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접 군단의 작전구역에까지 흥미를 갖느냐?”
1951년 5월16일 오후 5시부터 개시된 중공군의 5월 공세는 縣里(현리)로 집중되었다. 현리는 강원도 인제군 麒麟面(기린면)의 內麟川(내린천) 유역의 다소 넓은 골짜기다.
소양강 상류의 인제군은 면적이 1646km²이다. 인구밀도는 km² 당 18명으로 매우 낮다. 산이 많아 경지율이 3% 정도이고, 밭의 비율이 耕地(경지)의 65%를 웃돈다.
요즘은 군사취락과 淸靜(청정) 관광지로 성장하고 있는데, 과거 한때는 新兵(신병)들이 “인제 가면 언제 돌아오나, 원통(인제읍 북쪽 5km의 군사취락)해서 못 살겠네!”라고 한탄했다는 오지였다.
당시 국군 제3군단의 방어정면은 25km, 平地(평지)로 치면 1개 군단이 담당할 만하지만, 태백산맥의 등골 부분이어서 지형적인 악조건이 많았다. 주변에는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경사 60도 안팎의 비탈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지역으로 무전통신의 장애도 심했다. 視界(시계)와 射界(사계·쏜 탄알이 미치는 범위), 모두 나빴다. 그리고 5월 중순인데도 불구하고 응달에는 殘雪(잔설)이 보였다. 밤낮의 기온차도 심했다. 밤이 되면 모닥불 생각이 간절했다.
최대의 난점은 뭐니 뭐니 해도 보급로 사정이었다. 이 보급로는 군단 사령부가 있는 강원도 평창군 下珍富里(하진부리)에서 京江도로(서을∼강릉 간의 6번국도)와 갈라져 북상하는 외길인 31번 국도이다. 31번 국도는 강원도 홍천군의 蒼村(창촌)∼下梨里(하이리)∼城內里(성내리)∼上南面(상남면)의 오마치 고개∼龍浦(용포)∼縣里(현리)∼인제읍으로 이어진다.
이 31번 국도상에서 上南面의 오마치 고개가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다. 오마치 고개를 특별히 방어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다음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丁一權의 회고록 《전쟁과 휴전》에서 발췌한 것이다.
<劉載興(유재흥) 제3군단장은 오마치 고개와 부근 大岩山(대암산)에 1개 대대를 특별히 배치했다. 제9사단(사단장 崔石 준장) 제29연대의 제2대대였다. 그런데 부대 배치가 되기 무섭게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으로부터 항의의 전화가 걸려왔다. 오마치 고개와 大岩山은 미 10군단의 작전구역이라고 했다. 한국군 3군단의 대대 병력 배치는 작전구역 침해가 아니냐고 따졌다.
劉 군단장이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설명했으나, 알몬드 소장은 “왜 인접군단의 작전구역까지 흥미를 갖느냐?”고 했다.
“알몬드 장군, 오마치 고개는 지금 韓美 두 군단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중공군이 이 고갯길을 누르면 우리 모두의 숨통이 막혀버린다. 그래서 1개 대대를 급히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알몬드 소장은 미군의 작전지역으로부터 한국군의 철수를 계속 요구했다. 5월11일, 국군(제3군단)은 오마치 고개에서 철수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고 말았다.>
縣里 전투― 국군 제3군단의 와해
중동부전선의 도로망은 홍천∼신남∼인제∼원통으로 연결되는 44번과 46번 국도가 있지만, 당시엔 피아의 부대가 대치하는 접촉선 지역을 관통하고 있어 서로 사용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당시, 국군 제3군단 예하의 제9사단과 제3사단이 이용 가능한 도로는 인제~현리∼용포∼오마치∼침교∼창촌∼속사리로 이어지는 單車線(단차선)의 31번 국도가 유일했다.
오마치 고개. 한미 육군의 오판으로 오마치 고개에서 한국군 1개 대대가 철수한 지 닷새만에 중공군의 5월 대공세가 개시됐다. 국군 3군단은 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하진부리에 이르러서야 부대를 겨우 수습할 수 있게 되었다. |
오마치 고개에서 한국군 1개 대대가 철수한 지 5일 후인 1951년 5월16일 중공군의 5월 대공세가 개시되었다. 예상대로 중공군은 오마치 고개를 노렸다. 앞서 기술한 대로 중공군은 공세 하루만인 5월17일, 미 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7사단을 돌파했다. 중공군의 先發(선발) 1개 중대는 밤새 산길을 타고 동남쪽으로 진출해 오마치 고개를 점령했다.
