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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94
12월4일[대림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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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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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70ejNQ_X8c
[김상엽 유스티노 신부 (의정부교구 후곡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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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백인대장을 칭찬하신 이유!>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꼴불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머릿속에 든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자기 잘난 맛에 여기저기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사람, 말로는 만리장성을 쌓지만, 딱 까놓고 보면 뒤가 엄청 구린 사람, 시궁창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람,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악의 종합선물세트인데도 어깨 딱 힘을 주고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
더 슬픈 일이 있습니다. 정신 나간 정치인들과 중심을 잃은 매체 종사자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그들을 날개 없는 천사로, 세상 멋진 의인으로 둔갑시킵니다.
그 숱한 악행과 비리에 대한 정확한 진상조사는 뒷전이고, 물 좋은 자리로 보은 인사를 시킵니다. 수사와 처벌 대신 멋진 훈장을 수여합니다. 지나가던 개가 뒤집어져 배를 잡고 웃을 일입니다.
다행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다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이지 천사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되는 일도 아닌데,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나 몰라라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깊은 연민의 정과 측은지심으로 가득합니다. 본인도 힘들면서, 가진 돈을 나눕니다. 빠듯한 시간을 쪼갭니다.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이 그랬습니다. 그가 얼마나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는지, 그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었던지,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시는데, 수제자나 애제자에게도 하지 않으셨던 특별한 칭찬의 말씀을 그에게 던지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칭찬의 이유를 묵상해봅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청하는 바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이나 딸, 가족이 아니라 거느리고 있던 노예의 치유를 간곡히 청했습니다.
당시 사람들 머릿속에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가축처럼 시장에서 매매가 될 정도였으니 그들의 처지가 어떤 정도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자신의 노예를 살려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인간미가 철철 넘쳐흐르는 사람,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향해 지니고 있었던 겸손의 덕은 또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루카 8, 6~7)
거기다 예수님을 향한 강렬한 믿음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예수님께서 그토록 흡족해하셨던 것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
참 신앙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 믿음, 사랑, 겸손의 덕을 완벽히 지니고 있었던 백인대장을 바라보며 그 무엇 한 가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제 모습을 부끄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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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jeh7gGo_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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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조를 갖추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인 중풍 병자를 고치십니다. 로마 백인대장은 종을 위해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미사 때 성체를 바라보며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에 지배당하는 상황이었고, 일제 강점기로 보자면 일본군 높은 장교가 한 시골 선생에게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으니 한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겸손해질 수 있었을까요?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교만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가끔 남자와 여자가 사귀다 보면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자신이 잘났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처음엔 ‘나 같이 자격 없는 사람을 사랑해주다니 정말 감사하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 사람이 나에게 자격이 되나?’라는 교만한 생각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 둘의 사랑은 실제적으로는 끝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겸손이 사라지면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랑이 자기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너무 사랑했지만, 그래서 많은 애정을 쏟았지만, 결국 아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아들의 아내를 못살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어머니에게 잘못이 무엇일까요? 사랑을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아버지께 순종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혼자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큰 자아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머니가 자녀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남편과 자녀에게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를 상상해봅시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있을 때 교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덕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도 배 위에 머무는 이들은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님인가? 물 위를 걸으려고 하게?”라며 베드로를 나무랄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해주신 분처럼 나도 그분을 사랑하고 나의 자녀들도 그분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순종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따라서 백인대장이 이미 종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사랑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원천을 쉽게 알아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맞겠지만, 믿기 때문에 겸손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도 예수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나는 일분일초도 생존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임을 믿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하여 주님께 합당하지 못한 존재임을 알게 합니다. 이때 심지어 저는 예수님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겸손함은 결국 하느님 앞에서는 너무 당연하고 이웃 앞에서도 상대를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는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따라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지도, 믿지도, 그래서 희망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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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LA에 가면 교우 분들의 집에 머물곤 했습니다. 늘 감사했고, 고마웠습니다. 저를 위해서 공항까지 와 주셨고, 잠자리는 물론, 식사까지 챙겨주셨습니다. 지난 11월 신문 홍보 때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직접 공항까지 와 주셨고, 수도원에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아침이면 수도원 경당에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교우 분들의 집에 머물 때처럼 편안함은 적었지만, 신부님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뉴욕에서는 두꺼운 잠바를 입어도 추웠는데 LA에서는 잠바를 벗어도 될 정도로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날씨도 좋았고, 따뜻한 신부님의 배려도 좋았습니다. 덕분에 신문 홍보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았으니, 뉴욕에 오시는 분들이 편안하게 지내다 가실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2023년에 제가 있는 뉴욕의 신문사에도 20여명 이상의 손님들이 왔다 갔습니다. 2024년에도 손님들이 오시면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겠습니다.
