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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서 온 사람들
이 호 철
1
남쪽에서 의용군으로 마악 올라온 남로당원 갈승환(葛承煥)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막내이모부를 문득 떠올렸다. 비록 생김새는 달랐으나,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는 매우 비슷하였다.
막내이모부는 시내 어업조합 서기로 다녀, 인근 농촌 출신으로는 가장 먼저 도시의 세례를 받은 축에 속하였다. 첩첩으로 겹싸여 있는 무거운 기와집의 바깥을 에워싼 흙담부터 헐어내고는, 안과 밖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내다보이도록 통유리 달린 반양옥으로 개축했을 뿐 아니라, 그 당시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던 10급짜리 제니스 라디오도 일찍부터 장만하여 온 길명리 마을이 떠나갈 듯이 왕왕 틀어대었다. 한때는 아침 저녁으로 빨강색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고. 종전 임박해서는 전투모에 전투복과 각반* 차림이 그 이상 어울릴 수가 없었다. 해방 전전해던가에 우리 집에 4급짜리 데미안 라디오를 어렵사리 구해다 준 것도 바로 그 이모부였다.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진주하자 그는 백팔십도로 표변하여 제1착으로 공산당에 입당하여 설치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6·25가 일어날 무렵에는 그 마을의 농민위원장인가 하는 직함을 맡고 있었다.
내 선친은 그를 여간 미워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그런 행태에 대해서였기보다는 훨씬 더 깊은, 거의 원천적이고 생득적인 그의 사람 됨됨이에 대한 것으로 보였다. 나도 반드시 선친의 영향만도 아니게, 이모부의 그 사람됨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갈승환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막내이모부를 문득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해 8월 초순, 전쟁은 이미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다. 갈승환씨는 처음부터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눈에 걸리적거렸다는 것이 더 옳겠다. 서른 살 안팎의 깡마른 헌칠한 키에 무테안경을 끼고 있었고, 한여름임에도 짙은 까망색의 두툼한 털스웨터 차림인 것부터가 첫눈에도 유난히 돋보였지만, 일행 쉰남은 명을 정렬시킬 경우 중간에서건 뒷자리에서건 그는 늘 머리 하나 푼수* 정도 싱겁게 삐죽 솟아 있어 안 보자고 들어도 맨 먼저 눈에 들어오곤 하였다. 그 느낌은 처음부터 그닥 안 좋았다. 저만큼 무언가 성가신 것 하나가 노상 꺼끌꺼끌하게 걸리적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날 오후 느지막이 나는 동료 두엇과 함께 낭성(浪城) 특간대(特幹隊)에서 급히 차출당하여, 트럭으로 여단 보충대대가 있는 당상리로 옮겨와, 금방 닿은 그들 일행의 사상·정치 교양사업을 떠맡게 되었다.
여단 보충대대라고는 하지만, 8월 초에 접어들어서는 이미 허울뿐, 기간요원 몇이 농가 큰 기와집 사랑채 하나를 빌려 지키고 있을 뿐이어서 신병 떼거리가 새로 들어오면 언덕 및 과수원 움막 속에 가마니때기를 깔고 때려넣어져, 노래 몇 곡과 무기 조작법만 대강 익히고는, 사흘, 나흘, 길어야 일주일 내에 휘하 부대의 충원 요구가 들어오는 대로 급히 군복을 입혀 숫자만 맞추어서 금방금방 내보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여 우리가 차출당해 왔을 때도, 달덩 이마냥 귀공자로 생긴 군관 동무가 군복 윗도리를 급하게 걸치고는 마당으로 훌쩍 내려서며,
“동무들, 수고했소. 오는 도중 폭격이나 만나지 않았소?”
하고 무겁게 입을 떼었다.
“다름이 아니라, 조금 전에 서울에서 의용군 동무들이 도착했소. 동무들은 우선 이들을 맡아 기초적인 사상·정치 교양사업부터 해줘야겠소.”
우리 중 누구 하나 대꾸는 없었으나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처음으로 맞대면해 볼 수 있다는 일말의 호기심과 함께, 한편으로는 우리 푼수에 무슨 놈의 사상·정치 교양사업인가 하고 어이없고 터무니 없다는 느낌에 제각기 휘감겨 있는 것을 재빨리 눈치 채기라도 한 듯이, 그는 다시 비시시 쓴웃음을 입가에 어리우며 한결 억양을 낮추었다.
“뭐, 특별히 어렵게 받아들일 것은 없소. 동무들도 대강 겪어보아서 요즘 부대 돌아가는 형편을 나름대로 짐작할 것이오만, 원체 인원이 달리고 있는 판국이오. 우선에 동무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이쪽 노래들을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착수를 허면 될 것이오. 남쪽에서 갓 올라온 동무들로서는 모두가 귀에 선 신선한 노래들일 터이니까 말이오. 더구나 소련 노래 같은 건. 게다가 동무들은 어쨌건 간에 지난 5년 동안 공화국의 고등교육을 받은 만큼. 이 일 정도를 맡아내기엔 충분하다고 보오. 아무튼 동무들도 익히 아시다시피, 요즘 부대 형편이
이렇소. 잘 부탁하겠소.”
그 군관 동무는 당시 북에서 군관이면 누구나가 비슷한 한가락 폼으로 벌써 굳어가기 시작하던 일종의 관료적 냄새를 물씬 풍기며 거들먹 거리듯이 말끝을 맺었지만, 하지만 도대체 가당치도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의용군으로 올라왔는지는 모르나 내 주제에 사상·정치교양사업이라니,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물론 그 어마어마한 명칭에 비해서는 그게 실은 별것도 아니라는 것은 지난 5년 동안의 교육에서 나름대로 체득하고는 있었지만,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노상 듣는 편이었고 사업 대상 쪽이었다. 독보회, 학습회, 특히 비판회 같은 것은 지긋지긋하게만 느끼지 않았던가. 궐기대회니 열성자대회니 보고대회니 하는 것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농땡이 치려고만 하는 축에 들어 있지 않았던가. 그런 일에 몇 년 동안을 신물이 나도록 시달려왔는데, 이제 그 일을 나더러 맡으라니, 도대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더구나 금방 남쪽에서 의용군으로 자원하여, 불원천리 밤으로 낮으로 행군해 올라온 열성분자들을. 그런 일이라면 가령 박천옥 같은 녀석에게나 맞는 일일 터이었다.
사실로 박천옥이랑 주요 민청 간부들은 7월 초, 우리들 고3이 두 패로 나뉘어 동원되기 며칠 전에,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따로 모아져, 물밀듯이 밀려 내려가는 남쪽 새 점령 지대의 조직선전요원으로 뽑혀 나갔었다. 박천옥은 지금쯤 새로 점령한 남쪽의 어느 곳에서 선전선동요원으로 목이 쉬어 악악대고 있을 것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자 곧 우리는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방죽쪽으로 나갔다. 버드나무 밑 노천의 취사장에서 강물에다 씻어온 금방 먹고 난 양은 식기들의 물기를 군복 윗도리를 안 걸친 맨셔츠 바람의 취사병 두엇이 마른행주로 닦아내고 있는 곁을 지나 방죽을 넘자, 거기 저녁나절의 강변 자갈밭에 쉰남은 명이 얼멍덜멍 앉아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제각기 잡담을 하다 말고 일제히 이켠을 쳐다보며 앉은 채 엉덩이걸음으로 대강 대열을 정리하고 있는데, 첫눈에 보기에도 여기저기서 형편 닿는 대로 주워다가 잡동사니로 한데 모아놓은 사람들 떼거리 그것이었다. 보나마나 남쪽의 곳곳에서 동원되어 몇 날 며칠 밤으로 낮으로 도보로 행군해 올라왔을 것이었다. 하나같이 행색들이 초라하고, 차림차림으로 미루어서도 사람들 질은 가지각색이었다.
왕방울 같은 두 눈을 연상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무엇엔가 잔뜩 놀란 사람 같은 인상의, 그러나 콧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는 어지간히 나잇살깨나 든 축이 끼여 있는가 하면, 불과 열대여섯 살로밖에 보이지 않는 애리애리한 홍안 소년도 섞여 있었고, 그러가 하면 철공소나 대장간에서 일하다가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입은 채로 불려 나온 듯이 보이는 소매 짧은 잠바때기도 끼어 있었다. 모자를 쓰고 양복에 까만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넥타이를 맨, 조금 색다른 헌다한 신사 차림이 있는가 하면, 맨스웨터에 테 없는 안경을 낀 깡마른 서른 살 안팎의 사람도 섞여 있었다. 심지어 쯔메에리* 고등학생복 차림도 네 댓이나 되었다.
이때 갈승환씨는 맨 뒷자리에 상체를 잔뜩 치켜세우고 꼿꼿하게 앉아 있어서 일행 쉰남은 명 중 그 한 사람만 유독 머리 하나가 삐죽 솟아 보여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한여름임에도 까만 털스웨터에 테없는 안경을 끼고 있는 것부터가 꽤나 이색적이었다.
항용 이런 경우의 관례대로 우리는 우선 그들의 기초적인 인적 사항부터 정리하려 들었다. 성명, 나이, 본적, 주소, 출신, 성분, 직업, 가족 상황, 결혼 여부, 특기, 혈액형, 희망 부대, 의용군으로 나오게 된 경위, 이남에서의 소속 당이나 단체 등등을 각자 자세히 기입하도록 잘게 오려진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 주며, 특히 소속 당의 당증이나 단체 증명이 있거든 첨부해 제출하도록 하는 것으로 우선 우리의 일은 착수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종이를 회수하여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면서 그 적힌 내용과 본인 얼굴을 확인하는 일이었다는 것이 더 옳겠다. 실은 여단 대열과(隊列課=인사고)에서 주안을 두었던 것도 이점이었을 것이다. 사상·정치 교양사업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은 붙였지만 사실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초 성분을 확인하고, 의용군에 응모한 것이 참으로 자발적인 의사였는지 아니면 강제에 의한 동원인지 그 열성도부터 가려내자는 것이었을 터이다. 직업과 소속 당, 단체만 살펴보면 이 점, 대체의 윤곽은 금방 가려 질 터이었다.
방금 나누어 준 종이쪽지 속의 빈칸마다에 각자 열심히 적어놓고 있는 그들 틈을 나는 기웃기웃거리며, 우선 출신 성분란부터 관심 있게 들여다보았다. 학생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노동자, 빈농이었으며, 상업이라고 적은 사람도 예닐곱 명은 되었다. 갈승환씨를 포함해 남로당원도 두셋 섞여 있는 것 같았고, 용산(龍山), 경복(景福), 경동(京東) 같은 귀에 익은 고등학교 이름도 눈에 들어와, 나는 벌써부터 가벼운 흥분을 맛보고 있었다.
고 3졸업을 앞두고 부랴부랴 동원되어 나온 나나 매한가지로 이들도 통일이 되는 역사에 저들만 빠질세라, 그리하여 통일 조국의 첫 8·15 축전을 수도 서울서 맞는 그 뜨거운 자리에 그들대로도 몇몇이 끼어들기 위하여 용약* 자원해 올라온 학생들일 터이어서, 나는 이북의 고3 학생으로서 당연히 지닐 만한 강한 호기심을 벌써부터 그들 남쪽의 고등학생들에게 느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맨 앞자락에 앉은 김정현(金貞鉉)은 일행 중 가장 어리고 뛰어나게 예쁘장하고 귀티가 흘러 대번에 눈에 띄었다. 맨 뒷자리에 뒷대를 곧추세우고 앉은 갈승환씨가 처음부터 뭔지 끈끈하고 조금 걸리적거리는 편에 속했다면, 김 정현의 첫인상은 뭐랄까, 애처롭고 안쓰럽고 간지럽다고 할까, 겨드랑이로 정겹게 감겨오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바로 맨 앞줄 내가 서 있는 코 앞에서 쉬임없이 조잘대고 있었다. 나는 우선 흘낏 그가 적고 있는 종이 속을 들여다보았다. 18세, 경동고등학교 2학년…… 나보다 불과 한 살 아래였지만, 훨씬 더 어려 보이고 천진무구해 보였다.
양옆에 큼지막한 주머니 둘이 달려 있는 미군 새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는 것도 독특하였거니와(내가 미군 군복을 본 것은 이것이 난생처음이었다), 자크 달린 감색 고급 잠바에 희귀하게도 손목시계를 차고 있고, 멋들어진 소년용 모자 차림도 여간 깜찍하고 깔끔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총 손질할 때 총구 쑤시는 쇠막대기 하나를 지팡이처럼 들고 있었다. 도무지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의용군에 자원했을 것 같지는 않았고, 마치 가벼운 하이킹에라도 나선 차림이었다. 지금 그가 몸담고 있는 이 북쪽 세상의 실체와는 너무너무 다른 알짜배기 서울내기임은 첫눈에도 역력하였다. 그러나 본인은 전혀 기죽어 있거나 추호나마 주눅 들어 있지가 않았고, 되려 그가 앉아 있는 주위에만 솔솔 묘하게 달콤한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있지 않은가. 맨 앞자리에 앉아 있어 슬쩍 지나가는 말로 묻기도 좋아, 나는 이들을 떠맡은 뒤 사사롭게는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걸어본 셈이 되었다.