현리에서 회동한 제9사단장 최석 준장과 제3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2개 사단에서 연대 1개씩을 차출하여 2개 연대 규모로 후방의 오마치 고개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 무렵인 5월17일 14시경 헬기를 타고 현리에 도착한 제3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사단장들과의 작전회의에서 오마치 고개에 대한 공격계획을 보고받았다. 군단장은 “제3사단과 제9사단은 主力을 사용하여 오마치를 탈환해 퇴로를 개척하라. 철수간의 군단 지휘권은 제3사단장에게 위임한다”라는 명령을 내리고, 15시30분 하진부리의 군단지휘소로 복귀했다.
현재 현리에는 제3군단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 현리는 인제읍으로부터 남쪽 23km 거리의 내린천변에, 오마치 고개는 현리에서 12.5km 남쪽의 완만한 오르막에 위치해 있다. 현리전투 당시 31번 국도는 비포장의 단차선 도로였으나 지금은 4차선 포장도로이다. 부산 해운대∼경주 감포∼영양 일월산∼봉화∼태백산∼오마치∼현리∼인제읍∼양구의 ‘피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31번 국도는 한국의 秘境(비경)이 펼쳐지는 길이다.
金鍾五(김종오) 준장의 제3사단과 崔錫(최석) 준장의 제9사단이 1개 연대씩 투입해, 오마치 고개의 탈환을 시도했으나 되려 중공군의 대부대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중공군의 오마치 점령부대는 이미 소수 침투부대가 아닌 본대의 선두 부대였다. 5월17일 04시경에는 1개 중대 규모였으나 계속 병력이 늘어나 오전에는 대대 규모, 오후에는 연대 규모, 야간에는 1개 사단 규모로 증강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마치 고개 남쪽 5km인 침교란 지역에서도 5월17일 오후 중공군에 의한 이중 포위망이 구축되었다.
이로써 국군 제3군단의 退路(퇴로)이자 외길 보급로인 31번 국도가 차단되었다. 제3군단은 후방을 막힌 채, 산야를 매운 적의 공격에 견디지 못했다. 제3군단은 하룻밤 새 앞뒤에서 중공군의 협공을 받게 된 것이다. 전선은 전면 붕괴했다. “삘릴릴리 쾡 쾡 쾡∼∼∼” 장병들은 중공군의 피리소리와 꾕과리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국군은 오마치 고개 북쪽의 31번 국도 上에 차량과 중장비를 버렸다. 그 길이가 무려 20여리에 달했다. 다만, 고스란히 중공군에게 넘겨줄 수는 없어 차량의 엔진을 파괴했고, 장비에는 휘발유를 뿌려놓고 불을 질렀다. 수백 줄기의 검은 연기가 하늘로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5월17일, 날이 어두워지면서 제3군단 예하 제3·제9사단의 장병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마치 고개의 서쪽 芳臺山(방대산·1444m) 속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사단장도 계급장을 떼고 후퇴하는 참담한 모습이었다. 이로써 전선에는 현리를 중심으로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리고, 동해안의 제1군단 역시 西側方(서측방)이 적에게 완전 노출됐다.
도주하는 제3군단의 대열 속에는 제3사단장 김종오 준장과 제9사단장 최석 소장 그리고 제3군단 참모장 심언봉 준장 등 3명의 장군이 섞여 있었다.
敵 부대들은 산발적이긴 하나 집요한 추격을 계속했다. 제3군단 병력은 속사리 방향으로 퇴각하고자 창촌 쪽으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이곳 역시 5월18일 18시경부터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결국, 제3군단은 하진부리에 가서야 병력을 수습할 수 있었는데, 5월19∼20일 하진부리에서 수습된 병력은 제3사단이 34%, 제9사단이 40% 정도였다. 5월27일까지는 70% 정도의 병력과 30% 정도의 장비가 수습되었다.
