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참으로 힘든과정을 거쳐 드디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세상에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각각 몆 권의 저작을 낸 바 있는 편집위원들 (박지향,김철,김일영,이영훈) 이 이번 책의 출간에 그 어느 때와도 다른 감회를 느끼는 것은 이 책이 탄생하기까지 격은 색다른 고난의 과정 때문이다 책의 구상이 구체화된 것은 2004년 초가을이었다 그 무렵 1980년대에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인식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 는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지면을 통해 접하고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의"직무 유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몇몇 지인들에게 뜻을 물었고 세분이 기꺼이동참함으로써 편집진이 구성 되었다.
당시 편집위원들이 착안한것은 지난 20여 년간 학계의 부단한 연구로 <인식>에서 제기된 주장들의 잘못이 지적되고 수정되어왔는데도 그런 사실이 학계에만 국한된 챼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간 우리는 진척된 수준높은 학술 논문들을 선정해서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제시해주자는 목표를 세웠다. 세로 쓰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발표된 글들을 추려 책으로 묶기로 한것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역사 인식을 조금이라도 균형있게 돌려놓는 일이 너무도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였었다.
편집위원들은 최근 발표된 한국 근현대사 연구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라고 생각되는 글들을 엄선했고 각 필자들은 그 글들을 대폭 가필해 실었다. 물론 우리 책이 미처 망라하지 못다른 수준높은 연구 업적들이 많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데 출간 과정에서 두 차레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이 모든작업을 함께했던 출판사가 아무런 구체적인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더 이상 작업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통고해온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서로 다른 두 출판사가 똑같은 행태를 보였다.이 작업은 어디까지나 우리 학계의 학문적 발전을 위한 것이고 어떤 정치적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는 점을 누누이 설명하고 계약을 맺었던 우리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물론 그동안 일부 언론이 이 책의 내용을 지레짐작해서 이리저리 기사를 써온 것은 사실이지만 편집위원들은 이 책이 그 어떤 현실정치적 함의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혔기에 때문에 출판사들의 태도는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어찌 되었던 세 번째 만난 책세상에서<재인식>은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지만 그런 황당한 일을 두 번씩이나 겪어면서 책의 출간은 반년 이상 늦어졌다.<재인식>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독자들께는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또한 출판사가 바뀌면서 교정 작업을 여러번 해야 했던 필자들께도 송구스러울 뿐이다. 이번 일을 격어면서 우리 지식계의 편향성. 비판과 토론을 수용하지 않는 편협함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새삼 실감하고 절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재인식>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인식>보다 훨씬 넓은 시간과 공간을 주제로 한다.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인식>이 드러낸 두 가지문제점 .즉 민족 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이 우리 역사 해석에 끼친 우려를 담고있다.민족 지상주이와 현대사에 대한 좌파적 해석이 그동안 우리 지식계를 압도해왔다는 사실은 최근 자주 지적되고 있으며 이 두가지 성향이 야기하는 부정적 효과에 대해서도 이미 많이 언급되었기에 길게 거론할 필요가 없을 터이지만 간단히 정리해보기로한다.
민족주의는 본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다 그것은 자기 민족의 우월함을 주장하고 증명하기 위해 다른 민족들을 깍아내려야하는데 이점에서 민족주의는 굳이 배타적일 필요가 없는 혈육이나 고향에 대한 애정과 구분된다 우리 역사에서 특히 민족 지상주의가 야기하는 문제점은 첫째 그것으로는 고난의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우수한데 다른 나라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의 비극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말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남 탓을 하기 전에 우리 잘못이 무엇이었나를 자성해야 하고 그럴 때 우리가 참으로 많은 것을 잘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100년 전 국가의 생존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위정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사회 지도층은 또 무슨 노력을 했는지에 생각이 미칠때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지난 100년 전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다 세계12위의 수출대국이 된 지금 나라 망할 것을 걱정하느냐는 식의 안일한 태도가 왜 문제인지는 역사상 강대했던 많은 국가들이 어떻게 왜소화되거나 사라져갔는지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족할 것이다. 민족 지상주의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고있는 "우리민족끼리" 라는 논리와 관련된 여러 양태에서 잘 드러난다. 민족 지상주의는 민족이 다른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고 지고의가치로 부상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민족끼리" 라는 기상천외한 이념을 국민앞에 내세우면서 그에대한 반대 목소리를 짓누르고 있다. 민족에 앞서 인권과 자유가 먼저라는 외침은 민족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또 하나 우리가 <인식>에서 드러난 역사 해석을 우려하는 이유는 그것이 "좌파적" 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다고 <재인식>이 역사 인식이 우파적 역사 해석이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인식>의 역사 인식이 너무도 편협하고 균형 감각을 잃고 있음을 걱정하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는 공과 가 있기 마련이며 그것을 공정하게 보여주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인간 본성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과거를 해석하고 비판해서는 제대로 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도덕론자나 윤리학자라면 모를까 역사가는 냉철한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과거를 돌아보아야한다. 