“동무는 학생이었소?”
“네, 경동 2학년이었에요.
김정현은 영리하게 생긴 새까만 두 눈을 들어 낼름 받았다.
“집은?”
“집은 종로 2가고요:”
하고 그는 금방 생글생글 웃으며 스타카토식으로 낼름낼름 덧붙였다.
“취미는 승마고요. 저, 말, 참 잘 타요. 말 있음 당장 형님 앞에 시범을 보여드릴 텐데. 아부지하고 매일 새벽 두 시간씩 말 탔걸랑요.”
나는 이런 식의 ‘형님’ 이라는 간지러운 호칭도 난생처음 들어보는 데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고 거리낌이라고는 없이 알짜배기 서울말로 마구 지껄여대어 되려 내 쪽에서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였는데, 그러나 그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묻지도 않은 소리를 낼름낼름 내뱉었다.
“울 아부진 국회의원이었걸랑요. 엄마와 난 시골 양평(楊平) 마름* 집으루 소달구지 타고 피난 가다가 잡혔걸랑요.”
근처에 앉은 몇몇이 소리 죽여 슬렁슬렁 웃자. 김정현은 더욱 신이 나서 종알거렸다.
“우리 집, 아주아주 부자였걸랑요. 종로 2가의 큰 2층집이었걸랑요. 통일된 다음 우리 집으루 한번 오실래요? 형님, 꼭 한번 모실게요. 좋죠? 좋죠?”
“그 쇠막대기는 어디서 났지?”
“이거요? 후퇴 하면서 국군 아저씨 하나가 트럭 위에서 던져주데요.”
나는 지금의 이 장면이 자칫 박천옥 같은 열성분자의 눈에라도 띄었다가는 영락없이 비판회에 회부되리라 싶어, 그 무슨 위태위태한 것에서 놓여나려는 듯이 눈길을 다시 일행 전체 쪽으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맨 뒷자리에 앉은 갈승환씨 쪽으로 돌렸다. 그 근처에 앉은 그들 나잇살깨나 든 사람 몇몇은 지금 적어 내는 이것이 대강 무엇을 뜻하는지 대번에 눈치를 채며 예민하게 반응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때,
“질문있습니다아.”
하고 맨 뒷자리에서 한 손을 번쩍 들며 갈승환씨가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출신 성분과 직업은 어떻게 다르지요? 남조선에 있을 때도 입당할 때 같은 때 이런 것 더러 적어보긴 했지만, 혹시 이쪽에서는 같은 식으로 적는 게 아니지나 않는가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나는 금방 되튕겨 넘겼다.
“동무는 당원입니까?”
“네.”
“어느 당이지요?”
“남로당입니다. 물론 작금에는 북로당과 합당했습니다만.”
“당원증은 갖고 계시겠지요?”
“못 갖고 있습니다.”
“로동당원이 당원증을 못 갖고 있다니요?”
“공화국 품에 안긴 뒤 재발행을 못 받았습니다.”
“그전 것이 있었을 거 아뇨?”
“모르긴 모르거니와, 그전 거 갖고 있는 사람은 없을 줄로 압니다.”
“좋아요. 자세헌 얘긴 뒤에 듣기로 하지요.”
하고 나는 철두철미 공적인 표정으로 다시 일행을 구석구석 골고루 둘러보면서, 금방 그가 물은 출신 성분과 직업의 차이를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해주었다. 비로소 갈승환씨도 머리를 끄덕이며 약간 수그러드는 낯색은 되었으나 미심쩍어 하는 듯한, 비양거리는 듯한 미소 같은 것이 입가에서 아주 스러지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또 한 번 신경이 매우 거슬렸으나 일단 모르는 체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갈승환씨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태반의 사람들이 각항마다 간단히 적어 금방 내는 중에 그만은 다른 사람들이 다 낸 뒤에도 한참이나 꾸물거리며 혼자 끄적거리고 있어, 뭐 저다지나 쓸 것이 많은가 하고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투쟁경력란’ 이라는 것을 스스로 한 칸 따로 만들어 너저분하게 적어넣고 있지 않은가. 나는 와락 짜증이 났으나,
“우선 이쪽에서 요구하는 대로만 적으세요. 그런 건 뒤에 다시 적어 낼 기회가 있을 겝니다.”
하고 나지 막하지만 쌀쌀맞게 말하였다.
비로소 갈승환씨도 조금 멋쩍어하는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녜, 이제 다 썼습니다.”
하고 비로소 넘겨주었는데. 나이 29세에 주소는 서울, 출신은 노동, 성분 노동, 괄호 치고 혁명가, 직업 교원 등등으로 적혀 있는 것이 흘낏 눈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조금 웃기는 사람이었다.
2
이리하여 갈승환씨는 첫인상부터 별로 질이 안 좋은 사람으로 이미 내 눈에는 벗어난 사람이었거니와, 그러나 내 눈에 벗어나고 말고가 없이, 당장의 내 임무는 그 걷어 모은 종이쪽지들을 상부 기관에 올려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간의 사정을 뒤늦게 알고 본즉 대강 일은 그렇게 됐던 것 같았다. 그들 쉰남은 명은 남쪽의 곳곳에서 동원되어 일단 서울서 합류는 하였으나, 7월 하순으로 접어들자 묘한 처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기는 그랬을 것이다. 이 판국에 어느 누가 자청해서 그들을 떠맡으려고 했을 것인가. 어느 부대건, 기관이건, 제 몸 하나 건사해가기도 이미 여간 힘겨운 판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연히 이들은 어느새 어디서나 귀찮고 성가신 존재로 떨어져버려, 배구 선수가 제 앞에 넘어온 공을 금방금방 네트 너머로 쳐내듯이 하루 이틀 걸러로, 아니, 어떤 때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인수인계가 거듭되었다. 동원부에서 보급 부대로, 후방 사령부로, 군단 대열과로,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서울시 인민위원회로, 또다시 동원부로, 이런 식으로 인수인계가 거듭되다가 8월 초에 들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북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인수인계가 거듭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북행길로 접어들어서는 일단 남쪽에서 올라오는 의용군을 통틀어 관장하는 일정한 기관 속에 엉성하게 끼어들기는 한 셈이지만, 여전히 지청구 취급을 받기는 매한가지였고, 알찬 조직 속에 째여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백 명 가까이나 되었었지요. 그런데 안되겠더군요. 슬금슬금 다 빠져 달아나는 겁니다. 아침저녁 점호는 있었지만, 그건 형식 뿐이었지요. 누구 하나 책임지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정말 이러다가 통째로 몽땅 증발해버린들 자취 하나 남지 않고, 책임질 사람도 없어 보이더라니까요.”
필경은 그랬을 것이다. 인계하는 편이나 받는 편이나, 하다못해 이름 적힌 종잇장 하나도 없이 그 당장의 인원수만 대강대강 피차에 확인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결국은 제가 나섰습지요. 우선 빠져나가는 거나마 최소한 막아내자는 게 제 충정이었습니다. 게다가 로동당원으로서의 제 위치도 있고 해서, 아무튼 누가 나서든 나서야 했어요. 서울서부터였습니다.”
하고 갈승환씨는 그날 저녁 취침 직전, 노동당원으로서 당원증을 못지니고 있는 사연을 설명하려 뒤늦게 은밀하게 나를 만난 자리에서 정작 본용건은 제쳐놓고 저간의 그들 사정부터 대충 귀뜸해주듯이 이렇게 알려주었는데, 이때도 나는 기분이 썩 개운치는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자의(恣意)요 충정 이었을 뿐이지, 분명하게 공적으로 早장된 위치일 수는 없어 처음부터 나로서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흘려들을밖에 없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숱하게 그들을 인계하고 인계받아온 누구나가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오직 성가시고 귀찮은 한 떼거리였을 뿐이지 그들 속에서 어느 누가 지휘자 노릇을 하건 아랑곳하지 않았을 것이고, 설령 지휘자 비슷한 자가 있었다 한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식으로 그런 위치에 올랐는지 관심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여 차츰 갈승환씨는 일행 중 노상 설쳐대는 사람 비슷이 묘하게 될밖에 없었다. 새로 인계받는 쪽에서는 으레 사전 지식 하나 없이 백지상태에서 인계를 받는 만큼, 그들 중 이때까지 어느 누가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도통 알 턱이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얼마 동안 지나오는 사이에 사람의 습관이란 묘한 법이어서 갈승환씨도 갈승환씨대로 인계될 때마다 새 관리자에게 기묘한 조바심을 느끼는 데 버릇 들여졌을 것이다. 이 쉰남은 명을 서울서부터 자진해서 실질적으로 맡아온 자기 위치를 그때그때 새로 인계받는 관리자에게마다 설명하자고 들어도 딱히 분명하게 제 입으로 설명해낼 길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같은 일행들이야 그의 위치와 행태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있었고 으레 저 사람이니 저러나보다 하고 받아들였을 것이지만, 제각기 큰 테두리로 돌아가는 대세에 큰 테두리로 자신들을 내맡길 뿐,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하고 입빠르게 객쩍은 소리는 이미 하나같이 삼가고 있었다. 어떤 일에 임해서든 수수방관하는 데 버릇 들여져 있었고 대세가 바로 그런 때이기도 하였다.
이럴수록 갈승환씨로서는 차츰 더 묘한 처지에 빠질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런 식이었다. 흔히 국민학생 때나 중학생 때, 새 학년으로 올라가 학급 편성도 새로 바뀌어서 새 담임선생이 처음 들어섰을 경우, 선생의 눈에 들려고 첫 시간부터 유난스레 조바심을 피우며 설쳐대는 애들 한둘이 흔히 있게 마련인데, 그런 애는 대개 그 이전에 급장을 맡았거나 한 애들이기가 십상이다. 갈승환씨를 처음 보았을 적의 내 첫인상도 꼭 그런 느낌이었는데, 그 자신도 어느 새 알게 모르게 그런 쪽의 버릇이 붙어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새로 저들을 떠맡은 새 관리자들이 저들 속에서의 특별한 자기 위치를 몰라줄까보아 지레 안달을 하는……
이런 것이 이를테면 권력에 대한 욕심의 첫 싹인지 어떤지 그런 것은 나로서 알 바 없지만, 이만한 숫자의 사람들을 서울서부터 거의 혼자 힘으로 수습해 이끌고 온 공은 엄연히 있는 만큼 그에 값하는 대접을 응당 받고 싶어하는 것도 그로서는 당연하다면 너무 당연하였다.
첫날 저녁의 정치 교양사업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우선 서정적인 수련 군가 몇 곡부터 선을 보였었다. 나는 군에 동원되기 전, 시 청년 구락부* 합창부 성원이었기 때문에 이런 것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남쪽에서 갓 올라온 그들은 여간 신이 나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학생들이 주로 좋아하였다.
고요하게 흐르는 돈강 위에
행군 노래 들려온다
카자흐 병이 전장에 떠나갈 때
그 애인은 환송하였다
아아, 그 애인은 환송하였다
들판 위에 여명은 비쳐오고
돈강 물이 번쩍거렸다.
내 손으로 수놓은 이 지갑
선물로 드리나이다
아아, 나의 선물로 드리나이다
노래 부르세 내일은 전선
이른 아침 안개를 뚫고
즐거운 노래소리 맞추어
이 밤을 노래 부르자
사랑하는 거리여
내일 멀리 바다로
이른 아침에 뱃전을 보니
낯익은 푸른 손수건
어두운 밤이 왔다
연해주 국경에
용감한 전사는
눈감지 않는다
용감한 전사는
눈감지 않는다
나, 준엄한 길을 떠나올 때
내 사랑하는 그녀는
대문간 옆에서 손을 흔들었었지
이런 짤막한 소곡들을 러시아 말 원어로 불러주고, 곁들여 그때까지 우리에게 익숙하던 감상적이고 천박한 일본 군가 쪼가리들과 비교하며, 특히나 우람한 합창곡들을 가사 해설을 곁들여 불러주면 남쪽에서 갓 올라온 주로 학생 출신들은 여간만 신이 나 하지 않았다.
