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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항일전의 선봉에 선 정통 무장
한상도(건국대 사학과 교수)
1. 국외 망명과 의열단 활동
권준(權晙)은 경북 상주군 함창면(咸昌面) 척동리(尺洞里) 168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인(百忍)이며, 독립운동 과정에서 권중환(權重煥)․권중석(權重錫)․강병수(姜炳秀)․진민각(陳民覺)․장종화(張從化)․양무(揚武)․장수화(張樹華) 등의 여러 이름을 사용하였다. 1895년 5월 2일(양) 출생하여, 1959년 10월 27일(양), 충남 대덕에서 사망하였다.
1936년 7월 1일자로 상하이(上海)주재 일본총영사관(日本總領事館) 경찰부(警察部) 제2과에서 작성한 자료에서는, 그의 “키가 5척 3촌 정도이고, 얼굴이 넓고, 코가 크다. 눈이 크고, 피부는 검다”〔「要手配不逞鮮人名簿」, 在上海日本總領事館 警察部 第2課調〕고 하였다.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 광복회(光復會)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는데, 김학규(金學奎)와 동기라는 기록도 있다.
1919년 11월 9일 밤 중국 지린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 밖 중국인 반(潘)某씨 집에는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冑)‧이성우(李成宇)‧곽재기(郭在驥)‧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晙) 등이 모여, “천하의 정의(正義)의 일을 맹렬(猛烈)히 실행키로” 맹서하고,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였다. 김원봉이 단장 격인 ‘의백(義伯)’에 선임되었다.
의열단은 ‘공약 10조’ ‘암살 대상’ ‘파괴 대상’을 활동지침으로 채택하였고,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침략원흉 응징을 활동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와 함께 ‘왜적을 몰아내어(驅逐倭奴),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며〔光復祖國〕’ ‘계급의 차별을 타파하고〔打破階級〕’ ‘평등한 토지 소유를 이룩한다〔平均地權〕’는 최고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헌신키로 맹세하였다.
해방 후 국내신문에 실린 권준의 ‘약력’에 의하면, 그는 1920년대 초 ‘동제대학(同濟大學) 공과’에서 수학하였다. 이는 그가 상하이(上海)에서 동제대학에 다니며, 의열단 활동에 참여하였을 개연성을 뒷받침한다.
1924년 1월 광저우(廣州)에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었을 때, 그는 김원봉 등과 옵서버로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는 반봉건․반제국주의 투쟁을 통한 근대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소련과 연대〔聯蘇〕’ ‘공산주의 용인〔容共〕’ ‘노동자와 농민의 상호협조〔工農扶助〕’ 노선을 채택하였다.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립되었다.
요컨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을 두 축으로 하는 반봉건․반제국주의의 근대민족운동세력이 단결을 이룬 셈이다. 그리하여 첫 걸음으로 청(淸) 왕조 붕괴 이래 중국대륙을 할거해 온 각지의 군벌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북벌전(北伐戰)’이 시작되었다. 반봉건․반군벌 투쟁이 중국근대민족운동의 선결과제가 된 것이다.
권준 등은 근대민족운동의 수행을 위해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라는 이질적인 두 세력이 단결․합작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대회 참관을 통해, 의열단은 종래의 의열투쟁 노선의 한계를 인식하고, 민족전체역량의 총동원을 통한 민중직접혁명이 최우선적인 길임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를 선도할 중견간부의 양성이 시급함을 자각하였고, 의열단 단원 스스로 민중직접혁명을 이끌 수 있는 정치․군사간부가 되기 위한 능력을 갖추기 위한 방편으로써,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권준의 의열단 활동을 추적하고 있는 일제자료에서는 “1925년 8월 서응호(徐應浩. 徐義駿의 이명)가 ‘의열단 회계책임자’ 권준의 소개로 의열단에 가입했다”고 기록하였다. 또 1926년 11월경 광둥성(廣東省) 한봉근의 셋집에서 열린 의열단 제2차 대표대회에서, 권준이 김원봉․오성륜․김성숙․장지락․최원․이영준․강세우와 함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고 하였다.
그가 의열단의 활동자금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고, 또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된 사실은, 그가 1920년대 중반 의열단 활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뒷받침한다.
