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초엔가 90이 넘으신 어머니를 위해 휴대폰을 구입했다. 통화대상이라고 해 보았자 자녀 대여섯명, 일찍 큰 손자녀 몇일 뿐이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휴대폰 판매장에서 소위 그 요금이 저렴하다는 알뜰폰을 구입 개통했다. 어머니의 전화는 나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처음 예상한대로 통화량은 한달에 몇건 정도일 뿐이다. 간혹 다른 전화에도 그렇듯, 그것도 전화라고 귀찮은 광고 전화와 번지 수를 잘못찾아든 전화가 끼어든다.
그것도 연륜이 흐르니 기능이 악화되어, 작년 어느때 쓰던 전화를 해지하고, 다른 것으로 바꾸고자 가까운 같은 통신사 대리점을 찾았다. 대리점 측에서는 알뜰폰은 지방에서는 해지할 수가 없고, 서울에다 서류를 보내야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판매, 개통은 지방에서 가능한데, 해제, 해지는 본사차원에서 하라는 것인데...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을지 몰라도 나로서는 대리점의 이야기가 최선의 정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귀찮아 그냥 두기로 하였다.
그런데 엇그저께 작은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거처를 수도권으로 옮기신 어머니의 전화기가 완전불통이라 다시 구입을 해야겠단다. 하긴 벌써 3~4년을 사용하셨으니, 다시 돈 넣을때도 되었다. 올해 99세인 어머니가 한달에 몇번 통화하시고, 17,000~20,000원의 요금을 낸다는 것도 웃기는 애기다. 그것에서의 도대체 알뜰이란 개념이 뭘까? 회사경영만 알뜰한...
그래서 2021년 11월 9일, 내 명의의 전화를 해지하려고 여기저기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ARS과정을 거쳐 직원이 받드니, 그곳이 아니라며 다른 번호로 넘겨주었다. '00모바일 고객행복(?)센터'에서 다시 실명확인과 인증번호를 받고서야 신청이 가능했다.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메일, 팩스 중 수신방법을 선택하라고 하였다. 메일? 팩스? 퇴직한지 얼마인데, 누가 내게 뭘 보낼게 있다고 그딴걸 왜 간직하고 살아야 할까? 나의 메일이 우주공간 어디에 아직 살아 있기는 한걸까? 직장 다니던 시절에야 필요하지만, 지금은 애들에게 감자, 고구마 보낼 때의 우편번호와 집주소만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다행이 우편으로 받는 방법이 있다고 하여 주소를 불러준 것까진 좋았는데, 그게 전화를 '통화하는 이 싯점에서 7일이내에 도착하여야 유효하다'고 하였다. 서울과 지방간 우편으로 왕복 7일이내에? 가뜩이나 물류대란으로 배달업무가 지연된다는 시국에, 개통당시는 듣지도 못했던 그 7일이란 조건은 대체 어느 국민이 그들에게 이러한 권한을 부여했을까? 그리고 신청서류는 회사의 공식창구가 아닌 상담사가 근무하는 주소로 보내라고 하니, 그 또한 의아심이 생겨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내가 보낸 신청서가 상담사의 갑작스런 사정이 있어 기간내 처리가 안된다면 효력이 없다는 말인가? 계약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된 민주국가의 표상인데, 도대체 뭐가 뭔지 은근히 화가 났다. 차라리 웬만하면 해지를 하지말라는 말로 들렸다. 누구에게라도 따져묻고 싶어졌다.
약정 의무기간이 지났으니, 나의 해지의사가 자신들에게 도착하면 유효한 것이 아닌가? 회사의 방침이 그럴 것이니, 과정에서의 상담사의 불친절은 없었고, 그의 잘못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3일째되는 날 오전에 없어 신경을 쓰다 오후 늦게 우편물이 보였다. 서둘러 신청서를 써서 부리나케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토, 일요일은 쉬는날이면...
참 불합리하고, 일방적인 업무처리 형태다. 상품을 팔때도 이렇게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면 그 회사제품을 사고 싶을까? 내세우 듯, 진정으로 소비자를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시 한번 뒤돌아 보아야 할 일이다.
문명의 발전은 반길 일이지만, 기계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실상 서민들의 삶은 더 힘들어진다. 옛날에는 TV나 냉장고가 고장나면, 고장난 부위의 부품 하나만 교체하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부위의 기계뭉치를 통째로 갈아야 한다. 부품하나면 몇천원에다 기사 출장비 보태면 될 것을, 그냥 세트로 계산해서 십만원 단위로 되어버린다. 인건비가 오른다지만 해도 너무한다.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면 문명에서 소외라도 되는 느낌이다.
결과는 독과점 형태인 회사는 거대공룡이 되어가고, 서민들은 볼모의 상태로 내몰린다. 서민들을 위한다는 생각은 기업의 이윤에 매물되고 만다. 한때 극렬하게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던 사회풍조도 이젠 지쳐 나가떨어진 듯하다. 원래 노름판에서도 뒷돈 많은 자를 이기기는 힘든 법이다.
이렇게하면 생산과 소비단위가 커져서 국민총생산이 늘어나고, 경제규모가 늘어나 성장을 이룬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착시현상이고, 소시민들의 실질소득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흘러갈수록 빈부차가 커지고, 빈곤의 악순환이 거듭된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사라진다. 그래서 서민들은 옛시절을 그리워 한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가고, 그러다 누군가가 나서 세상의 평정을 바라게 된다. 그 누군가는 국민들의 마음을 빌린 히틀러와 스탈린이고, 모택동이 된다. 생각하기에 따라 모두가 능력을 인정 받는게 아니라, 공멸을 하게 된다.
그래도 작금의 세태는 '배고픈 것보다 배아픈 것이 참기가 힘들다'는 사회풍조가 만연한지라 그렇게라도 흘러가게 될 것 같다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그 힘없는 소시민, 정부는 일자리 늘었다고 자화자찬인데, 그게 대부분 정부주도의 단기 일자리가 많다고 하니 큰일이다. 게다가 노년의 수입이래야 변함없이 뻔한데도, 지난해까지 없었던 세금마져 생겨나 삶의 의욕을 꺾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희망은 줄어들고, 세금만 늘어나는 나라, 한번도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또한 너무 싫다.
해마다 수없이 계절바뀜의 사진을 찍었지만, 올들어 단풍든 나무를 찍어보기는 처음이다. 그만큼 세상 삶에 대한 의욕이 꺾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