노래라는 것은 서먹서먹 하거나 꺼끌꺼끌한 것을 대뜸 녹여내는 힘이 원체 있거니와, 남쪽에서 휘늘어진 뽕짝조의 유행가에만 노상 젖어 있던, 주로 학생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색다른 체제 속으로 진짜 자기들이 당도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노래란, 특히 군가란 선동효과가 가장 빠르고 완벽하다는 것을 나는 이때 새삼 강하게 느꼈었다. 첫날의 첫 마수걸이* 정치 교양사업 치고는 그야말로 120퍼센트의 성공이어서, 불과 몇 시간 전에 이 일을 우리에게 맡겼던 그 군관 동무부터 여간 흡족해하지 않았다. 희한한 소련 노래들을 내가 그렇게나 많이 알고 있다는 데에 거듭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일을 요즘 떠올리면 나는 일말의 쑥스러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노래들이 아무리 웅장하고 문학적 품격을 갖추고는 있었을망정, 요컨대 우리 노래가 아니라 소련 노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으로 말한다면, 거부반응을 느끼는 사람은 그때 당장에도 없지는 않았다. 갈승환씨 같은 사람도 그런 편이었지만, 가령 같은 남로당원이었던 김석조(金錫祚)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도대체 저런 노래들에 학생들이 저토록이나 좋아하는 것을 뭐가 뭔지 몰라하는 낯색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내심으로는 혼자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내가 청년구락부 합창단에 들었던 것은 학교 안에서 매일같이 벌였던 딱딱하고 상투적이고 악악대는 과(過)정치적 집회들의 그 지겨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나로서는 오로지 하나 밖에 없는 도피 수단이었음은 그들 누구 하나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첫 마수걸이로 첫 오락회 겸해서 두어 시간 화끈하게 신명을 올린 뒤, 밤이 늦어 나는 이들을 과수원 움막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잠자리를 정해주었다. 다음 날의 예정 일정을 대강 일러두고 마악 나오려는데,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갈승환씨가 내 뒤를 바싹 쫓아 나왔다. 으레 초저녁의 그 당증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려는 것이겠거니 지레 짐작하며, 나는 말없이 앞서서 움막 밖으로 나왔다. 높은 구름 속에 달이 가려 있어 녹음이 우거진 과수원 속은 칙칙하면서도 온통 희어무름하였다.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 집에서 개가 호들갑스럽게 짖고 있었다. 벌써 초가을 기운으로 밤공기는 찼고, 유난히 맑고 싱그러웠다. 주위는 불길할 정도로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하였으나, 높은 하늘에는 세찬 바람이 지나가는지 달은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뒤채며 서남쪽으로 디굴디굴 굴러가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가볍게 몸서리를 한 번 쳤다. 그러자 갈승환씨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천만뜻밖이었다.
“이 소린 반드시 제가 할 소리인진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이 동무들 태반이 자원은 아닙니다. 노골적으로 말씀드려서 태반이 그렇습니다. 이 점, 우선 아셔야 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하고 되튕기듯이 생각하면서 나는 금방 찬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돌아서서 멀거니 건너다보았다. 그의 안경알이 높은 차일구름에 가린 달빛을 마주 받아 둔탁하게 번쩍이었다. 그는 조금 주춤거리며 미적미적 거리다가 비로소 그동안 그들이 겪어온 대강의 정황과, 그리하여 그 자신이 수습자로 자진해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짤막짤막하게, 그러나 매우 요령 있게 설명하고 나서, 금방 다시 잇대어 말했다.
“그러구 또 한 가지. 이건 어디가지나 참고삼아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김석조 동무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도 그렇겠지만, 당성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여러 날 같이 겪어보았는데, 계급적인 견지와 사상적인 철저성에.”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김석조 동무라니요?”
그러나 금방 생각이 났다. 일행 중 남로당원 갈승환씨 말고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나이 지긋한 사람으로 노상 갈승환씨와 붙어 지냈지만, 또 한 사람은 스무 살 안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전혀 애송이여서 나는 내심 여간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아까 초저녁에 신상조서 종이를 적어 낼 때부터 이미 나대로 관심 있게 훑어보았는데, 김석조, 나이 24세, 국졸, 노동, 인쇄공……
내가 그에게 유독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 나이에 남로당원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 밖에도 나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김석조는 바로 김정현과 나란히 맨 앞에 앉아 노상 같이 히히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정 현의 심심풀이 상대역을 자청해서 떠맡은 꼴이었다는 것이 더 옳겠다. 일터에서 곧바로 끌려 나오지 않았나 싶은 기름때 묻은 잠바때기 차림에 모로 퍼진 작달막한 키, 어느 모로 뜯어보나 노동자였고,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자란 밤송이 같은 맨 머리며, 펑퍼짐한 주먹코에 약간 어리수굿하게, 멍청하게 보이는 얼굴도 도무지 알짜 돈푼깨나 있는 서울내기 소년으로 생긴 김정현과는 어우러져드는 구석이 너무너무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남로당원에다 출신이고 성분이고 알짜배기 노동자계급인 그가 김정현 따위에 말려들어 같이 히히덕거리며 일일이 장단을 맞추고 있다니 도대체 있을 법이나 한 얘기인가. 살아가는 그냥 평범한 기준으로건, 무겁게 따져드는 논리로건 어느 한구석 인들 김정현과 어울려들 구석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아하니, 김석조는 완전히 본심으로 김정현의 장단에 녹아들어 있었고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김정현 옆에 노상 붙어 앉아 처음 나올 때부터 그의 보조역으로 따라붙은 하인으로서 상전 모시듯이, 혹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챙기듯이 일일이 챙겨주고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대로 전혀 어색해 보이지가 않았고 무척 어울려 보였다. 도대체 저런 것이 뭘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 갈승환씨는 김석조의 바로 그 점을 두고 당성이 어쩌네, 사상적인 철저성이 어쩌네 하고 그 나름의 충정으로 나에게 귀띔을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런 소리들을 일체 묵살하듯이 되받아 물었다.
“그건 그렇고, 동무가 로동당원이었다는 걸 뭘로 증명하지요? 증명해줄 사람이 일행 가운데 누구 있습니까?”
“당장은……”
하고 그는 비시시 실소를 흘렸다. 마침 이때, 높은 구름 속에서 달이 잠시 빠져나와 그의 낭패해하는 표정의 변화까지도 손에 잡힐 듯이 잘 보였다.
“당장은 없습니다. 허지만 먼저 월북했던 동무들을 만나면 입증해 보일 수 있을 겝니다. 남쪽에서의 저의 행적까지도 다.”
“먼저 월북했던 동무들이라니요?”
“48년 전후해서 대거 월북한 동무들 말입니다.”
“그때 동무가 월북하지 않은 이유는 뭐였지요?”
하고 나는 짓궂게 묻다가 금방 잇대어 말했다.
“허긴, 남쪽대로도 사정이 있었을 테지요. 그런 긴 얘기까지 이 자리서 나눌 수는 없을 게고, 그래도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요. 진짜 동무가 남로당원이었다면, 그리고 동무 말대로라면 태반이 강제 동원된 이 패거리에 하필 동무가 끼이게 됐느냐는 거지. 허긴 동무 혼자만도 아니지만. 엄연히 두 동무가 더 있으니까. 김석조 동무와 또 한 동무. 이름이 뭐였던가? 암튼 좋아요. 동무들 신상은 동무들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상부에 올렸으니까, 그렇게 아시오.”
내가 빠르게 말하자,
“네, 감사합니다.”
갈승환씨는 꾸벅 절까지 하고는, 무슨 말인가 더 할듯 할듯 하다가, 해본들 말발이 별로 안 먹히겠다고 판단한 듯 슬그머니 그냥 물러갔다.
그러나 그를 두고는 나는 그냥저냥 개운치가 않았다.
3
우선 객관적으로도 그랬다. 북쪽의 고3 학생들까지 새 점령 지대의 조직 선전요원으로 대거 긁어모아 가던 판국이 아니던가. 이런 마당에 진짜 제대로 생긴 남로당원이었다면 지금쯤은 남쪽 현지의 새로 생긴 당기관이나 행정기관에서 의당 요긴하게 활동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기껏 이런 떨거지 같은 의용군 패거리에 끼여서 올라오다니. 제대로 따져들기 시작하면야 애당초부터 말이 안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갈승환씨 한 사람뿐이었다면 모르되 엄연히 남로당원은 두 사람이 더 있는 만큼, 그런 일을 둘러싼 그러저러한 저간의 남쪽 사정은 나로서는 가늠하기가 어려웠고, 가늠해본들 별수가 있어질 것도 아니었다.
그런 공적인 정황으로서보다도 우선 나는 개인적으로 처음부터 갈승환씨가 께름하고 싫었다. 그것이 갈승환씨의 원래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인지, 아니면 서울서부터 그동안 일행을 수습해 이끌고 올라오면서 그 사람대로 저도 모르게 버릇 들여진 그 점에 대해서나 아닌지 그 점은 스스로도 정확히 가리기는 힘들었으나, 어쨌든 나는 그가 도무지 개운치가 않았고 늘 걸리적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공적으로 나에게 배당된 만큼의 원칙에 따라 그에 대응하면 될 뿐이었다. 이 점으로 말한다면, 나는 그쪽 기준으로 보아 애시당초 사
상적으로 철저한 축은 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내가 이들의 사상·정치 교양사업을 떠맡게 된 것부터 스스로 가당치도 않다고 한 것도 그냥 겸사로 한 말은 아니었다. 지난 5년 동안 중고등학생으로서 평소의 내 위치도 그러했거니와, 군에 동원되어 나온 뒤 불과 달 반 동안의 내 행적도 뒤죽박죽 바로 그런 혼란의 연속이었다.
우리 고3이 동원되던 경위부터가 이미 적지 않은 혼선을 드러냈다. 주요 민청 간부들이 거지반 문화공작대로 빠져나간 뒤의 500명 가까운 우리 고3의 처리를 두고는 시 교육위원회와 시 민청, 그리고 학교 측이 나름대로 오면가면 숙의를 거듭한 것 같았고, 급기야는 그런 결론에 이른 듯하였다.
이 판국이 어떤 판국인데 500명 가까운 팔팔한 젊은이들을 매일 학교에서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놀게 할 것이냐. 이런 때에 대비해서 평소에 기초 군사훈련도 시켜두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참에 자체적으로 1개 대대를 편성하여 쉽게 연줄이 닿는 인근 군부대와 교섭해서 반어거지로라도 쑤셔넣도록 하자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7월 3일, 출신 성분이 극히 안 좋은 학생과 경고 처분을 받은 문제학생, 그 밖에 뚜렷한 병자 등 별 볼일 없는 축을 추려내고 (또 일부 발랑 까진 눈치 빠른 애들은 미리 알고 날렵하게 빠져 달아난) 나머지 360명가량이 1차로 동원되어 나갔는데, 나는 이때에도 별 볼일 없이 추려낸 쪽에 들어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때 나는 시 청년구락부 합창단 성원이어서 특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해 있도록 하달을 받고 있어, 통일 조국의 첫 8·15 축전 식장의 대합창단 성원에 끼어들 꿈에 아직은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1차로 동원된 패거리는 곧바로 문천(文川) 모처에 주둔 중이던 군부대에 입대하였으나, 거의 반어거지로 떠맡다시피 한 그 해당 부대도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이렇다할 엄두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입대 즉시 지급해줘야 할 군복과 총기 장만도 미처 안되어, 그들은 고등학생 복장 차림 그대로, 편제도 1중대는 3학년 1반과 2반, 2중대는 3반과 4반, 3중대는 5반과 6반이라는 식이어서 진짜로 군에 입대했는지, 학생 신분으로 잠깐 모의 훈련장에라도 나와 있는 것이나 아닌지 알쏭달쏭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전선 쪽이 차츰 굳어지면서 그들도 급전직하,* 휘하 부대의 충원 요청에 따라 조각조각 쪼개어지고 몇몇씩 무 솎아내듯이 뽑혀, 개중에는 그길로 낙동강 전선까지 나가 그대로 미국 비행기밥이 된 예도 드물게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그 대대의 기본 골격만은 끝까지 근근이 유지하여, 이것은 그 석 달 뒤의 얘기거니와, 9·28 수복 뒤 국군이 계속 바닷물 밀리듯이 북으로 밀어 올라올 때는, 이들은 겉껍데기일망정 독립 대대 골격만은 그대로 유지한 채 동해안 상음(桑陰) 근처에 주둔해 있다가 반나절 정도 전투 비슷한 것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성원은 이미 50명도 채 안 되었던 모양이다. 내 친구 최준만(崔俊萬) 같은 아이는 이때 BAR*사수였는데, 산발적 인 전투를 계속 벌이면서 오계(梧溪), 안변(安邊)을 거쳐 원산까지 후퇴하여 바로 모교 앞 남산에서 끝까지 버티다가 탄알이 동이 나자 장렬하게 산화하려다 아슬아슬하게 포로로 잡혔다던가. 이것은 훨씬 뒤에 들은 얘기다.
