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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상에 떠도는 논문입니다. 이글은 중국의 경우만 다룬것이만, 고대 동북아와 서방의 문화교류를 염두해 두고 읽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동서교류사는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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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史學》第二輯 (2003年12月)
고대 중서교류의 물증
?중국 경내 발견 고대 중서문화교류사 관련 유물·유적
공영안(?纓晏)
중국은 동아시아에 위치하는데, 높고 험한 산악지대와 부드럽게 펼쳐진 고비사막이 중국과 유라시아 대륙의 서북지역 사이의 왕래를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중국문명이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태어나 발전해 왔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로부터 중국과 서방은 줄곧 각종 형식의 문화교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교류는 뭇 문헌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상에도 반영되고 있다. 고고학자는 장기간에 걸친 어려운 작업을 통해 중국 경내에서 많은 서방 제조 혹은 서방에 관련된 유물·유적을 발견했는데, 이는 중서(中西) 문화교류의 물증이다. 지면이 짧아 이 글에서는 단지 선진(先秦)부터 기원전 3 세기 즈음까지 중서 문화교류사의 유물·유적 및 상관내용에 대해 개괄한다.
1. 방직물
20세기 초에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Mark Aurel Stein)은 우리나라[=중국]의 신강(新疆) 누란(樓蘭)에서 채색 모직물의 조각을 한 점 발견했는데 시대는 동한(東漢) 만기의 것이었다. 이 양털로 짠 방직물에는 “완연한 그레코-로마 스타일 디자인의 헤르메스(Hermes)의 머리”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헤르메스는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다재다능한 신(神)인데 무역, 여행, 스포츠 등을 관장한다. 헤르메스는 또한 여러 신의 전령이기도 해서 모시는 신들을 위해 소식을 전한다. 그의 표지는 두 마리의 뱀이 감겨있는 지팡이(caduceus)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현대에도 세계의 일부 국가에서는 이와 같은 뱀 지팡이가 의연하게 의사 혹은 의학의 상징으로 쓰이는데 예를 들어 미 육군 의무대(U.S. Army Medical Corps)가 이것을 표지로 삼고 있다. 바로 스타인이 발견한 양털 직물 조각에서 비교적 완전한 뱀 지팡이 디자인을 볼 수 있다. 이 채색 모직물 뭉치는 마땅히 지중해 지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어야 하겠다.
신중국(新中國) 건국 후, 신강지역에서 수많은 모직물이 발견되었다. 이 모직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학자에 따르면 그 중에서 일반 모직물은 현지에서 생산된 것이되 고급 모직물은 파미르(Pamir) 이서(以西)지역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이 외래 고급 모직물은 다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유적지에서 발견된 것이고, 그것들은 주로 크게 2가지로 분류된다. 제1유형은 재융직물(栽絨織物)[겉면에 보풀이 돋게 짠 카펫]인데, 그 조직구조는 카펫[地?]과 같다. 이런 류의 모직물은 제직방식의 매듭기법에 따라 구분해서 말할 수 있는데 3가지 방식이 있다 ? 기오르데스(Ghiordes) 매듭, 세나(Senna) 매듭, 반고리형[半環形] 매듭. 기오르데스 매듭은 오늘날의 터키 서부에서 기원하고, 세나 매듭은 이란 서북부에서 기원하며, 반고리형 매듭은 발원지가 분명치 않다. 제2유형은 탈직물(?織物, Tapestry-woven textile)인데, 그 직조공예는 국부알직법(局部?織法)에 의한 꽃 문양이다. 이런 류의 탈직공예의 발상지는 소아시아인데 페르시아어로 gilim이라고 부른다. 한대(漢代) 중국어 문헌에 나오는 모직물인 “계(?)”는 이 페르시아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클 것이다. 신강에서 출토한 외래 모직물은 결코 단일 생산지에서 온 것이 아니며 중앙·서아시아 및 지중해 주위의 서로 다른 지역으로부터 생산된 것임이 연구에서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 이들 모직물의 소재 및 풍격을 보면, 일부는 메소포타미아풍의 사자 스타일 디자인이 있고, 일부는 그리스풍의 켄타우루스[馬人] 디자인이 있다. 덧붙여 제1유형인 재융직물의 매듭기법의 다양성도 또한 이들 모직물의 출처가 여러 종류임을 말해준다.
이런 외래 모직물 중에는 진귀한 물건이 드물지 않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84년 신강 낙포현(洛浦縣) 산보랍(山普拉)묘지1호에서 출토된 채색 벽걸이 1점인데, A.D. 1-2세기 시대(동한 시기 무렵)의 것이다. 벽걸이는 출토 할 때에 이미 4조각으로 잘려 마름질되어 한 벌의 바지가 되어 있었다. 왼쪽 바짓가랑이상엔 한 무사상(武士像)이 거꾸로 배치되어 있었고, 오른쪽 바짓가랑이상엔 사람 머리가 달린 말몸뚱이가 디자인되어 있다. 복원 후엔 응당 한 점의 대형 벽걸이로 되어야 할 것인데 오른쪽 바짓가랑이는 본래 벽걸이의 윗부분이고 왼쪽 바짓가랑이는 곧 아랫부분이다 (그림 3, 4). 벽걸이 윗부분의 사람머리 달린 말몸뚱이 디자인은 사실상 그리스-로마 신화의 켄타우루스(Centaurs, 그림 5)이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그리스 예술의 풍격으로 그윽하다. “높이 솟은 콧대는 거의 이마와 수직을 이루며, 어깨에서 퍼덕퍼덕 움직이는 짐승(사자?)는 몹시 용감함을 은유하며, 수중의 뿔나팔은 자신의 영예를 떨침을 상징하며, 말의 4 발굽은 또한 중국 전통의 배치 방식과 다르다. 켄타우루스의 마름모꼴 격자 디자인이 오히려 서역의 맛을 느끼게 한다.” 벽걸이 아랫부분의 오른손에 창[矛]을 쥔 무사는 입체감이 매우 강하다. 비록 지금은 이 무사상이 내포한 의미가 무엇인지 확정할 순 없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그리스 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특히 앞에 언급한 스타인이 누란에서 얻은 채색 모직물 조각은 헤르메스의 두상과 닮았다. 산보랍 고묘(古墓)에서 출토한 채색 벽걸이는 20 여 종 색깔의 섬세한 털실로부터 짜였으며, 국부알직법(局部?織法)으로 짠 탈직물이다.
Wall hanging with centaur and warrior
1995년, 고고학자는 신강 위리현(尉犁縣)의 영반(營盤)유적에서 한 한·진(漢晉)시대의 대형무덤을 발굴하여 약 400 점의 유물을 얻었다. 영반유적은 한대(漢代)의 묵산국(墨山國, “산국(山國)” 혹은 “산왕국(山王國)”이라고도 함)에 속하며, 고대 실크로드의 교통요지에 자리한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중원에서 온 견직물뿐만 아니라 중앙·서아시아에서 생산된 장식품도 있으며 심지어는 지중해 지역에서 온 것도 있어 고대 동서양 문화의 융합을 충만하게 반영한다.