우리는 중요한 이 두 가지가 <인식>에서 간과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재인식>이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균형 잡힌 역사관으로 역사에 대한 편협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은 태도이다. 유럽은 전제왕정으로부터 시민사회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수세기에 걸쳐 겪었다. 반면 우리는 그런 나라 만들기 과정을 단 수십 년 만에 치러야 했고 그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따랐다. 생전처음 접한 민주주의는 시행착오를 거쳐 조금씩 습득될 수밖에 없는 외래의 것이었다. 그 사정은 집권층에게도 대중에게도 지식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후세에 태어난 운 좋은 사람들에게는 마치 안개 자욱한 길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암담함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암중모색에서 일어난 시행착오에 현재의 잣대를 들이대고 비난하기전에 그 사정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역사가라면 역사가 얼마나 천천히 진행하는지 역사의 강은 때로는 곧장 흐르지만 때로는 굽이굽이 휘돌기도 하고 되돌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국민국가가 무엇인지 시민의 권리와 의무는 또 무엇인지를 모른 채 나라 만들기의 첫 삽을 뜬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를 따뜻하게 이해하고 싶다. 우리는 인간 삶의 증층적 모습에서 애틋함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일제에 종속된 위치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처음 맞부딪힌 근대성에 환히를 느낀 식민지기를 산 우리 선조들의 복잡한 심사가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자력으로 일구어낸 근대성이었다면 20세기 전반기에 우리가 겪었던 식의 근대성으로 구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재인식>의 제1부는 일본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이 조선 사회와 조선인의 삶에 미친이중적 효과를 추적한다. 일본 식민권력은 한편으로 근대적 법치를 확립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자연권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부당한 폭력체로 기능했다. 식민지기에 관한 우리 인식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문제점으로 대두하는 것이 바로 경제 영역이다
1910~1940년간 세계 자본주의가 침체와 위기를 겪는 동안 조선은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성장율을 보였고 산업 구조도 근대화했다. 조선의 경제 발전은 일본의 자본과 교역에 의존한 것으로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들은 살찌웠지만 그렇다고 그 성장의 과실이 온통 일본인들 차지였고 조선인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당시 대중의 일상적 삶음 한편으로는 주체가 되지 못한 식민지인으로서의 무기력과 절망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경성만이 그런 근대화의 물결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에 벌어진 투기붐과 그를 통해 성공한 자와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느 소설보다 흥미진진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연들이다.
제2부는 식민지기 역사에서 가장 슬프고도 부끄러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많은 경우 위안부들을 고통과 희생으로 내몬 원초적 요인은 가정 내 가부장적 권력의 구타와 학대였다 상하이에서 일본군 위안소를 위탁 경영한 민간 업주들의 민족별 구성을 살펴보면 적지 않은 조선인 업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위안부의 비극은 민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성적 사회적 차별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친일 문학작품의 전형으로 알려진 최정희의 <야국초>는 실상 조선인 남성에 의해 서럽고도 처절하게 배신당한 작가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글 읽기는 식민지기의 삶을 민족이라는 단일한 시각과 담론으로 환원해온 연구들이 간과했던 바를 분명히 보여준다.
제3부에서는 식민지를 산 사람들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본다. 한편으로는 일본을 선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차별에 분노했던 지식인들의 정신세계는 매우 복잡했다. 지배자와 종속민의 관계는 협력과 저항, 친일과 반일이라는 잣대로 구분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다층적이었던 것 같다. 친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던 이광수의 친일은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인이 강건한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갈구한 복합적 정신세계의 표현이었다. 그와 반대로 민족문학의 성과로 간주되어온 이태준의 소설〈농군〉은 실은 일본제국주의의 만주 침략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작가의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식민지기의 한글보급운동이 조선어학회만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에 의해서도 추진되었다는 사실이다
해방 전후 역사의 단절과 연속을 다룬 제4부는 식민지기와 해방후 역사를 직접 연결시키는 인간군, 이를테면 박정희와 같은 인물들이 성장한 사실에서 식민지 유산을 찾아낸다. 우리는 또한 총독부 산하 각급 관료기구와 학교 등에서 복무한 조선인들을 통해 역사의 연속을 만나게 되는데, 상위층 친일파와는 다르게 테크노크라트적 협력자였던 그들은 해방 후 국가 건설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둘로 조깨진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혁명적 신인간' 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지만 그런 부르짖음은 결국 일제가 전시에 내걸었던 '혁신적 국민'과 다를 바 없었다. 일제가 전시에 구축한 통제경제 체제도 북한에서는 거의 모습을 바꾸지 않은채 그대로 계승되었다.
결국 남북 모드에서 단절보다는 연속이 해방 전후 역사를 지배한 셈 이다. 제5부에서는 남한과 북한에서 서로 다른 나라 만들기가 진행된 원인과 과정에 대해 살펴보면서 그동안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대한민국에 가한 비난이 얼마나 편파적이며 근거없는지를 알게 된다. 공개된 소련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 북한의 독자적 행정기구를 구축하려는 비밀 지령을 소련 군정에게 내렸다.