이렇듯 7월 3일에 1차로 고3의 짱짱한 애들을 골라내어 1개 대대 분을 입 대시켰는데, 불과 나흘 뒤에는 벌써 전혀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정작 가장 막강한 진짜배기 부대로 원근에 소문이 나 있던 시내 주둔 87연대 육전대(陸戰隊 =해병대) 연대본부에서 직접 학교로 충원 요청이 날아들었다. 학교 측은 당황할밖에 없었다. 학교 측뿐 아니라 시 민청 학생부나 시 교육위원회도 이 점은 매한가지였다. 사흘 전에 동원되어 나간 고3 학생들의 그 뒤 형편을 소상히 알고 있었더라면 그 쪽으로 연락을 해서 충원을 받으라고 했을 것이지만, 이미 학생들은 저들 손에서 떠나 있었고, 그런저런 군의 내용을 학교 측에서는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나흘 전에는 별 볼일 없어 추려냈던 학생들을 부랴부랴 다시 긁어모을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통일되는 날에 대비한 시 청년구락부 합창단 성원도 대기 상태에서 유야무야로 풀려져 있는 셈이 되어 자연히 이 속에 합류되었다.
이렇게 이날 오후, 우리 50여 명은 집에다 미처 알리지도 못한 채 학교에서 곧장 시내 북쪽 끝에 자리해 있던 국민학교 강당으로 가서 대충 형식적인 신체검사만 거치고는 짱짱하기 원근에 소문나 있던 그 87연대 육전대로 입대했고, 입대 즉시 새 군복에 군모, 철모, 내의 일체, 목 긴 군화, 농구화, 손삽, 머플러, 따발총 한 자루씩과 72발짜리 따발탄창, 57발들이 탄창 각기 하나씩에 깜찍하게 생긴 일본식 반합과 우둔하게 거지 깡통처럼 생긴 소련식 밥통, 심지어 발싸개에 이르기까지 일체 지급을 받았다.
대강 돌아가는 형세는 이미 공기 속에 떠도는 그 무슨 납덩이 알갱이마냥 속속들이 피부로 느껴져왔다. 그리고 끝내는, 나는 아직 열아홉 살의 고등학교 학생일 뿐이었다. 내가 떠맡은 이들의 사상·정치교양사업보다는 김정현을 비롯한 남쪽의 내 또래 학생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그런저런 사사로운 얘기를 나누며 저간의 남쪽 사정을 구석구석 알고 싶은 충동과 호기심으로만 탱탱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일행 속에는 남쪽의 대학생까지 두 사람이나 끼여 있어 나는 여간 반색을 하고 놀라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항상 중간쯤에 가지런히 붙어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부산 수산대학교 3학년이고, 또 한 사람은 서울대학교 영문과 3학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나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다. 그들도 처음부터 이들 속에서 특별대우 비슷이 대학생 대접을 받는 것을 의당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 일행 태반이 그 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사사롭게 가만히 말을 걸어본 것은 그러니까 이들 일행 중 김정현 말고는 바로 이 두 사람이었다.
“이 동무도 서울대학입니까?”
하고.
그러자 짙은 초록색의, 보기에도 폭신폭신한 가을 잠바 차림의 서울대학생은 볼품이라고는 없는 얄따란 회색 잠바 차림의 옆 사람을 흘낏 한 번 쳐다보고는, “아닙니다, 이 친군 부산 수산대학이죠.”
하고 받았다.
“두 분은 친척입니까?”
“아뇨, 친척은 아닙니다.”
하고 그는 금방 덧붙였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동창이고, 그때부터 친했지요. 민애청에도 겉이 들고 물론 의용군 지원도 겉이 했죠.”
저간의 사정은 곧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수산대학교 학생 장서경(張瑞卿)은 6·25가 일어나자 물밀듯이 내려오는 피난민 인파를 거꾸로 뚫고 부산에서 북상하여 최일선을 대전 근방에서 관통하여 서울 통인동으로 장세운(張世雲)을 찾아왔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둘은 서울에서 민청사업도 같이하고 의용군 지원도 같이했다는 것이었다.
“이 친구 보기는 별거 아닌데, 독종이에요. 오죽허면 부산에서 일선까지 뚫고 올러왔을러구요.”
하고 장세운은 스적스적 웃었으나, 바로 그 순간 나는 어느 누군가의 강한 눈길을 뒷등에 느끼며 은밀하게 그 어떤 사사로운, 안 좋은 일을 하다가 들킨 사람마냥 약간 당황을 하며 돌아보았다. 갈승환씨가 뚫어져라 이쪽을 쳐다보다가 마악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드디어 사흘 뒤 취침 시간 직전, 나는 갈승환씨를 밖으로 불러냈다. 1대 1로 그와 무엇인가 마무리를 짓고 결판을 내지 않고는 못 견디겠던 것이다. 이런 일이 이런 식으로 과연 결판이 지어지려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요 전날 밤처럼 물 흘러가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고, 과수원 속은 어둡고 칙칙하였다. 우리가 숙소로 정하고 있는 집의 기와지붕이 바로 앞에 시커멓게 막아서 있었고 앞마당 쪽에서는 모깃불 타는 냄새가 풍겨오며 두런두런거리는 사람들 목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불쑥 돌아서면서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며칠 전에 동무는 김석조 동무에 대해 무슨 얘기인가 하려다가 그만뒀었는데, 줄곧 그 점이 걸리는군요. 동무가 그날 밤에 나에게 말하고자 한 건 요컨대 뭐였지요?”
동쪽에서 이제 마악 늦저녁 달이 떠오르고 있어 나뭇잎새들은 유난히 금속성으로 번뜩이고 있는 속에, 그도 안경알을 허옇게 번뜩이며 금방 받았다.
“그동안 주욱 보아왔는데, 당원으로서의 책임감도 희박하였고, 너무 의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의식이 없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요?”
내가 재우쳐 묻자, 비로소 갈승환씨는 이 문제를 새삼 끄집어내는 내 저의를 가늠하려는 듯이 빤히 건너다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이 동무들이 다 빠져 달아난다 한들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습니다. 최소한의 협조 정신도 없을 뿐 아니라 당원으로서의 문제의식이나 조직성이 없고. 도대체가…….”
“그거야 동무가 자청해서 그 일을 맡아 나섰으니까 그 동무까지 굳이 그 일에 동무식으로 같이 나설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요. 당 사업이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의 특수한 정황이나 경우에 따라, 혹은 각기 사람 됨됨이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있을 수 있을 테니까요. 가령 그 일은 당신에게 맞지만 그는 전혀 다른 일에 어울릴 수 있다는 식으로.”
“글쎄, 그 점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겪는 고충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당원으로서의 협조 정신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되레.”
“김정현 같은 동무하고만 붙어 놀더라 그 말이지요?”
내가 낚아채듯이 받자, 순간 갈승환씨는 그 특유의 약간 비양거리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고 있었다. 이때 늦달이 완전히 떠올라 그의 안경 낀 표정은 유난히 더 서슬이 서 있게 첨예해 보였다.
나는 내친김에 다시 덮치듯이 말했다.
“요컨대 동무는 김석조 동무가 당신보다는 김정현과 노상 어울려 놀며 히히덕거리는 걸 못 참아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게 아닙니까?”
“그 점도 있습니다.”
갈승환씨는 이렇게 불시에 핵심 문제로 접어들자 갑자기 열을 내며 단호하게 받았다.
“김정현, 그 아이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나는 분위기를 조금 부드럽힐 생각으로 우스갯소리 하듯이 한마디 쐐기를 박았다.
“나는 처음에 갈 동무를 그렇게 알았었지요. 맨털스웨디 차림도 그렇고, 안경 낀 날카롭게 생긴 얼굴도 그렇고.”
갈승환씨도 마지못해하듯이 피시시 조금 웃고는 다시 금방 정색으로 돌아오며 또박또박 말했다.
“김석조 동무는 아직 노예근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원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은커녕 기초 성품이 도무지. 그런 동무가 어떻게 당원까지 되었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계급 적(敵)에 대한 최소한의 증오심도 안 서 있다·…….”
“바로 그 점입니다.”
갈승환씨는 힘주어 말했다.
“어떨까요? 당원으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는 동무가 말하듯이 항상 그런 식으로 밖으로 더덕더덕 드러나 있어야만 할까요? 그래야만 자존심이고 긍지일까요?”
갈승환씨는 순간 꿈틀하면서 자못 의외라는 듯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반드시 그렇진 않겠죠만.”
목소리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그렇치만 누가 보더래도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그걸 더덕더덕이란 말로 표현하는 건 듣기가 거북합니다…….”
하고 그는 조금 우물쭈물하였다.
“동무처럼 당원으로서 늘 모범적이고 표준적으로 되려다가 보면 자칫 그런 형식적인 틀에 째여 들어가지 않을까요. 실례지만, 제가 보기에 동무는 벌써 그런 일정한 틀에 째여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조금, 어렵습니다. 당최 그런 식의 말씀은, 지금 처음 들어보는지라.”
하고 갈승환씨는 그의 스물아홉 살 나이답게 능청 섞어 또 비양거리 듯이 웃었다.
“그렇다면 제가 동무에게 묻겠는데, 동무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런 조건에서 김정현 같은 동무에게 어떻게 응대하는 것이 당원으로서 가장 합당하다고 보십니까?”
“우선 철저히 미워하여야 할 겁니다. 그런 종류의 행태가 발붙일 구석을 추호나마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두드리는 거지요. 대장간의 쇳덩이 두들기듯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라는 소설도 보지 못했습니까?”
“오스뜨로프스끼의. 보았지요. 동무는 남쪽에서 용케 그런 책까지 얻어 보았군요. 허지만 그 경우는 엄연히 그런 조건 속의 그 경우고, 이 경우는 이 경우입니다.”
“그런 식으로 개개적으로만 접근하는 건 사상적으로 곤란하지요. 언제 어디서나 계급적인 견지와 사상적인 철저성으로.”
“잠깐.”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지요?”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물론, 동무가 말하고자 하는 대강의 윤곽은 알겠소만.”
“그럼 됐지요.”
그는˙욱하듯이 받고는 결연하게 말했다. ˙
“제 쪽에서 한 가지 묻겠습니다. 동무는 당원입니까?”
나는 꿈틀하면서 한 발 물러서는 기분이었으나, 안간힘을 쓰듯이 같이 결연하게 받았다.
“아니오, 아직 그런 나이가 못됩니다.”
그렇다면 아직 풋내기로군 하고 생각하는 것이 금방 분위기로 느껴졌다. 그리고 스물아흡 살의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문제를 군 내의 당 세포회의에 제기하겠습니다. 지금 군 내의 그 형편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염려 마십시오. 요구대로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럴 형편이 못됩니다. 동무가 진짜로 당원이냐 하는 것도 아직은 확실히 확인된 것은 아니니까. 허지만 그렇게 성급하게 나오지는 마시고. 요컨대 동무가 지금 당 세포회의에 문제로 제기하겠다는 그 내용은 뭔가요? 제가 김정현 동무를 근거 없이 싸고돈다 이겁니까?”
“뿐만 아니라 김정현 동무를 싸고도는 김석조 동무를 두둔하고 있다, 계급적 견지가 철저하지 못하고, 사상적으로 철저성이 약해 보인다 이렇게 되겠습니다.”
나는 담배를 못 피우지만, 이런 경우에는 담배라도 한 대 피울 만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비시시 실소를 흘렸다. 먼 어디선가 개가 짖고 있었다. 이 동네 개 같지가 않고, 가까운 아랫마을이거나 개울 건너 마을에서 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묘하였다. 그 개 짖는 소리는 우리를 둘러싼 지금 이 여름밤의 무르익은 부드러움과 무언가 환상적인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 사는 여러 마을들을 부피 있게 따뜻하게 새삼 일깨워주고, 지금 우리 둘이 무슨 일로 이렇듯이 티격태격하고 있는가 싶게 하였다.
나는 다시 나직나직 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동무는 김정현 동무를 대하는 김석조 동무의 그런 행태를 이런 식으로 문제를 삼음으로써 동무 자신의 계급적 견지와 사상적 철저성을 스스로 새삼 확인시키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상적으로 철저한, 노상 핏대라도 내는 동무 자신을 늘 누구에겐가 내보이고 싶은 건 아닌가요? 내 이런 말이 지나치게 짓궂다면 용서하십시오만.”
“(어린 사람이) 말장난이 심헌 것 같습니다.”
물론 ‘어린 사람’ 이란 말은 직접 입에 올리지는 않았으나, 나는 갑자기 필요 이상 어른스러워지는 그의 어투로 직감했다.
“뭐요? 말장난이 심하다구요? 내가?”
나는 가슴에 한 손을 대기까지 하며 되묻고는 와락 물 쏟아븟듯이 퍼부어댔다.