현리 전투 당시 중공군의 진격로. 국군 3군단 예하 3사단과 9사단이 와해되면서 후방으로의 퇴각이 이어졌다
미 제3사단, 雲頭嶺 점령해 오마치의 치욕 보복
당초,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는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서울 방향으로 지향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중공군의 주력이 중동부에 집중되어 속사리(강원도 평창군 용평면)까지 縱深(종심) 70km의 대규모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이에 밴플리트 사령관은 軍 예비로 후방에 배치하고 있던 미 제3사단과 미 제187공수여단을 급거 200km 거리의 중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공세 4일째인 5월19일, 중공군의 고질인 병참의 제한으로 인해 공격기세가 현저히 둔화되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5월19일 아침, 미 제3사단이 속사리·하진부리 일대를 정찰한 결과, 중공군의 저항이 예상외로 경미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중공군 주력의 요충지인 강원도 홍천군 내면의 雲頭嶺(운두령) 일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운두령은 속사리 북방 10km 지점 회령봉(1326m)과 계방산(1577m) 사이에 있는 험준한 고개로서, 현리∼속사리를 연결하는 31번 국도가 이 고갯길을 통해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미 제3사단이 운두령을 점령할 경우, 오마치의 차단으로 국군 제3군단의 퇴로가 차단되었던 것처럼 강원도 용평군 束沙里(속사리) 일대에 진출한 중공군의 퇴로가 차단되는 것이었다.
운두령을 공격한 미 제3사단은 적의 강력한 저항에 일시 고전했지만, 막강한 화력을 집중 운용해 5월22일 18시경 마침내 운두령 정상을 점령했다. 이로써 중공군의 공세 초기에 오마치가 피탈됨으로써, 국군 제3군단이 무기력하게 무너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운두령이 차단됨으로써, 중공군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韓信 대령의 제1연대가 지켜낸 대관령 고개
京江(경강)도로(6번 국도)로 진출한 중공군은 당연히 大關嶺(대관령)을 넘어 江陵(강릉)을 노릴 것이었다. 강릉에는 우리 공군의 유일한 출격 기지인 K-18비행장이 있고, 폭탄과 보급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미 공군의 P-51 무스탕 전투기도 여기서 평양까지 출격했고, 미 해병비행단도 강릉기지를 이용했다. 강릉을 잃으면 공군기지뿐만 아니라 동해안의 보급항도 잃게 된다.
강릉을 지키려면 전략적·전술적 요충인 대관령을 확보해야만 한다. 위기가 고조된 5월21일 아침, 미 8군으로부터 국군 제1군단장 白善燁(백선엽) 소장에게 급한 연락이 왔다. 대관령 서쪽 龍坪(용평) 소재 제3군단의 간이 활주로에서 작전회의가 있으니 출석하라는 통지였다. 요즘의 용평은 스키장과 명태를 태백산맥의 바람에 말리는 덕장으로 유명하다. 다음은 당시의 국군 제1군단장 白善燁 장군의 회고이다.
<나는 미군기를 타고 급거 대관령 너머로 날아갔다. (중략) 활주로에 착륙하자 미 3사단 소속 라이딩스 장군이 한발 앞서 도착해 있었다. (중략) 곧 2대의 L-19 경비행기가 서쪽 하늘에 나타났다. 적의 대공포화에 맞아 기체에서 가솔린이 흰 연기처럼 새고 있었지만,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밴플리트 사령관과 8군 작전참모 머제트 대령이 타고 있었다. 비행기가 적의 포화를 맞아 가솔린을 흘리면서 山中의 간이 활주로에 착륙하는 모습을 보자니 숙연해졌다.
머제트 대령은 즉시 두루마리 작전지도를 펼쳐 들고 활주로 위에서 전황을 설명했다. 밴플리트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협조해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제1군단(국군)은 우측으로, 제3사단(미군)은 좌측으로 공격하라!”>
당시, 서울 방어를 위해 世祖(세조)의 무덤인 남양주의 光陵(광릉)에 배치돼 있던 제8군의 유일한 예비였던 미 제3사단은 하루만에 250km를 이동해 下珍富里(하진부리)에서 동북방으로 진격했다.
한편 국군 제3군단의 패잔 장병의 일부가 산길을 타고 대관령으로 몰려왔다. 그 꼬리를 물고 중공군이 추격해올 것은 분명해졌다.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병력의 긴급출동을 예하 수도사단장 宋堯讚(송요찬·이후 육군참모총장, 내각수반 역임) 준장에게 지시했다. 대관령 방어에 급파될 병력은 韓信(한신) 대령이 지휘하는 수도사단 예하의 제1연대였다. 이어지는 백선엽 장군의 회고.
<제1연대가 대관령까지 육상 이동하는 데 약 3시간, 또 전투 배치에 서너 시간이 소요될 것이 예측되었다. 이 정도면 적보다 먼저 대관령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제1연대의 이동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후 3시경, 작전참모 孔國鎭(공국진) 대령이 극도로 흥분한 어조로 내게 보고했다.
“송요찬 장군이 제1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건 抗命(항명)입니다!”