이번 주에도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의 강의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부정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부정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용서’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부정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누가 죄인인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부정한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죄인을 심판하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에서 죄인을 용서하려고 하십니다. 성전은 이제 심판과 단죄의 장소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심판은 부당한 심판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부정한 행위를 했다면 남자도 같이 벌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에는 부정한 남자는 없고, 부정한 여인만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사람들은 죄를 고발하려고 모였습니다. 겉으로는 열심한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려합니다. 직분이 나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제, 수도자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사제와 수도자가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이 생기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습니다.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직분에 따라서 종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그게 문제입니다. 성직자들이 조심해야 할 생각입니다. 사제도 베풀 줄도 알고, 나눌 줄도 알아야 합니다. 주인의식과 주인이 되려는 마음은 다릅니다. 주인이 되려고 하면 심판하고, 비난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배우자와도 그렇습니다. 주인이 되려고 하면 심판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악용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약자에게만 적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썼을까?’는 중요한 것이 압니다. 무엇을 쓰셨는지가 아니라 ‘왜’ 쓰셨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인에게 쏠려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닥에 글을 쓰시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여인의 몸은 잠시나마 자유로워졌습니다. 그것이 죄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신 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여인이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디에 있느냐?’는 창세기의, 하느님의 물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누가 과연 죄인인가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숨어 버렸습니다. 진짜 죄는 하느님 앞에 숨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이웃을 심판하는 것이, 큰 죄입니다. 여인은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주인이 되지 않으려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웃은 비난의 대상,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웃에게 그 사람을 살리고, 희망을 주고, 하느님께서 하려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자세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니 심판하려는, 비난하려는, 단죄하려는 그 마음을 버리면 좋겠습니다. 직분이 있다고 해도, 하느님 앞에서는 나도 종이라는 생각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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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5-11: 한 말씀만 하소서.
백인대장은 예수께 자기 종을 위하여 도움을 청한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6절) 예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7절) 하신다.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알게 된다.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그의 믿음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일보다 더 큰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종이 일어나리라는 확신했다. 백인대장은 겸손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자기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자격이 있는 자임을 보여 준다. 그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 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의 집에만 들어가시고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하셨다면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주님으로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받은 분으로 여기고 찾아왔다.
백인대장은 예수께 “말씀만 해 주십시오.”(8절) 했고, 이 말은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그분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그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10절)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이민족이지만 믿음의 가족인 백인대장을 칭찬하셨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1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거절한 백성들은 쫓겨나고 그리스도인들은 동서에서 몰려와 복된 잔칫상에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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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카파르나움에 주둔하던 로마군 지휘관으로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던 그는, 아마도 이 고을에서 손꼽히는 세력가였을 것입니다. 그런 이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한껏 낮추는 자세를 보입니다. 차원이 다른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알아본 것입니다. 이 인식은 믿음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군사들을 복종시키는 권한을 예로 들며, 이보다 더 큰 권한을 지니신 분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굳이 자기 집에 모시지 않더라도 권위 있는 말씀만으로도 자신의 종이 나으리라 확신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믿음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과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아본 이상, 자기 신분(이방인)이나 직책(백인대장)이나 체면(세력가)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 믿음을 드러내 보이고자 노력하였고, 결국 어떤 유다인도 들어 보지 못한 예수님의 찬사를 듣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약한 믿음 때문에 때로 질책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마태오 복음서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8,26; 참조: 14,31; 17,20)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그분의 현존과 능력을 의심할 때가 때로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작고 보잘것없는 믿음이라고 자책하기보다는, 백인대장이 보여 준 확신에 찬 행동들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17,20)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께 조금씩이나마 성장하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 드리도록 노력합시다. 어느덧 크게 자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감탄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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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5-11)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한 말이지만, 백인대장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주인공은 보지 않고 조연만 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보라는 예수님은 보지 않고 백인대장만 본다면, 복음 말씀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원래 복음서는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을,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서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믿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라는 백인대장의 말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병마(病魔)’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 ‘병마’가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고, 그러면 병자가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하느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백인대장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은 사람은 그 백인대장이 첫 번째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거나, ‘메시아’로 믿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 믿은 사람은 그때까지는 아직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게 된 것은 '예수님 부활 후부터’입니다.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리고 그 뒤에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맨 먼저 적은 다음에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을 증언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ㅈ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1티모 2,4-6)
<여기서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말은, “하느님이신데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신 분이고, ‘참 사람’이신 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셔서ㅈ사람들 가운데로 오신 날”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성탄절을 성대하게 경축하는 이유입니다.