영반의 무덤 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15호묘인데 시대는 동한(東漢) 중만기(中晩期)다. 이 무덤의 목관(木棺) 겉에는 한 직사각형 채색 재융(栽絨, 겉에털(실)이 돋게 짠 것) 담요가 덮여 있었는데, 길이는 312 cm이고 폭은 178cm였다. 담요의 주체는 웅크리고 있는 숫컷 사자 한 마리인데, 사자의 머리가 측면을 보는 자태가 상냥하며 감성이 풍부하다. 전체적으로 담요는 서방 예술의 특색으로 충만해 있다.
관(棺) 속엔 체격이 건장한 남성이 한 사람 있었는데 얼굴에 마질(麻質)의 인면형(人面形) 가면을 쓰고 있었다. 주검의 몽뚱이엔 사람·동물·나무 문양의 붉은색 계포(?袍)가 입혀 있었다 (그림 7, 8). 이 계포는 기본적으로 온전하고, 빛깔과 광택이 선명하고 아름다우며, 디자인은 섬세하고 아름다워서 세상에 보기 힘든 명품이라 부를 만 하다. 계(?)의 겉면에는 한 구역마다 6조의 도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도안 사이에는 열매가 가득한 석류수가 있다. 제1, 2, 4, 5조의 인물은 다 벌거벗은 남자인데, 코가 높고 눈이 크며 머리털은 곱슬머리인 것이 전형적인 유럽인이다. 이런 두 사람이 짝을 이뤄 방패를 들고 창(검)을 휘두르던지 아니면 한 손으로 찔러 공격하던지 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다. 특히 이들의 근육은 과장되게 솟아있어 더욱 힘과 생기를 충만하게 한다. 제3조는 소고 제6조는 양이다. 이 두 조의 동물의 조형은 생동감이 있으며 모습이 활발하다. 전체적인 도안은 그리스 예술과 중앙·서아시아 예술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보는 사람에게 감탄해 마지 않도록 한다. 이런 계포 한 벌은 응당 서방에서 생산된 것이어야 하겠다. 애초에 학자는 이 옷을 입은 무덤 주인공은 묵산국의 귀족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무덤의 발굴자는 ““M15에선 묘지에서 유행하는 목기, 양뼈 등이 조합된 형식의 껴묻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주검의 얼굴의 가면, 부장된 수의, 팔다리를 싸맨 비단 등의 풍습은 유일무이하다. 무덤 주인공의 복장은 화려한데 그 두루마기[袍] 겉의 문양은 그리스화 예술의 풍격이 농후하다. 관 겉은 이역의 특색을 갖고 있는 사자 문양의 담요가 덮여 있다. 15호묘는 무덤 주인공이 생전에 특수한 신분이었음을 나타내는 매우 독특한 자료이다. 영반이 실크로드 상에 위치한 점, 한·진 시기 실크로드를 따라온 문화교류, 그리고 무역 왕래의 역사적 배경과 연관지면 무덤의 주인공은 서방으로부터 와서 무역에 종사한 거상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신강에서는 일부 출토된 서방 전래의 모직물 외에 또한 외래 면직물도 발견되었다. 1959년, 신강의 고고학자는 신강 민풍현(民豊縣) 고니아(古尼雅)유적에서 동한(東漢) 만기(?期) (서기 2세기)쩍 무덤을 하나 발견했는데, 무덤 안에서 남백(藍白)색 꽃무늬가 입혀진 면포(棉布) 조각이 2점 출토했다. 이것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면포다 (그림 9). 그 중 한 점의 면포 중심부는 이미 손실되어 있어 단지 맨발과 사자 꼬리의 일부만 볼 수 있다. 다행인 것은 그 왼쪽 모퉁이에 얼추 32cm의 네모난 틀이 1점 있는데 틀 안에 반신(半身) 여신상(女神像)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여신은 가슴에 품은 생각을 드러내고 몸을 옆으로 기울여 비스듬히 보고 있는데 안색은 차분하고 편안하며 몸 뒤쪽에 원형의 빛 고리가 있다. 그녀의 목과 팔에는 다 장식품이 있으며, 손에는 뿔모양의 장통용기(長筒容器)를 하나 쥐고 있고, 용기 안에는 과실이 가득 담겨있다. 이 여신은 처음엔 불교의 보살상이라고 간주되었고 이 면포 뭉치도 또한 인도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연구가 깊어지면서 학자들은 여러 다른 해석을 제기했다. 일부는 이 디자인 체계는 그리스풍이라 여겨서 그림 중의 뿔모양 용기는 불교의 예기[法器]가 아니라 그리스신화 속의 ‘풍요의 뿔’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림의 여신은 불교의 보살이 아니라 그리스신화 속 풍수(豊收)의 여신인 티케(Tyche)라고 했다. 또 일부는 그녀를 그리스 신화 속 대지(大地)의 여신인 가이아(Gaea)와 곡물(穀物)의 여신인 데메테르(Demeter)의 혼합체라고 여겼다. 또 다른 학자는 이 디자인의 테마는 응당 본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풍의 사자(라이온)이어야 할 것인데 단지 빠진 곳이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그림 속의 여신은 응당 페르시아의 여신이라고 했다. 최근에 쿠샨[貴霜]왕조의 금화에 나타난 도안과 대조·비교했던 학자는 면포 상의 여신이 응당 중앙아시아 풍수의 여신인 Ardochsho라고 여겼고,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가장 이른 시기의 면직물은 동한(東漢)때 쿠샨으로부터 전해져 들어온 것이다.
Textile with deity
2. 금·은 그릇 등
건국 후에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서방제 금·은 그릇을 발견되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산동성의 고고학자는 치박(淄博)시 교외에 자리한 서한(西漢) 제왕(齊王)의무덤을 발굴했는데 1호 수장갱(隨葬坑)에서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잎새 문양[列瓣紋] 은합(銀盒) (그림 3)이 1점 출토되었다. 이 합(盒)의 높이는 11cm고, 아가리 지름은 11.4cm였다.
1983년, 광주(廣州) 상강산(象崗山)에서 남월왕(南越王)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 속에서 3자루의 아프리카 상아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26cm이나 되었다. 한 칠합(漆盒) 속에선 26 그램의 홍해(Red Sea) 유향(乳香)이 수지(樹脂) 형상으로 남아있었다. 이런 것들은 이역의 문물에서 나온 것으로 광주를 거치는 해상 항로와 인도양 지역의 교역 관계를 설명해 준다. 무덤에서는 또한 잎새 문양 은합(銀盒)도 발견되었는데 출토할 때 속에 환약[藥丸]이 담겨있었다. 남월왕 무덤의 이 은합은 높이가 10.3 cm고 아가리 지름이 13 cm였으며, 형상은 산동 제왕묘에서 출토된 은합과 극히 유사하다 (그림 11).