宋 장군이 수도사단 담당 정면도 위급한 터에 제1연대를 뺄 수 없다는 이유로 군단장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宋 준장의 태도에는 또 다른 미묘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나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사단장이었다. 또 그는 동부 전선에서 누구 못지않게 용맹을 날렸다. 나이도 별 차이가 없었다. 자존심 강했던 그로서도 “네까짓 게”라는 기분이 있었을 터이고, 그러다 보니 고분고분 내 명령에 따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백선엽 소장과 송요찬 준장에게 국군 경력의 출발점은 모두 軍英(군영·군사영어학교)이었다. 110명의 軍英 출신자들 가운데 백선엽은 군번 54번, 송요찬은 96번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軍英에서 실제 수업을 받지 않고 軍英 졸업자로 인정된 케이스에 속한다.
奉天(봉천)군관학교 9기 졸업 후 滿軍(만군) 중위로 복무한 백선엽은 副尉(부위·중위) 계급장을 달고 바로 연대 창설 요원으로 부임했고, 일본군 하사관 출신인 송요찬은 창설기 연대의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능력을 특별히 인정받아 軍英 졸업자 대우를 받고 參尉(참위·소위)로 임관했다.
군사영어학교의 우수성적 졸업자인 군번 1번 李亨根(이형근·일본육사 56기), 2번 蔡秉德(채병덕·일본육사 49기), 3번 劉載興(유재흥·일본육사 55기), 5번 丁一權(정일권·봉천군관학교 5기) 등 5명은 모두 正尉(정위·대위) 계급을 받았다. 만주군 중좌(軍醫) 출신으로서 군사영어학교의 副교장을 맡았던 元容德(원용덕·세브란스醫專 졸업)은 군번 41번으로 參領(참령·소령), 일본군 대좌 출신으로 創軍(창군)의 산파역이었던 李應俊(이응준·일본육사 26기)은 군번 110번으로 正領(정령·대령) 계급을 받았다.
이런 서열의 혼돈이라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송요찬 사단장의 태도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짐작컨대, 당시 군단장은 군단 직할의 포병부대·戰車(전차)부대 등을 갖지 못해 사단에 대한 전투 지원의 능력도 없으면서 사단장에게 간섭(명령)만 하는 屋上屋(옥상옥)의 존재로 비쳐졌기 때문에 빚어진 사태였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백선엽 장군의 회고이다.
<정말, 오후 늦도록 제1연대가 움직이지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허리에 45구경 권총을 차고 지프에 올랐다. 孔 대령(공국진·1군단 작전참모)도 동행했다. (중략) 나는 宋 준장과 마주 앉았다.
내가 조금 위협적인 목소리로 “貴官(귀관)은 내 명령에 복종할건가, 아니면 불복할건가?” 라고 하자,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각하, 죄송합니다.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중략) 그는 바로 전화기를 들어 韓信(한신) 연대장에게 출동을 명했다.>
‘각하’는 1970년대의 軍法에서 대통령에 대한 존칭으로 한정되었지만, 6·25 당시엔 웬만한 高官들에게 다 붙이는 존칭이었다. 예컨대 ‘사단장 각하’ ‘大使 각하’ ‘도지사 각하’라고 했다. 지금은 대통령에 대한 존칭으로 ‘대통령님’이 통용되고 있다.
韓信(한신) 대령의 제1연대는 급히 대관령으로 이동했다. 대관령 정상에 도착한 것은 그날 밤 9시경이었다. 전투는 그로부터 불과 1시간 만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제1연대가 3시간 남짓 늑장을 부렸는데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1시간 늦게 도착한 것이다.
전투는 처음부터 고지를 先占(선점)한 제1연대의 완승으로 전개됐다. 2차·3차 측면공격도 격퇴하고 대관령을 死守(사수)했다. 제1연대는 이 전투에서 1180명의 敵을 사살한 반면 제1연대의 전사자는 12명에 불과했다. 이로써 중공군의 5월 공세로 형성된 거대한 돌파구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돌파구 동쪽의 방위선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전략적 요충지인 江陵(강릉)의 위기가 해소되었다.
