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와 건강 3
(입력: 2022.11,16/ 서해진)
- 박현 선생님의 차예사 시간 말씀을 조금 수정 정리 -
- 가을 환절기 변화를 실감하는 시간, 차와 건강 복습용 자료 -
고전 문헌에 나타나는 차의 효능
고전적인 차의 효능을 보여주는 문헌들은 적어도 몇 백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이제 몇 가지 정도만 뽑아 봤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엄밀하게 후대 특히 청나라 때 기록된 것으로 치면 청나라 황실에서 유지하던 청나라 황실 태의방에만 하더라도 차를 이용해서 치료를 하는 기법들이 무려 60 가지 이상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문헌들, 대략 200가지 정도의 문헌들에서 상당한 양의 차료(茶療) 즉 차 치료법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신농본초(神農本草)>라는 글에서는
“(신농께서) 백초를 맛보실 때 어느 날 72가지 독에 중독되셨는데 차를 마셔서 해결했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인물인 신농이 가장 오래된 설화적 역사적 사이에 걸친 인물이라 보통 신농을 차의 시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신농(神農)의 신(神),
신자 앞에 붙은 이 글자(示)는 후대에 붙은 것입니다. 원래 귀신 신 자의 신자는 이 글자(申)만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보고하다 이런 의미로 쓰이니까, 현재는 이렇게 ‘神’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것이 ‘申’이 곧 ‘神’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申’의 원 글자는 머리 위의 가마를 뜻합니다.
사람 머리 위에 가마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가마 ‘신’자라고합니다.
중간 단계의 글자가 이렇게‘甶’ 됩니다. 이것이 똑바로 올라가면 자유로울 유(由)자가 됩니다.
말미암을 ‘유’라고도 합니다. 말미암을 ‘유’라는 글자도 기본적으로는 이‘甶’를 똑바로 세워놓은 것입니다.
‘말미암다’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 자유의지로부터 말미암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역시 가마를 의미합니다.
뜻을 가마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신령함이 가마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자가 나중에 이렇게 ‘申’으로 되는데 기본적으로 ‘납’ 申이라는 글자인데, 납 신 자가 바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외적인 것을 내가 인식하다! 내가 받아들인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보고하다’ 혹은 ‘신고하다’라는 의미로도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쓰이게 되고 보니 나중에 귀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神’으로 독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농’이라는 말에 이 ‘神’은 존중하는 표현이므로 원래 없었던 글자입니다.
즉 신농은 이름이 그냥 ‘농’입니다. 신농은 그냥 農인데, 농은 두 가지 글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굽을 곡(曲)자와 별 진(또는 별 신)인 辰 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보통 중국의 한자가 이렇게 이루어져있으면 하나는 뜻이고 하나는 발음입니다.
이것 ‘曲’도 발음이 아니고 이것 ‘辰’도 발음이 아닙니다. 발음은 다른 ‘농’입니다.
옛 발음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롱’입니다.
이 ‘농’의 과거 발음에서 갈라져 나온 것 하나가 ‘롱’이고 다른 하나는 ‘용(龍)’이 됩니다.
신농씨를 다른 문헌에서‘신용’씨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발음을 딴 것입니다.
신농을 설화에서 용의 변신, 실제적으로 신농을 상징하는 모습이 용입니다.
이 ‘龍’은 발음 때문에 그런 것이고, 이 ‘신농’이라는 사람은 이 ‘農’이라는 글자가 있기 전에 이름이 농이었던 것입니다.
이름이 ‘농’인데, ‘농’을 한자로 만들다 보니 두 가지 뜻을 합성한 것입니다.
곡(曲, where)이라는 지명과 그가 했던 행위(辰 what)를 결합시킨 것입니다.
곡이라고 하는 곡땅, 이 땅의 옛이름은 ‘앗땅’이라고 부르던 곳입니다. ‘앗’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땅입니다.
