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낙랑군 조선현이 있었고, 패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대릉하 또는 태자하로 추정하고 있으며, 왕검성은 요령성 금주시로 추정된다.
〇 낙랑군 조선현을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으로 보는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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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지금의 하북성 노룡(盧龍)현에 대해서 “또 조선성이 있는데 영평부 북쪽 40리에 있다.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다”라고 말했다.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이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에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 하북성 노룡현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 학계는 한사군을 지금의 요동반도로 본다. 북한의 ‘조선전사’ ‘고대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조선을 강점한 한나라 침략자들은 고조선 령역 안에 락랑군(오늘의 료동반도 천산산 줄기 서쪽 료하 하류 류역)을 비롯하여 진반, 림둔, 현도 등 4군을 설치하였다”(‘조선전사’ 2권, ‘고대편’ 112쪽, 1979)
■위만이 건넜다는 ‘패수’의 위치를 이병도와 남한은 청천강, 북한은 대릉하로 보고 있다.
패수는 고조선과 중국의 진·한(秦漢) 사이의 국경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위만이 동쪽으로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다”고 나온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 남한 학계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등 한반도 안의 강으로 본다.
(***참고: 이병도는 패수를 청천강이라고 하였고, 대부분의 한국사학계 사람들은 이병도설에 따라 청천강을 패수로 보고 있다)
반면 북한은 서기 전 5~4세기 때는 하북성 난하였다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에서 서쪽 강역 1000~2000리를 빼앗기고 난 다음의 패수는 지금의 대릉하로 보고 있다.
중국 고대 지리서인 ‘수경’(水經)은 패수에 대해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東入于海)라고 말했다. 압록·청천·대동강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 구절에 대해서 이병도 박사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구절은 잘못된 것이라면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西入於海)고 바꿔 써야 한다면서 패수는 청천강이라고 우겼다. ‘동북아역사지도’도 이를 따라 패수를 청천강으로 그려 놨다.
원 사료의 동(東)자를 마음대로 서(西)자로 바꾸어 우긴 것이 이른바 ‘정설’이 되어, 나라 강역 넘기는 데 국고가 투입되는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현주소다
○위만이 건너온 패수를 태자하로 추정하고, 왕검성의 위치를 요령성 반금시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기 조선전(史記朝鮮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 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전성기에 진번조선을 공격해 정복하고 관리를 두었으며, 장새를 쌓았다. 진(秦)나라라 연(燕)나라를 멸망시키자, 조선에 속하던 땅은 경계 밖의 땅이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그 땅(조선)은 너무 멀고 지키기 어려웠다.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개축하여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소속시켰다(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도망치자, 위만이 법령을 업신여기어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머리에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벗어나 패수를 건너(滿亡命 聚黨千餘人髮結蠻夷服而東走 出塞渡浿水) 진나라의 옛땅이던 공지인 상하장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위만은 점차 진번조선의 만이들과 옛날 연나라 및 제나라 망명자들을 부하로 만들어 왕이 되었고, 왕험에 도읍하였다.
〖집해〗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험독현이 있다 색은에 위소가 말하기를 옛 고을의 이름이다. 서광이 말하기를 창려에 험독현이 있는데, 응소가 주를 달기를 지리지의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현의 동쪽에 있다.
(〖集解〗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韋昭云 古邑名 徐廣曰 昌黎有險凟縣 廣劭注 地理志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臣瓚云 王儉城在樂浪君浿水之東).
위만조선의 수도가 요동군 험독현에 설치되었다고 했는데,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험독현(險瀆縣) 조에는 당시 광령현(廣寜縣) 동남쪽의 바다 가까운 곳이라고 하였다(險瀆故城 在今廣寜縣東南.....濱海之地).
이곳은 지금의 쌍태자하 하류인 요령성 반금시(盤錦市, 盤山縣)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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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찬경 박사의 “612년 고구려-수 전쟁에서 요수, 요동성, 압록수, 살수, 평양의 위치 비정” 논문에서도 패수(浿水)는 저강(沮江)이라고도 하였고, 지금의 태자하를 가르킨다고 하였으며, 당시의 고구려 평양성 위치(P)를 지금의 요령성 반금시 부근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