결국, 미 제3사단의 운두령 전투와 국군 제1연대의 대관령 전투는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고 反擊(반격)작전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중공군은 현리 전투를 통해 속사리와 大關嶺(대관령)에 이르는 큰 돌파구를 형성할 수 있었지만, 이때 입은 피해 때문에 휴전에 임박해서야 공세를 펼칠 정도로 戰力(전력)과 보급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참 군인으로 유명했던 韓信 장군
韓信(1922∼1996) 예비역 육군 대장은 함경남도 永興(영흥) 태생이다. 일본의 中央大學(주오대학) 재학 중에 學兵(학병)으로 가서 日軍(일군) 소위가 되었다. 1946년 12월 경비사관학교 2期 졸업. 1950년 8월부터 제1연대장으로서 1950년 9월의 永川(영천)전투와 1951년 5월의 대관령 전투 등에서 무용을 떨쳤다
그의 전투병과교육사령관 재임(1966∼68) 末期에 필자는 초임 육군 소위로서 光州(광주) 보병학교에서 초등군사반 교육을 받았는데, 韓信 사령관이 겁나 CAC(전투병과사령부) 본부 앞을 지나지 못하고 일부러 애둘러 다녔다. 그는 군화 뒤축이 비스듬히 닳은 장교를 보면 불러세워 ‘보행 불량!’이라 엄히 꾸짖으며 정강이까지 걷어찬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필자의 군화 뒤축의 상태도 매우 불량했기 때문이었다.
예편 후 옛 부하가 시장을 지내는 강원도 어느 고을에 무슨 일로 갔는데, 옛 부하는 그를 위해 料停(요정)에 술상을 근사하게 차려놓았다. 그러나 그는 대번에 요정의 술자리를 박차고 나와 해변의 모래사장에 앉아 소줏잔을 기울일 만큼 소박했다. 서릿발 같으면서도 부하 사랑이 넘쳤으며, 전투에 강하면서도 청렴결백했다. 1969년 제1군사령관(대장)을 거쳐 1972년 합참의장을 역임, 1975년 예편했다.
중공군의 공세와 병참의 상관관계
“중공군의 공세는 兵站線(병참선: Lines of communication)을 유지하지 못해 1주일을 넘기지 못 한다”
과연 그러했다. 병참에 실패한 중공군의 공세는 5월23일을 고비로 수그러들었다. 五臺山(오대산)에서 대관령 남쪽 일대까지 포진했던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은 산기슭을 누비며 적을 소탕했다.
6·25전쟁 중 중공군의 치명적인 약점은 兵站(병참)이었다. 병참이란 軍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보급·정비·교통·위생·건설 등 일체의 기능을 총칭하는 것이다. 6·25전쟁 중 중공군은 병참의 어려움으로 제2차 공세를 제외한 全 전투에서 공세기간이 2주 이상 지속하지 못했다.
밴플리트 8군사령관은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군단장 白善燁 소장)과 8군 예비인 미 제3사단 에 대해 태백산맥 따라 진출해 온 중공군과 북한군을 반격하도록 명했다. 국군 제1군단과 미 제3사단은 5월19일부터 20일에 걸쳐서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해 반격으로 전환했다. 국군 제1군단은 미 제3사단 및 미 제10군단과 호응해 오대산에서 인제-원통까지 거침없이 진격했다.
적의 主力은 이미 퇴각해 중공군 포로를 太白山脈(태백산맥) 여기저기서 주어 담는 꼴이었다. 중공군 병사들은 전투 시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지만, 일단 포로가 되면 양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한국말로 “한국 사람, 자장면 좋아한다. 나, 자장면 잘한다. 나, 살려야 한다!”고 애원하기도 했다.
국군 제1군단은 국군 제3군단의 패잔병들도 수용했다. 芳臺山(방대산)을 넘어 산길로 50km 이상을 걸어 京江도로(서울-강릉 간 6번국도)까지 탈출했던 패잔병은 제3군단의 병력 중 40%에 불과했다. 이들은 5월인데도 눈 내린 산악에서 열흘 동안 물과 음식이 없어, 옷에 내린 눈을 핥아 먹고, 화전민들에게서 씨감자를 얻어먹으며 버텼다고 했다.
5월28일, 국군 제1군단은 杆城(간성)을 거쳐 북위 38도 35부에 위치한 巨津(거진)까지 일거에 북상했다. 현재 휴전선과 거의 비슷한 선까지 확보하게 된 것이다.
중공군은 1951년 4·5월의 제1·2차 춘계공세에서 무모한 공격을 감행해 한국전 개입 이래 최대의 타격을 입었다. 국군 제3군단을 돌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것에 고무되어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까지 포위·섬멸하려고 욕심을 부린 것이 禍根(화근)이었다. 태백산맥 서쪽에서 협공을 받아 상당 기간 再起(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것은 병참의 실패 때문이었다.
첫댓글 한신대장군 정말 대단한 참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