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뤼셀. 16세기 플랑드르의 대표적 화가.) 농민생활의 활달하고 재치 있는 장면과 풍경화로 유명하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에 서명과 연대를 적었기 때문에 16세기 플랑드르의 풍경화 전통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초기의 풍경화에서 이탈리아 양식에 영향을 받은 말기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적 발전을 추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북해 연안의 저지대 국가의 회화에 강한 영향을 끼쳤으며, '벨벳의 브뢰헬'과 '지옥의 브뢰헬'로 각각 알려진 그의 두 아들 얀과 피테르를 거쳐 18세기까지 있었던 한 화가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 그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1604년(브뢰헬이 죽은 지 35년이 지난 해)에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된 카렐 반 만데르의 〈화가들의 생애 Het Schilderboeck〉에 따르면, 브뢰헬은 브뤼셀에 살고 있었던 안트웨르펜의 주요한 미술가인 피테르 쿠케 반 알스트 아래에서 도제로 지냈다. 대규모 작업장의 감독이었던 쿠케는 조각가 겸 건축가이자 태피스트리와 스테인드글라스의 디자이너로, 이탈리아와 투르크를 여행했다. 남아 있는 브뢰헬의 초기 작품들이 양식면에서 쿠케의 이탈리아식 미술과 아무런 관계도 나타내고 있지 않지만, 후기 특히 브뢰헬이 쿠케의 딸인 마이켄과 결혼한 1563년 이후에는 쿠케의 구도와 비슷한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여하튼 쿠케의 도제로 있는 동안 그는 일찍부터 인문주의를 접했다. 브뢰헬은 쿠케를 통하여 또다른 전통과도 간접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쿠케의 아내인 마리아 베룰스트 베세머스는 달걀 노른자나 끈적끈적한 용매로 갠 안료로 린넨 위에 그리는 템페라나 수채화로 유명한 화가였다. 그 기법은 그녀의 고향인 메헬렌(말린)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나중에는 브뢰헬도 그것을 사용했다(→ 색인 : 템페라). 또한 농부들에 관한 주제를 처음으로 우의적으로 다룬 것도 바로 메헬렌의 미술가들이다. 후에 브뢰헬은 안트웨르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 주제들을 다루었다. 1551년 또는 1552년에 브뢰헬은 북부의 미술가들이 그래왔듯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는데, 아마 프랑스를 거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아 있는 여러 점의 회화·소묘 및 에칭들을 보면, 그가 나폴리를 거쳐 시칠리아 및 멀리 팔레르모까지 여행했으며, 1553년에는 얼마간 로마에 살면서 미켈란젤로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고 뒤에는 젊은 엘 그레코를 후원한 유명한 세밀화가인 줄리오 클로비오와 함께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클로비오의 재산 목록을 보면 그들이 합작으로 그린 세밀화뿐만 아니라 브뢰헬이 그린 많은 회화들과 소묘들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브뢰헬이 처음으로 서명과 연대를 적은 작품인 〈그리스도와 12제자가 있는 티베리아스 호의 풍경 Landscape with Christ and the Apostles at the Sea of Tiberias〉은 1553년 로마에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의 거룩한 인물들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안트웨르펜 출신의 화가인 마르텐 데 보스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1552년 남쪽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이탈리아 경치를 스케치한 2점의 소묘를 비롯해 남아 있는 초기의 작품으로는 풍경화들이 있다. 1553~56년에 알프스 지역을 그린 많은 소묘들은 북해 연안의 저지대에서 온 브뢰헬이 산악지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여행에서 그린 풍경화들은 높은 산들의 압도적인 웅장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산골짜기를 그린 소묘를 제외하고는 유럽의 미술에서 거의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이 소묘들 중 현장에서 그린 것은 불과 몇 점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브뢰헬이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온 뒤에 그린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알프스 산맥을 지나면서 스케치한 것들을 결합하여 자유롭게 구도를 잡은 것들이다. 그중 일부는 안트웨르펜의 주요출판업자이자 판화가인 히에로니무스 코크가 주문한 판화의 도안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브뢰헬은 말년까지 코크를 위하여 일하기로 했었지만 뜻밖에도 1556년부터는 풍자적이고 교훈적이며 도덕적인 주제들에 몰두했으며, 이따금씩은 당시에 매우 인기가 좋았던 보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환상적이거나 괴기적인 그림을 그렸다. 다른 미술가들은 대체로 보스와 유사하게 모방하는 데 그쳤지만 브뢰헬은 창의성을 발휘하여 단순한 모방을 뛰어넘어 자신의 구도로 발전시켰으며, 곧 아주 색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러한 구도를 사용한 판화가 코크에 의해 출판되자, 브뢰헬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주제와 인물에 대한 관심 때문에 풍경화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브뢰헬은 이 분야에서의 탐구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산을 소재로 한 풍경화와 나란히 시골의 숲을 스케치하다가 얼마 후에는 플랑드르의 마을들을 그렸으며 그뒤 1562년에는 암스테르담의 탑과 관문들을 담은 도시 풍경(브장송 미술관과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소묘들)을 그렸다. 브뢰헬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더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의 그림에서는 풍경화와 인물이 들어가는 주제에 대한 이중의 관심이 나타나 있다. 그의 모든 그림들, 심지어 풍경이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그림들조차 어느 정도 설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이야기를 주로 다룬 그림들에서는 배경을 이루는 풍경이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도 있다. 1558년과 1561년을 제외하고 그 시기에 해마다 연대가 적힌 그림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후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로 브뢰헬이 1563년에 브뤼셀의 노트르담드라샤펠 교회에서 마이켄 쿠케와 결혼하여 그녀의 어머니가 살고 있던 그 도시로 옮겨왔다. 그가 살던 집은 최근에 복구되어 브뢰헬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집이 정말로 그가 살던 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치 않다. 브뤼셀에서 브뢰헬은 가장 완숙한 그림들을 그렸지만 브뢰헬이 안트웨르펜을 떠난 뒤로는 히에로니무스 코크에게 건네주던 판화용 도안을 몇 점밖에 그리지 않았는데 그나마 전처럼 섬세하지 못하다. 회화에 몰두하게 된 또다른 이유는 이 분야에서 그가 점점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후원자로는 네덜란드 국책회의의 의장인 앙투안 페레노 드 그랑벨 추기경이 있었는데 브뤼셀에 있는 그의 궁전에는 조각가인 자크 용얼링크의 작업장이 있었다. 그와 브뢰헬은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안트웨르펜의 부유한 수집가인 그의 형 니클라스는 브뢰헬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로서 1566년 당시 브뢰헬의 그림을 16점이나 수집하고 있었다. 또다른 후원자로는 그의 사망기사에서 브뢰헬을 16세기에서 가장 완벽한 미술가라고 평한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가 있었다. 브뢰헬은 대부분의 그림을 수집가들의 요구에 맞춰 그렸다. 브뢰헬은 1569년에 세상을 떠났고 브뤼셀의 노트르담드라샤펠 교회에 묻혔다. 그의 유가족으로는 아내와 두 아들인 피테르(1564~1638)와 얀(1568~1625)이 있었는데, 두 아들은 아버지 브뢰헬이 1559년 그의 이름을 Bruegel로 바꾸기 전에 그러했듯이 h를 넣어 Brueghel이란 이름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