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독립군과 독립투사, 양민들이 잔학한 일본군에 붙잡혀 온 집결장이다. 일본인에 체포 되어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대기 하고 있다. 손을 뒤로 묶인채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다. 1928년 이때부터 일본군은 악랄하고 잔혹한 살육의 강도를 높인다.
독립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 하기 위하여 일본도를 손질하는 일본군인 놈들.
독립군, 독립투사를 처형장소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다.
일본군놈의 장칼에 목이 떨어지는 독립군-죽일 놈들
일본군 놈들에 끌려 가는 독립군 의병장
무기도 빈약하고 의복도 남루 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놈들을 해 치워야 겠다는 의기 투철한 의병대들 모습.
총검으로 처형하기 위해 담장 쪽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미 총검에는 선혈이 묻어 있다
체포된 독립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을 칠 때 넘어 가지 않도록 팔을묶고 뒤에서 당기고 있다. 일본인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촬영한 것이다.
개를 풀어 인간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결국 총살로 생을 마친다.
독립군 간부의 처형 장면이다. 목을 치기전 뒷편 일본군이 웃는 모습을 볼 때 분노보다 일본의 양심과 목적을 혼돈하게 한다
독립군 병사를 작두로 목을 짤라 공중 높이 매달아 놓았다. 추운 겨울 날씨로 오랫동안 매달아 경각심을 주기위해 인간이 할수 없는 최악의 형벌을 자행 했었다.
죽은시신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화장을 시켰다. 온 마을이 유해로 가득하고 일본의 원폭 피해처럼 보인다.
손을 뒤로 묶고 물에 수장하는 처형. 처형이라기 보다 학살이라고 하는게 맞을것 같다.
일본 토벌군인 들은 OO없이 민간인 까지 처형 했다. 떨어진 목을 손에 쥐고 미소까지 보이는 것은 사람 목숨을 장난삼아 학살하는 것을 증명 할수 있는 장면이다.
일본놈 들은 포로가 된 민간인 과 독립군을 OO없이 목을 잘라서 담장 밑에 상품처럼 진열하여 두고 있다. 독립군 용사들은 죽어서도 한결같이 한을 품고 눈을 감고 있다.
생매장 되어지고 있는 양민들. 일본놈들의 잔혹함을 엿볼수 있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들은 숨이 끊어질때 까지 대한독립을 원했다.
일본군 의사 간부가 세균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마취도 없이 손을 묶고 해부하고 있다, 복부에 창자와 내용물이 나오고 일본인들은 입 마스크하여 지켜 보고 있다.
일본군들이 처형하기전 목에 수건을 감아놓은 것은 칼이 목을 치기전 잘린 몸통에서 품어 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수건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손을 뒤로 묶고 칼로 살육하는 장면.
지독한 고문. 하의가 벗겨지고 혹독한 고문뒤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나무 벌목 과 혹독한 노역을 시키고 난뒤 결국 모두 처형되었다.
총검으로 처형당하는 모습이다. 일본인의 입가에 미소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장면. 천벌을 받을 놈들이다.
일본도로 목을 자를려고 고개를 새우고 있다.
잔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처형하는 순간.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상태.
독립군의 목은 이미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 순간.
처형후 두병사의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찰영.
죽음을 기다리는 양민들 일본인 감시아래 손이 뒤로 묶여져 있다.
생매장된 양민들 가족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는 장면이다. 죽은사람의 표정에서 일본인의 잔혹한 흔적을 엿볼수 있다.
처형을 기다리는 소년투사.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잔악 무도한 일본군들이 대량 학살 하고난 뒤 처참한 광경. 교랑에 즐비한 시체들 중에 뒤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과 애국지사의 가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살펴 보고 있다.
잔혹한 살육 장면(1942) 옷이 벗겨진 여인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목은 짤라져 있고 얼굴 모습은 등뒤로 돌려 져있다.
