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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통치에 대한 글을 쓰면서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언약과 통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언젠가 묵상의 흔적으로 책을 출판하게 된다면......
언약과 통치의 하나님나라는 책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깨달은 복음의 정수는
언약과 통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에 대한 주변 학문은
성경의 증거를 충분히 깨닫게 하지 못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라도
성경의 증거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로 깊지 않습니다.
성경은 개혁주의를 말하지 않고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에 대한 편협한 이해의 산물일 뿐입니다.
성경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신학의 관점이 아니라
성경 저자의 관점으로 성경의 그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저자의 관점으로 그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하지만
신학은 성경의 그 말씀이 아닙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구속사를 말하지만
구속사의 본질,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계시의 말씀으로 온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할찌라도
복음과 성경의 그 말씀으로 안내하는 율법적 몽학 선생에 불과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옷을 입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는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혁주의 출판사를 운영하는 어느 목사님은
개혁주의 신학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였지만 성경의 복음적인 이해는 걸음마 수준이었습니다.
성경의 복음적인 이해는 신학의 깊이가 아니라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여 성경 저자의 시선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많이 알고 있는데 성경에 대한 이해는 1학년 1반인 이율배반적인 현상은
신학은 신학이요, 성경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신학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교회 강단의 설교는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어 쏟아져 나옵니다.
신학은 멀고, 성경은 더 멀고......
성경에 대한 범신론적 설교는 인본주의 신앙의 본질을 이루었습니다.
아전인수식의 성경 이해와 적용으로 난무하는 설교를 듣는 청중은
그리스도의 옷이 아닌 양의 탈을 쓴 염소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혼합한 비전 설교는
종교적 성공을 위한 경영 철학이요, 경제 마케팅의 옷을 입었습니다.
다단계 시스템의 골자는
초대형 교회를 만드는 골격이 되었습니다.
프렌차이즈식의 교회 성장 프로그램은
인적 인스탄트 인프라 구촉의 솔루션을 제공하였습니다.
삼성의 경영 시스템과, 보험회사의 경영 시스템과 다단계 경영의 시스템이
교회 성장 프로그램의 골격이 되었습니다.
정치 평론가들은
정치는 생물이다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생물로서의 정치는
유기체적 먹이사슬의 생태적 환경,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권모술수와 교언영색의 막말과 파편 정치의 공방과 이합집산의 철새 정치를
생물 정치라는 유기체적 생태환경으로 적용하였습니다.
죽은 정치를 살아있는 정치로 호도하는
궁색한 몸부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적 인스탄트 인프라 구촉의 솔루션으로 채색된 교회 성장 프로그램은
영적으로 유기체적인 생태 환경을 가졌는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장의 몸부림은
영적 생태 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고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태 환경의 흐르는 물을 가로막은 4대강의 담수는
오염된 물의 고인 현상으로 자정 능력을 상실한 생태파괴로 이어져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성경의 유기체적 생태 환경은
언약과 통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태초의 창조로부터 흐르는 보좌 앞 강수는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언약과 통치의 맑은 샘으로 흐릅니다.
오늘날 교회 성장 프로그램과 혼잡한 다른 복음은
청정하게 흐르는 언약과 통치의 영적 생태 환경을 고인 물로 썩게 하는 종말론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흐르는 물의 생태 원리는
물의 자정 능력, 그 자체입니다.
맑은 물도 고이면 썩게 마련인데
오염된 물을 담수하는 것은 생태 환경에 대한 반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담수된 물이라도 흐르게 하는 생태 환경을 조성한다면
생태 환경과 소통하는 치수일 것입니다.
생태 환경의 공학.....
그것은 창조의 그 말씀이 녹아있는 자연 만물의 서정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말씀으로
우주 만물의 질서를 확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발견된 과학적인 연구로 진화론적인 사상을 교육하는 현장은
하나님의 창조를 반역하는 인본주의 문화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생태 환경을 하나님의 위대한 뜻으로 노래하고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서정의 생태 환경에 아름답게 적응된 창조 신앙입니다.
만상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언약과 통치를 담고 있는 심오한 원리로 담고 있습니다.
창조의 순환을 가로막는 인본주의 문화는
도시 문화의 생태적 파괴 현상을 낳았습니다.
흐르는 물의 자연 생태 환경은
하나님의 언약과 통치의 순환을 거울로 들여다 보게 합니다.