상술한 서한(西漢) 제왕묘와 월왕묘에서 출토한 두 은그릇은 다 추설기법(錘?技法)을 쓴 것으로 표면을 두들겨 압출(押出)시켜 서로 교차하는 잎새 무늬[列瓣紋]가 나타나게 했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던 질거푸집[陶範] 혹은 밀납[蠟模]주조(Lost-wax)에 의한 문양장식 공예전통과 완전히 다르며 명백하게 외래 그릇[器皿]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그릇의 원산지에 대한 견해는 아직 서로 다르다. 이런 종류는 Phialae라고 통칭되는 그릇이라고 여기는 학자에 따르면, 그 기술원류는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앗시리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조 시기(B.C. 6C ? B.C. 4C)에 성행해서 파르티아 통치기에 계속 발전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2점의 한대(漢代) 은합은 파르티아의 같은 종류 은그릇과 거의 완전하게 똑같으므로 그것들은 바닷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파르티아로부터 수입한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은합은 로마인의 기물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학자에 따르면, 산동 제왕묘와 광주 월왕묘의 두 은합은 로마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있으며 바닷길을 거쳐 전해 들어왔다고 한다.
연구에 따르면 산동 제왕묘의 매설시기는 대략 기원전 179년이고, 광주 월왕묘의 매설시대는 약 기원전 122년이다. 이 두 봉분에서 발견된 은합의 그 원산지가 중앙아시아의 파르티아든 아니면 지중해 지역의 로마이든 간에, 이것들은 다 일찍이 기원전 2세기에 이미 중국과 인도양 지역 간의 해상교통 라인이 존재했음을 힘차게 증명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그릇이 외부로부터 중국에 전해 들어온 뒤부터 중국인은 자신의 사용습관 및 탐미적 기준에 따라 그것들의 개조를 진행했다는 점이다. 은합의 밑바닦에 구리로 들린굽[圈足, ring foot]을 달아서 중국인에게 익숙한 그릇인 두(豆)처럼 하여 사용하였다. 이런 “본토-서양 결합[土洋結合]”의 두(豆)는 딱 고대 중서문화 융합을 구현하고 있다.
1988년, 감숙성 정원(靖遠)현 북탄(北灘)향의 한 농가의 방 터에서 도금[?金] 은쟁반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림 12). 이 쟁반의 높이는 4.4cm이고, 직경은 31cm, 무게는 3180g 이었다. 쟁반의 도안은 3층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바깥 면의 1층은 포도 넝쿨 문양이 서로 엉켜있다. 포도의 중심부마다 작은 오목한 점이 하나 있다. 포도의 꽃 아래의 입사귀 밑바닦에는 보일락말락하게 각양각색의 곤충, 날짐승이 29개가 조각되어 있는데 앵무새, 메뚜기, 도마뱀 전갈, 달팽이, 꿀벌 등등과 같다.제2층은 12개 단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단위마다 왼쪽엔 동물 한마리가 오른쪽엔 신(神)의 두상이 있다. 가장 안쪽 면 1층은 직경이 9.5cm인데 상부에 청년 남신(男神)이 곱슬머리로 벌거벗은 상체의 어깨에 “권장(權杖)”을 메고 용감무쌍한 동물 한마리 위에 타 앉아있다.
서방의 정취가 듬뿍한 이 은쟁반은 국내외 학자에게 폭넓은 흥미를 일으켰다. 이 은쟁반의 최초 연구자인 초사빈(初師賓)은 은쟁반의 제2층에 있는 12개의 신상(神像)은 응당 고대 그리스신화 속 “올림푸스산의 12신”으로서, 태양신 아폴로, 월신 아르테미스, 천제 제우스, 처녀신 아테나, 해신 포세이돈, 천후 헤라, 화신 헤파이토스, 곡신 데메테르, 전신 아레스, 미신 아프로디테, 사자신 헤르메스, 춘신 페르세포네 라고 했다. 초사빈의 고증은 기타 학자에게 받아 들여졌다. 쟁반의 정중앙에 있는 남신(男神)에 대해 초사빈은 이 신이 “아폴로일 수 있겠으나, 또한 이 신은 주신 디오니소스 또는 그리스신화 속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초사빈은 또한 짐작하기를 이 쟁반은 “시대는 약 4-5세기로서 늦어도 6세기 전반기는 넘지 못한다. 그 생산지는 대략 이탈리아, 그리스, 그리고 터어키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후에 더욱 많아진 학자가 은쟁반 정중앙의 남신(男神)은 응당 로마의 신 바카스(Bacchus)라고 했는데 이 신은 그리스신화 속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us)에 상당한다. 이 은쟁반의 생산지에 관하여 어떤이는 서기 2-3세기 로마의 동방 속주(Provincia)인 북아프리카 혹은 서아시아라고 했고, 또 어떤이는 3-4세기 로마제국 동부 속주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여겼다. 1997년, 우리나라 학자 임매촌(林梅村)은 이 은쟁반상에 있는 한 줄의 대하(大夏) 문자 명문을 해독하여 그 뜻이 “가치 490 斯塔特[solidus(?)]” 혹은 “가치 490 금화[金幣]”라고 했다. 이렇게 임매촌은 이 은쟁반은 마땅히 대하(大夏)의 은기(銀器)여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감숙성 정원현에서 발견된 이 그리스-로마 예술 풍의 은기는 “서기 5세기에서 6세기 초, 그리스문화는 여전히 대하(大夏)문화의 주체”임을 표명하고 있다는 글을 썼다.
덧붙여 외국 명문(銘文)이 있는 구리코인[銅餠]과 납코인[鉛餠]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겠다.
일찍이 해방 전에 몇 점의 구리코인이 발견되었는데 그 형상은 한 면이 凸꼴로 나와있는데 윗면에 용과 같은 문양이 있다. 다른 한 면은 凹꼴로 들어가 있는데 주위에 외국 문자가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구리코인의 출토지 상황은 자세하지 않아 그 시대를 규정할 수 없고, 게다가 그 중 일부에는 후대인이 모방해 만든 가짜도 있다. 건국 후에 또 조금 발견되었다. 1965년 서안시 서북의 한대(漢代) 장안성(長安城) 내에서 출토된 1점의 도관(陶罐)속에 명문이 있는 납코인이 다해서 13매 있었다. 1973년, 섬서성 부풍(扶風)현 강원(薑原)에서 또 이와 같은 납코인이 2매 출토되었는데 “이 유적안에서 출토한 기타 유물[文物]에 연관시켜 볼 때 그 상한은 서한(西漢)까지는 이르지 못할 것이고 하한은 늦어도 동한(東漢)말기”의 것이다. 1976년, 감숙성 영대(靈台)현에서 같은 종류의 납코인이 274매이 발견되었는데 총중량은 31,806g에 달했다.