OO후 총으로 치부에 발포한 장면.엉덩이에 총상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음부를 일본군이 가려 좔영 하였다.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는 사진이다.
한국 여인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본군들. 눈에 띄는 여성은 모두 끌고가 OO후 살해했다.이런 여성보급을 당담하는 일본군을 항상 여러명의 한국여성을 데리고 다녔다.
수장된 시신들. 손을 뒤로 묶고 저수지에 수장시켰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 에게는 긴막대기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곳으로 몰아 넣어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 한 후 불 태웠다.
(1937년)허탈한 아버지 죽은 어린 자식 시신을 물건 처럼 들고 있을 만큼 어이가 없는 학살 이였다.
여성의 옷을 벗기고 마구 살육당 했던 참혹한 현장. 모래사장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 일본군이 1943년 후퇴하면서 최후 발악을 자행한 흔적들이다.
(1938년)죽이는 방법 시범 실습 현장 장면이다.강변에서 총검으로 살육하는 실습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인들은 관심 깊게 보고 있다.
살이 떨리는 공포.두사람의 양민이 포로가 되어 일본인에게 두손 모아 애원하는 모습이 보이고 일본군은 무엇인가 소리 치고 있다.
산더미 같은 시체. 여성의 하의가 벗겨져 있고 하체에선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다.
집단 학살. 가슴에는 죄명아닌 죄명을 달아놓고 사살했다. 얼굴의 선혈을 보아 총살이다.
이성 잃은 일본군. 일본군은 여성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장난하고 있다. 전쟁과 관계 없는 일이다. 일본의 숨은 근성을 엿볼 수가 있다.
부녀자 OO. 일본 병사의 손을잡고 애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미 젖가슴이 드러나고 반항을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수난이다.
수장된 시신. 손을 뒤로 묶고 못에 수장을 시켰다. 막대기는 위에서 누르고 있다. 살기 위해 얼마나 바둥 거렸는지 짐작이 간다.
갓난 아기의 죽음. 인형처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시체. 일본 놈들은 전쟁으로 이성을 상실 했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 잡아온 양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부녀자 집단사살. 엄마와 함께 도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흐르는 선혈이 계단을 적시고 있다.
집단 사살 현장. 오른쪽 일본군이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부녀자 절규. 하체를 강압에 의해.(차마 설명 할수 없음) 손에 실반지가 보인다. 단란했던 가정을 등지고 결국 정신대로 갈것이다. 여성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한숨 뿐이다.
작두로 처형 직전. 작두로 목이 곧 짤러 질것이다.
작두로 목을 짜르고 있다. 작두 앞에 잘려진 목이 하나 보인다.
작두로 수없이 잘려간 양민들의 모습.일본군이 장난 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부분을 가르키게 해놨다. 저런 끔직한 일은 일본군에겐 단지 장난에 불과했다.
일본 관동대학살 (1923년) 1923년 일본 관동일원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0여만명이 사망 했다 민심이 극에 달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시켜 한국교포 약 5천명을 피살 하였다. (몽둥이,죽창 으로 학살)
창고에서 독살. 엄청난 시체가 당시 혹독한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노역자가 운송을 마치면 죽음 이다. 부릴때로 부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이렇게 죽였다.
3명의 의병 총살 현장.영국여행가 비숍 씨가 촬영한 것이다. 영국왕립 박물관에 소장된 자료.서대문 형무소뒤 야산 공동 묘지에서 독립 의병 3사람이 총살 당하는 모습이다.
일본군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기로 한것인다. 어린아이들 까지 죽여 불태워 졌다. 온갖 수단으로 자행한 행위는 사진속에는 피할수가 없다.
독립 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된 유해들. 잔혹한 행위로 소리없이 죽은 영혼은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선량한 양민을 단 칼에 처형하는 지구상에는 하나 밖에 없는 족속들이다.
<죽음 앞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당당한 독립투사.