“천만의 말씀을. 여보시오, 내가 보기엔 당신이 말장난에 너무 젖어 있어 보이는데. 당신은 당신 자신을 늘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웃기지 마쇼.”
나는 딱히 노렸던 것은 아니지만, ‘동무’ 라는 호칭이 아니라 ‘여보’ 라든지 ‘당신’ 이란 호칭으로 옮아와 있었다.
“아직 난 어려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 점에 관한한 사상적인 철저성에서는 당신이 물론 옳겠지만, 자기과시가 너무 심해. 그리고 벌어진 사태의 구체성을 두고 말한다면, 당신보다는 김석조 동무가 훨씬 윗질에 있어. 일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당신처럼 이 판국에 뭐 자존심? 긍지? 그리고 또 뭐? 사상적 철저성, 어쩌고? 웃기지 말아요. 오늘 얘기는 일단 이만 해둡시다. 잠자리에 들어서 물 흘러가는 소리라도 열심히 들어보쇼. 그러면 어느 정도 내 말이 짐작될 거요.”
나는 자르듯이 말하고는 횡 그 자리를 떴다.
모깃불이 아직 채 사그러들지 않은, 돼지우리와 외양간 냄새가 범벅으로 나는 마당을 돌아 들어왔다. 자다가 마악 깨는 듯 군관 동무가 한 번 뒤채면서 잠결에서인 양 물었다.
“모두 어떻습디까?”
“네, 자리가 잡혀갑니다.”
나는 선선히 대답하고 자리에 누웠다.
4
내가 특간대로 배속된 것은 7월 13일의 대대적인 폭격이 있은 바로 그 이튿날이었다. 처음 87연대로 입대했을 때 우리는 일단 첫날 저녁은 연대본부에서 각자 내무반에 침대까지 지정받아 잠자리에 들었었다. 으리으리한 붉은 벽돌집 2층 건물로, 본시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던 고등여학교 교사였다. 그리고 그날 밤 세시나 됐을까, 갑자기 비상이 걸려 우리는 미리 지시받은 대로 완전무장을 갖추고 칠흑 속의 운동장으로 나갔다. 첫날 밤부터 본때를 보이려는 것이겠거니 알았으나, 그길로 우리는 그 연대본부 건물을 버리고 신풍리 뒷산 골짜기로 들어가 호를 파고 들어앉았다. 이미 6월 말에 정찰기 두어 대가 날아와 비잉 둘러보며 마수걸이 비슷이 아랫거리의 석유 정유소 근방과 윗거리 해안통의 해군본부 인근에 소형 폭탄을 떨어뜨리고 갔었고 7월 초로 접어들면서는 그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던 추세였다.
우리가 갓 입대해 들어갔을 때 정작 87연대는 텅 비다시피 하고 있었다. 군관 몇몇과 하사관 몇몇이 연대본부를 지키고 있을 뿐, 연대장을 비롯한 연대 성원 전원은 이미 6·25 훨씬 전에 이곳을 떠나 속초항에 대기하고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주문진, 강릉, 삼척 등지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물밀듯이 동해안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이 부대의 핵 중의 핵이라는 정찰중대에 처음부터 배속을 받았던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전투대대들은 뿌리째로 일선으로 나가 있어, 연대장 없는 연대본부와 정찰중대 말고는 취사반, 창고계, 대열과 등속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호를 파고 들어앉아 위에 뗏장까지 입힌 뒤, 그러니까 닷새나 지났을까, 정확히 7월 13일 한낮에 드디어 우리는 처음으로 대대적인 폭격을 당하였다. 두꺼운 구름이 낮추 덮인 속이었음에도 비행기들은 어떤 식으로 알아내는지 기막히게 표적을 찾아내었다. 아아, 난생처음 맞닥뜨려본 이날의 그 혼비백산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선연하다. 500킬로그램과 1톤짜리 쇠뭉치가 하늘에서 곧바로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오는 그 무지무지한 소리! 우리는 호 안에 깐 가마니때리 위에 납작 엎디어, 양손 엄지로 양쪽 귀를 틀어막고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양쪽 눈알을 힘껏 누른 채, 입도 양쪽 볼이 얼얼해올 정도로 양껏 짜악 벌리고 있었다. 폭음에 고막이 터지고 눈이 빠져 달아나고 가슴이 빠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머리 위로 500킬로 그램과 1톤짜리 쇳덩이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려오는 그 짜개지는 듯한, 세상이 송두리째 갈라져나가는 듯한 소리는 마치 귓구멍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구멍을 통해 곧장 고막에 와 닿기나 하는 듯이 어마어마하였다. 10분, 15분 간격으로 잠시잠시 뜸하여, 이제 끝났는가 싶으면 다시 물결 밀려오듯이 몰려오고 몰려오고 하였다. 소위 파
상공격*이었다. 도대체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겨우 나흘 전에 아무도 모르도록 한밤중에 이 골짜기로 옮겨 앉아 호를 파고 들어앉았는데, 저 비행기들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직방으로 우리를 찾아 날아왔을까. 두꺼운 구름이 낮추 깔려 있는 속을 그 짙은 회색의 우람한 몸통을 구름 밖으로 더러 징그럽게 드러내며, 시가지를 에워싼 구릉을 낮추 떠서 넘어와 우리가 들어앉아 있는 소나무 우거진 좁은 골짜기를 불시에 훑어내리며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퍼부어대었다. 얼추 두어 시간을 망나니 돌아가듯이 돌아간 끝에 저녁나절이 되어, 바다 쪽 하늘 끝에서부터 희끗희끗 구름이 벗겨질 무렵에야 비행기들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벌어진 정경은 눈 뜨고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들어앉아 있던 호에서 불과 20미터 어간*인 호 하나에 폭탄이 정통으로 뚫고 들어가 터지는 바람에 그 속의 여남은 명은 서로 엉겨 범벅이 되어 시체조차 온데간데없었고, 피와 살점이 흙더미에 녹아들어 과하게 끓인 팥죽마냥 걸쭉해져 있었다. 호라고 해야 사람 키 높이만큼 파고 그 위에 잡목가지로 횡목올 가로세로 얽고는, 싸릿대 같은 것을 얹고 흙을 덮고 뗏장을 입혔을 뿐이었다. 설마하니 비행기들이 이 구석까지야 알아내랴 싶었던 것이다. 취사 현장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큰 쇠여물 솥이 볼품없이 우그러들어 있었고, 곳곳에 피와 살점이 낭자하였다. 항용 포도당이라고 불리며 밥에 비벼 먹던 황설탕도 포대에서 싯누런 물을 질질 게워내고 있었다. 나는 내 평생에 전쟁의 가장 참혹한 현장을 이때 비로소 피부 가까이 오직 한 번 맛보았다. 그날로 우리는 다시 그곳도 버리고 등성이 너머 외따로 한 채 있는 민가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이날 폭격으로 당한 것은 우리뿐이 아니었다. 윗해안통의 해군본부도 작살이 나고 정유 공장이 화염에 휩싸였으며 기관차 공장, 조선소를 비롯하여 당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희한했던 것은 우리가 떠난 뒤 텅 비워두었던 그 연대본부 2층 벽돌 건물은 정작 폭탄 한 방 안 맞고 말짱해 있었던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또 한 가지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그날 아침 열차편으로 평양에서 이곳에 와 닿은, 대학생들이 태반이던 300여 장정이 역에서 마악 내려 그 옆의 국민학교 교정에 집합해 있다가 비행기의 첫 표적으로 잡혀 기총소사를 당했다는 점이었다. 마침 고래고래 군가 합창을 하고 있던 참이어서 비행기가 머리 위까지 오는 소리조차 미처 못 들었다던가. 그야말로 그물에 든 고기들이 팔딱거리듯이 기총 알에 맞아 팔딱팔딱 몸째로 튀더라는 것이어서, 아비규환의 지옥 그것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감색 더블*에 감색 모자의 학생복 차림 그대로, 기분도 아직 대학생 기분 그대로인, 주로 김일성대학, 평양사범 대학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고스란히 87연대로 들어올 예정이었다.
이때, 나는 이미 이 전쟁의 끝을 예감했는데, 그 점으로 말한다면 지금까지도 개운하게 풀리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그렇게도 족집게로 집어내듯이 우리 동정을 하나하나 속속들이 꿰던 것으로 미루어, 대대적인 6·25 기습이 감행되리라는 것을 정작 사전에 몰랐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남쪽에서는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장병들의 외출이 많았다고 한다. (그 점도 내 감각으로는 이해가 쉽게 안 되지만) 6·25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당시 이북에서 나는 매일같이 보았다. 거의 한두 달 내리닫이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화차를 통해 병력이 수송되었고, 탱크와 포들이 알몸뚱이 그대로, 혹은 짙은 초록색의 갑바천에 휘감겨 비를 맞으면서 무개화차*에 실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나갔다. 그런데 6·25가 일어날 것을 남쪽에서는 전혀 몰랐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내가 겪은 그날의 폭격 경험으로 미루어서 그 무렵의 전 국면을 새삼 되짚어본다면, 당시의 늙은 이승만 대통령이나 태어난 지 불과 두 살밖에 안되었던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설령 모르고 있었을지라도, 적어도 미국의 중추부, 어느 깊숙한 곳에서는 이미 속속들이 꿰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지나 않았을까.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반도는 제외된다느니, 애치쓴 라인*이 어떻다느니 하는 식으로 슬슬 북쪽으로 하여금 쳐내려오도록 유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으로 말한다면, 미국은 그때 6·25가 일어남으로 하여 이 땅에 다시 올 핑계가 생길 수 있었고, 이날 이때까지 아시아 대륙의 맨 끄트머리에 오늘과 같은 든든한 교두보를 유지할 수가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잠시 얘기가 겉가지로 흘렀는데, 이날의 폭격은 그 뒤의 내 운명마저 홱 바꾸어놓았다. 이 폭격의 피해는 그 정도로 북쪽 당국 깊숙이에도 충격이 컸던 것 같았고, 이 무렵을 고비로 해서 그 어떤 나락으로 송두리째 떨어져가듯이 갈피를 못 잡기 시작했다. 불과 이틀 뒤에는 87연대가 249부대라는 이름으로 동해안 방위여단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우리도 그 속성 간부양성소인 특간대에 편입되어 낭성으로 옮겨 앉았다. 여기서 나는 평양에서 열차 편으로 어제 마악 닿은 그 김일성대학, 평양사범대학 학생들과 합류되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나는 첫눈에 이미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알짜배기 간부들은 이미 문화공작대 성원으로 제일 먼저 뽑혀져 나갔고, 중간치기 씩씩한 학생들은 탱크부대로 동원되고, 나머지 별 볼일 없는 찌꺼기들만 긁어모아 부랴부랴 열차로 실려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북쪽의 대강 기준치 대학생들이 아니라 주로 평 양 시내 날라리들 출신의, 대체로 알로 까진 축이 태반임은 그들의 생김새나 주고받는 말씨, 분위기만으로도 대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현지에 닿자마자 그들은 바로 어제, 맛보기로 날벼락을 맞듯이 많은 동료들이 죽고, 혹은 부상을 당하는 대대적인 폭격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나는, 느닷없이 이게 웬 떡 인가. 시골 거리의 고3이 별안간 평양의 가장 명문대 학생 패거리에 끼이게 된 것도 그러려니와 부대분위기도 어제까지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서로 오고 가는 말씨부터가 되바라진 농담 위주였으며, 구성원들 태반이 이런 종류의 날라리들이었음으로 하여 말미암은 것이었을 터이지만, 상부에서도 이것저것 까다롭게 굴지를 않고 이들 비위에 맞추듯이 훨씬 느슨하게 감당해주었다. 심지어 상부 기관이 있는지조차 처음 한동안은 궁금하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이틀 걸러 소 한 마리씩 잡고 돼지고기도 천신*으로 남아났으며, 훈련은 둘째로 하고 매일 낮이나 밤이나 없이 오락회로만 시간을 보냈다.
비행기도 이곳까지는 쫓아오지 않았다. 알고도 별 볼일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우리 꼴을 내려다보며 어딘가 저희들을 닮았다고 회심의 미소를 흘리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필경은 몰랐을 게 틀림없다.
더구나 나는 고1 때부터 시 청년구락부 합창부 성원이었던 만큼 희한한 소련 노래들을 수없이 배워 알고 있어, 자연히 오락회 때마다 인기를 독차지하였고 얼마 안 있어 오락회장으로까지 발탁이 되었다. 나는 이때 불과 며칠 동안에 분수없이 살이 포실포실 쪘었고 그 무렵의 하루하루 분위기는 바로 그 일 년 전의 그것과 닮하 있었다.