2. 황포군관학교 입교 및 졸업 후 활동
1926년 3월 8일 개학한 4기생으로 입학한 한인은 24명이었는데, 이는 각 기별 한인 입교생 중 가장 많은 수효였다.〔참고로, 3기생: 5명, 5기생: 5명, 6기생: 9명, 7기생: 1명, 8기생: 2명, 10기생: 16명, 11기생: 24명, 12기생: 5명, 15기생: 1명, 16기생: 2명이었다〕
이들의 소속을 살펴보면, 보병과: 박효삼(朴孝三)‧박건웅(朴建雄)‧왕자량(王子良)‧윤의진(尹義進)‧전의창(田義昌)‧이우각(李愚慤)‧이집중(李集中)‧이종원(李鍾元)‧이기환(李箕煥)‧김종(金鐘)․강평국(姜平國)‧유원욱(柳元郁)‧최림(崔林)‧최영택(崔泳澤)‧양검(楊儉)‧노일룡(盧一龍)‧권준(權晙), 포병과: 오세진(吳世振), 공병과: 김홍묵(金洪黙), 정치과: 문선재(文善在)‧박익제(朴益濟)‧백홍(白紅)‧노세방(勞世芳)‧노건(盧建)이었다.
이들 가운데, 박효삼‧왕자량‧이집중‧이기환‧김종‧강평국‧최림(김원봉)‧최영택‧양검‧노일룡‧권준‧노건 등은 의열단원으로 분류될 수 있다.
『황포동학록(黃埔同學錄)』의 4기생 신상기록에 의하면, 재학 시 권준의 “소속은 보병 7련(連)이었고, 별명은 무산(武山), 나이는 27세, 국적은 한국(韓國), 통신처는 강소성(江蘇省) 금산수경서시(金山洙涇西市) 508호 팽(彭)씨 댁”이었다.
1926년 10월 4기생으로 졸업한 권준은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장교로 임관되어, 북벌전(北伐戰)에 참전한 다음,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武漢分校)의 교관으로 배속되었다. 이후 그는 중국군 장교의 신분으로, 한인독립운동의 주요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북벌전이 진행 중이던 1927년 2월 개교한 무한분교의 설립 목표는 북벌전에 투입할 국민혁명군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의 5기생 중에서 포병‧공병‧정치과 입교생 일부를 이동시키고, 추가로 1,100여 명의 남‧녀 학생을 모집하였다.
당시 무한분교 입교생모집위원회는 중국전역의 요충지에 ‘입교생 모집 특파원’을 파견하였고, 중국국민당의 지부조직을 이용하여 입교생을 모집하였는데, “한국청년회(韓國靑年會)에 입교생 모집을 위탁하여 이들이 모집한 한인청년을 입교시켰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한국청년회’은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鄂韓國革命靑年會, 이하 ‘유악청년회’)를 가리킨다.〔참고로, 卾은 武漢, 粤은 廣州, 渝는 重慶, 滬는 上海, 京은 北京을 가리킨다〕
유악청년회는 국공합작이 파국을 맞이하는 1927년 초 우한(武漢)에서 결성되었다. 의열단 무한지부와 밀접한 관계였고, 조직구성상 겹치는 부분도 많았다. “한국혁명의 이론 및 방략을 연구하고, 정치‧군사상 일체의 혁명훈련에 노력하며” “일체의 개인중심적인 사상 및 지방감정적인 결합을 박멸함으로써, 혁명전선의 숙청 및 통일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아울러 ‘한국 민족혁명 및 사회혁명’ ‘세계 혁명군중과의 연합을 통한 세계혁명의 완성’을 표방한 이 단체는 ‘독립운동 및 사회운동의 협동전선 완성’ ‘민족유일당 조직 시 즉각적인 가입’ ‘국내외 각지 한국혁명단체와의 연락’ ‘중국정부와의 연합을 통한 국제자본제국주의 타도’ ‘혁명이론의 연구와 정치‧군사상 단체 혁명훈련의 노력’ ‘개인적 사당(私黨) 및 지방적‧감정적 결합의 배격’ ‘세계피압박민족 및 피압박계급 해방전선에의 참가’ 등을 결의함으로써, 1920년대 후반기 한인독립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써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접목을 통한 협동전선운동(協同戰線運動)을 제시하였다.