참아 볼수 없는 사진이다.
길거리에서 일본군인놈에게 OO을 당하고 맞어서 내장이 나온 상태.
일본군 종궁 위안부(정신대)의 거실 내부-이곳에서 일본군은 성욕을 채웠다.
근심이 가득한 한국여성. 일본군 위문품을 강제로 하는수 없이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노리게로 끌려 갔다.
종군 위안부에 들어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 병사들.
종군 위안부의 음부를 노출하게 하여 찍은 사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로 실려가는 위안부.
위안부의 휴식시간.
일본병사 근무지에도 불려간 종군 위안부?
우리 력사 바로 알기_20. 경신년대학살사건
잔악한 일본강도 연변땅 피로 물들이고 조선족백성 혈육 잃고 삶의 터전 잃어
무고한 백성들을 "토벌" “일본침략군은 중국땅에 들어온 그날부터 반일부대는 물론 무고한 백성들까지 <토벌>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백운평전투때에도 적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사람들을 젖먹이까지도 빼놓지 않고 죄다 집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휘둘러 쏴죽이고는 시체를 불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청산리전역에서 대패한 일본침략군은 보복을 무고한 백성에게 감행했는데 그 잔인성과 참혹성은 인류력사상 찾아보기 힘든 사례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경신년대토벌”은 사실상 “경신년대학살사건”이라고 피력했다. 청산리전역후 반일부대가 안전하게 로령일대로 전이한후 일제는 약 8개월간 중국의 조선족사회를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조선족학교와 교회당 심지어 식량, 가옥마저 무차별 소각하는 천인공노할 참변을 빚어냈다.
“일본군은 10월26일 간도령사관에서 작성한 <배일부락 및 학교조사표>에 근거하여 연길현내에서는 동불사, 태평구, 와룡동, 소영자, 의란구를 비롯한 23개 마을과 흥동학교, 연신학교, 명신학교 등 18개 학교, 화룡현내에서는 상광포, 어랑촌, 류동, 청산리, 청파호, 장재촌, 걸만동 등을 비롯한 12개 마을과 명동학교, 창동학교, 광동학교, 정동학교 등 19개 학교, 왕청내에서는 류수하, 대감자, 덕원리, 서대파, 봉오동, 합수평, 라자구 등을 비롯한 11개 마을과 명동소학교, 원동소학교 등 5개 학교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소탕>과 학살을 감행하였다.”(김춘선 “경신참변연구”)
중국지방관원 장순사(張巡師)와 포대사(鮑大師)등이 1920년11월5일 외교총장에게 한 보고에서는 “간민들이 모여사는 부락을 한당들의 근거지라고 하면서 온 마을을 불살라버렸으며 조선족농민들 대부분을 살해했다. 조금이라고 의심스러운 마을을 골라 몇집 또는 몇십집씩 불살랐고 몇 명 또는 몇십명씩 죽여버렸는데 가는곳마다 불타버린 집과 시체가 있었다. 이들 태반이 밭가는 종민들이였지 결코 무기를 들고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는 무리가 아니였다. 이렇게 마음대로 참살하는 것은 실로 인간성이라곤 털끝만치고 없는 일이다”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피로 물든 연변땅 “경신년대학살사건 하면 흔히 <장암동(獐岩洞)참안>을 전형으로 렬거하고있는데 그것은 당시 카나다 목사들이 조사한 자료를 신문을 통하여 세상에 공포하였고 지금도 그 기록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변에는 <장암동참안>같은 사건이 아주 많습니다. 의란구는 여러차례 토벌을 당했는데 구룡평, 고성촌, 류채촌, 태양촌, 련화촌은 일제의 살인현장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일제가 마수를 뻗치지 않은 곳이 연변 어디에도 없을것이라고 한다. 구룡평은 의란구의 중심지이고 고성촌은 구룡평에서 서북쪽 15.5킬로메터 떨어진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분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류채촌은 구룡평에서 동북쪽 3.5킬로메터 떨어진 산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태양촌은 구룡평에서 서북쪽 5킬로메터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고 남동이라고도 불리우는 련화촌은 구룡평에서 15.3킬로메터 떨어진 산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의란구에는 당시 간도국민회와 의군부가 있었는데 방초령에다 국민회군의 사관훈련소까지 설치하고있었다. 의군부가 고성촌, 련화촌 등지에 자리잡고있어 의란구는 반일부대의 탄탄한 후방기지이기도 했다.
