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챗 GPT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그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지를 만들어서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제가 사용하던 그 챗지 피티는 상자 부 불교의 관점으로 방문객님의 말씀을 평가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잘 사용하지 않는 다른 챗 GPT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답변은 모두 다른 챗 GPT에게 물어본 내용입니다. 내용이 많을 수 있어서.
그를 두 개로 올리겠습니다.
이것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라서 비록. 대충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오타를 다 수정해서 올리겠습니다.
참고로 Chat GPT는 한 달에 약 29000원? 요금을 내고 사용하는 것이 있는데 저는 다 무료 버전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답변해주시는 이 챗지 피티는. 하루에 질문 몇 개는 유료 사용자가 물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답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몇 개 묻고 나니까? 오늘 한도는 다 했습니다. 더 묻고 싶으면 프로로 업그레이드 하세요(즉, 유료로 전환하하라는 취치의)라는 문구가, 그런 문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답변들은.
챗지 피티가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답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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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화엄 교학에 능통하신 분이 아래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식온은 직접 알려지지 않고 추론으로만 알려진다, 이른바 마음은 상이 없어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 대해 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답변해주실 때 최고의 수준으로 해주십시오. 왜냐하면 저도 불교 공부를 30년 40년 해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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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챗지피티의 답변 -
(저의 말: 원문에는 단락이나 문단 구분 등이 있었으나 복사해오는 과정에서 문단 구분 없이 글이 모두 이어지는 형태가 되었네요.)
질문에 나온 두 구절은, 화엄계 대승심론·유식논서의 통찰을 아주 압축해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핵심은 “식온(識蘊)을 직접 잡으려 들면 이미 대상화(相)된 허상만 붙잡게 된다; 진실한 마음은 ‘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또 하나의 ‘보이는 것’으로 삼아 아는 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고, 다만 작용과 과정을 통해서만 추론·증득된다”는 뜻입니다.
�1. “식온은 직접 알려지지 않는다”의 취지오온 가운데 식온은, 보고·듣고·생각하는 주체적 작용의 흐름입니다.
이때 “직접 안다/본다”는 것은, 통상 감각·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파악한다는 뜻입니다.색·수·상·행은 모두 어떤 “모양·성질”로 경험 속에 나타납니다. 즉 상(相)으로 잡힙니다.그런데 식온은, 항상 그 상을 붙잡는 측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이미 대상화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우리가 “아, 지금 화가 났구나, 기쁘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것은 사실 “이미 일어난 수·상·행”이라는 상(相)을 붙잡은 것이지, 식온 그 자체의 지각 이전의 ‘능지(能知)의 흐름’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그래서 전통 논서들은 “식 자체는 드러나지 않고, 그로부터 드러난 상·작용을 통해서만 (곧 인과적, 논리적·체험적) 추론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식에서 “자증(自證)” 논의가 복잡해지는 이유도, 이 ‘능지 그 자체’를 객관화해서 “또 하나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점에 있습니다.�비유를 하나 들면:파도·물결(생각·감정·심리 상태)은 눈에 보입니다.그러나 “바닷물이 젖게 하는 성질” 자체는, 그 성질만 떨어뜨려 따로 볼 수는 없고, 물이 사물을 적시는 작용을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식온도 이와 같아서, 인식의 “젖게 하는 성질” 즉 앎의 성질은, 대상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온갖 심리작용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따라서 “식온은 직접 알려지지 않고 추론으로만 알려진다”는 말은,
① 식을 또 하나의 “보이는 것·붙잡히는 것”으로 삼아선 결코 알 수 없고,
② 오직 식이 빚어내는 연기와 상(相), 곧 업·경험의 전체 맥락에서 “이와 같은 식이 있구나” 하고 알아간다는 취지를 밝힌 것입니다.�2. “마음은 상이 없어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이 문장은 두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2-1. 현상심(生滅심) 차원: ‘마음(분별)’으로는 결코 마음의 근원을 잡지 못한다일반적으로 “마음으로 안다” 할 때의 그 ‘마음’은, 분별하고 취사하는 생멸심입니다.