사도 바을은 그 지으신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신성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하는 자연적인 증거로 삼았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빛과 물과 흙의 신비로 자라난 푸른 숲은
창조의 원리와 서정으로 가득합니다.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우주적 생태 환경,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삶의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것은 생각, 그 자체가 없는 짐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이 없는 짐승과 생물도 그 살아가는 생태 환경에 친화적으로 적응하는 데
생태 환경을 파괴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은 짐승과 생물보다 더 못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태 환경 그 자체가 되어 살아가는 생물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통치,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는 그 창조의 원리대로 순응하며 통치, 그 자체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그 형상의 원리를 따라 바르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애견이 사랑스럽고, 밥 주는 주인을 꼬리 흔들며 반가워 하지만
애견은 생각, 그 자체가 없습니다.
창의적 생각으로 밥 주는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또한 같이 살지만 주인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동행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형상, 곧 자유하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원칙과 원리 그 자체인 기계적인 순응이 아니라
보다 높은 품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감동과 탄성으로 이루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그 창조의 탄성을
그 지으신 사람의 형상으로 존귀와 찬양을 받고 싶었습니다.
밥 주면 꼬리 흔드는 애견이 아니라
자식에게 느끼는 살아있는 감동으로 창조의 탄성을 더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상대로 지으신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그 형상대로 창조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창조한 만물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통치의 위임이요,
함께 동행하는 기쁨의 탄성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우리", 곧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되어 함께 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에 하나님의 영역, 통치의 권한을 위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아담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에덴 동산에서 함께 하는 각 생물을 부르며 이름을 불렀습니다.
생물의 이름을 붙여 부른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위임받은 그 통치로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창2:19)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그 통치를 상실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첫 사람 아담에게 생명의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첫 사람 아담의 언약이었습니다.
아담의 언약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통치의 언약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생명의 언약이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통치와 생명의 그 말씀으로 아담과 동행하기를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와와 함께 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았지만 생명의 언약을 어김으로
에덴 동산의 통치권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아담의 에덴 통치권 상실은
유혹의 욕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권한을 침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언약, 바로 그 말씀을 불순종하여
준엄한 하나님의 법치가 심판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죽음의 심판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하고 쫓겨난 상태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였습니다.
낙원의 행복을 언약과 통치의 상실로 잃어버린 인류는
죄악된 삶으로 노아의 홍수 심판을 맞았습니다.
아벨과 셋과 에노스 등 경건한 후손도 있었지만
에덴의 회복은 아니었습니다.
에덴의 회복, 그 영광의 주인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받았던 에녹이었습니다.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 에덴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에녹의 하나님과 동행.....
그것은 언약과 통치의 회복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목적하였던 그 놀라운 감동의 삶을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영광의 소통으로 죽음의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의 삶으로 옮겨졌습니다.
에녹은 비록 실낙원의 생태 환경에서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그 놀라운 언약과 통치의 하나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언약과 통치의 완전한 소통의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의 감동으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히11:6)
하나님과 동행의 경지는
언약과 통치의 완전한 믿음의 소통이요, 기쁨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녹이 삼백년 동안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탄성이 되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위대한 족적을 남겼지만
시대의 대세는 악의 굴레, 그 자체였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의 죄악은 관영하였고
에녹의 감동이 없는 세상을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듯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창6:5-7)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몸만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은
땅의 심판을 더하여 공중의 새까지 멸하였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언약에 대한 심판이요,
땅을 정복하고 그 모든 것을 다스라라는 통치의 위임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노아......
하나님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 노아에게 생명의 언약과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하였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은혜입은 노아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에녹의 감동이 노아의 감동으로 이어져
마침내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무지개로 언약의 증거를 받은 노아와 아들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언약과 통치를 위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의 말씀과 통치를 위임받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된 노아의 후손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시날 땅의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인본주의 사상과 문화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언약의 말씀을 준행하고 위임받은 땅의 통치로 에녹과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하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힘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인본주의는 인류의 이상이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고 반역하며 배반하는 심판의 블렉홀입니다.
인본주의와 소통하는 인본주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타락이요, 혼합이며, 혼재된 신앙입니다.
성경적인 언약과 통치의 하나님 나라는
언약 신앙의 구심점과 원심점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인본주의 신앙은
계시의 실존을 자아 주체적으로 인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