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요, 고양이에요
김윤이
문득 저 자연 속에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본다. 동일성까지 가지 않더라도 생명력으로, 자연의 원초로부터 나 자신을 살아낸 무엇이 있나,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다. 자연의 생명 그 자체를 그려보고 싶은데… 자연을 바라본 내 시선이 여태 소위 패스트푸드식 사랑이었나? 왜 이렇게 감이 안 잡히는지 모르겠다. 생명. 자연. 평화. 어마맛. 내가 보고 있던 몇 권 문명에 관한 책들을 작은 새 채가듯이 재빠르게 밀치고 가는 놈이 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시야를 가린다. 시시껄렁한 녀석이다. 그냥 내가 저와 놀아주지 않고 만날 종이짝을 붙들고 있는 게 못마땅해 툭하면 와서 훼방 놓는다. 옳거니 싶다. 멀리서 찾을 게 무어람. 나는 이제 고양이에 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우리집 고양이 이름은 ‘냔냐’다. 이 녀석은 엄밀히 말해 길냥이다. 업둥이다. 연년생 언니에 의해 생명을 연장시킨, 그야말로 근근이 살아낸 녀석이다. 녀석을 살리기 위해 들인 노력을 수효화 할 수 있다면(이런 생각 자체가 나는 길냥이를 걷어 먹일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그 계량화된 수치를 안다면 아마 쉬이 건강상태가 위험지경인 동물을 반려동물로 받아들이진 못하리라. 지금은 녀석을 집으로 들인지 일 년 정도가 되어 천국/지옥행을 오가던 녀석도 죽을 상태에서 벗어났고, 왕성한 성장으로 윤기나는 털을 선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들인 언니의 수고는 가히 엄청나다. 태어날 때부터 버려진 녀석이니 분유를 먹이고, 항문을 열어 배변을 누여야했고, 조금씩 성장할 때마다 그리고 신장기능이 약한 녀석을 위해 여러 제품을 먹여 식성에 맞는 것을 골라주었고, 시시때때로 같이 놀아주었고, 지금도 녀석의 장난감과 놀이터에 고심이다. 무에 그리 과잉으로 신경을 쓰는가 싶지만, 정말 죽을 생명에 숨을 불어넣고 피둥피둥 건강히 살찌운 거다, 라 생각하면 된다. 걷지도, 울지도, 눈도 뜨지도 못할 지경이었기에 초호화(?)로 먹이고 키웠어도 아프기 일쑤고, 조금만 날이 차거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그루밍으로 먹은 제 털을 토해내는 헤어볼이 아니라) 짐짐한 침까지 몽땅 속의 것을 게워낸다.
사람이란 동물이 이리 간사할 수가 있나. 무방비 상태로 버려진 동물에 관한 글과 영화 등을 보아왔고, 당연히 동물권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나는 동물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머리와 몸은, 생각과 실천은 항상 동일하게 실행되지 않았다. 구체관절인형 같았다. 머리 따로, 손 따로, 발 따로. 그런 내가 기껏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그것도 온전히 내가 키우는 것도 아니고 언니를 통해 보면서도 길냥이 문제와 로드킬에 관한 관심이 지대해졌다.
고양이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내겐 황인숙과 이용한 시인이다. 두 시인은 고양이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고양이를 진심으로 알고 사랑하는 작가다. 고양이를 기르는 나의 시각에 그렇게 보인다는 거다. 내게는 『안녕, 후두둑씨』(실천문학사)라는 시집의 시인으로 더 친근(개인적 친분은 없다. 친분은커녕 뵌 적도 없다.)하지만, 대중들에게는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라는 고양이 서적이 더 잘 알려진 듯한 이용한 시인의 고양이 책과 함께 윤기형 감독, 이용한·윤기형 목소리 출연의 「고양이 춤Dancing Cat」이란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길고양이 다큐멘터리다. 길냥이들이 주택단지 사이사이에 어떻게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지, 세계 최고 수준의 도로 포장률을 자랑하는 이 땅이 얼마나 세계 최악 수준의 생태통로를 보유하고 있는지 등, 그들의 생명이 얼마나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어렵지 않게 그려낸다. 실례도 그러하거니와, 물론 책과 영화 안에서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호의적이거나 동물에 대한 배려나 동물권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듣기민망한 쌍욕은 아니었지만, 길거리 미화를 헤치고 쓰레기를 뒤지는 길냥이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는 어른들과 돈으로만 생각하는 어린아이까지 현대인의 생각은 다양하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판단하기도 쉽진 않다. 건강하고 멀쩡하지 못한 길냥이 한 마리를 데려다 기르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 현대인에겐 가장 정직한 고백일 듯싶다.
하지만 다소 걱정스러운, 실은 더 염려스러운 것은 힘과 횡포의 논리에 사람들이 아무 자각 없이 휩쓸려가고 아이들 또한 그러하다면 이것은 심각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고양이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성과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해맑다. 한밤에 눈에 불 켠 모습만을 보고 겁먹었던 나도 고양이의 생태를 알게 되면서 그간 잘못 알아왔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삼 개월을 넘기기 힘든 새끼 길냥이들의 신세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주는 고양이밥 등. 한 생명을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는데 삼십 해를 훌쩍 넘겼으니 아마 도외시한다면 우리는 일평생을 인간 외의 생명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살다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마녀의 동물이라고 싹쓸이하듯 학살당했지만, 고양이를 죽여 페스트가 창궐했고 인간이 피해를 입었다. 인간의 도로와 건물 등, 문명과 기술만을 위한 발전, 그러한 인프라 구축에는 분명 자연의 희생이 있다. 인간은 분명 많은 것을 이룩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강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강자가 선이며 옳은 것은 아니다. 근시안적 세계관과 그릇된 가치관으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동물과 자연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 가까이만 보아도 애완용품매장·애완샵 등은 골목까지 들어와 있을 정도로 증가추세다. 그러나 비싼 애완동물 외 무관심 영역의 동물은 여전 소외되고 하루아침에 로드킬을 당한다.
고양이는 고양이다. 인간의 비교 대상이 아닌 순한 그 자체의 생명이다. 나 또한 일시적 감상에 내 면죄부를 씌우고 나름 지식인이랍시고 의무를 보충하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고양이는 앞으로도 내내 나에게 있어 고마울 것이다. 우리집 고양이는 ‘냔냐’다. 나보다 입맛이 까다로워 아무거나 먹지 않고 한뎃잠을 자지 않으며, 언니와 나의 싱거운 농담에 “냔냐 어쩌구”, 라는 말만 나와도 제 이야기인 줄 알고 고개를 빼물고, 컴퓨터 좌판 위에서 깡충깡충 뛰거나 종이원고를 수시로 뜯어먹는 천방지축 고양이다. 퇴고 중인 원고를 뜯어놓는 날엔 내 성미에 들들 볶이지만 일상 때는 내가 반대로 놀아달라는 성화에 들볶이는 ‘냔냐’! 고양이는 살아 숨 쉬는 고양이다.
─『시에』 2012년 여름호
김윤이
서울 출생.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