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유일한 피할 길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히2:1-4)
- 우리는 함께 모여 복음을 고찰하는 것이 조금은 특이한 일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은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만, 그나마 일부는 자신들이 왜 교회에 오는지 한 번도 살펴보지 않은 채 잘못된 이유로 오는 것 같다. 삶이 너무 풍족하고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어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복음의 사실들을 생각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경고를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복음을 고찰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는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는 우리가 고찰하는 내용이 진짜 복음인지, 혹시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은 아닌지 먼저 확인해 보라고 말한다.
- 우리는 “들은 것”, 모든 사람이 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 중대한 이유는 이 메시지의 원천, 즉 배후의 권위에 있다. 각자의 당면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처한 곤경과 처지부터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1. 하나님을 모르는 비그리스도인들의 처지가 얼마나 위험한지 강조한 것은 성경에 늘 나타나는 큰 특징이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1)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로 고상하고 훌륭한 인생관 내지 인생에 가르침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것을 채택했기에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며, 따라서 큰 결핍감이나 절박감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의 문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자신을 바라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이다.
2) 어떤 이들은 이러한 가르침과 설교에 반발하기도 한다.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라는 것은 모욕적이고 이기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런 걸 강조하는 복음은 필요 없다”라고도 한다. 문제는 개인의 구원에는 이처럼 반발하면서도 몸의 구원(먹고 마시는 일, 미래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을 위해서는 당연시하며, 불멸하는 영혼의 영원한 운명에 신경을 쓰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불난 집에 갇히면 창밖으로 뛰어내려서라도 목숨을 구하려 드는 법이다. 영원한 운명과 관련하여 자신들이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지를 안다면 이런 어리석은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3) 두려움과 경고라는 개념 자체가 현대인과 현대의 정신에 모욕이 된다고 느끼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과거와 달리 오늘날 지옥과 심판과 형벌을 설교하지 않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현대인은 이전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행복해 한다. 우리는 그만큼 발전했고 우월하다는 것이다.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같은 질문에서 벗어날 만큼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 질문과 20세기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과학 지식이 늘었다고 해서 과연 달라진 점이 있는가? 지금 우리가 논하는 대상은 영과 혼과 하나님 –불변하시며 동일하신 하나님, 성경을 떠나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 의 영역에 속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저는 창조주시요 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밝히건대, 오직 이 경우 외에 사람들을 겁주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위대한 성도들, 스펄전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한 과거의 거인들이 두려움을 조장하길 즐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이 남긴 이름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설교를 했던 것은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며 영혼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닥칠 일을 전하지 않은 것 때문에 정죄받을 것을 생각하면 두렵기만 하다.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면 권면해야 하는 것이다(고후5:11).
4) 이 가르침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와 완전히 상반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영벌과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과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 가지 의견으로 갈라진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신다는 보편적인 구원과 그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죽은 자들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2. 이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 관점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는가?
1) 요점은 ‘성경을 믿을 것인가? 사람의 생각을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 이보다 더 눈에 띄는 메시지는 없다.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성경은 경고의 책이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인간관이다. 이 진술은 복음 및 피할 길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인간관 중 하나를 취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성경의 관점으로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과 교류할 수 있는 존재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를 위해 살도록 지어졌다. 두 번째, 인간은 특별한 피조물이 아니라 다른 동물보다 좀 더 진화한 동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꽃이나 동물이 죽듯이 인간도 잠깐 살다가 죽지만, 좀 더 진화했기 때문에 일정한 책임은 져야 한다. 그 책임은 사는 동안의 삶과 사회에 한정된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성경의 관점은 아주 다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완전히 다른 중대한 인격체, 중대한 피조물로서 피조세계의 주관자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히2:16) 이것이 인간에 관한 성경의 진술이다. 인간은 일종의 진화된 짐승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운명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과 세상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성경은 이 질문에 유념할 것을 요구한다. 현대인들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위대한 우월성을 자랑하며 거의 신으로까지 격상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왔다가 죽으면 그만인 짐승으로 묘사하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 인간은 설명할 의무와 책임을 가진 존재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행한 모든 일을 아시며 기록하시고, 여러분은 그 모든 행동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2)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권위는 오직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① 구약성경을 보라.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한 분임을 알려 주셨다. 자신에게 복종하며 살 것을 명하셨고, 계명을 주시면서 순종치 않으면 형벌이 따름을 알려 주셨다. 정말로 인간을 벌하셔서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죽음과 땅은 저주를 받아 우리의 삶은 이런 모습이 되었다.
홍수 이야기도 보라. 그때도 하나님은 자기 성품을 계시해 주셨으며, 인간이 의무와 책임을 가진 존재임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부르신 노아가 120년간 의의 교리를 전하며 경고했지만, 회개치 않아 하나님은 노아의 말이 참된 것이었음을 입증하셨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구약성경은 말씀의 계시일 뿐 아니라 행동의 계시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고, 홍해를 건너게 했던 위대한 지도자조차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개개인이 받은 형벌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받은 무서운 형벌을 보라. 친 백성이었던 그들은 포로가 되어 앗수르와 바벨론에 잡혀갔다. 그들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그의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평하시며 의로우신 분으로서, 설사 자기 백성이라도 그 죄와 허물을 반드시 벌하신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영원한 기념물이다.
세례 요한도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마3:7),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29) 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것을 촉구했다.
② 주님의 가르침도 살펴보자.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또한 주님은 기계적인 율법관을 폐기하시고 율법을 이전보다 무한히 더 지킬 수 없는 법으로 만드셨다. 율법은 영적인 법이다. 산상설교를 읽어보라.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목적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데 있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마지막 때, 모든 사람이 양과 염소로 분류될 심판 때에 대해 주님이 지옥에 대해 하신 말씀을 읽어보았는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영원한 고통의 불꽃과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를 직접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신 말씀을 보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5). 주님은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하셨다. 히브리서 기자가 촉구하듯이 우리는 이런 사실들로 출발해야 한다.
③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와 함께 지냈던 사도들의 글을 보아도 전부 다가올 심판에 대한 경고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의 진노를 피하라고 권면했고, 유일한 피할 길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와 이적으로 그들의 메시지를 입증하셨다. 심판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히브리서에 이 엄숙한 메시지가 가장 많이 나온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10:31),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12:28-29). 우리는 직면해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온전히 거룩하시고 공평하시며 의로우시고 능하신 하나님,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대답해야 한다. 계시록도 읽어보라. 이 모든 경고와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선포가 아주 비상한 방식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 모든 것에서 구원받을 길 또한 영광스럽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라.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고, 하나님을 잊었고, 모욕했다. 우리는 다 정죄 아래 놓여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부 해주셨다. 아들을 보내 주셨다. 그리스도의 피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 피야말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피할 길이요 유일한 속죄제물이다. 이 제사를 거부하면 “다시 죄를 속하는 제사가 없”다(10:26). 남는 것은 장래의 고통과 번민뿐이다. 이것이 불신자의 영원한 운명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말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이것만이 유일한 피할 길이라고 가르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이같이 큰 구원을 우리가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라고 말한다. 피할 수 없다.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이 사실을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