지금 현재는 곡부입니다. 산동성에 있습니다. 산동성 곡부 일대에서 이 ‘辰’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천문을 보던 사람이 아닙니다. 이 별 ‘진’자는 옛글자가 다릅니다.
옛글자는 바로 누에를 말합니다.
지금의 산동성 지역에서 처음으로 양잠업을 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실크를 만들던 사람입니다.
신농씨가 처음에 농사라는 표현의 첫출발은 우리가 생각하는 벼농사가 아닙니다. 벼농사는 ‘농’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밭갈 경(耕)이라든가 하는 글자가 있습니다.
이 ‘농(農)’이라는 것은 천의 소재가 되고 있는 누에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누에로부터 실을 끄집어내는 것을 형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누에를 친 사람이 신농입니다.
이 사람은 인간이 가사 노동 내에서 또는 생활범위 내에서
자연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어떤 신화적인 역사인물로 기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신화라고 하지 않고 사화(史話)라고 그렇습니다.
그는 실존했던 인물로 보여집니다. 또는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음식을 그냥 구워서 먹고 익혀서 먹고 하는 단순 음식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음식과 저 음식을 결합시켜 하나의 요리를 하고, 또 다른 저 음식과 저 음식을 결합해 또 하나의 요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음식을 요리화시킨 사람이 신농씨였던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농씨는 이렇게 음식을 요리로 하는 일을 하면서 인간의 몸에 대한 변화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직접 겪게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독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차로 풀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아무튼 <신농본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신수본초(新修本草)>
새로 닦은 ‘본초’라는 글에는 “차는 그 성격이 미미하게 차며 독은 없다”라고 나옵니다. 차의 성격은 미미하게 찹니다. 그것은 만들기 전의 차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흔히 많은 사람들이 차는 성격이 차기 때문에 많이 먹으면 몸이 차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차의 잎은 미미하게 차지만 그 미미하게 찬 것을 미미하게 따뜻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 제차(制茶)기술입니다. 차라고 하는 것은 차가운 차를 따뜻한 물건으로 바꾸는 기술입니다. 그래서 차가운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뜨거운 것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투입된 힘이 바로 신체의 복원력이고 해독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차의 성격은 주로 위와 장을 다스리고 소변을 편하게 하며 속에서 응어리진 기운과 열독을 제거하고 잠을 줄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로 위와 장을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이때 즉 <신수본초>에 나온 차는 주로 녹차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전까지는 중(重)발효된 차가 아직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서 많은 분들이 육우(陸羽)가 썼다고 하는 <차경(茶經)>을 읽고 하는데 사실 <차경>은 별 내용이 없습니다. 옛날시대 사람들이 썼던 몇 가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내용들이 훨씬 더 깊이가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분들이 했으니까 거기에 권위를 두려고 그러는데 오히려 틀린 것도 많습니다. 현대적 연구에서 뒤집어진 것도 부분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당나라 시기에) 녹차를 위주로 하다 보니까 위와 장을 다스린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소변을 편하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해보시면 알 것입니다. 차를 생활화해서 어떤 종류의 차든 간에 차를 드시는 분들은 소변의 불편함이 늙어 죽을 때까지 없습니다. 이른바 나이 드신 남성들의 경우에 어디가 붓는 것을 걱정 많이 하는데 그럴 염려가 전형 없습니다.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
<습유>는 보충편이라는 뜻입니다. <본초강목>의 보충편이라고 하는 책에 보이차고(普洱茶膏)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이차를 엑기스로 뽑은 보이차고는 백병을 다스리는 바, 윗배와 아랫배에 한기가 찰 경우 그 쓰임새가 탁월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기(寒氣)라고 하는데, 이것과 같이 자주 말하는 것이 냉기(冷氣)라고 하는 것입니다.
냉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의 소화기관과 장기에 가스가 차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스가 찼다는 것은 어떤 물건이 들어가 그 안에서 완전분해가 안되거나 부분적인 문제 발생으로 기체 상태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체 상태가 몸에 있다 보면 마치 보일러로 물 움직이는 수온식 난방기처럼 그곳에 가스가 차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따뜻해지지 않습니다. 물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몸 속에 가스층이 형성되어 있으면 몸이 따뜻해지지를 않습니다.