<성탄절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나중에’ 메시아가 되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신 분이 아니라,ㅈ원래 메시아이신 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ㅈ하느님이신 분인데, 아기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꾸짖으신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도, 성경도 모르고 살던 이방인도 이렇게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하느님도, 성경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너희는 왜 이렇게 믿지 않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알아볼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보여 주어도 보려고 하지 않고, 말씀을 하셔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것만 찾고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구원이 아닌 것, 즉 재물 같은 것만 찾고, 영원한 생명이 아닌 것, 즉 허무한 쾌락 같은 것만 찾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음을 전해 주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어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사람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진리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의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으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손해’라고 표현했지만, 그냥 ‘손해’가 아니라 ‘영원한 멸망’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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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야 에언서 2,1-5 참조)
구세주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대림 시기에 우리를 맞이해 주는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유배 이전, 유배, 유배 이후, 이렇게 세 세대를 아울러 활동했던 예언자 학파의 이름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는 제1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제1이사야는 유다의 사제 귀족이었으므로 유다 왕실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밝았고, 머지않아 유다 왕국은 망할 것이며 백성은 유배를 당할 것과 이 참담한 유배 역사가 지나가고 난 이후에 메시아가 오셔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왕국을 세우실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이 주님의 산으로 올라오는 그날이 오리라.” 그날이 오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국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까지 내다보았습니다.
국운이 다하여 민족의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때에 가장 찬란한 미래를 보았을 만큼 이사야의 예언자적인 상상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내다본 장밋빛 미래는 단지 유다인들과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한 미래는 아니었고, 예수님을 내칠 그들 대신에 참으로 하느님을 섬길 새로운 백성이 나타날 것임을 내다본 예언이었는데, 그 백성이 바로 그리스도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메시아적 백성으로서 처음부터 이사야가 내다본 국제적 연대와 미래지향적 개방성을 지니고 태어난 것입니다.
꽉 막힌 유다인들로부터 견제를 받거나 배척을 당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마태오 8,5-11)에서는 모처럼 열린 이방인을 만나시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을 무력으로 식민 통치하는 로마 군대의 고급 장교였으므로 공적으로는 유다인들의 원수라 불릴 만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유다인들의 원로들은 그를 예수님께 소개하기를 그가 유다인들의 회당을 지어 주었고 유다인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니 도와줄 만하다고 추천하였습니다.
또 자기가 데리고 있는 유다인 종들을 매우 아꼈으며 또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군인정신으로 충일한 사람이어서 신앙마저도 군인다운 단순함으로 예수님께 믿음을 보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처형작업을 진두지휘하다가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는 로마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을 미사에 도입하였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또한 1945년에 출범한 국제연합은 미국 뉴욕에 세워진 본부 건물의 외벽에 이사야의 그 유명한 예언이자 인류의 이상을 크게 써 놓았습니다.
“칼을 보습으로, 창을 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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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오 8,5-11 참조)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가면 그 옛날 예루살렘의 성전에는 두 개의 성지가 있습니다. 회교도의 모스크가 솔로몬 성전 그 자리에 있어서 아랍인들이 코란을 읽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구역에서 로마의 헤로데가 유대인들의 성전을 무너트리고 남긴 성전의 한 귀퉁이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자리에서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가 전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아브람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유대인들과 앙숙지간인 회교도인에게도 아브라함은 그들의 깊은 신앙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칼을 보습으로 창을 낫으로 만들어 농경사회의 평화를 구가하듯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의 예언말씀을 골고타의 언덕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전쟁과 무력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위력을 과시하려고 하지만 ‘사람의 아들’께서는 지상에서 그들에게 버림을 받으신 돌이셨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건물의 모퉁이의 중요한 돌이 되게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진정한 평화를 이루셨고 온 민족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과 회교도 사람들이 전쟁인 아닌 평화를 지니고 예루살렘을 찾고 있는지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우리는 예루살렘에 서서 이사야의 예언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신비스런 헤아릴 길 없는 하느님의 계획이십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야 예언서 2장 2절-3절)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한 백인대장의 당신께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에 대해서 감탄하고 계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이 아끼는 종이 중풍으로 누워있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와 그 종을 고쳐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그의 말을 받아들여 고쳐주시려 그 집으로 가려고 하자 그는 주님께서 굳이 가지 않으시고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오 8,8)라고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교회의 미사전례에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놀라운 믿음을 본받아 성체를 모시기 전에 백인대장의 이 말을 새기며 깊은 신앙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감탄하시지만 우리에게도 믿음의 소중한 본보기이고 그 믿음으로 주님의 성체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대림시기의 첫 주간 첫 날을 맞으며 우리도 이사야의 놀라운 예언말씀과 백인대장의 전적인 신앙이 담긴 말씀을 묵상하며 ‘늘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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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기다림의 시간이 모두 같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풍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의 기다림과 시험 전날 잠을 못 자며 공부하는 아이의 기다림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과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은 다릅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행복하고 기대되는지의 여부는 누구를, 무엇을, 그리고 어떤 상황을 기다리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백인대장의 기다림은 예수님께서 아픈 종을 반드시 고쳐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의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는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자신의 처지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고 배려합니다. 그래서 그 기다림은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마침내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을 만난 백인대장은 이를 표현합니다.