구리코인과 납코인의 내력에 대한 견해는 현재까지도 서로 다르다. 20세기 중엽, 독일의 O. Maenchen-Helfen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때 서아시아에서는 코인을 주조하면서 그리스문자를 새겼다. 그런데 그리스문자를 베껴 새기는 과정 중에 베껴 쓰는 사람이 그리스문자를 이해하지 못했던 탓으로 본래의 꼴과 맞지 않게 망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더 나아가 중국에서 발견된 이런 구리코인은 중국의 장인이 주조한 것인데 윗면의 명문은 중국인이 사실과 다르게 망가져 있는 그리스문자를 본떠 베껴 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하내(夏?)는 이들 구리코인은 중국 주조가 불가능하며 응당 서역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한·위(漢魏)시대의 중국에는 “외국 명문(銘文)을 모방한 선례가 없으며, 더군다나 그들이 당시에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닮게 베껴 써야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납코인에 있는 도안과 한대(漢代)의 문양 장식은 같지 않다. “한대(漢代)에는 이와 같은 양식의 동전[銅幣]을 주조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당시엔 외국문자가 새겨진 화폐를 제대로 주조할 수도 없었다.” 근래에 우리나라 학자인 임매촌은 이들 납코인 상의 명문(銘文)은 응당 흘림체[草體] 그리스문자로 표기한 중고(中古) 이란어라고 했다. 서기 1세기 전기에 쿠샨[貴霜]왕조가 세워졌는데 서기 2세기 중엽 이후 쿠샨에 내란이 끊임없자 경내의 대월지(大月氏) 사람들은 대량으로 땅을 버리고 동방으로 떠나 동한(東漢)에 피난해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 출토한 이 명문에는 흘림체 그리스문자의 구리코인과 납코인이 있는데, 아마도 집을 떠나온 중국의 쿠샨 대월지인이 삼보(三輔, 서안을 중심으로 한 섬서 중부 지역) 및 그 서쪽 인근 지역에 자리잡고 번창하면서 남긴 유물일 것이다.
3. 유리 용기
일찍이 기원전 5천 년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유리를 이용해서 표면도료를 만들었다. 기원전 15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유리로 만든 용기가 출현했다. 유리제조기술은 아주 빠르게 이집트 등지로 전해졌다. 고대 이집트 및 지중해 연안지역의 유리는 나트륨(Na)-칼슘(Ca) 유리 위주였고 19세기 후반기가 되고야 산화바륨(BaO) 성분의 유리가 출현했다. 중국에서는 뒤늦게 전국시대에 유리를 제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방과는 다르게 중국의 고대유리는 납(Pb) 유리 위주였다. 전국시대에서 한대(漢代)사이에 중국이 자체 제작한 유리는 모두 납, 바륨(Ba)의 함량이 비교적 높은데 이는 서방에는 없었던 것이다.
현재 재료에 한해 말한다면 우리나라 경내에서 발견한 가장 오래된 유리는 춘추말-전국초(기원전 5세기 무렵)에 속한다. 중국의 초기유리로 주요한 것은, 하남성 고시(固始)현 후고퇴(侯古堆)1호묘 중의 사기구슬[料珠], 하남성 휘(輝)현 유리각(琉璃閣) 출토 오왕부차검(吳王夫差劍)의 칼코등이[劍格]에 박힌 유리 조각, 호북성 강릉(江陵)현 망산(望山)1호묘 출토 월왕구천검(越王勾踐劍)의 칼코등이에 박힌 유리 조각, 운남성 이가산(李家山)22호묘 출토 6각기둥형 유리 구슬, 산동성 곡부(曲阜)현 노국고성(魯國故城) 발견 사기구슬, 산동성 임치(臨淄)현 낭가장(郞家莊) 출토 색구슬, 호북성 수(隨)현 회후을(曾侯乙)묘 발견 사기구슬, 산서성 장야(長冶)시 분수령(分水嶺)270호묘 출토 사기구슬과 유리관, 등등이 있다.
이런 초기 유리 기물 중에는 속칭 “잠자리눈알[??眼]”라고 불리는 상감유리구슬[?嵌?璃珠]이 아주 많은데 그 직경은 일반적으로 1-2cm 가량이다. 이런 류의 상감유리는 하남성
또한 어떤 학자는 상감유리구슬 외에 춘추전국시기의 일부 유리기물도 서방으로부터 전입된 것이라고 여긴다. 분석결과를 예로 들면 하남성 휘현에서 출토한 오왕부차검의 상감 조각은 소다석회규산염(CaO-SiO2) 유리며 호북성 강릉현에서 출토한 월왕구천검의 유리는 칼륨(K)-칼슘(Ca)계 유리인데, 모두 중국 자체제작의 납-바륨 계통에 속하지 않으며 “외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몹시 높다”. 덧붙여 운남성 이가산 출토 육각기둥형 구슬은 “운남의 기타 지역에선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또한 우리나라 내지(內地)에서도 볼 수 없고,” 때문에 이집트 혹은 서아시아로부터 인도를 거쳐 수입된 것일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유리제조업은 전국시대부터 시작되어 끊임없이 발전했으며, 이와 동시에 중국에 유입된 중국의 서방 유리기물 또한 점차 증가했다. 유입된 서방 유리기물에 관한 것은 일찍이 20세기 초에 발견되었다. 스타인은 호탄[和?]에서 한 알의 채색 상감유리구슬을 찾아내고 전형적인 서방산 제품이라고 여겼는데 이것은 로마제국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었다. 이 밖에 하남성의 한대(漢代) 무덤 하나에서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리병이 발견된 적이 있는데 겉면의 도안은 아테네의 두상이었다.
신중국(新中國)이 성립된 뒤, 각지에서 외래 유리기물이 계속해서 발견되면서 학자 또한 이것에 대한 전면적이고 진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서한(西漢)시기의 비교적 유명한 외래 유리기물은 광주(廣州) 횡지강(橫枝崗)2061호 한묘(漢墓)에서 출토한 3점의 유리주발[碗]이다. 이 3점의 유리주발은 출토시에 이미 조각나 있었지만 복원해 보자 기본적으로 서로 동일했다. 다 아가리가 넓고 복부가 동그란 평저완(平底碗)이고, 짙은 쪽빛을 띠고 반투명했으며, 아가리 지름 10.6cm, 밑바닥 지름 4 cm이고, 본을 떠 성형된 것이었다 (그림 15). 그 중 1점은 정성분석 결과 소다회-소다 유리였음이 판명되었다. 이 3점의 주발의 제작방식은 기원전 1세기 지중해 남해안에서 만든 로마유리와 유사하다. 횡지강2061호 무덤은 서한(西漢) 중기(기원전 1세기)에 속하며, 무덤 안에서 출토한 이 3점의 유리주발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로마유리용기일 것이다.
