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오피니언
[선데이 칼럼] ‘잃어버린 30년’ 겪은 일본, 따라가는 중국
중앙선데이
입력 2023.09.23 00:08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금융위원장
저출산·고령화·저성장·저물가
중국의 ‘일본화’ 경고 잇따라 나와
저성장 고착화 남의 얘기 아냐
구조개혁과 혁신투자가 절실
21세기 현대경제사는 몇 차례 큰 변곡점을 지났다. 2000년의 세계는 총생산(GDP 기준) 30%가 넘는 압도적 1위 미국에 이어 일본이 근 15%를 차지하는 구도였고, 당시 신흥국인 중국의 비중은 3% 남짓으로 미미했던 때였다. 2010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단일 국가로는 2위에 올라섰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에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의 GDP 합계를 넘어 명실공히 G2 반열에 올랐다. 코로나 사태를 지난 2020년 이후 세계 경제 25%를 점한 미국에 18%의 중국이 추격하는 모양새였는데, 이제 또 다른 전환점을 예고하는 중국경제의 구조적 저성장이 새로운 글로벌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선데이 칼럼
반세기 전 필자가 유학길에 올랐던 시절, 학계든 업계든 관심은 온통 일본이었다. 2차대전 패전국에서 기적적 경제성장을 일궈 낸 일본으로부터 배우자는 재팬 붐이 지구촌을 휩쓸었다. 일본식 기업경영과 성장전략은 새로운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린 30년’의 서막을 앞두게 되는 시기였다.
세계은행(WB)으로 자리를 옮긴 1980년대 중반 첫 출장은 개혁개방의 문을 연 중국이었다. 나는 그 후 중국 천지개벽의 역사적 현장을 오랫동안 출입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이후 지정학적 갈등 고조, 글로벌 공급망 재편, 산업 대전환 가속화 등 대외변수가 오래 누적된 내부 구조적 문제와 겹치면서 중국 상황은 급변했다.
얼마 전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표지 기사는 40년에 걸친 중국의 기적적 성장모델이 막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올해 연간 목표 5% 성장 페이스는 주요국보다는 높지만 지난 20년간 평균 근 10%에 비해 크게 떨어졌고, 지방정부 과잉 부채와 부동산 디폴트 위기로 금융시장 불안과 외국인 투자 이탈이 가속화하며 GDP 성장률 예상도 줄줄이 낮춰지고 있다. 고성장 시대로의 회귀는 물 건너갔고 구조적 장기 침체 가능성이 커지면서 2030년께에는 중국 GDP 규모가 미국을 넘어서리라는 예상도 자취를 감췄다.
중국이 정점을 지났다는 ‘피크 차이나(Peak China)’의 단정은 이르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최근 블룸버그 분석에 따르면 중국은 결코 미국 GDP를 넘어서기 어렵고 혹여 잠시 2040년대 1위로 올라서더라도 곧 다시 2050년대 1% 저성장 구도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중국의 ‘일본화(Japanification·일본형 장기 불황)’ 경고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화는 저출산·고령화의 인구구조 악화와 부동산시장 거품 붕괴 속 저성장·저물가의 장기 침체를 일컫는다. 일례로 일본의 1990년부터 7년간 물가 궤적과 중국의 2016년 이후 현재 인플레이션 추세가 매우 유사하다는 분석 등과 함께 중국이 일본형 저성장 패턴을 따라간다는 평가가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의 지적처럼, 중국은 일본보다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정학적 갈등과 인구구조 악화 측면에서 중국은 일본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다. 과거 일본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이후 맞았던 위기와 달리 중국은 아직 중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고 민간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공산당 주도의 전체주의 체제도 중국의 추가적 한계로 꼽힌다. 근 50%에 달하는 청년실업률로 젊은 세대의 불만이 증폭되고 “부유해지기 전에 고령화가 먼저 왔다”라는 자조적 의미의 미부선노(未富先老)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지난 8월 산업생산과 소매 판매가 예상보다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중국경제가 저점을 통과하고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으나, 부동산 위기 우려는 여전하고 한 달 수치로 추세적 변화를 가늠하긴 무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올 2분기 중국 주요 도시의 신규 채용 보수 평균이 2015년 이후 처음으로 감소하는 등 중산층 불안이 커지고 소득·소비 감소에 따른 성장률 하락으로 중국몽은 멀어지면서 시진핑 체제에 정치적 부담이 되는 상황이다.
『이번엔 다르다』는 제목의 하버드대 케네스 로고프와 카르멘 라인하트의 저서는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지난 800년간 발생했던 수많은 경제위기에 대한 검증분석에 따르면 ‘과도한 부채가 금융위기의 도화선’이라는 공식은 깨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대내외의 도전적 경제 여건 하에서 적극적 재정의 역할은 필요하지만 경기 침체와 부채의 악순환을 겪어온 일본 등의 사례는 건전 재정 회복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튼실한 재정은 특히 소규모 개방 경제의 마지막 보루다.
저성장 고착화 경고는 남의 얘기 아니다. 우리는 지금 3高(물가·금리·환율) 충격에다 세수 결손과 과잉 부채로 경제 전망에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다. 올해 1%대 중반 성장은 25년 만에 일본보다 낮고 내년 2%로 올라서지 못하면 70년 만에 2년 연속 1%대 저성장 기록이 나올 판이다. 구조적 장기 침체의 주범은 감당하기 어려운 빚이고 부채 감축의 바른길은 역동적 성장뿐이다. 국가와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개혁과 혁신투자가 그래서 절실하다. 나아가 삭발이나 단식 투쟁의 구시대 정치풍토를 넘어 이성적·합리적 정치사회 문화의 안착이야말로 선진경제 구축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인프라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금융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