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복음을 전하던 사도 베드로는 사도들의 으뜸으로서 신변에 누구보다도 더 많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이를 염려하던 신자들의 권고에 따라 로마를 떠나 지중해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십자가를 지고 로마 쪽으로 걸어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놀라 묻자, 예수님은 ‘네가 신자들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로 가려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어디론가 사라지시자, 베드로는 신자들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려 했던 것을 뉘우치고 눈물 흘리며, 다시 로마로 들어가 순교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과 그분이 가시려는 곳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오늘도 가셔서 하실 일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물음은 지금 교회와 우리 자신을 두고 묻게 될 물음이기도 합니다. 교회와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교회와 우리가 가려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지금 교회와 우리가 마음을 모아 힘을 다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곳과 그 일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시편 50,21)” 하시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발거 벗기시면 우리는 지금 아는 대로 가고 있고 또 그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요즘 성당이나 개신교 예배당을 보면 좌초된 배나 표류하고 있는 뗏목같이 보입니다. 요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보고 있으면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진리와 구원에로 이끌기는커녕 자신들도 방황하고 위태로워 보입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마태 8,19)” 우리는 지금 머리와 입술로 주님께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젠 말이 아니라 행실로 따라야 하겠지요. 막연히 ‘어디로 가시든지’라고 하지 말고 지금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어디에 누구와 함께 계시는지를 먼저 성찰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곤궁함과 힘겨움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심을 다시 깨달아 교회와 우리 자신이 그곳에 마음과 정성을 다해 현존하는 것이 실재입니다. 그것이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하신 주님의 명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