체온을 상실하게 되고 배는 계속 더부룩하게 되고 불편해집니다.
그것이 나중에 피부트러블을 일으키게 되고 피부사막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이제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보이차고는 그런 냉기를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즉 한기를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윗배와 아랫배에 한기가 찰 경우 즉 윗배인 위(胃)와 아랫배인 소대장에 한기가 찰 경우, 이곳에 가스가 찰 경우
생강과 함께 달여먹으면 땀이 나고 가스층이 해소가 됩니다.
뱃속에 가스층이 있을 때 따뜻한 차를 들면 뱃속에서 온난전선과 한랭전선이 부딪치는 것처럼 차가 얹히는 느낌이 오기도 합니다.
차가 내려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차가 쭉 내려갔으면 좋겠는데 계속 얹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스층에 의해서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가스층이 녹게 되면 뻥 뚫리면서 땀이 쭉 나게 됩니다.
처음에 몸 속에 냉한 가스층이 많이 형성된 분은 차를 드시면 오히려 위 속이 더 더부룩하게 얹히는 느낌이 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할까요?
그 더부룩한 것이 없어지고 땀이 날 때까지 차를 마셔야 됩니다.
차로 그렇게 드시기 힘들면 그 이후에 미지근하거나 따뜻한 물이라도 계속 드셔야 됩니다. 그렇게 녹여내야 됩니다.
그 가스층이 바로 만병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몸에 땀이 나고 땀이 나면 낫게 됩니다.
입과 목에 열이 차서 갈라지거나 아플 경우에 보이차고입니다.
약간을 입에 머금은 채로 있으면 저절로 녹게 됩니다.
입에 머금은 채 자면 어떻게 될까요? 위 속으로 그냥 들어갑니다. 체온에서 차고(茶膏)는 저절로 녹습니다.
1g이 체온에서 녹는데 2분 정도 걸립니다. 3g이 녹는데 한 5분 정도 걸립니다. 부피에 따라서 조금 늘어납니다.
설탕 1g이 녹는데 1분 걸린다면, 3g 녹는데 3분 걸리지 않습니다.
부피가 주고 있는 압력을 해소하는 에너지가 또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이 늘어나게 됩니다.
차고는 3g 정도면 너무 많은 양입니다.
1g 정도면 머금고 녹이지 않으려고 해도 2~3분이면 녹아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날 낫습니다.
더위나 건조함으로 피부가 간지럽거나 갈라질 경우
또는 몸에서 소금, 염분 등 독소가 나와서 갈라지거나 간지럽거나 할 경우에
따라서는 차고를 갈아서 조금 외복(外服)용으로 발라줘도 낫습니다.
찻물을 발라줘도 낫기도 합니다. 찻물을 발라주면 피부트러블은 금방 없어집니다.
“보이차는 초기성 곽란과 이질 등을 치료할 수도 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수식거음식보(隨食居飮食譜)>
<수식거음식보>입니다. 여기에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이차의 맛은 무겁고 힘은 강하다.
풍담 즉 풍과 담을 쉽게 배출시키며(여기서는 초기 풍담입니다. 오래 되면 다른 약을 써야 됩니다), 육식을 잘 소화시켜낸다.
한기로 말미암은 여름 하복통과 초기성 곽란이질에도 잘 듣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풍은 가스층이 위와 장을 벗어나서 전체 혈관 속에 차기 시작하는 것을 풍이라고 합니다.
냉기와 한기는 우리 몸 속에 늘 있을 수 있습니다.
음식에 따라서 혹은 환경에 따라서 혹은 노동조건에 따라서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거기서 사라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장기화되면 신경을 타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피를 타고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피 속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잘 낫지 않고 머리가 띵하고 머리가 그냥 얼음이 박힌 것 같고 그렇습니다.
