하여 쭉쭉 내린다.
소청대피소도 경점이다. 특히 공룡능선의 역동성을 숨차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1급 슬로프
내린다. 잦은 코너링으로 어질어질하다. 봉정암. 적멸보궁 그대로 적막한 절간이다. 석가사
리탑(불뇌보탑) 올라가는 길은 눈을 치웠다. 도중의 오세암 가는 길은 아무도 오가지 않아
조용하다.
석가사리탑에서는 용아의 어금니격인 침봉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특히 직벽구간을 바라
보면 손바닥에 저절로 땀이 괸다. 뒤돌아 다시 절집으로 내리고 암벽 밑을 돌아가면 사자바
위다. 여러 지도에 표시된 사자바위인데 어느 바위를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사자바위 지나면
골로 가는 가파른 내리막이다. 오를 때는 ‘해탈고개’라고 한다. 여기를 오르려면 그랬다. 내리
는 데도 땀난다.
구곡담계곡에 내려서면 험로는 다 지났다. 한적한 산길 또는 잔도를 가고 계곡은 무지개다리
로 건너가고 건너온다. 때때로 수렴 걷어 용아장성릉의 현란한 암벽 암봉의 병풍을 감상한
다. 묵직한 배낭을 메고 느긋이 올라오는 젊은이들, 중형카메라를 들쳐 매고 잰걸음 하는 이
들을 만난다. 어디로 가시냐고 물으니 중청대피소에서 묵을 예정이란다. 중청 대청에서 보는
일몰 일출은 또 어떠할까, 금세 그들이 부럽다.
그러고 보니 눈길에 우리 둘뿐인 것은 중청대피소를 지나고서부터였다. 오색에서 단체등산
객으로 출발했는데 소청, 봉정암, 백담사를 가는 이는 우리 둘뿐이다. 아니면 우리 걸음이 너
무 빨랐거나. 한갓져서 좋기는 하다. 쌍룡폭, 용아폭, 용소폭, 관음폭, 만수폭은 겨울잠을 자
는 중이다. 마침내 용아장성릉은 옥녀봉을 넘자마자 수렴동대피소에서 맥을 놓는다.
길은 대로다. 산자락 돌다가 언덕바지 오르면 오세암(2.5km) 갈림길이고 한 차례 길게 내리
면 영시암(永矢庵)이다. 영시암은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이 기사환국으로
부친 김수항(金壽恒)이 사사(賜死)된 뒤 더더욱 세상에 진출할 뜻이 없어져 설악산으로 들
어가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지었는데, 불이 나자 더 깊숙한 이곳에서 머물렀다. 영시암이란
이름은 삼연이 이 절에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의 뜻을 담고 있
다 한다.
영시암의 현판과 삼연의 시를 새긴 주련은 삼연의 후손이자 당대의 명필인 여초 김응현(如
初 金膺顯, 1927~2007)의 글씨다. 다음은 영시암 정면의 주련이다.
雲守虛樓鹿守園 구름은 빈 누각을 지키고 사슴은 동산을 지키는데
檢看春井宛然存 자세히 보니 절구와 우물은 그대로네
牛於耕日勤生犢 날마다 부지런히 밭가는 소는 송아지 낳고
蜂在花時鬧出孫 벌은 꽃필 적에 요란히 분봉하네
可忖山奴治事密 산촌 머슴의 세밀한 일처리 헤아릴 만하고
亦知隣寺護緣敦 이웃 절간의 도타운 인연 또한 알겠네
西游得喪都休說 서쪽 유람의 득실을 모두 말하지 말게
且據殘冬受飽溫 그저 남은 겨울 배나 부르고 따뜻하게 지내려네
백담사 가는 길. 하늘 가린 낙엽송 숲에 이어 소나무 숲속 호젓한 산책로다. 아이젠은 풀었
다. 해거름 산그늘 지고 어둑하여 줄달음한다. 16시 40분. 오늘도 지척인 백담사 절집을 들
르지 못한다. 용대리 가는 셔틀버스가 승객을 태우며 어서 오시라 재촉한다. 이다음은 17시
막차다. 따지고 보면 아슬아슬했다. 괜히 해찰이나 부리다가 17시가 넘어 백담사 주차장에
도착했더라면 도리 없이 용대리까지 7km를 걸어갈 뻔했다.
26. 소청봉 가는 길의 동쪽 사면
27. 서북주릉 북사면
28. 대청봉
29. 중청봉 북사면
30. 봉정암 석가사리탑에서 바라본 용아장성릉
31. 봉정암 석가사리탑에서 바라본 공룡능선, 가운데가 1,275m봉
32. 봉정암 석가사리탑에서 바라본 공룡능선, 맨 왼쪽이 1,275m봉
33. 용아장성릉
34. 용아장성릉, 가운데가 직벽
35. 왼쪽이 중청, 오른쪽은 끝청
36. 구곡담계곡 내리면서 바라본 용아장성릉(부분)
37. 구곡담계곡 내리면서 바라본 용아장성릉(부분)
38. 구곡담계곡 내리면서 바라본 용아장성릉(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