1920년10월부터 일본군은 의란구일대를 여러차례 “토벌”하였다. 1920년10월20일 일본군 제19사단 이시쯔가대대는 의란구토벌을 감행하여 리동근, 리종옹, 김득산, 윤남극, 강경성, 김해룡, 김순지, 김락세, 리붕재 등을 살해하였다. 며칠후인 24일에는 일본군 74련대가 의란구를 토벌, 양만홍, 리태미, 리근치, 리렬 등 10여명을 살해하고 학교 1채와 민가 5채를 소각해버렸다. 11월3일에는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반일부대의 군자금모집과 정보수송을 하였다는 리유로 일본군 76련대가 재차 의란구를 토벌하여 리국화, 리일재, 김렬, 리명초, 리진철, 리창옥, 김성운, 리종란, 리종눌, 리여익, 리여영, 리병재, 허익, 최병조 등 16명을 살해하였다. 11월3일, 5일 일본군 76련대는 불령선인가족이라는 리유로 북의란구에서 김창홍, 로우선, 김렬의 집을 비롯한 31채의 민가를 불살라버렸으며 3일과 4일에는 태양촌에서 반일단체를 조직하고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는 리유로 교원 리우선 등 2명과 농민 리주향, 리수악 등 13명을 살해하였다. 11월5일 의군부 총무 리우익, 서무부장, 리을, 홍정필을 비롯한 10여명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였다.
당시 연변에 파견되여 현지조사를 한 “대한신보” 기자는 “독립신문”(1920년12월19일)에 이렇게 보도했다. “의란구 남쪽은 전부 30여호 되는 리성(李姓)촌인데 3명이 근히 성명을 변하여 해탈되고 그 여의 전수가 학살되였으며 모씨의 4형제는 소화(燒火)되는 가옥중에 던져넣어 분살(焚殺)하였다 합니다. 그 외에 수 3명 혹은 10여명의 학살은 없는데가 없습니다. 방화도 그러합니다.”
당시 연변주재 림시정부 통신원이 “독립신문”(1920년12월8일)에 투고한 조사자료에 의하면 26265명이 학살되고 71명이 OO당했으며 3208채의 민가, 39개의 학교, 15개소의 교회당, 53265섬의 곡식이 소각되였다. “독립신문”은 1920년12월19일자 보도에 상기 조사통계의 추가조사에서 연변지구에서 146명이 더 학살되고 민가 78채와 학교 2개소, 교회당 4개소가 더 소각되였다 했다.
침략자의 야수적만행 당시 룡정에 거주하고있던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의사인 말틴이 쓴 연변참안 “견문기”가 서방 각 나라 신문에 보도되여 세계를 들썽해놓았다. 하여 일본침략자의 야수적죄행이 세계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견문기”에는 이런 대목이 적혀있었다.
“나는 10월31일 일요일, 북경식마차로 12마일 떨어져있는 비암촌을 향해 룡정에서 출발했다. 10월30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 데서였다. 그날 날이 채 밝기전 무장한 일본군이 촌락을 포위하고 쌓아놓은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들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채 죽지 않으면 그우에다 불붙는 곡식단을 들어다 무지군 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세 번이나 사격한 후에도 불속에서 숨이 붙어 일어나는자가 있게 되면 총창으로 찔렀다. 마을 성년남자들이 한사람도 남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광경을 옆에서 보도록 부녀자들을 강박하여 끝까지 서있게 하였다. 그런후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 천장절(天長節)을 경축하였다. 나는 19채의 집이 불에 탄 것을 사진 찍고 총살당한 시체도 사진 찍었는데 이는 일본군이 방화한지 36시간이 지난후였다.