유악청년회에는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에 근무․재학 중인 한인들과,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 중인 한인이 참여하였다. 황포군관학교 4기 졸업생으로서 중국군에 복무 중인 권준‧오세진‧노세방, 무한분교 입교생인 진공목(陳公木)‧진갑수(陳甲秀)‧안동민(安東民)‧안자산(安自山)‧사검인(史劍仁)‧왕거(汪炬)‧관추(關추)‧조국동(趙國棟)‧안동만(安東晩)‧송욱동(宋旭東)‧김준(金俊)‧유광세(劉光世)‧김치정(金致廷)‧이종(李鍾)‧유원도(柳源道)‧박태섭(朴泰燮)‧진용학(陳龍鶴)‧백규(白珪)‧이건(李建)‧최승연(崔承淵)‧김희철(金熙喆)‧박우균(朴禹均)‧이춘식(李春植)‧이벽파(李碧波) 등이 회원이었다.
이들 외에도 유자명(柳子明)‧김원봉 등 당시 무한에 머문 한인독립운동가들도 적극 가담하였다. 유악청년회는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승인 하에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지역의 한인관련 사무 일체를 처리하였다.
그런데 유악청년회의 운영을 주도한 인물이 ‘비서(秘書)’ 직의 권준이었다. 또 그는 5인 상무집행위원(권준․안동민․홍의표․진갑수․진공목)의 한 사람으로서, 서무부를 관장하였다. 당시 권준은 국민혁명군 제6군 포병영 부영장으로 재직 중이며, 무한분교 훈련부 교관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한인으로서 중국군의 부영장과 훈련교관 직을 수행하였던 사실과, 유악청년회의 주요 직책을 맡은 사실은 상관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유악청년회가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지시와 지원을 받고 있었던 사실과 연관지워 접근해 보면, 당시 권준의 위상과 역량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의열단과 우한지역 중국국민당 및 중국군 측의 관계가 원활하였고, 권준이 양자 간의 소통을 담당하였을 개연성이 암시된다.
이와 함께 권준은 1927년 상반기 한커우(漢口)에서 개최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반제국‧민족해방’을 표방하며, 제국주의세력의 식민지배에 신음하고 있던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국제적 연대를 지향하였다.
유자명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무한에 있었던 동지들로는 김약산․리검운․권준․안동만․최원․최승년․양검 등이었다. 리검운(李劍雲)은 제6군 포병영 영장이었고, 권준은 부영장이었으며, 안동만은 영부(營附)의 부관이었다.” “북벌전쟁이 승리적으로 진행될 때, 무한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가 성립되어, 중국․인도․조선의 대표가 이 연합회에 참가하였다. 조선대표로는 김규식과 리검운과 내가 참가하고. 인도대표로는 샤두신과 간타신․비샨신이 참가하고, 중국대표로는 왕척진(王滌塵)․휴광록(畦光錄)․로관일(盧貫一)이 참가하였다. … 북벌전쟁 기간 국민정부는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의 경비로 매달 2천원 씩 주었으므로, 이 돈에서 인도대표들의 생활비를 지출하였다”고 한다.
유자명이 조선대표로 김규식․이검운과 자신 세 사람만을 꼽았지만, 다수의 한인독립운동가들이 우한에서 활동하였던 상황에서, 유독 세 사람만 참석하였으리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유자명의 회고에서 거론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이 참가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듯이, 당시 유악청년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동시에 중국군에 재직 중인 한인들 중에서 리더 역할을 하였던 권준의 참가는 상상이 가능한 일이다.
같은 시기에 작성된 일제자료에 따르면, 그는 1927년 9월 27일 창립된 한국유일독립당 남경촉성회(南京促成會)의 회원으로도 참여했다.
3.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활동
이렇듯 권준은 중국군 장교 신분으로서, 직․간접적으로 한인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데,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활성화된 재중 한인독립운동진영의 재정비 움직임과 맞물려, 그의 항일열정도 다시 구체화되었다.
