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성결교회 신학자들 모임에 잠시 참석했는데,
내 후배가 되는 어떤 교회사 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신학대학교에서 성서에 대해서 역사비평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독일의 쉴라터(?)같은 대학자도 역시 축자영감설에 동의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한동안 머리가 띵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축자영감설 운운하고 있는 건지
순간적으로 2백년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거명하고 있는 그 신학자에 대해서 잘 모르겠거니와
그가 말하는 대로 그 신학자가 축자영감설을 주장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가 축자영감설을 떳떳하게 받아들어야 한다는 주장만큼은
매우 신학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식적이지도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축자영감설 운운한 것일까?
사실 한국교회는 교파를 초월해서
성서에 대한 축자영감설이 거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축자영감설은 말 그대로
성서의 한자 한자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17,18세기에 유럽에서 축자영감설이 횡행했던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주장이 왜 나왔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혹은 삶의 자리를 늘 염두에 두고 그런 걸 논의해야 한다.
종교개혁을 거친 다음에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의 논리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 시대의 신학사조를 가리켜 우리는 정통주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함으로써
그 정신을 상당 부분에서 놓치고,
도그마에 치중하고 말았다.
그중의 하나가 곧 축자영감설이다.
그들이 성서를 축자영감설로 주장하게 된 이유는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에 닿아있다.
그게 우리의 논의에서 핵심이다.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권위에 대립적인 의미에서
'솔라 스크립투라'를 제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성서만이 모든 신앙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들은 극단적으로 축자영감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축자영감설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로마의 교회전통과의 대립개념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신학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축자영감설을 무조건 개신교의 성서관으로 도입하려는 것은 넌센스다.
참고적으로 칼빈이 성서를 해석할 때 '성령의 내적 조명'을 언급했다고해서
오늘날 툭하면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비슷한 우를 범하는 일이다.
칼빈도 역시 성서 해석의 권위가 교회에만 있다고 하는,
결국 사제와 교황에게만 있다고 하는 로마 가톨릭과 대립적인 차원에서
성령의 해석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령의 조명을 언급했다고 보아야 한다.
루터의 솔라 스크립투라와 칼빈의 성령의 조명이
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축자영감설로 규합된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런 부분은 교리사적인 검토가 좀 더 있어야 한다.
어쨌든지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오랜 신학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무조건 성서에 대해서 축자영감설의 구도로 접근하고 있다.
여기서 벌어지는 문제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성서라는 텍스트를 해석학적 토대 없이 해석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는 흡사 어느 시인의 시를 신문 기사처럼 읽으라는 것과 같다.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보존하려는 것 보다는
오히려 해석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큰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성서가 진리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보편적 해석에 의해서도 진리로 인정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석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니까 결국 그것을 거절하기 위해서
축자영감설이라는 요새 안으로 숨으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서는 성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
그럴리가 있겠는가?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신출귀몰한 마술이나 주술이 아니라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성서기자들에게 활동하셨다.
시인들이 영감을 얻듯이 말이다.
따라서 그 성서에 오늘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도 역시 이런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비록 그런 진리론적 해석학이 고단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길을 포기하고
안전한 축자영감설에 숨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자폐증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글자 한자한자 다 틀리지 않고 원본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믿는 축자영감설의 근본 이해는 사본비교를 통해서 맞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글자의 틀림에도 불구하고 성경진리는 전혀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인 것이고 그 성경을 보존하신 이가 성령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은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는 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성경무오설은 인정하되 축자영감설은 거부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 자체를 거부하고 성경비평학을 따르고 있다....맞나요?
머 성경무오설이 뭔지는 몰라도, 현대인의 성경, 표준새번역, 개역성경, 한글킹제임스버젼..수없이 많은 성경이 있는데 당근 잘못된 내용도 있죠. 일부러 번역을 다르게 한 성경도 많은데... 중요한건 성경에 씌여진 본래취지는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본래취지도 저절로 지켜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이 변질 되지 않도록 우리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뭐에 속하나요?
첫댓글 성경 무오설, 축자 영감설 등에 대한 성경적 접근이 필요한 것 같아 다양한 의견을 가진 님들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축자영감설은 말 그대로 성서의 한자 한자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윗글 정목사의 말, 축자 영감설의 의미도 모를는 자가 축자 영감설을 비판하고 있군, '도올'이랑 친구해서 요즘 잘 나가는구먼!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설명부탁합니다. 일반 성도들(저같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성경무오 축자 영감 자체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말이 너무 어려워서 쉽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축자영감설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숫자의 부분 등에서 잘못된 부분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무오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리와 원리는 훼손되지 않고 기록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글자 한자한자 다 틀리지 않고 원본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믿는 축자영감설의 근본 이해는 사본비교를 통해서 맞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글자의 틀림에도 불구하고 성경진리는 전혀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인 것이고 그 성경을 보존하신 이가 성령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아멘..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은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는 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성경무오설은 인정하되 축자영감설은 거부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 자체를 거부하고 성경비평학을 따르고 있다....맞나요?
머 성경무오설이 뭔지는 몰라도, 현대인의 성경, 표준새번역, 개역성경, 한글킹제임스버젼..수없이 많은 성경이 있는데 당근 잘못된 내용도 있죠. 일부러 번역을 다르게 한 성경도 많은데... 중요한건 성경에 씌여진 본래취지는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본래취지도 저절로 지켜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이 변질 되지 않도록 우리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뭐에 속하나요?
설경이 틀리므로 하나님의 권위가 손상 받는다면 성경은 틀린 곳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고 성경이 없던 시대에 구원이란 생각도 못해 볼 일이겠군요
아담시대에도 노아시대에도 아브라함시대에도 성경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계셨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능력없는 분이시겟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