동한(東漢) 시기의 외래 유리기물 중에서 주요한 것은 1980년 강소성 한강(?江)현 감천(甘泉)2호 한묘(漢墓)에서 출토한 유리 파편(그림 16)이다. 이 무덤의 연대는 서기 67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에서 발견된 3조각의 유리파편은 자흑색(紫黑色)과 유백색(乳白色)이 섞여있는 투명체인데 복원한다면 응당 외벽 장식은 바퀴살 모양의 가지가 볼록 나와있는 바리[鉢]일 것이다. 이런 종의 기형은 지중해 지역에서 흔히 보이되 우리나라 안에선 극히 보기 드물다, 이 유리그릇은 반죽[攪胎]장식기법으로 만든 것인데, 즉 우선 녹인 자홍색 유리 액체와 백색 유리 액체를 한데 섞고 반죽을 한 뒤에 마지막으로 거푸집에 따라내어 성형한다. 이런 제작기법은 지중해 지역에서 유행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고대 유리그릇 중에서 이 기법이 채용된 것은 오로지 이 한 점뿐이다. 화학분석결과 이 유리그릇에는 납이 함유되어 있지 않아 중국이 자체 제작한 납 유리 계통에 속하지 않고 서방의 나트륨-칼슘 유리 계통에 속하며, 그 화학성분은 로마유리와 서로 부합한다. 상술한 몇 가지 원인에 따라 이 유리기물은 일반적으로 로마유리라고 여겨지며 바닷길을 통해 우리나라로 전해 들어온 것이다.
기원전 1세기, 지중해 동부연안의 공예가는 유리불기(Glass Blowing) 기술을 발명하여 아름답고 화려한 구형(球形)의 유리용기를 제조했다. 서방에서 유리불기 제법으로 만든 유리그릇도 중국에 전해 들어왔다. 1987년, 낙양(洛陽)시 동쪽 교외에 있는 서기 2세기 무렵 동한(東漢)때 무덤 하나에서 꽤 완전한 긴목유리병[長頸?璃?]이 한 점 출토하였다. 이 병은 녹황색을 띠며, 반투명이고, 그릇 겉면 전체가 백색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으로 얽혀있고, 그 아가리 지름은 4cm, 복부 지름 7.5 cm 그리고 높이는 13.6 cm 였다. 이 한 유리병의 조형은 우아하고 아름다운데 전형적인 로마의 반죽[攪胎] 유리불기로 만든 유리그릇이다. 1992년에 이 유리병은 기타 몇 가지 진귀한 유물과 함께 일본으로 전시하러 나간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토한 한대(漢代) 유리 그릇 중에는 칼륨(K)계 유리도 일부 있는데 이것은 서방의 나트륨-칼슘 유리와 다르며 중국 특유의 납 유리와도 다르다. 이 칼륨 유리 중의 일부는 인도 등지에서 수입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론 이런 칼륨 유리는 인도 등지에서 발견된 유리와 성분이 비슷하고, 또 한편으론 우리나라에서 출토한 칼륨 유리는 기본적으로 광동, 광서 등지의 남방 연해 지역에 분포하므로 인도 등지와 바다를 통한 왕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중 일부 칼륨 유리는 중국에서 자체 제작되거나 외래 영향 하에 독자 생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4. 악세서리[小件飾物]
우리나라에서는 또한 일부 서방에 관련된 악세서리 및 공예품도 발견되었다.
서방에는 일종의 대단히 섬세하고 아름다운 다면체 쇠구슬[金珠]이 있다. 그 제작공예는 누금세공(鏤金細工, granulation)이라 불리는데 즉, 먼저 일종의 접합성 땜납(solder)으로 금붙이 알갱이를 기물 표면에 고정시킨 후 열을 가해 용접(welding)한다. 이런 공예는 기원전 4천 년대에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제1왕조 시기에 최초로 나타났고, 이후 이집트, 그리스, 페르시아 등지에서 유행했으며, 알렉산더의 동방 침입 후 인도로 전해져 들어왔다. 누금세공을 써서 다면체 쇠구슬을 제작한 것은 미케네 시대(기원전 1600-기원전 1100년)의 그리스에서 발원했을 것이다. 서방에서 발견된 쇠구슬은 다 12면체였기 때문에 12면쇠구슬(dodecahedron)이라고 지칭되었다. 이런 류의 다면체 쇠구슬은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12면 쇠구슬만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14면짜리도 발견되었고, 때문에 국내에서는 이를 앞으로는 “다면쇠구슬[多面金珠]”이라고 부르자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다면쇠구슬이 출토한 주요지점은 다음과 같다.:
1959년, 호남성 장강 5리패 9호(長江五里牌9號) 동한(東漢)때 무덤 속에서 11점의 “구형 장식(球形飾)”이 발견되었다 (그림 17). 간이발굴보고서에 따르면 “그 중에서 4점은 12개의 작은 금실[金絲] 고리가 서로 붙어 이루어졌다. 고리와 고리 사이에 빈 틈이 있고, 또 거기에 3개의 작은 동그란 구슬이 붙어있어 더욱 보기 좋게 한다. 또한 5점은 먼저 작은 쇠구슬을 만들고 재차 금실 무늬로 꾸며서 구슬 장식에 엮어 붙였다. 다른 1점은 그 제법은 앞의 것과 같지만 접착 방법이 더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어느 쪽을 보더라도 구슬 장식과 구슬 장식 사이는 가로세로로 라인을 이루면서도 질서정연하다. 또 1점은 다각형으로 투조(透彫)하여 극히 깔끔하다.”
1980년, 강소성 한강(?江)현 감천(甘泉)진의 동한(東漢)때 무덤 속에서 1점의 “속 빈 쇠공[空心金球]”이 발견되었다 (그림 18). 원보고자는 이 유물은 “2개의 큰 쇠방울[金圈]과 12개의 작은 쇠방울을 이어 붙여 24각의 속 빈 구슬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쇠방울이 상접한 24개의 빈 곳에 다시 각각 4알의 섬세하고 야채씨앗 같이 작은 쇠구슬을 쌓아 붙여 24개의 예각을 냈다. 직경 1.3cm, 중량 2.7g”이라고 했다.
1983년, 광주 남월왕묘에서 출토한 32매의 작은 쇠꽃방울 장식[金花泡飾]의 윗면에는 극히 작은 쇠깨알[金粟粒]이 있다(그림 19). 이런 쇠꽃방울 장식은 누금세공으로 제작된 것으로 응당 서방의 공예품이다.