1931년 후반기 의열단은 만주사변으로 고양된 중국민의 반만항일(反滿抗日) 의식을 배경으로, 항일투쟁 노선을 재정비하기 시작하였다. 그 복안은 중국정부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독자적인 투쟁역량을 강화한다는 요지였다.
1932년 초 난징(南京)에 집결한 의열단 지도부는 동북의용군후원회(東北義勇軍後援會)‧동북난민구제회(東北難民救濟會) 등 중국민 항일운동단체를 상대로, 한․중 연합 기구의 구성을 타진하는 한편, 중국정부를 상대로 한‧중 연합전선의 결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의열단의 교섭활동에 있어서는, 의열단 지도부의 황포군관학교 출신 이력이 유익한 인연으로 작용하였다. 1932년 3월 초부터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인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 일명 藍衣社, 이하 ‘역행사’) 서기 덩지에(滕傑)와 사전 접촉하였고, 같은 해 6‧7월 경 중국정부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의 승인을 얻었다.
의열단의 한․중 연합 제의를 수락한 군사위원회 장제스(蔣介石) 위원장은 황포동학회(黃埔同學會)와 역행사 간부들에게 구체적인 지원을 지시하였다. 장제스 위원장이 의열단의 건의를 수락한 데에는, 김원봉과 의열단 지도부의 황포군관학교 출신 이력, 북벌전 과정에서 검증된 한인독립운동가들의 역량, 이봉창‧윤봉길의거를 계기로 형성된 한인독립운동진영에 대한 신뢰감 등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이후 김원봉과 덩지에․간궈쉰(干國勳, 황포군관학교 5기 졸업생)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이하 ‘간부학교’)의 설립을 결정하고, 훈련인원‧훈련기간‧교육과정‧설립경비‧운영경비‧졸업 후 활동 방안 등을 입안하였다.
간부학교의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였고, 설립 목표는 ‘한국의 절대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다. 간부학교 졸업생들의 활동 방침으로는, 一. 일만요인(日滿要人)의 암살, 一. 재만 항일단체와의 제휴, 一. 국내‧만주지역 노동‧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공작, 一. 위조지폐 남발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교란, 一. 특무활동에 의한 물자 획득 등이 결정되었다.
훈련장소로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난징 교외 탕산(湯山)에 있는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찰이 선정되었는데, 당시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통신대 관리 하에 있었다. 간부훈련반은 6개 대(隊)로 편제되어 제5대까지는 중국인들이 수용되었고, 제6대에 한인들이 수용되었는데, 이곳이 곧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였다.
역행사 측은 간부학교 운영을 위한 경상비‧임시사업비는 물론, 졸업생 파견 시 활동자금을 별도로 지급하는 등의 재정적인 지원과 함께, 입교생 교육훈련에 필요한 총기‧탄약 등의 물자와 장비‧인력을 제공하였다. 또 중국군 장교를 파견하여 교육을 보조하였다. 이처럼 중국정부의 물적‧인적 자원이 다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간부학교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은 의열단에 위임되었다.
운영은 교장 김원봉을 정점으로 의열단 지도부가 담당하였다. 설립 초기의 조직은, 교장(주임): 김원봉, 비서 겸 교관: 왕현지(王現之), 군사조: 이동화(李東華)‧김종‧권준, 정치조: 김정우(金政友)‧왕현지‧한일래(韓一來 혹은 高豁信), 총무조: 이집중(李集中)‧삐싱추(畢性初, 중국인), 대부실(隊附室): 신악‧노을룡‧이철호(李哲浩), 의무관실: 다이(戴)모(중국인), 외교주임: 김원봉(겸임)이었다. 권준은 1기생에게 축성학(築城學)을 가르쳤다.
여기까지가 비교적 쉽게 확인이 가능한 권준의 항일역정이다. 의열단 창단멤버․황포군관학교 4기 졸업생․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교관․유악한국혁명청년회 중심인물․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등의 이력은 그의 역동적이고 선 굵은 삶의 자취를 드러내고 있다.