나는 학살되고 방화당한 32개 촌의 마을 이름과 정황을 잘 알고 있다. 한 마을에서는 145명이 살육되였다. 30명이상 살해된 마을이 많다. 서구동에서는 14명을 한줄로 세워놓고 총살한후 석유를 쳐서 불태웠다. 일본군사령관은 외국인에 대한 인신안전을 보장하여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려행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의 살인수단은 극히 잔인하였는데 연길현 와룡동의 창동학교 교사 정기선은 얼굴가죽을 몽땅 벗기우고 두눈을 도리운채 처형당했다. 어떤자들은 총창에 찔려 아우성치는 참상을 보고 미친 듯이 웃으면서 기뻐했으며 2~3세 되는 어린이를 총창에 찔러들고 어린아이가 아우성치는 것을 보고 손벽을 치며 좋아했다. 투도구에서는 전선을 절단하였다는 협의로 12살나는 조선족아이를 붙잡은후 아무런 조사도 없이 목을 잘라 전선줄에 꿰여 효시했다. 연길현 춘양향(왕청현 하마탕)일때에서는 무고한 조선인 3명을 붙잡아 쇠못으로 손바닥에 구멍을 뚫은후 쇠줄로 손과 코를 꿰여 10여리를 끌고다니다가 총살하였다. 연길현 제3구의 남녀로소는 아무런 리유도 없이 사살당하였고 의란구의 12명 조선족들은 부근의 산고개에서 기무라지대의 토벌대에게 생매장당했는데 이듬해 봄에 마을사람들이 시체를 찾아보니 온통 칼자리뿐이였다. 토벌도중 야수같은 일본군은 소영자에서 25명 부녀를 OO하였으며 이도구에서도 20여명 부녀를 OO하였다. 간약한 일본놈들은 소녀를 붙잡기만 하면 꼭 OO한 다음 학살하였다.
당시 “독립신문”은 간도학살사건을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불쌍한 간도동포들 3000명이나 죽고 수십년 피땀 흘려 지은 집 벌어들인 량식도 다 잃어버렸다 척설이 쌓인 이 겨울에 어떻게 살아들 가나 뻔히 보고도 도와줄 힘이 없어 속절없이 가슴만 아프도다 나라 잃고 기름진 복지를 떠나 삭북의 살길을 그 동지조차 잃어버렸구나 오늘 밤 강남도 추운데 장백의 모진 바람 오죽이나 추우랴 아, 생각키우는 간도의 동포들
일본침략자들의 야수적만행에 전국인민들이 분노하여 일어났다. 북경, 심양, 장춘, 길림 등지의 학생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강연회, 집회를 열어 일본침략자의 침략죄행을 성토하였으며 북경정부와 봉천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주권을 보호할 것을 청원하였으며 일본침략자가 연변에서 즉각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날로 앙양되여가는 연변지구의 여러 민족들의 반일투쟁과 전국인민들의 강력한 항의밑에 일본침략자들은 1921년5월 할수 없이 철퇴하였다.
첫댓글 말이 않나오네...쪽바리넘들...하여간 ...이 지구상에서 씨를 말려야 할 벌레같은 넘들.....박멸해야 하는데.....
바퀴벌레보다 더 혐오 스러운 일본놈들 대지진에 없어져라....
정치인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아직도 당파싸움질이나 할까여.............쩝 우리나라가 강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느낌이 중국의 남경 대학살 사건사진도 뒤섞여 있는것 같은 느낌이네요.. 또 선거가 다가오니.. 친일파소동을 일으키고 싶은 모양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