그러니까 작년 1949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우리 청년구락부 합창단 성원은 밴드부 성원과 합쳐 몇 조로 나뉘어, 일주일씩 벽지 계몽사업에 나섰었다. 계몽사업이라지만 도 인민위원회 선전부 주관이어서, 그쪽에서 주로 연설꾼 하나가 책임자 격으로 붙고 우리는 여흥 삼아 풍각을 울리면 되었다. 더러 시 낭독 같은 것을 곁다리로 붙이기는 하였지만, 우리 조의 여덟 명은 38선 인접 지역인 연천(漣川), 전곡(全谷) 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안개 자욱한 한탄강 너머 남쪽 산천에 처음 접했다. “저 건너가 바로 남쪽 적지이지요” 하고 안내하는 군 직원이 가리켰을 때, 우리는 일순 하나같이 조용했었다.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맞대면하는 남쪽 적지는 휘영청한 달빛 속에 누워 있었고, 보이는 것은 오직 우람한 산덩어리의 북향 경사일뿐이었다. 달빛 속에서일망정 숲이 여간 깊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들리는 것은 여름 바람 소리뿐이었다. 우리는 하나같이 그쪽의 어떤 기척을 듣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닌 게 아니라 잠시 뒤, 그쪽에서 길게 꼬리를 물며 딱, 꿍 하고 총소리 한 방이 들려왔을 때는, 책임자 격인 그 도 선전부에서 파견되어 나온 사람부터가 와락 겁먹는 낯색이었다. 군 직원이 다시 가만가만히 잇대어 말했다.
“저게 바로 남쪽 국방군의 총소리입니다. 심심하니까 저렇게 공중에다 대고 한 방씩 쏘는 겁니다. 물론 이쪽에서도 거기에 맞대꾸라도 하는 듯이 이따금씩 쏘지요. 그쪽에서 들으면 이쪽 총소리도 같은 식으로 들린다나 봅니다. 딱, 꿍 하고. 그러다가 더러는 잠깐잠깐 맞붙는 것마냥 서로 따르르 연발로 내갈기기도 하지요. 그런 경우엔 총탄이 조 앞에까지도 날아온다더군요.”
우리 중 누구 하나가 가만히 물었다.
“혹시 저쪽에선 우리가 지금 여기 나와 있는 걸 알고, 인사 삼아 총 한 방 쏜 건 아닐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하고 그 군 직원은 우스갯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았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여덟 명의 책임자 격이던 그 사람은 우리 중 누구보다도 잔뜩 겁먹고 있는 낯색이었다: 그것이 내심으로 여간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핏대를 내며 소위 선동 연설을 할 때로 보아서는 너무나 쉽게 기가 죽어 있었고, 여차하면 저 혼자서만 달아날 것이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의 그 총소리 한 방! 깊은 고요를 찢어며 딱, 꿍 하고 울려오던 그 한밤중의 불길한 총소리는 바로 일 년 뒤의 대파란을 그렇게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나 아닐까.
이렇게 38선 인접 마을을 일주일가량 돌고 우리는 귀갓길에 올랐다. 우리는 저마다 흥분해 있었다. 경원선 북행 기차에 오르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노래가 터져 나왔다. 그 당시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서정적인 러시아 노래들, 「젊은 병사의 노래」니 「항구의 아침」이니 「조국의 노래」, 요즘 우리의 「서울 찬가」와 비슷한 「보스끄바의 노래」 「군대 깐따따」, 심지어 장중한 「스딸린 송가」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가 운만 슬쩍 떼면 금방 무르익은 사중창으로 되어 나왔고, 한 찻간 속에 탔던 손님들뿐 아니라 여느 찻간 속에서까지 몰려와 우리 주위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모두가 우리의 이 노래 분위기 속으로 녹아들어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더욱더 신이 났고 마치 우리 자신이 영화 「씨베리아 대지의 곡」의 주인공이라도 된 느낌 이어서,
토 지킴 스테 자 바이칼랴
그제 조올로토 로유고라
부로자아가 스팀 프로쿨리나야
타쉬샤 스 모이 나 프레챠
하고 마치 깊은 대지의 숨결마냥 극히 억제된 삐아니씨모*로, 그러나 장중하게 바이칼 호수 근방의 러시아 민요를 불렀다. 협곡을 돌아나가는 기적 소리, 깎아지른 바로 손에 닿을 듯한 시커먼 바위산, 깊은 골짜기와 짙은 녹음, 마악 해질 녘이어서 찻간 속으로 밝은 햇살이 잠깐 들이비쳤다가는 금방 빠져나가며 갑자기 서늘한 짙은 그늘이 수울 들이밀고, 곧 다시 잠깐잠깐 환하게 밝아지고, 이렇게 음영이 엇바뀌는 속을 우리는 극히 억제된 삐아니씨모로 장중히 흐르다가 갑자기 불기등마냥 포르띠씨모*로 폭발하며 절정으로 치달았다. 드디어 석왕사를 지나고 남산역을 지나 안변에 이르러서야 시계가 갑자기 트이며 차창 멀리 명사십리* 바닷가 솔숲이 보이고, 이때쯤 우리의 노래는 완전히 무르익어 있어 종착역인 원산역에 이제 금방 가 닿는다는 것이 여간 아쉬운 느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이 점만은 변함이 없다. 이때의 그것은 서정적인 러시아 민요나 그 비슷한 노래들과 함께 30여 년 전의 나의 고등학교 적 추억 속에서 여직도 가장 따뜻한 것으로 남아 있다. 가지가지의 보고, 토론, 비판, 격문 일색의 딱딱한 군중집회, 상투형 일색의 지긋지긋한 홍수 사태에서 잠시잠시 놓여나 숨통을 틀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청년구락부 합창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게 웬 떡이란 말인가. 낭성 특간대의 분위기라는 것이 이를테면 조금은 그와 비슷한 분위기였고, 나는 오락회장까지 되어 더욱더 마음껏 그 속에 취해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오래갈 리는 없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빈둥거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대 혼란의 증거였으니까. 애초에 특간대라는 이름부터가 혼란의 와중에 생겨났던 것이었지만, 일선 쪽의 소모가 늘어나면서 차츰 우리도 대여섯씩 혹은 많은 때는 여남은 명씩 무 솎아내듯이 뽑혀 나가기 시작했고, 이럭저럭 근 스무 날 가까이 지난 8월 초순에는 어느새 처음의 반절도 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태는 급박하고 삼엄 해져갔다. 비행기 떼거리는 고공으로 유유히, 혹은 망나니들마냥 지상으로 낮추 붙어 돌며 매일 쉬임 없이 오르내렸고. 이제는 그 소리가 안 들리는 것이 도리어 어색할 지경이었다.
5
내가 지난날 남로당원이었다던 갈승환씨에게 그 정도로나마 정면으로 대어들 수가 있었던 것은 따지고 보면 이런 뒤숭숭한 국면을 전제해서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평상적인 조건하에서였다면 감히 그에게 그런 식으로 맞대거리할 수가 있었을까.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내 말에 일리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 점은 틀림없이 그랬다. 과(過)정치적인 언설들만 소리 높이 횡 행하는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현실에 근거한 소리는 먹혀들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러기도 하려니와 그 점은 오늘날까지도 쉽게 납득이 안된다. 민애청 성원이 더러 이 속에 끼여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지만, 남로 당원이었던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패거리에 끼어들었었는지, 아무리 그때가 혼란의 와중이었을망정 지금까지도 그 점은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갈승환씨와 그런 일이 있고 난 바로 그 이튿날이었다. 오전 중 쉰 남은 명의 그들 일행을 이끌고 개울가 방죽으로 나와 소위 20개 정강 해설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선전을 벌일 판이었는데, 잠시 숨을 돌릴 겸 쉴 참이었다.
내 옆에 김정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나는 불쑥 사사로운 말 하듯이 말했다.
“김정현 동무, 동무는 아직 너무 어려서 동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이북 세상을 너무너무 모르고 있어. 여기서는 동무네 집처럼 잘살았다는 건 자랑이 못된다구. 되레 부끄러워해야 하고 창피하게 알아야지. 그러니까 이제부턴 그런 소린 일체 말어. 알겠어? 서울서 잘살았다는 소리 같은 거, 아예 입엘랑 올리지 말라고.”
“네…… 알았습니다.”
뭔가 조금 기별이 가는지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묘한 얼굴이 되면서, 그러나 금방 본래의 활달하고 천진한 얼굴로 돌아오면서 그가 물었다.
“그럼 말 탈 줄 알았다는 소리 같은 것도 하질 말아야겠네요?”
“아니, 말 탈 줄 아는 거야 어떻겠어. 그건 괜찮지만, 단지 아부지가 국회의원이었다느니, 매일 새벽 아부지와 같이 두 시간씩 말을 탔다느니 자랑삼아 떠벌리는 건 안 좋지. 그런 건 자랑이 아니라, 여기선 창피헌 쪽에 속허니까. 동무 아버진 아주아주 나쁜 사람이었다구.”
“네,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형님.”
순간 나는 무언지 뭉클하였다. 그의 말에는 그 정도로 진정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한편 그의 그 ‘형님’ 이라는 호칭에는 뭔지 징그럽고 근지러운, 역거운 것도 섞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나는 방금 그에게 한 말을 은밀하게 귀뜸해주듯이 일러둘 수도 있었고, 성 질상 그래야만 마땅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스스로 떳떳지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니, 나는 이때 부지중일망정 간밤의 갈승환씨를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김석조가 갈갈갈갈 하고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커다란 소리로 웃지 않는가. 그의 그 짤막하게 튕기듯이 터뜨리는 웃음소리는 실로 독특하였다. 더러 그가 앉은 쪽에서 그런 웃음소리가 터뜨려질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 쳐다보곤 하였으나, 그때마다 그는 금방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곤 하였었다. 근데 비로소 처음으로 직접 맞닥뜨린 것이다. 그의 그 웃음소리는 어리숙하고 약간 바보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평소의 생김생김과는 도무지 걸맞지가 않았다. 추호나마 거리껴하는 구석이라고는 없이 마치 폭죽 터지듯 하는 그의 직절(直裁)한* 웃음은 뭐랄까 단순히 우스운 광경을 보고 못 참아서 웃는 그런 웃음이었지만, 김석조라는 사람의 무엇에나 쉽게 얽매이지 않는 활달하고도 솔직 담백한, 그리고 강건한 일면을 흘낏 드러내고도 있었다. 실은 어떤 사람보다도 차라리 김석조야말로 알짜배기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때 나는 직감으로 느꼈다. 그리고 이때 갈승환씨는 또다시 저만큼 맨 뒷자리에서 뚫어져라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김정현은 잠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코 먹은 소리로 말하였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고멉습니다, 형님. 아니, 동무.”
그러자 김석조는 또 한 번 짧게 갈갈갈갈 하고 웃어, 이때는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까지 웬일인가 하여 일제히 이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별일도 아니었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러니까 그날 오후였다. 점심 먹은 뒤에 그들 일행을 전투훈련을 맡은 고참병 하사관에게 인계해주고, 나는 낮에 할 일이 없을 때는 주로 나가 있곤 하던 취사장 옆 방죽가의 미루나무 아래로 나갔다. 그곳은 여간 서늘하지 않아 이일 전체의 관할 책임자인 그 군관 동무부터 한낮에는 아예 돗자리까지 깔고 맨셔츠 바람으로 그곳에서 빈둥거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군관 동무는 정장 차림으로 군모까지 제대로 쓰고 있고, 누군가를 응대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나는 내심 놀랐다. 오는 기척도 없이 통별 하나가 거기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둘은 참외를 깎아 먹고 있었다. 소장이었다. 소장이라면 여단장 정도가 아니라 사단장급이어서 나는 여간 놀라지 않았다. 빳빳이 서서 거수 경례를 올려붙이고는 조금 머뭇머뭇거리다가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들 틈새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까만 지프차 한 대도 저 아래 높이 자란 수수밭 옆에 세워져 있었다. 대강 돌아가는 분위기로 금방 알 수 있었다. 공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일로 틈을 내어 들른 듯하였다. 공적으로야 이런 구석진 곳으로 찾아올 리도 없었고, 설령 온대도 이렇게 조용하고 조촐하게 넘어갈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늘은 어제오늘로 갑자기 높이 올라붙어 활짝 개고, 수수밭을 서걱이며 지나가는 바람도 서늘하였다. 물 흘러가는 소리가 오늘따라 더 밝게 들려온다.
그 장군은 돗자리 위에 한쪽 팔굽을 세워 머리를 받치고 비스듬히 모로 누워 있었고, 그를 응대하는 군관 동무도 별로 격식 갖춤이 없이 편하게 응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짐작이 갔다. 삼촌 되는 사람으로, 평소 귀여워하던 조카를 이 편한 자리에다 박아두고 잠깐 찾아와본 셈인 것 같았다.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썩 부리웠다.