“주님, 제 종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욕심과 바람만을 요구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배려와 사랑도 표현합니다.
“수고롭게 이방인인 저의 집에 오실 필요없습니다. 그냥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종으로서 당신께서 하라고 하시면 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백인대장은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기다림으로 자신의 시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요? 기쁨과 행복의 기다림인가요? 아니면 고통과 초조함의 기다림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해마다 다가오는 성탄이기에 너무 익숙해진, 그래서 아무 느낌 없는 기다림인가요?
우리는 가난한 구유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아니면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크리스마스의 활기 속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어떤 기다림인지 잘 바라보아야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가난하게 오신, 나의 가장 가난한 마음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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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 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오래전 일이지만 너무도 확실한 기억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고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 가슴으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으로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 넣어 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 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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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남을 아프게 하는 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일부러 아프게 하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평상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아픔을 주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망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 뜻은 남편을 여의고 혼자 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한자 뜻을 살펴보면, 아닐 미(未), 죽을 망(亡), 사람 인(人)으로 ‘죽지 않은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유교적 사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살색’ 역시 황인종 중심의 사고로, 피부색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표현입니다. 또 ‘결정 장애가 있다’도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주저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하는 말이지만, 장애를 단순한 불편함이 아닌 부족하고 열등한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그런 잘못을 많이 범했음을 반성합니다. 실제로 제 말을 듣고서 크게 상처를 받았다면서, 한동안 저를 많이 원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계속해서 실수할 수 있는 우리였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말을 하는 데 노력해야 그나마 아픔을 주는 말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 종이 중풍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백인대장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 기억나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해서 표징만 보여달라는 말이었고,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행한다면서 철저하게 반대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진정한 회개와 겸손의 말이었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감탄하시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특히 주님께 하는 말은 어떠했습니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에서 나오는 겸손과 감사의 말이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 대한 불평에서 나오는 불평과 원망의 말이었습니까? 우리의 말에 주님께서는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슬퍼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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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게 사랑이니까요>
마태오 8,5-11(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게 사랑이니까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오 8,7)
나를
바람에도
차마 나에게
오지 못하는
그 누군가에게
내가 가는 겁니다
그게 사랑이니까요
나를
바람에도
차마 나에게
올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
내가 가는 겁니다
그게 사랑이니까요
나를
바람에게
차마 나에게
오라할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
내가 가는 겁니다
그게 사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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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믿음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대림 시기 첫날인 오늘 백인대장 얘기를 교회 전례가 들려주는 것은 창세기의 그리스도론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얘기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옵니다. 1장은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없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얘기입니다. 이 하느님은 신비의 하느님이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곳에 계시는 분입니다
이에 비해 2장의 하느님은 인간이 있는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러 땅에 다시 내려오시는데 그분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십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땅에까지 내려오지 않고도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 굳이 땅에까지 다시 오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능력으로만 구원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치유해달라고 청하자 주님께서는 즉시 “내가 가서 고쳐주마.”라고 하시는데 백인대장은 주님이 자기 집에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으로 충분히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음을 보입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도 백인대장과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종에게는 사랑을, 주님께는 믿음을 지닌 백인대장과 같이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믿음을 지닌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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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8,10)
<구원과 믿음!>
오늘 복음(마태8,5-11)은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백인대장은 로마의 장교로서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던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종은 노예의 신분으로서 물건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도움을 청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마태8,8-9)
백인대장의 이 말을 듣고 '이방인의 믿음'에 예수님께서 크게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8,10-11)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충격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한 '이방인들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구원'은 유다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 있으며, 그 문은 '믿음의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면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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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X9QTBm7JU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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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 8, 7)
모든 이들을
편안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모든 자녀들이
행복하길
바라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통하여
진정한 삶의
참된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신분의 굴레에서
풀어주시며
고통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니다.
사람은
참사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말보다는
실행을
앞세워야 합니다.
이 세상 전부가
하느님의
소중한 것이며
하느님의
아픔들입니다.
하나하나의
아픔이
하나하나의
깨달음으로
바뀝니다.
새로운 삶의
영원한 기쁨과
환희를
예수님을 통해
뜨겁게
체험합니다.
보살피고
보호하고
기도하는
백인대장의
믿음에서
진정한
믿음이란
소중한
것을 지켜나가는
오늘의 마음임을
절실히 만납니다.
아픔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믿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믿음이란
치유의
체험입니다.
믿음으로
오시고
믿음으로
맞이하는
믿음의 참뜻입니다.
믿음이
생명의 빛이며
믿음이
우리에게 온
새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듯
소중한 관계를
고쳐 주시는
행복한 믿음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믿음과 기도로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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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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