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6일 연중 제20주간 (토) 말씀 묵상 (룻 2,1-3.8-11; 4,13-17) (이근상 신부)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나오미가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된 것이다.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룻기 4,15-17)
예수의 육화는 비루함이다. 인간의 비루함,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세상의 불공정과 부조리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불공정과 부조리를 박살내겠다는 비전의 제시가 아니었다. 우리 하느님의 응답은 육화. 말이 좋아 육화지,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불공정과 부조리의 톱날에 갈기갈기 찢기는 한 운명으로 하느님이 들어온 것. 구원해 달라 부르짖었더니, 힘센 그가 부르짖는 자의 처지로 내려와버린 동문서답. 그러니 하느님의 이 응답을 듣고, 보고, 먹고 소화하는건 삶의 여정이 필요하다.
예수의 피에는 남편이 없어 들판에서 낫알을 주워먹도록 허락한 인심 후한 자의 피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살아낸 이방여인의 피가 가득하다. 그는 비루한 피, 비루한 삶을 사는 것으로 비루함에 응답한다. 아무것도, 온 세상의 어떤 비루한 자도 하느님만큼 거룩하다는 선언을 이리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pfbid06UaEKEHhm9S1ZUZN13AZXJsQD1tj968BU11G2qxw9115xv4f4ShjUNt6h5GunDVNl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