그러자 그 장군의 말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기대하진 마라. 그렇겐 안될 거다. 절대로 그렇겐 안돼. 그런 달콤한 꿈을 꾸지 말어라. 이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되면 그날로 뿔뿔이 집으로, 직장으로 따뜻한 가족 품으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생각해선 오산이야. 그렇겐 안돼. 형식은 어떤 식이 될는진 모르나, 강철의 조직이 그냥 유지될 것이다. 세계 혁명이 완료될 때까지. 아니, 적어도 일본 혁명이 완수될 때까지는. 따뜻한 가정의 품? 그런 건 이젠 없다. 그런 건 아예 기대하짙 말어. 그런 건 이제 없다고 생각해야 돼.”
나는 당장 두 귀를 막고 싶었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린가. 그새 이쪽의 군관 동무가 짤막하게 한마디 물어본 모양으로 그 장군은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약간 짜증 섞어 말했다.
“그런 건, 달콤한 기대라는 거다. 내 휘하엔, 중국에서 나온 부대다만, 20여 년을 줄곧 몸담고 있는 사람도 있다. 허지만 전혀 불만이라곤 없다. 아니. 불만은커녕 이런 생활이 아닌 생활이 되레 이상하고 어색한 거지. 혁명에 몸을 담는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다. 너도 어서 정신 차려야 돼. 네가 꿈꾸는 그런 종류의 모든 꿈은 썩은 꿈이다. 부르주아적인 것이야. 자정이니, 대학이니, 결혼이니, 그런 달콤한 꿈은 하루빨리 벗어 버려야 한다. 알겠니?
“그렇지만.”
하고 이편의 군관동무가 다시 물었다.
“어째서 우리만, 우리 민족만 떠맡아서 고생을 해야 하지요? 어째서 세계 혁명이 끝날 때까지 우리 민족만이.”
“그런 식의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안 좋은 거다. 사상적으로 철저치가 못해.”
“그렇다면 당분간 세계 혁명이 끝날 때까지는, 우린 재래적인 행복한 생활이라는 건 생각하지도 말아야겠군요.”
“그런 건, 썩은 자들이나 맛보라고 그래. 내장이 온통 썩은 자들이나.”
“아니, 어째서 그럴까요? 사람은 기왕 태어났으면 의당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의 문제 제기부터가 곤란해. 넌 아직 벗어야 할 껍질이 너무 많다. 암튼 내 말을 곰곰 씹어보도록 해. 이런 소린 그만 하자. 슬슬 이제 가봐야겠구나.”
이때 나는 귀에다 화둥잔이라도 켜듯이 그쪽에 귀를 기울였었는데,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장군이 말하던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의 그 가라앉은 침잠된 목소리와 억양이었다. 조카라는 육친과 대면한 가장 맘 편한 자리여서도 그랬겠지만, 노골적으로 체념과 짙은 우수가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장군은 금방 일어설 것같이 하면서도 좀체 일어서지 못하였다. 모처럼 만난 조카에게서 쉽사리 떠나기가 싫었을 것이다.
“형편이 어떠신지는 모르겠지만, 별 지장이 없으시면 여기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죠. 저와 얘기도 더 나누시고. 저도 여러 가지로 더 여쭤볼 것도 있고요. 농가의 정취도 오랜만에 한넨 맛보실 검해서.”
“흥, 농가의 정취? 좋은 소리 하는구나.”
하고 비로소 장군은 벌떡 일어섰다.
“자, 진짜로 이젠 가봐야겠다. 내 말 명심허고, 느른하게 게을러빠져서 살찌지 않도록 해라. 알았지?”
“네.”
그 군관도 같이 일어섰다. 일순 조금 머뭇머믓거리며 장군은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긴 모른다. 재작년의 유고슬라비아의 배반* 이후, 코민포름의 기본 노선이 더 국제주의의 단결 쪽으로 치우쳐졌지만, 조만간 어느 땐간 가서 각 민족 단위의 이익으로 노선 변화가 올는지는. 그때는 우리도 사정이 달라질는지는 모르지. 그때에 가면 과(過)혁명적 노선도 일정한 궤도 수정이 될는지는. 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견디면서 나가야 해. 실은 나도 힘들다.”
수수밭에 모로 엇비슷이 비쳐오는 햇빛이 완연히 가을이었다. 장군은 천천히 지프차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이때의 일은 지금까지도 줄곧 궁금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때 그 장군의 목소리에서 감돌던 짙은 우수는 그 무렵의 송두리째 나락으로 떨어지던 전황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때 그의 말, 액면 그대로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그 말은 소련, 중공, 루마니아 및 베트남의 최근의 움직임으로 입증된 것이나 아닐는지. 그리고 정작 북쪽은?
그리고 그날 저녁 이었다.
“김석조 동무, 물어볼 것이 있으니, 나하고 조금 나갑시다.”
하고 마침 동료 하나와 인계를 하는 중에 김석조만 불러냈다. 동료에게는 미리 핑계를 대어 양해를 구해놓았다.
“녜? 저만 혼자 말입니까?”
하고 김석조는 잠시나마 김정현과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는 듯이 그를 흘낏 한 번 쳐다보고는 부스스 따라 일어섰다.
사실은 우리는 벌써 밑천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첫날 소련 노래를 선보였던 것이 하나의 절정이었을 뿐 그다음에는 20개 정강, 토지개혁을 비롯한 몇몇 가지 법령과 조치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의 등을 대강 설명해주고 나서는 딱히 할 일이라고는 없었다. 이 점으로 말한다면, 책임자였던 그 군관 동무도 우리로서는 잘 만났던 셈이었다. 그 사람부터가 도무지 이 일에 열성이라고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는 그날 낮에 찾아왔던 고급 장성 아저씨 덕분에 이런 한직에 배치되어 얼쩡거리자는 속셈이었지, 정작 일에는 우리보다도 관심이 적어 보였다. 결국은 할 수 없었다. 우리대로 애국가와 「인민군의 노래」 등을 비롯한 군가들, 「장백산 줄기줄기」 등등을 가르치는 것으로 주안을 삼을 밖에 없었다. 그 밖에는 낮이나 밤이나 오락회를 열어 그들 멋대로 돌아가며 한 사람 빠짐없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잘하는 사람은 재창 삼창을 시키고, 더러 분위기가 드드거워지면 노랫가락에 맞추어 춤까지 추며 늘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우리도 우리대로, 그들도 그들대로 차츰 김이 빠져가고 심드렁해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그럴밖에 없었다. 의용군으로 현지에 닿은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총 한 자루 만져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군복 지급도 안되어 한 덩어리로 모아놓으면 그대로 여전히 제각기 가지각색 차림의 얼멍덜멍한 떨거지 꼴이었으니, 그들 당사자인들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단지 매일 네 시간씩 그쪽을 담당한 하사관 몇이 전투훈련을 시키면서 따발총과 아식 보총,* 그리고 수류탄 조작법을 가르칠 때만 실물 구경을 해볼 뿐이었고, 그나마 박격포, BAR 등등은 손짓 흉내로만 할 뿐이지 현물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러니 날이 갈수록 심드렁해져가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나도 나에게 배당된 시간에 장세운, 장서경 두 대학생을 비롯한 주로 학생 출신들과 사사로운 얘기를 나누는 데만 더 열을 올려, 심지어 때로는 누가 관리자 쪽이고, 어느 쪽이 갓 올라온 의용군들인지 몰라질 정도이기까지 하였다. 두 대학생은 내 소련 노래 실력뿐 아니라 문학 실력에도 거의 혀를 내두르다피 하며, 북쪽 고둥학교 교육의 일반 수준에 대해 높이 평가해주곤 하였다. 당장의 피차 관계가 관계니만큼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만은 아닌 것 같아 나도 우쭐해지는 느낌이었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나의 이런 행태 자체에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점은 스스로도 아슴아슴* 느끼고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연줄로 떠오르는 것은 갈승환씨였다. 그럴 때마다 아닌 게 아니라 갈승환씨도 뚫어져라 이쪽을 쳐다보곤 했다. 이 대목에 이르러 보면 며칠 전 저녁의 갈승환씨 말이 그 말 자체로만도 내 말보다 옳을 뿐 아니라, 전혀 다른 각도의 조명을 받아 새삼 살아오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혹은 그 구성원 전체의 초지일관되고 강한 이념이라는 것은 사실 이런 경우에 처해서 필요해지는 것일 터이었다. 그러나 정작 작금의 갈승환씨도 혼자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겉으로 특별히 이렇다 할 중쁠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도 별수 없이 지쳐 가고 심드렁 해져가고 있었다.
다만 김정현과 김석조는 여전하였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노상 붙어 돌아가며 경우 없이 히히덕거리곤 하였다. 그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여서도 그렇겠지만, 모든 것이 신기하고 신선하기만 한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전체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시들해가면 갈수록 그 두 사람의 히히덕거림은 더욱 열도를 더하고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는 것이 옳겠다. 심지어 보다 보다 못해 더러는 내 쪽에서 눈을 부라리며 주의를 준 정도였으니까. 지금도 김석조는 그 일환으로 본때 있게 주의를 받으려니 지레 짐작하는 듯이, 몇 발짝 떨어져
잔뜩 주눅이 들어 내 뒤를 쫓아왔다.
우리는 수수밭 곁을 지나 다시 방죽을 넘어 강 쪽으로 나갔다. 방죽까지 친다면 강 전체는 꽤나 폭이 넓었으나, 정작 물 흐르는 곳은 좁다랗고 물살이 세었다. 이쪽은 풀 섶이 키로 자라 있었고 저쪽은 조금 높게 둔덕이 져서 곧장 잔 소나무들이 수북이 선 야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시퍼렇게 물이끼가 낀, 보기에도 미끈미끈한 자갈돌들이 물속으로 훤히 들여다보였다. 건너편 골짜기에 옅은 저녁 안개가 끼어 있었고, 바람은 젖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깊은 골짜기 쪽에서는 뻐꾸기 한 마리까지 청승맞게 울고 있어 주위는 여름 저녁답게 소슬하였다.
나는 물 흘러가는 것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다가 옆에 와서 조용히 선 김석조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
“동무, 갈승환 동무에게서 무슨 꾸중 같은 거 들은 일 없소?”
가볍게 놀라며 약간 위아해하는 그의 기척 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자그마하게 되물었다.
“어제오늘 사이 말입니까?”
“아니, 어제오늘 말고라도.”
“여기 닿기 전까지는 몇 차례 꾸중을 들었이유.”
“뭐라고?”
비로소 나는 눈길을 들어 그를 돌아보았다.
“……”
그는 잠시 우물쭈물하며 손가락으로 콧구멍으로 후비고 있었다.
“응? 뭐라고 꾸중을 했어? 말해봐요.”
“당원으로서 돼먹지 않았다고…… 그 동무 말씀은. 나에게도 옳게 들렸에유.”
“옳으면, 그 동무 말대로 해보려고, 동무는 노력을 왜 안했지요?”
“그 동무 말대로라뇨?”
그는 조금 뜸을 들였다.
“갈 동무가 무슨 소릴 하시던가요? 직접?”
김석조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니, 별소린 못 들었소. 허지만 갈 동무는 더 구체적으로 집어서 동무에게 충고를 했을 텐데.”
“김정현 동무와 놀지 말라고 하더군유. 당원의 품성과 관계된다고, 그 말씀도 옳아 보였에유. 허지만.”
“허지만 뭐요? 말해봐요.”
바로 그때, 지척 거리 풀 섶에서 꿩 두 마리가 갑자기 날아올라 푸드득푸드득거리며 뒤뚱거리듯이 강을 건너갔다. 순간 김석조는,
“어? 꿩이다, 꿩이다.”
하고 곧장 그쪽으로 쫓아가려는 듯이 한 발을 내디디려다가 멈칫하고는, 멀거니 꿩이 내려앉는 근처를 잠시 건너다보았다. 나도 그쪽을 건너다보았다. 그쪽 둔덕에 내려앉은 꿩 두 마리는 성긴 풀포기들을 가르며 빠르게 기어가고 있었다.
“야아, 여긴 꿩이 있네요.”
하고 김석조는 두 눈을 반짝 빛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방금 주고받은 말 같은 것은 이미 전혀 상관을 않고, 오직 근처에 꿩이 있다는 사실로만 두 볼에 홍조를 띠며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김석조를 어이 없어하며 멀거니 건너다보다가 다시 채근하였다.
“응? 왜 그랬지? 김정현 동무는, 동무가 보기에도 엄연히.”
“아, 그거요?”
김석조는 다시 낼름 받고는 빠르게 말하였다.
“그렇지만 난, 그 애가 좋은 걸유. 좋은 걸 어떻게 하남유. 그러구 기왕지사 이렇게 됐음, 모두 그 동무를 도와줘야 할 거 아니겠에유.”