이와 같은 12면체 금구슬은 파키스탄, 인도 동부연안, 베트남 남부의 알골[奧高]유적에서 다 발견되며,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장강 이남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므로 연구자는 이런 금구슬 및 그 제조방법은 아마도 바닷길을 통해 우리나라에 수입되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어떤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다면쇠구슬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서방의 원형을 개조해 만든 본토 제품”이라고 제안했다.
20세기 초에 스타인은 우리나라의 신강과 호탄에서 돌구슬을 몇 알 발견했는데, 겉면에 백색의 꽃문양이 있다고 스타인은 기록했다. 뒷날, 하내(夏?)는 이런 돌구슬의 원료는
연구에 따르면, 식화홍옥수는 기원전 3천 년대에 인도의 Jalapa문화에서 가장 일찍 나타났고, 후에 서아시아 등지로 전파되었다 (그림 22). 초기의 꽃문양은 동그라미 문양[圓圈紋]이 주요 특징이었는데, 우리나라 운남 이가산에서 발견된 것도 이 종류에 속한다. 중기에는 십자 문양 혹은 평행직선 문양이 특징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대다수가 이런 종류의 문양이다. 수많은 연구자가 우리나라에서 출토한 이런 식화홍옥수는 서방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긴다. 그 주요근거는 다음과 같다. 식화홍옥수는 국외에서 가장 일찍 나타났으며 아울러 인도와 서아시아의 주요 생산품이다. 국내에서 발견된 식화홍옥수의 기형, 문양장식은 모두 같은 종류의 국외 생산품과 유사하되 우리나라의 구슬 장식과는 다르다. 국내에서 발견된 수천 수만 알의 보석 중에 식화홍옥수가 점유한 비율은 극히 적어 국내에서 이런 구슬류를 생산하지 못했음을 얼추 말해 주는데 만약 그렇지 안다면 이다지 드물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돌구슬은 통상적으로 비교적 급이 높은 귀족무덤에서 나오는데, 이는 그것이 대단히 희귀하게 들어오는 물품이며 일반인이 손에 넣어 쓰지 못했음을 설명해 준다.
1969년 강소성 서주(徐州)의 한 동한때 무덤 속에서 동물모양 도금 구리벼루집[獸形?金銅硯盒]이 발견되었다 (그림 23). 이것은 희귀한 공예품면에서 최고수준의 한대(漢代) 공예를 반영한 것인데 상감된 redcoral[紅珊瑚, 붉은 산호]과 사파이어[藍寶石]말고도 또한 청금석(Lazurite)이 상감되어있다. 아시아에서 청금석은 주로 아프카니스탄에서 생산되는데 자고이래 그 미려한 빛깔과 광택은 진귀한 보배로 보이게끔 했다. 서주 동한때 무덤에서 나온 도금 구리벼루집의 청금석은 적어도 서기 2세기에 청금석이 이미 중국에 전해 들어왔음을 말해준다. 더욱이 강소성은 바닷가에 위치하기 때문에 바닷길을 거쳐 전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몹시 높다.
5. 예술 이미지[藝術形象]
중국에서 발견된 각종 서방 제조 기물은 고대 중서문화교류의 확실한 증거이며, 이 밖에도, 중국 본토에서 창제한 어떤 기물 중에도 중서문화교류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주요한 것은 각종 기물의 예술 이미지다.
사자는 주로 아프리카에서 사는데, 아시아에서는 주로 인도, 이란 등지에 분포했었고 중원지역에는 없었다. 어떤 외국학자에 따르면 선진(先秦)시기에 사르마타인(즉 중국고대문헌에서 말하는 塞人)이 우리나라 신강지역에 들어와 살았고, 그들은 인도-유럽어계 고대방언의 일종을 사용했는데 사자를 sarvanai(형용사), sarauna(추상명사)라고 불렀고, 이들 어휘가 중국 글로 “산예(?猊, Su?nni)”라고 번역되면서부터 선진문헌 중의 산예(?猊)는 사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어 중문(中文) 중의 “사자(獅子)” 혹은 “사자(師子)”란 말은 한대(漢代)에 가장 먼저 출현했는데 이것은 Tocharia A 방언 중에서 사자를 뜻하는 어휘인 sisak의 음역(音譯)이다.
장건(張騫)이 서역을 통한 후,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서역 특산물은 급증했는데 그 중에는 사자도 있었다. 《한서·서역전》에, “거상(巨象), 사자(師子), 맹견(猛犬), 대작(大雀) 떼가 외원(外?, 궁성 밖 나라 동산)에서 (먹이를) 먹는다. 수방(殊方, 이역)의 이물(異物)이 4면에서 이르렀다.”라고 했다. 서역의 사자가 중원지역에 들어오는 한 주요 경로는 외국의 조공인데 사서(史書)에 이에 대한 것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후한서·장제기(章帝紀)》에 장화(章和) 원년(서기 87년) “월지국(月氏國)이 사자를 보내 부발 및 사자를 바쳤다.”고 했다. 《후한서·순제기(順帝紀)》에 양가(陽嘉)2년 “소륵국(疏勒國)이 사자 및 봉우(封牛)를 바쳤다.” 《후한서·서역전》에 안식국(安息國)이 장제 장화 워년에 “사자를 보내 사자 및 부발을 바쳤다.”하며 영원(永元) 13년(서기 101년)에는 “안식왕 만굴(滿屈)이 또 사자 및 조지(국)의 대조(大鳥)를 바쳤는데 때로는 이 (조지대조를) 안식작(安息雀)이라고 말한다”. 한대(漢代)에 들어온 중원의 사자는 주로 파미르(Pamir) 이서(以西)지역에서 왔음을 볼 수 있다.