무릎관절도 손상이 쉽게 오게 됩니다.
이런 경우가 곧 풍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한 곳에 맺혀서 적체가 되어버리면 담이 됩니다.
풍은 질서를 왜곡시키게 되고, 담은 피와 신경을 타고 돌아다닙니다.
<전남견문록(滇南見聞錄)>
滇南(전남)에서 滇은 운남을 말합니다.
운남에 대한 견문록이라고 하는 글에 보면
“차는 음식을 잘 소화시키고 기력을 조절하며 적체를 해소하고 풍한을 흩어지게 하는 유익한 물건으로 여긴다.”라고 합니다.
한자어는 뜻이 비슷하면 두 개 붙이는 경우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붙이지 않는 글자가 있습니다. 일부러 붙이지 않는 글자들이 있습니다.
최고할 때 ‘最’와 지극하다 할 때의 ‘至’입니다.
‘至’는 끝까지 갈 때까지 간 ‘매우’라는 뜻입니다.
‘最’는 번역이 안됩니다. 그냥 최고입니다. ‘最’라는 말을 쓰는 것은 현대적인 개념이고 일본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고문서를 봤는데, 이 ‘最’글자가 나왔다고 하면, 그 고문서는 위조된 문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지선(至善)이라고 하지, 최선(最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극한 선(至善)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사람이 지극 정성이라고 하지 최고의 정성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最라는 표현을 쓴다, 특히 최고라고 높을 ‘高’자까지 같이 썼다면 그것은 위서입니다.
하늘도 지고(至高)하다고 표현합니다. 그 외에 최고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고라는 표현을 썼다면 이것은 위서입니다.
물론 위서(僞書)라고해서 내용이 모두 가짜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진짜 진서(眞書)라고 하더라도 내용이 모두 진짜일 수는 없습니다.
진서라고 해서 꼭 내용이 진짜라고 말할 수 없고, 책이 가짜라고 내용이 다 가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책이 가짜면 일단 가치는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최’라는 표현은 금기해야 되는데 일본사람들이 많이 썼습니다.
특히 메이지유신 때 서양에서 배우고 온 사람들이 영어의 베스트를 번역하면서‘最’자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가장이라는 표현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동양적 개념은 거기에 근접하는 0.9 무한입니다, 이 ‘지(至)’라는 개념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最는 1.0입니다. 더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동양사람들은 금기시했던 것입니다. 이 ‘最’는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그랬습니다.
도를 도라고 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라고 그랬던 것입니다.
이것도 문법을 모르면 이상하게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도에만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道에서 파생된 모든 인격화되거나, 인간이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 붙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이‘至’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神조차도, 인간이 인식하는 의미의 神도 이렇게 ‘至’라고 표현합니다. 지고(至高)하다고 표현합니다.
최고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되는데,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합니다. <전남견문록>은 근대에 쓰여진 것입니다,
위작이라는 것입니다. 청나라 때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엄차의(嚴茶議)>
푸른 보리, 우리가 어려운 시절 특히 봄에 보리를 많이 먹었습니다.
“푸른 보리의 열을 차가 아니면 풀 수가 없으니 어찌 차에 기대지 않을 것인가?
소화를 돕고 위를 튼튼하게 하며 지방을 제거하고 기름을 풀어 주며…”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무슨 제거할 지방이 있었겠습니까?
예전에는 지방이 저처럼 좀 있어야 잘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옛날엔 사람 손 등에 물을 뿌려서 물이 도르르 흐르면 몸에 기름기 많다고 잘 산다고 그랬습니다. 달걀깨나 먹었다고 그랬습니다.
요즘에는 손 등에 물을 뿌려서 물이 도르르 흐르면 정말 심각하게 체지방 빼야 되는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열을 흩어지게 하고”요즘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합니다.
“갈증을 풀어주는 바, 차는 장부와 몸에 불가결한 보건음료이다.”라고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