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과 구체를 결합시킨 변증법적 방법론의 초석을 놓다
레닌의 강점은 추상적인 교리에 맹목적으로 빠지거나 혹은 구체적인 현실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추상과 구체를 적절하게 조화하여 사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고라고 믿었다. 가령 멘셰비키는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공식을 추상적으로 대입하여 현 러시아 사회가 봉건제 농노사회이므로, 부르주아지 시민사회 혁명을 통하여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한 혁명적 과제이며, 그 후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자신들이 알고 있던 마르크스 텍스트나 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반면 레닌은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Razvitiye kapitalizma v Rossi, 1899)이라는 책을 통하여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 1862)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이를 융통성 있게 적용하여 러시아에서 봉건제 농업 양식의 형태와 더불어 시장경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학술적으로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가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임을 명맥하게 밝히고 이를 실행하고자 하였다. 거대이론이라는 추상에 사로잡힌 근대적인 방식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국주의나 독점자본주의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추상에 사로잡혀 구체적 현실의 가능성을 묵과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나 정반대로 일시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을 일반론으로 확장한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 1877~1941)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의 축적》(Die Akkumulation des Kapitals, 1913)에서 제국주의의 정치경제학적 토대를 명쾌하게 다룬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2권에 나타난 ‘확대재생산의 표식’을 전제로 추가적인 자본의 공급, 즉 확대재생산이 자본주의 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을 증명한다. 제국주의란 서구 사회가 이미 포화된 국내 시장의 범위를 벗어나서 추가적인 이윤을 습득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비서구적인 시장을 개척하는 과정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 확대재상산을 하는 과정이 제국주의인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이다. 제국주의의 과정이 완성되면, 즉 비서구 시장이 모두 자본주의 시장으로 전환되면 더 이상 자본의 축적이 불가능해져서 자본주의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레닌은 이러한 룩셈부르크의 생각이 마르크스의 확대재생산 표식을 추상적이고 기계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며 현실의 구체를 무시한 것이라고 보았다. 현실에서 제국주의 국가는 내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대재생산이 가능하다.
한편 힐퍼딩은 그의 주저(主著) 《금융자본론》(Das Finanzkapital, 1910)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며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여 금융자본의 독점이 도래하여 자본주의 사회는 금융자본에 의한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분석은 실제로 19세기 말 독일의 자본주의 상황에 의해서 충분히 증명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레닌에 따르면 이는 오로지 19세기 말 독일의 자본주의 현상을 일반화한 것에 불과하며 자본의 근본적인 출처는 산업자본이라는 마르크스의 전제와 상충되는 것이었다. 이는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충분히 목격된다. 미국이나 아이슬란드,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국가는 20세기 후반 들어 금융산업에 집중하였다. 이들은 한때 번성할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 모두 마치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아무리 금융자본이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산업자본이 이익을 발생시키지 못한다면 일순간 파산하고 말기 때문이다.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분석이 지나치게 마르크스의 이론을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추상화하여 현실에 적용한 반면, 힐퍼딩은 구체적인 상황을 성급하게 일반화하여 마르크스의 원칙으로부터 일탈하여 현실을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였다고 보았다. 레닌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추상과 구체의 결합, 즉 변증법적 통일이었으며 레닌의 이러한 이상은 단순히 근대적인 합리성의 추구나 거대이론의 집착을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레닌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왜곡과 속류화로부터 구해낸 대표적인 철학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쓰게 된 동기는 ‘마르크스주의 옹호’라는 기만적 기치 아래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잡탕 속으로 왜곡, 속류화한 마하주의를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던 이 기만적 마하주의로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원칙을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실천적 의무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추상과 구체를 결합시킨 변증법적 방법론의 초석을 놓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