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에서 츠빙글리의 발전과정을 읽어보면,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자로서 그 접근방식과 실천 모두에서 루터와는 차이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이점의 포인트를 잘 짚은 W. P. 스티븐스의 설명을 아래에 타자 쳐서 붙입니다. |
츠빙글리는 한 사람의 개혁자로서 그 접근방식과 실천 모두에서 루터와는 차이를 보이는데, 이 차이점들은 그가 1518년 말에 취리히로 가기 이전의 그의 발전과정이라는 맥락과 취리히에서의 목회라는 상황 안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츠빙글리는 자신이 소년시절부터, 다시 말해 강한 애국심을 특징으로 하는 스위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기 이전, 자신의 견해에 영향을 준 에라스무스와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a)의 글을 읽기 이전부터 열렬한 애국주의자였다고 주장했다.(Z V 250.8-11) 젊은 시절 그가 애국주의자였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개혁자가 되기 전에 그가 저술한 초기작품들이 조국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한 사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초기작품들은 스위스를 외국 권력자들을 위한 용역에 연루시키는 용병제도에 대한 맹렬한 반대로 그를 이끌었다. 이것은 1510년 초에 그가 쓴 『수소의 우화』(The Ox)라는 비유적인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용병제도에 대한 반대는 아마도 자신의 전쟁경험으로 인해 강화되었을 것이다. 츠빙글리는 1512년 군목으로 군사들과 동행했을 것이고, 만약 그랬다면 그가 전해준 스위스와 프랑스 간의 교전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그저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분명 1513년과 1515년에 참전했으며, 1515년 9월에는 수천 명의 스위스 군인들이 전사한 마리냐노(Marignano) 전투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그는 전쟁의 참화를 뼈저리게 느꼈으며, 스위스 백성들의 도덕적, 사회적 비용에 대해서도 절감하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1516년에 또 다른 비유적인 시 『미로』(The Labyrinth)를 써서 용병제도를 더욱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이때는 에라스무스적인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애국주의에 명백하게 종교적인 차원이 나타나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츠빙글리가 온전히 개혁자가 되기 이전부터, 그의 목회와 신학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조, 단지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구조 안에 놓여 있었다. 더욱이 1516년에 그가 글라루스를 떠나 아인시델른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용병제도에 대한 반대, 특히 프랑스와의 동맹에 대한 반대 때문이었다. 이것은 또한 이후에 그가 취리히로 초청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취리히에는 그가 도착하기 오래 전부터 용병제도나 프랑스와의 동맹에 대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1520년대 초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츠빙글리는 전쟁과 용병제도를 단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로 보았다. 용병전쟁은 많은 위험들을 지니고 있었다. 용병전쟁은 뇌물을 통해 정의를 왜곡하도록 만들었고, 시기와 사치를 조장했으며, 외국 통치자들의 권력행사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다는 것이었다.(Z I 175-85) 따라서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복음은 루터처럼 개인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민족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연관되어 있었다.
개혁자로서 츠빙글리는 복음이 용병제도의 폐지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복음이 정치적인 목적에 이바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인 영향력을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1522년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취리히는 다른 어떤 스위스 주들보다 평화롭고 평온한데, 모든 선한 시민들은 이것이 복음의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Z I 148.32-3; Selected Works 16; Works i. 121)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참으로 순수하게 공표된다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국가의 평화에 지대하게 공헌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아니 주장한다."(Z I 308.24-6; Works i. 267)
이것이 츠빙글리가 1518년 말경 취리히로 오기 이전과 그곳에서의 초기 몇 해 동안에 그리스도교 목회와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대해 발전시켰던 견해이다. 그의 발전은 루터의 발전과 달랐다. 수도승으로서의 루터의 삶은, 교구목사요 군목인 츠빙글리의 삶과 완전히 달랐으며, 또 자기 개인의 삶의 견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한 루터의 견해와 백성의 견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한 츠빙글리의 견해는 전혀 달랐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목회와 경험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목회활동을 펼쳤던 지역의 정치적이고 지리적인 환경까지도 서로 달랐다.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 중 한명이었던 현명한 프리드리히(Frederick the Wise)가 다스리던 작센에서 활동하였다. 츠빙글리는 의회가 법률로 다스리던 스위스 연맹 안의 도시국가에서 활동했다. 취리히의 정부형태와 도시규모가 츠빙글리로 하여금 도시의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또 때로는 그렇게 할 필요도 있었다. 이것이 루터와 츠빙글리의 차이점들 중 일부를 설명해 줄 수 있고, 또한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 혹은 목회자와 관료의 관계에 대한 츠빙글리의 이해는 단순히 이론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의 이론이 실천에 영향을 준 것같이 그의 실천도 이론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모든 실천가들이 그렇듯이 그의 이론과 실천이 항상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론은 성서에 뿌리박고 있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리스도교 저술가들과 비그리스도교 저술가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츠빙글리가 말했던 것과 츠빙글리가 행했던 것을 적절하게 구별해야 하며, 그가 행했던 것은 부분적으로 그가 직면했던 상황들, 특히 취리히와 연맹의 정세에 의해 불가피하게 좌우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W. P. 스티븐스 지음, 박경수 옮김,『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pp.196∼199.