사자가 전해져 들어오면서 이것은 점차 중원지역의 한 예술 소재가 되었다. 20세기 중반에 한(漢) 원제(元帝, 기원전 76-기원전33년)의 위릉(渭陵)유적에서 서한(西漢)때의 옥조각[玉雕] 한 무더기를 발견했는데 그 중에 옥사자[玉獅]가 있었다 (그림 24). 한대(漢代)의
동한(東漢)시기에 천록(天祿)이라 불리는 벽사(?邪)의 석조(石雕)가 중국에서 유행했었다 (그림 27). 이 신령스런 짐승은 도대체 무슨 동물을 원형으로 한 것일까? 현재 설법(說法)은 합일되지 못하고 있다. 일부는 그것들이 한족(漢族) 고대 전설속의 기린(麒麟)과 관련이 있다고 하고, 어떤이는 중국 고대 전설속의 익수(翼獸)가 발전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여긴다. 일부는 천록의 원형은 서역의 영양(antelope)이고 벽사(?邪)는 바로 서역의 코뿔소라고 여긴다. 일부는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사자의 조형이라고 여기고, 당연히 또한 일부 중국의 고유 예술 관념이 융합된 것이라고 한다. 비록 현재까지 아직 천록 및 벽사가 사자의 이미지인지 아닌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동한 시기에 사자 석상의 유행이 시작된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예를 들면, 산동 가상(嘉祥)현 무씨무덤떼[武氏墓群]의 석각(石刻) 중에 1쌍의 돌사자가 동서로 마주하고 있다. “동쪽의 돌사자는 높이 1.26, 길이 1.58미터이고 오른쪽 앞발톱으로 한 마리의 구부려 있는 작은 짐승을 찍어 누르고 있다. 꼬리와 앞뒷발 일부가 손상된 것을 빼고 그 나머지는 보존상태가 기본적으로 온전하다. 서쪽 돌사자는 높이 1.28, 길이 1.48미터인데 돌사자의 손상이 비교적 심해서 꼬리부분, 왼쪽 발과 오른쪽 뒷발이 다 불완전하고 빰도 희미하다.” 이 두마리의 돌사자는 다 머리를 쳐들어 눈을 부릅뜨고 있으며, 위무당당하다 (그림 28). 무씨 돌기둥[石闕]의 명문으로부터 이 두 마리의 사자는 동한 환제(桓帝) 건화(建和) 원년(서기 147년)에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한 후에, 사자는 이런 외래 동물을 뛰어넘어 중국문화의 구성요소가 되었고, 나날이 철저하게 일생생활 속으로 침투해서 줄곧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사자춤은 중국문화의 상징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1995년, 중국-일본 니야[尼雅]유적 학술고찰대는 신강 타클라마칸 대사막의 고대 니야 유적지에서 대량의 진귀한 유물을 발견했는데 국내외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제8호묘 안에서 길이 18.5, 폭 12.5cm의 직금(織錦)을 1덩이 발견했는데 윗면에 2행 소전체 한자로 “五星出東方利中國”라고 쓰여있었다. 이 무덤의 연대는 얼추 동한(東漢) 말년에서 위·진 전량(前?) 시기 사이의 것인데 위·진 전량 시기 쪽일 가능성이 있다. “五星出東方利中國”은 중국 고대의 천문 별점 용어로서 이 물품은 의심할 것 없이 중국에서 제조된 것이다. 그런데 이 물품은 중국의 비단짜기 기술 수준을 대표할 만한 직금(織錦)이면서도 타조의 도안이 나타나 있어 더욱 사람들이 절찬케 만들었다 (그림 29). 이런 체형의 거대한 새는 아프리카 외에 서아시아의 시리아 및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살고 있다. 한대(漢代) 중국인은 타조를 “대조(大鳥)” 혹은 “안식작(安息雀)”이라고 불렀다. 장건이 서역을 통한 후, 서방 국가는 타조 알 및 타조를 공물로 삼아 중국에 보냈었다. 《사기·대완(大宛)열전》에 안식국이 사신을 거듭 보내면서 “한나라 사신을 따라와서 한나라의 광대함을 보았고, 대조 알[大鳥卵] 및 여헌(黎軒, 로마)의 솜씨좋은 현인(善眩人)을 한나라에 바쳤다.”고 했다. 《후한서·서역전》에, 영원(永元) 13년(서기 101년), “안식왕(安息王) 만굴(滿屈)이 또 사자 및 조지(국)의 대조(大鳥)를 바쳤는데 때로는 안식작(安息雀)이라고도 말한다”. 《한서·교사지 하》에 또 말하길, 한무제가 장안에 건장궁(建章宮)을 축조하면서, “그 남쪽에 옥당(玉堂), 벽문(壁門), 대조(大鳥)의 속(屬)”이라 했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석에 “대조상(大鳥象)을 세운 것이다.”고 했다. 즉, 타조의 석상(石像)을 이곳에 안치한 것이다. 니야 유적에서 나온 “五星出東方利中國” 직금(織錦)의 타조 도안은 당시 중국의 방직공이 타조라는 서방 동물을 이미 비교적 깊이 알고 있었음을 표명한다.
장건 후부터 중원지역도 중앙아시아 거주민에 대한 일정한 인식이 있었다. 《사기·대완열전》에 “대완으로부터 서쪽의 안식까지는 나라가 사뭇 다른 말을 쓰지만 얼추 풍속은 같고 서로의 말도 알고 있다. 그 사람은 다 눈이 깊고 털 수염이 많다.”고 했다. 이는 한족 작가가 중앙아시아 유럽인종의 체질 특징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개괄한 것이다. 뒷날 서진(西晉)의 장화(張華)도 자연환경의 각도에서 다른 종족의 형성 원인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었다. 그는 “오방인민(五方人民)”을 논술하면서 말하길, “서방은 소음(少陰)이고 일월(日月)이 들어가는 곳인바, 그 땅은 궁명(窈冥, 날이 어스레함)하며 그 사람은 코가 높고 눈이 깊으며 털이 많다.”고 했다. 한대(漢代) 이전의 중원지역은 서방을 각종 귀괴한 신령이 출몰하는 지방이라고 여겼고, 서한 시기가 되면 이미 체질특징이 한족과 다른 종족이 서방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런 인식이 진보해 갔다. 이는 장건이 서역을 통한 후에 동서방 교통이 발전한 결과이다.
역사 문헌에 의하면 한대(漢代), 특히 동한(東漢) 시기에 중앙아시아 거주민이 적잖이 중원에 왔었다. 그 중에는 외교사절이 있었는데, 《사기·대완열전》에 “서북의외국 사자가 쉬 왔다가 쉬 갔다.”고 했다. 안식 등에서 나라에 온 승려는 중국에서 경전을 번역하고 전도했었다. 또한 수많은 난민이 안심할 수 있는 땅을 찾아 중국에 왔었다. 당연히 상인과 여행자도 드물지 않았는데 《후한서·서역전》은 “명을 전하고자 역참을 달리는 일이 철[時月]이 가도 끊임없고, 호상(商胡)은 손님에게 장사하며, 해[日]는 새(塞)아래로 다했다.”고 썼다. 이런 외래인은 주로 유럽인종이었고 또한 일부 니그로인종이 있었을 수도 있다.
문헌 기재 말고도 한대(漢代)의 각종 예술품 중에 또한 일부 외국인의 형상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광주(廣州)의 한대(漢代) 무덤 중에는 껴묻은 일부 토우[陶俑] 등좌(燈座)가 있는데 토우의 특징은 눈이 깊고 코가 크며 체모가 발달했다 (그림 30). “이 토우[陶俑]의 특징은 서아시아 및 남양군도(南洋群島)의 사람과 닮아있어 당시 소수의 서아시아 및 남양군도 사람을 반영하는데, 일찍이 상선에 실려 광주까지 팔려온 뒤에 부잣집의 가노(家奴) 꼴이 되고 말았다.”