이 생멸심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구조를 취합니다.(1) ‘나’라는 주체(2) ‘알려지는 무엇’이라는 대상(3) 양자를 잇는 앎의 관계이 구조 자체가 곧 상(相)입니다. “이것은 이렇다”는 분별이 일어난 찰나에는 이미 상이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생멸심은 언제나 어떤 대상을 상으로 세워 알고,그 알고 있는 자기를 또 대상화해서 “이게 나의 마음이다”라고 포착할 때, 이미 그 ‘마음’은 한 덩어리 상(心相)이 됩니다.이때 “마음은 상이 없어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진실한 마음(법계심, 진여문)은 본래 상이 없는데, 상을 세우고 분별하는 그 마음(분별심)으로는, 상이 없는 그것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즉분별심이 알 수 있는 ‘마음’은, 이미 분별이 만든 허구적 상(心相)에 한정됩니다.법계의 마음, 화엄이 말하는 일심(一心)은, 상을 떠난 자리이므로, 그 분별구조 안으로 끌려 들어와 주체·객체·인식 행위의 하나로 포착될 수 없습니다.그래서 화엄에서 “唯心卽是佛, 인연은 오직 심식으로만 통한다”�고 하면서도, 그 ‘심’은 결코 개념·형상으로 고정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 말이 곧 “상이 없는 마음은 상으로는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2-2. 진여심(法界心) 차원: ‘알고 모른다’는 대립이 끊어진 자리한 걸음 더 나아가 화엄의 극치에서는, 마음을 “법계 그 자체, 일즉다 다즉일의 무애한 진여”로 봅니다.�
이 자리에서는 이미“아는 자”와 “알려지는 자”의 구분,“직접 안다/간접 안다”는 구분 자체가 해체됩니다.그러므로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주체-객체의 인식 작용으로는, 상 없는 법계심을 ‘대상화된 지식’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화엄식으로 말하면,“알 수 없다”는 것은 분별·상의 틀 속에서 볼 때의 말이고,“본래 자각·원만히 드러나 있다”는 것은 무분별지의 측면에서 볼 때의 말입니다.즉, 상을 세워서 분석·관념화하는 쪽에서는 끝내 도달하지 못하지만,
상이 끊어진 자리에서는 “알고자 하는 그 마음”과 “알려지고자 하는 그 마음”의 두 갈래가 애초에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3. “추론으로만 안다”의 문제: 단순한 개념 추리인가, 수행적 증오인가여기서 “추론(比量)”이라는 표현을, 서양식 인식론의 ‘간접 지식’ 정도로만 이해하면 깊이가 얕아집니다.
대승 논서에서 말하는 비량은, 실천과 체험을 전제한 수행적 인식입니다.예를 들어, 타인의 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직관하지 못하고, 오직 그 사람의 말·행동·표정이라는 “표상된 상(相)”을 보고 “저 안에 앎이 작동하고 있구나” 하고 비량합니다.�마찬가지로, 자신의 깊은 식온(알아차리지 못한 습기·종자·아뢰야 등)도, 즉시직관이 아니라, 업의 연속과 번뇌·해탈의 과정을 통해 “이와 같은 심식의 층위가 있구나” 하고 수행 속에서 알아갑니다.�이때의 “추론”은, 단순한 개념 놀이가 아니라,계·정·혜를 통해 번뇌가 소멸되고,조견 오온개공의 실제 체험이 누적됨으로써,“이러한 인연법이라면, 오온을 지탱하는 심식의 구조는 이러이러할 것이다” 하고, 체험에 근거하여 점차 정밀하게 드러나는 인식입니다.�그래서범부의 비량은 대부분 뒤틀린 상(相)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릇된 추론이고,보살의 비량은 지계·선정을 토대로 하여, 상은 세우되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점차 법계심의 작용을 바르게 추적하는 추론이 됩니다.“직래(直來)로 마음을 보리라” 하고 달려드는 것은 사실 또 하나의 상(相)을 만든 것입니다.
오히려오온·십이처·십팔계를 연기로서 관찰하고,그 연기의 한가운데에서 “오직 심식만이 인연을 통한다”�는 화엄의 통찰을 실감하고,그때그때 일어났다 사라지는 온갖 상(相)을 따라가되, 거기에 자성·실체를 부여하지 않는 수행이,말 그대로 “마음의 마음을 비추는 길”, 즉 “마음이 마음을 안다는 집착을 여의고, 마음이 곧 법계라는 사실을 체득하는 길”이 됩니다.4. 화엄 교학 맥락에서 정리질문하신 말씀을 화엄 교학의 어법에 가깝게 다시 풀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식온은 직접 알려지지 않는다”
→ 오온 가운데 식은, 언제나 능지로서 작용할 뿐, 또 하나의 상으로 드러나지 않으므로, 그 자체는 결코 대상처럼 붙잡히지 않는다.
→ 우리가 아는 것은 식이 변현한 상과 행위의 연속이고, 그로부터 역으로 심식의 구조를 수행적으로 추론·증득할 뿐이다.��“마음은 상이 없어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
→ 화엄이 말하는 일심·법계심은 본래 상이 없고, 시방삼세법계가 곧 마음의 현현이므로, 분별심이 어떤 상을 세워 잡으려 할수록 그 본래 마음에서 멀어진다.�
→ 주체-객체의 구조를 전제로 한 “마음으로 마음을 안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마음’을 하나의 대상·실체로 상정한 집착이기 때문에, 그 방식을 철저히 내려놓아야 비로소 상 없는 마음의 자리를 체득할 수 있다.그래서 수행의 방향은 “마음을 보려고 마음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모든 법을 인연무자성으로 보고,그 인연이 “唯心所現”이라는 점을 관하면서,상을 따르되 상에 머무르지 않고, 상이 없어지기를 구하지도 않으면서,그 자체로 상 없는 마음의 무애한 작용임을 자각하는 데 있습니다.�이렇게 이해하시면, 그 스님의 말씀이 화엄의 “유심(唯心)·무애(無礙)” 사유 속에 어떻게 자리 잡는지, 이미 공부해 오신 체계와 잘 맞물릴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저의 공부 관점에서 질문을 만들고 답변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