첫댓글 본문에서 용병제도의 실태와 츠빙글리의 개혁과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용병제도가 낯설지만 스위스의 사회적 문제가 되어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네, 저도 그 부분에 눈길이 갑니다. 공감합니다.
츠빙글리에게 영향을 준 마르실리우스에 대해서 알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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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리우스의 저서는 《평화의 수호자》, 《제국의 전이에 관하여(De Translatione Imperii)》, 《소 수호자(Defensor Minor)》 총 3편이다. 《평화의 수호자》는 당시 전방위적 권한을 가졌던 교회 권력에 도전해 정치 공동체에서 정치적 권위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보고자 하는 저서이다. 이는 마르실리우스의 사상이 가장 자세하고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는 대표적 저서이기도 하다. 《평화의 수호자》는 1권(Discourse I)—정치적 권위의 기원과 본질, 2권—사제, 특히 교황 권력에 대한 비판, 3권—정리와 요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71XX57700013
에라스무스는 알아도 마르실리우스는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이렇게 알아 가네요.
@노베 공감합니다.
마르실리우스
마르실리우스 파타비누스(라틴어: Marsilius Patavinus, 이탈리아어: Marsilio da Padova 마르실리오 다 파도바[*]: 1275년 ~ 1342년)는 중세의 유명한 정치철학자이다.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태어나 파도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으며 파리 대학교에서는 오컴의 윌리엄 밑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웠다. 그는 파리에서 의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으며 1313년에는 파리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논쟁적인 저작 평화의 수호자를 루트비히에게 헌정하고 세속 정부 권력의 독자성을 강력하게 옹호함으로써 제권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참고 문헌
이상영, 이재승 공저, 《법사상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05.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 《평화의 수호자(Defensor pacis/The Defender of Peace)》, 길, 2022(황정욱 옮김)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정치와 종교의 분리나 구분을 주장한 것 같아요. 종교개혁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이네요.
마리냐노 전투 Battle of Marignano
요약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시도한 제1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이 스위스 용병과 싸워 승리한 전투(1515. 9. 13~14).
이 전투는 밀라노에서 남동쪽으로 16㎞ 떨어진 마리냐노(지금의 멜레냐노)라는 곳에서 벌어졌으며, 전투 결과 프랑스는 밀라노를 탈환하고 스위스 연맹과 제네바 평화조약(1515. 11. 7)을 체결했다. 밀라노 공작령을 정복하기로 결심한 프랑수아 1세는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은 뒤 콜드라르장티에르(콜드라르슈, 마달레나)를 경유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프랑스 군대는 노바라를 점령한 뒤 스위스 동맹군이 방어하고 있는 밀라노로 진격했다. 9월 13일 마리냐노 근처의 프랑스 진영을 향해 진격한 스위스군은 부대를 분산시키며 늪지대를 넘어 공격하다가 자정쯤에 철수했다. 다음날 8시간 동안 공방전을 벌인 뒤 베네치아 기병의 증원으로 병력을 강화한 프랑스군은 스위스군을 격퇴했다(→ 이탈리아 전쟁).
출처: Daum 백과
츠빙글리 개혁의 과정에 나오는 전투의 이름이라면 알아 놓아야 하겠네요.
마리냐노 전투에 대한 더욱 상세한 설명은 아래 위키 백과 내용을 참조하면 되겠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6%AC%EB%83%90%EB%85%B8_%EC%A0%84%ED%88%AC
유럽의 역사가 곧 전쟁의 역사라는 것을 느낍니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선제타격 운운하는 지도자는 솔직히 군사정권 시절의 지도자보다도 더 어리석고 무지한 자입니다. 전쟁을 안다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실력을 기르고 국민의 단합을 이끌어낼 것 같습니다.
@노베 매우 공감합니다.
유럽은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정교분리, 민주주의 훈련을 받은 셈입니다. 루터와 츠빙글리 모두 전쟁에 관여가 되어 있지요.
스위스 용병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할 때가 있어요. 남자들이 먹고 살 직업이 없어서 돈받고 전쟁을 하는 것인데요. 정규군과 달리 매우 열악하고 비참하며 정규군이 처리하기 어려운 임무를 맡아야 하거든요.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민주화와 사회개혁으로까지 이어진 것이 부러움을 자아냅니다. 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는 물론이고 일반사회 마저도 개혁하고 발전시킨 거에요.
이 점은 한국교회가 아무리 노력해도 본받거나 따라잡기 어려운 실태가 되고 만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ㅠㅠ
깊은 내용의 댓글에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
츠빙글리가 애국자였던 것도 감동이고,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당사자로서 용병제도가 암 덩어리 같은 거라는 것을 알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용병제도를 폐지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갖게 된 것도 감동입니다.
문제의 해법이 진리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군요. 아멘.
아멘! 공감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