1975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귀주(貴州) 흥의(興義)현 및 흥인(興仁)현에서 한 무더기의 동한(東漢)때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중 한 무덤 안에서 동제(銅制) 궤인등(?人燈)이 출토되었는데 높이는 26cm이었다. 땅바닥에 굻어 앉은 사람의 상반신은 노출되어 있었고 손에는 등꽂이[燈揷]을 쥐고 있다 (그림 31). 그의 머리털은 곱슬이고 코가 높으며 눈이 큰 것이 뚜렷하게 몽고인종이 아니다. 이밖에 운남성 진녕(晉寧) 석채산(石寨山)의 서한(西漢) 중기적 13호묘 안에서 일찍이 대단히 유명한 “쌍인무반동식물(雙人舞盤銅飾物)”이 1점 출토했었는데, 윗면의 춤추는 두 남자는 눈이 깊고 코가 큰 것이 기타 유물에서의 인물과 달라서 연구자는 “서방 출신이라고 의심된다.”고 여긴다 (그림 32). 코가 크고 눈이 깊은 인물은 한대(漢代)의 벽화에도 보인다. 1971년, 하북성 안평(安平) 청리(淸理)에서 동한(東漢) 말년때의 대형 다실전실묘(多室?室墓)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무덤 안의 생동적인 채색벽화는 묘주의 생전 호화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이 무덤의 가운데 묘실의 우측 묘실 서벽 벽화에 “눈이 깊고 코가 높은 한 사람이 있는데, 반라에 맨발이며, 황색 삼각형의 짧은 바지를 입었고, 두 손을 들고 두 다리를 벌리는 연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벽화는 이미 손상되어 있어서 이 인물을 뚜렷하게 볼 수 없다. 이런 인물은 다 몽고인종에 속하지 않다 함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원형을 확정할 방도가 없다. 왜냐하면 한대(漢代)에는 수많은 비몽고인종 민족이 중원문명의 인근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이 깊고 코가 높은 호인(胡人)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온 사람을 대표할 수 있겠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소수민족 거주민을 대표할 수도 있겠다.
장건 후의 중서문화 교류 중에는 서방의 잡기(雜技) 및 마술이 전해 들어왔다는 한 내용이 있는데 중국 사서에 많이 기재되어 있다. 《사기·대완열전》에, 안식국의사신이 “한나라 사자를 따라 들어와 한나라의 광대함을 보았고, 대조(大鳥) 알 및 여헌(黎軒)의 솜씨좋은 현인(善眩人)을 한나라에 바쳤다.”고 했다. 비슷한 이야기가 《한서·장건열전》에 “대완의 여러 나라가 사자를 뽑아 한나라의 사자를 따라 들어와 한나라의 광대함을 보았고, 대조 알 및 리간(??)의 현인을 한나라에 바쳤다.”라고 나와있다. 안사고(顔師古)는 주석에서“현(眩)은 환(幻)과 같은 뜻이다. 즉, 지금의 탄도(?刀), 토화(吐火), 식과(植瓜), 종수(種樹), 도인(屠人), 절마(截馬)의 술(術)이 다 그런 것이다. 본디 서역으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른바 “선현인(善眩人)”이란 현재의 마술사 혹은 잡기 배우에 상당한다. 《후한서·남만서남이열전》에, 동한 안제(安帝) 영녕(永寧) 원년(서기 120년)에 동남아시아의 탄국(?國, 미얀마) 국왕이 한조(漢朝)에게 “약과 환인(幻人)을 바쳤는데 (환인은) 불을 뿜어 변화시킬 수 있었으며, 스스로 팔다리를 풀 수 있었고, 소와 말의 머리를 바꿀 수 있었다. 또 공놀리기(跳丸, 저글링)를 1천 번까지 했다. 스스로 말하길 바다 서쪽[海西] 사람이라고 했다. 바다 서쪽이란 즉 대진(大秦)인데, 탄국의 서남쪽으로 대진에 통한다.”고 했다.” 대진(로마제국)에서 나온 마술·잡기는 고대에서 대단히 유명했음을 볼 수 있다. 《위략·서융전》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있는데, 대진국의 “풍속은 이상야릇[奇幻]함이 많은데, 입속에서 불을 내뿜고, 스스로 묶고 스스로 풀 수 있으며, 12개의 공[丸]을 휘돌리는데 솜씨가 아주 기묘하다.” 상술한 기록을 근거로 한대(漢代)에 서방에서 온 마술·잡기는 주로 불내뿜기[吐火], 공놀리기[跳丸, 저글링] 따위였음을 알 수 있다.
한대(漢代)의 화상전(畵像?) 및
南陽 舞?百?畵像
한대(漢代)의 화상전 및
한대(漢代)의 화상(畵像) 속에서 우리는 또한 늘 다음과 같은 그림을 볼 수 있다. 탁자 여러 개를 하나가 되게 포개 쌓았는데 배우가 물구나무서기로 그 위에 있는 것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조형을 이루었다. 때로는 심지어 손에 혹은 머리 위에 주발 등 그릇을 받치고 있기까지 하여 사람들을 절찬케 한다 (그림 36). 오늘날 우리는 아직도 이와 유사한 잡기 연기를 볼 수 있다. 이런 잡기는 “안식오안(安息五案)”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서 “안식(安息)”이란 두 글자 자체가 그것이 서방에서 전해 들어왔음을 표명하고 있다. 당연히 한대(漢代) 화상(畵像)속에서 우리는 포개 쌓은 탁자의 개수가 왕왕 5개에 그치지 않음을 볼 수 있는데 때로는 10 여 개에 달할 수도 있다. “안식오안”이란 이름은 비록 현존하는 한대(漢代) 문헌중에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한대(漢代) 이후의 문헌 중에는 많이 언급되고 있다. 동진(東晉) 육홰(陸?)가 쓴 《업중기(?中記)》에선 “(석)호(石虎)가 정회전(正會殿)앞에서 놀이판[樂]을 벌렸는데, 고환(高?, 줄타기), 어룡(龍魚, 가장놀이·춤), 봉봉(鳳凰), 안식오안(安息五案)의 속으로서 마련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태평어람》권569 소인《양원제편요(梁元帝纂要)》엔 “또 백희(百?, 樂舞雜技의 범칭)는 진한(秦·漢)에서 일어났다. 어룡만연(魚龍曼延), 고환봉황(高?鳳皇), 안식오전(安息五案), 도로심동(都盧尋?, 머리 위에 장대를 세우고 또 그 위에 사람을 받치는 것)”, 등등이 있다고 했다.
중국 경내에서 발견된 고대 중국과 서방의 문화교류를 반영한 각종 실물은 중화민족이 자고이래 끊임없이 줄곧 외래 선진적인 문화를 흡수했음을 표명한다. 빛나는 중국 문명 속엔 수많은 외래 문화 요소가 녹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