남과 북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나라 만들기가 진행된 상황을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한반도를 점령한 외국 군대가 서로 대립하는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외적 조건은 그에 상응하는 국내의 조건과 조응하면서 상호 보합적 과정을 야기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남한에서 허용한 공간은 북한에 구축된 전체주의적 동원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다양한 선택지가 보장된 고장이었다. 그 공간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채 도시적이고 이념 편향적 정책만을 추구하다실패하고 만 좌파 노동조직 전평은 그 후 몇 십 년 동안이나 한국 노동 운동의 발복을 잡는 비극을 야기했다. 이 공간은 또한 과잉되고 열띤 정치 토론의 장이었지만 막산 민주주의 의 문적 토대인 시민사회는 허약했다.사람들은 좀더 많은 자유와 신사조를 누렸지만 방종과 무질서도 그 정도를 더했다.
제6부는 우리에게 아직도 가장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한국전쟁을 다룬다. 최근 공개된 소련 문서는 한국전쟁이 미소 냉전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기 위한 스탈린의 세계 전략과 김일성의 무력 통일의지가 합쳐저 만들어진 비극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전쟁의 와중에 이승만은 소위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이승만 개인의 탐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 순종하는 국회의 야당 지도자들에 대항해 벌인 한판 승부이기도 햇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약소국 대한민국의 생존을 확보할 가장 확실한 길은 미국과의 방위조약 체결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때로는 미국에 맞서는 전략을 불사하면서 미국을 상호방위조약으로 얽어맸고, 그것이 훗날 고도 경제성장을 확보해준 안보 환경으로 작용했다.
대한민국 나라 만들기의 제일보는 농지계혁이었다. 그동안 주장 되어온, 개혁이 철저하지 못하여 지주제가 온존했고 영세 농민만 잔뜩 만들어내었다는 식의 오해는 이제 거의 불식되었다. 제7부는 그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농지개혁의 경제적, 정치적 효과를 추적한다. 농지개혁의 성공 덕분에 남침한 북한군이 기대했던 민중 봉기는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고, 이승만은 그 업적 위에서 소농들의 보나파르트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처럼 제도는 바뀌었지만 1950년대 말의 농촌사회는 여전히 조선왕조 이래 전통사회의 마지막 자취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도상의 반상 구분은 사라졌지만 그것은 사람들 정신속에 아직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 농촌사회는 동시에 1960년대와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이책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1950년대는 이제까지 생각된 것처럼 어둡고 정체된 시기가 아니었다. 그 십 년은 한국이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확립하고 국민교육을 확대하는 등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나라 만들기의 첫 삽을뜬 기간이었다. 이승만은 확고한 반공-반일주의자엿으며 북진통일과 한미방위조약, 수입대체산업화라는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기회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 마키아벨리였다. 거기에는 언제 되살아날지 모르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작용했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달러를 얻어내려 고심했지만 미국 원조가 마냥 계속될 수는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정권이 민주주의 원리에 좀더 충실하고 임박한 원조 삭감에 대비해 경제발전의 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가동해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이룬 것에 도취된 나머지 더 없이 완고해졌고, 1985연 실제로 원조가 대폭 줄였을 때 경제는 침체하기 시작했다. 민중은 벙기했고 미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이상이 이 책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미처 다루지 못했거나 편집위원들의 정보 부족으로 선정되지 못한 훌륭한 글들도 많을 것이다.한 가지 확실히 해둘것은 각각의 필자들은 각자 자신의 논문에 대해서만 책임진다는 사실이다. 각론에서 필자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전개하고 있고 모든 필자들이 편집위원들과 동일한 사고를 하는 것 도 아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축척된 학문적 성과를 일반인과도 공유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재인식))에 수록된 논문 대부분은 이미 단행본이나 학술잡지에 발표되었지만 몇 편은 이번에 새로 쓴 글이다. 이미 발표된 글이라도 그간 진척된 연구 업적을 반영하고 평이한 문장으로 바꾸는 등 이번 기회에 새롭게 단장했음을 밝힌다. 외국어로 씌어진 일곱 편의 글들의 경우, 일차 번역 후에 편집위원들이 책임 감수를 했고, 원 저자들이 마지막 교정을 보았다.((재인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왜곡된 역사적인식을 조금이라도 교정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더불어 우리 현대사를 성찰적으로 재해석하는 수준 높은 논문들이계속 나올것을 기대한다. 그런 글들을 모아 이 책의후속편을 편집하게 되다면 큰 기쁨일 것이다. 많은 츨판사들이 이 책을 외면할 때 기꺼이 받아준 책세상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책을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사회 여러 곳에서 보여주신 성원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오해와 곡해를 걷어내는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이 책의 출간 과정에서 드러나듯 험난하기만 하다.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그저 묵묵히 나아갈 것을 다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