4. 중국군 복무와 독립운동 참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국독립의 사명을 짊어질 청년투사 양성에 진력하던 중, 일제자료에 따르면, 1933년 1월경 “1933년 1월경 김원봉과 의견을 달리하여, 의열단을 탈퇴하고 한커우(漢口)로 가서” 중국군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의견의 차이로 권준이 김원봉과 결별하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결과적으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종래 강고한 인간적 신뢰와 동지적 연대의 토대 위에서 협의 결정되어 왔던 의열단의 운영방식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운영 단계에 이르러서는, 조직규모와 참여인물이 대폭 확대된 상황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었다.
인간관계 또한 규정이나 룰에 의해 지배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며, 대등한 관계의 동지 간에도 상하관계의 계급적 질서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창립멤버라고 할 수 있는 고참단원 이외에, 젊고 새로운 세계관과 교양을 갖춘 인물들이 교관이나 학생으로 대거 충원된 사실은 김원봉과 권준의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그가 김원봉과 결별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후의 동정을 살펴보면, 1934년 6월 현재, 그는 난징에 있는 중국군 부대의 연장(連長)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또 1937년 12월 현재 중국군 상교(上校)로 근무하고 있음이 확인된다〔「要手配不逞鮮人名簿」, 在上海日本總領事館 警察部 第2課調〕. 덩지에(滕傑)의 회고에 의하면, 권준은 삼민주의역행사의 우한(武漢) 및 장시성(江西省) 지역의 정보책임자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중국군 복귀 후 그의 항일운동 행적을 밝히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군대라는 조직이 갖는 폐쇄성, 한인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절대보안이 요구되었던 현실, 더욱이 --일제정보기관의 감시와 한인독립운동을 빌미로 한-- 일제의 압박을 극력 피하고자 하였던 중국정부의 입장 등을 배경으로 하여, 현역 중국군 장교로서 한인독립운동진영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란 극히 위험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1933년 초이래 그의 독립운동 행적은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향후 적극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과제이지만, 1937년 말 작성된 일제자료는 일제기관이 그의 신상과 활동을 꾸준히 감시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하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부단히 한인독립운동진영과의 연계와 참여를 시도하였음을 반증한다고 할 것이다.
이후 1944년 일제의 패망에 대한 전망이 어느 정도 가능한 시점에서, 그는 임정 활동에 합류하여, 내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일제말기 임정활동에 합류한 사례에 대해서는, 김홍일․박기성․박시창․채원개․최용덕 등의 경우와 더불어, 추후 검토해 보아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끝으로, 의열단의 동지이며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인 김원봉 등과 달리, 그가 중국군에 복무하며, 직․간접적으로 한인독립운동을 지원해 온 사실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현재적 관점에서 되짚어 보기로 하자.
물론 중국군에 복무함으로써 --한인독립운동진영에서 활동하는 여타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명의 안전과 신분의 안정을 담보받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항일전쟁기 중국의 주류사회로서, 획일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이 수직적으로 강요되는, 군대조직 내에서 외국인(특히 ‘조선인’으로서)의 신분으로 생활하면서, 맞닥뜨리는 일상사의 어려움과 상처를 상정해 볼 때, 이들의 삶의 질이 나았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자신의 조국을 되찾고, 자신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항일독립운동의 행로로써, 중국군 복무라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지 주류사회에 적극 뛰어들어 자신의 능력과 위상을 키워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의 조국과 민족에게 유익하고 유리한 공헌을 추구해 나갔다는 점은 되새겨 보아야 할 일이다.
5. 해방 후 국내활동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우한지역 교포선무단(僑胞宣撫團) 단장과, 광복군 5지대장에 임명되어, 혼란기 중국사회에서 동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진력하였다.
1946년 12월에 귀국하였으며, 이후 건군(建軍)에 참여하였다.
1959년 10월 27일 충청남도 대덕군 유성면 구암리 63번지에서 별세하였다(향년 65세). 1968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묘소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102번’에 있다. 가족으로는 부인 이석우(李錫雨)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장녀 權泰玉, 장남 權泰烋, 차남 權泰環)를 두었으나, 모두 고인이 되었다.
첫댓글 제발 이런분들이 장관을 하고 외교관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겹습니다. 군대도 안 가본 등신들이 정치하는 현실이...
우리 외할머니 쪽이시네요..권씨중에 친일매국노 유명한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항일운동하신분도 계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