나는 일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이 멍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잠시 김석조를 멀거니 건너다보다가 다시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래, 동무는 갈승환 동무에게 그렇게 대답을 했소?”
“아뇨.”
“왜?”
“그냥유. 그 점은 의당 그 동무도 알고 있겠거니 했에유. 내가 굳이 말을 안해도.”
“그렇지만 그 동무는 김석조 동무에게 거듭 충고를 했잖어. 그러니까 그 점, 갈승환 동무는 처음부터 모를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글쎄, 그런 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구유. 허지만 암튼 저는, 김정현 동무를 도와주고 싶었어유. 그 동무는 참으로 어쩌다가 우리 속에 껴든 거거든유. 누구보다도 도움을 받아야 할 동무지유.”
“동무는 충청도였나?”
“본시는, 왜정 말까진 집이 충남 서산이었에유.”
“남로당엔 언제 들었었지?”
“딱히 기억은 안 나는데, 들어가서 얼마 안 있으니까 유야무야가 되데유. 세포회의에도 몇 번 참가는 했지만, 다 인쇄소 동료들이었에유. 그래서 사실은 당원이라지만, 갈 동무와는 전혀 다를 거예유.”
비로소 나는 그의 정 체가 대강 감이 잡혔다.
6
밤의 안변 역두.* 우리는 아까 오후 나절에 도보로 이곳에 도착하였다. 북쪽 곳곳에서 이 잡듯이 사그리 굵어모아, 바로 사흘 전에 근 400명의 신병이 새로 들어왔다. 당상리는 갑자기 벌집이라도 쑤신 듯이 여간 북적거리지 않았다. 민가 몇 집과 과수원 움막 두엇을 새로 징발해야 했으며, 바닥에 깔고 잘 가마니때기와 큰솥도 더 얻어야 하였다. 끼니때마다 몇 차례로 나누어 먹인다고 하더라도 식기도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동네 초입 미루나무 밑에 설치한 취사장도 더 늘리고, 이들의 기초 훈련과 교육을 맡을 하사관들도 더 지원받아야만 하였다. 털털거리는 헌털박이* 지프차가 바쁘게 산자드락* 길을 오르내리고, 연락병의 자전거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여단본부로 오르내려야 하였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전원 새 군복 한 벌씩이 지급되었다. 여단본부는 지금은 차라리 시내 한복판의 사범학교 자리를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종일 비가 와서 모두가 과수원 움막 안에 처박힌 채 오락회를 벌이다가 트럭으로 실어 온 군복을 지급받았던 것이어서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었다.
이렇게 새 군복을 일제히 입히자, 과연 전체의 분위기는 홱 달라져 이럭저럭 꼴이 잡히고 겨우 자리가 잡혀가는가 하였는데, 어제 오후에는 다시 새 날벼락이 떨어졌다. 사흘 전에 들어온 이 새 신병 떼거리들에 남쪽에서 올라온 의용군 일부를 합류시켜 대충 1개 대대를 편성하여 오늘 밤 안변역을 떠나 고성까지 기차로 가서 거기서부터는 도보로 울진 주둔중인 249부대 제2대대로 전원 편입해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남쪽에서 갓 올라온 의용군들 가운데서는 반절가량인 스무남은 명, 주로 민애청 소속 젊은이들만 이 속에 합류시키고, 나머지는 북쪽 오지로 후송된다는 것이었다.
훨씬 뒤에야 이때 이 조치의 전략적 의미를 나름대로 감 잡을 수 있었는데, 요컨대 이것은 후퇴 작전을 위한 예비 조치였다. 포항, 영덕 근방에서 일진일퇴하며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최일선의 정예부대를 표 안 나게 뒤로 빼돌리면서, 별 볼일 없는 우리 신병 대대로 하여금 그 뒷자리를 메우게 한다는 것이었을 터이다. 말하자면 정예부대의 후퇴를 순조롭게 보장하기 위해 적의 진격을 곳곳에서 지연시켜보자는 것 이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울진 근방에서 적의 진격을 잠시라도 지체시킬 책임을 지닌, 별 볼일 없는 소모품이었다. 그리고 강제로 동원되어 올라온 것이 거의 분명 한 남쪽의 의용군 출신은 이 소모품 틈에도 끼일 자격이 없이, 사상 단련을 더 쌓기 위해 후방 오지로 후송된다는 것이었다. 하기는 그랬을 것이다. 남쪽에서 강제로 동원되어 갓 올라온 그들을 금방 남쪽 최전선으로 되내려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장세운, 장서경 등 민애청 소속 대학생을 비롯하여 그 밖에 태반의 민애청 소속 고등학생 출신들은 우리와 함께 일선 쪽으로 나가는 패거리 속에 끼였으나, 김정현은 후방으로 후송되는 쪽에 끼어들었다. 김석조도 물론 우리와 함께 울진으로 나가는 쪽이었다.
갈승환씨와 그리고 그와 노상 같이 붙어 지내던 나이 지긋해 보이던 또 한 사람 남로당원 조승규(趙昇圭)씨는 바로 이틀 전 새 군복이 지급되던 날에 상부의 특별 소환을 받아 빠져나갔다. 그렇게 갈승환씨는 제대로 조회가 이루어져, 애당초의 뜻대로 평양 쪽으로 불려 올라가는 듯싶었으나, 그날 저녁 조승규씨는 혼자서만 되돌아왔다. 웬 일인지 떠나기 직전 갈승환씨는 갑자기 물 만난 고기마냥 희색이 만면하여 설쳐대었다. 원체 체대가 커서 새 여름 군복이 빠듯하게 끼어보였는데, 벌써부터 야간 거들먹거리듯이 권위주의와 관료주의풍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분이 썩 좋아서도 그랬겠지만, 그동안의 피차 꺼글꺼끌했던 점에 추호나마 유감의 기색을 드러냄 없이 시원시원하게 악수를 청하면서, 그리고 잡은 내 손을 거세게 흔들어대면서 말했다.
“통일된 다음에 꼭 만납시다. 우리는 한 번 더 꼭 만나야 됩니다. 만나야 되구말구요.”
그는 스물아홉 살 나이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흥분되어 있었다.
“꼭 다시 만나선, 그 문제를 더욱 깊게 토론을 해봅시다. 동무의 견해에도 충분히 일리는 있어 보이니까, 더 널리 문제를 제기해서 결론을 내도록 합시다. 꼭요, 꼭. 통일된 다음에, 꼭 다시 만납시다. 우리, 만나는 거요!”
나는 격의 없이 웃으면서 받았다.
“암튼 축하합니다. 그러구 그동안 여러 가지로 잔신경을 쓰게 한 점, 사과드립니다. 제가 아직 어려서 철없는 소릴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천만에, 천만에.”
하고 갈승환씨는 그길로, 그 커다란 체대가 조금 경망스러워 보이게, 새 군복 차림이 훌렁훌렁해 보이는 김석조 쪽으로 달려가 그와도 악수를 나누면서 같이 평양으로 소환당하지 못하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위로의 말 몇 마디를 하였다.
“동무. 안됐소. 같이 갔더면 좋았을 것을. 동무 혼자서만 빠지다니.”
“……”
“허지만 어느 자리에 있더라로 원칙적으로는 같을 거요. 언제나 굳게 마음먹 고, 타의 모범이 되도록 힘써주오. 그럼 뒤를 부탁하겠소.”
정작 김석조는 그 특유의 멍청한 얼굴로 그저 '멀거니 그를 마주 쳐다보기만 하였다. 두 사람만 특별히 평양으로 소환된다든지 어쩐다든지 하는 일에 애시당초 선망은커녕 관심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시종 무표정하였고 차라리 의젓하였다. 언뜻 보기에 그 두 사람만 평양으로 소환당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는 듯이도 보였다. 그리고 갈승환씨는 이때 김석조 옆의 김정현에게는 쌀쌀맞은 일별*을 던졌을 뿐 의례적인 인사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 군복 차림이 그중 제법 깔끔해 보이는 김정현도 김정현대로, 그런 일에는 전혀
추호나마 관심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김석조 못지않게 차라리 의젓해 보였다.
“자, 그럼 뒤는 동무에게 거듭 부탁하고 떠나겠소.”
하고 갈승환씨는 마지막으로 김석조에게 다시 못을 박듯이 말하고는, 그와 늘 붙어 지내다시피 하던 또 한 사람과 함께, 퍼븟는 소나기 속에 마악 시동을 건 트럭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 두 사람은 이틀 전에 그렇게 먼저 빠져 나갔다.
주관하는 쪽에서는 원체 그런저런 자질구레한 면에 신경을 쓸 형편이 못되기도 했었지만, 이때 북쪽 오지로 후송되는 축에 끼이게 된 남쪽의 의용군 몇몇은 어거지를 쓰다시피 안변역까지 따라 나왔다. 일선으로 나가는 패거리에 저들도 같이 끼워 넣어달라고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하면서, 김정현도 물론 김석조와 떨어지지 못하고, 그 옆에 여전히 찰거머리마냥 붙어 서서, 안변 역두까지 따라온 축에 들어 있었다. 모두가 새 군복 차림인데다가 이들의 관리를 맡아 새로 임관되어 온 군관들인들 소모품이기는 피장파장이어서 도대체 누가 누군지, 인원 숫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할뿐더러 자상한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간관리층 격인 나 같은 사람이 굳이 무리를 한다면, 그들 전부를 얼마든지 일선 쪽으로 나가는 패거리 속에 끼워 넣을 수는 있었다. 몽땅 울진까지 데리고 나갈 수도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김정현 한 사람쯤은 이쪽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가능하였다. 여단 대열과에서는 그들 각자가 처음에 적어낸 그 종이쪽지를 기준으로 하여 나가는 쪽과 후송되는 쪽으로 편의상 분류해놓기는 했지만, 실제 국면은 엉 망이었던 것이다. 서로 바꿔치기한들 알 리가 없었고, 몽당 이쪽에다 끌어넣는다 한들 별일이 있을 리도 없었다.
애초에 인원 숫자부터 엉성하였거니와, 누가 누군지 아직 제대로 문서화되어 있지도 않았다. 소모품 떼거리를 두고 누구 하나 자상한 관심을 기울였을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안변 역두에서 기총소사까지 당하여 벌써 몇 사람의 희생자까지 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당상리를 떠나 안변 역두에 점심 전에 닿은 우리는 근처 민가에 분산 수용되어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는 하릴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오후 두시나 됐을까,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이 곡할 일이었다. 불시에 비행기 서너 대가 낮추 날아오더니, 역 구내와 주변 민가에다 대고 무차별 기총소사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우리를 태우기 위해 역 구내에 기다리고 있던 화물차량 두어 대가 소이탄*에 맞아 벌써 불타고 있었고, 우리는 제각기 들어 있는 민가에서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두가 방구석 쪽에 한 덩어리로 몰려 양쪽 손으로 양 귀를 틀어막고 서 있었고, 더러는 미친 사람 모양으로 방 안 한 가운데를 기어다니고, 부엌으로 달려나가 덮어놓고 아궁이에다 머리를 쑤셔 넣는 사람까지 있었다. 기관포탄과 기총탄이 머리 위로 쏟아부어지는 소리는 바로 콩 볶는 소리의 몇만 배쯤 되는 소리 같았다. 쫘그르르 쫘그르르, 곧바로 아래로 내리꽂히며 한바탕씩 기총소사를 쏟아 붓고 다시 기체를 솟구쳐 위로 오를 때는, 열린 격자문 밖으로 비행기의 등짝과 그 속의 적 비행사까지 손에 잡힐 듯이 내다보였다. 여기서 여섯 사람의 희생자가 났다. 초가지붕을 뚫고 들어온 기관총 알을 맞고 즉사한 사람이 둘, 나머지는 부상이었다.
아직 달이 떠오르기 전이라 안변 역두는 엷은 저녁 안개 속에 잠겨있었다. 땅에서는 아직도 더운 기를 내뿜고 있었고 습기 찬 끈끈한 대기 속에는 각종 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저께 내린 소나기 탓인지 어둠 속에 보이지는 않으나, 어디선가 개울물 흘러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우리는 역 구내의 소이탄 맞은 화재 뒤처리와 몇몇 시체 처리를 마치고, 새로 편성된 각 소대별로 저녁 끼니를 때우고는, 다시 하릴없이 열시에 떠날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임관되어 온 군관들인들 썩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기관차가 당장 와 닿아야만 진짜 떠나게 되기는 떠나게 되나보다 하고 알 판국이었다.
역사 앞은 민가 몇 채가 서 있고는 그대로가 논으로 이어져 고즈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바람결 끝 어느 구석인가, 먼 갯내가 풍겨오기는 하였다. 여기서 남대천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와 맞닿는 언저리에 불과 얼마 전까지 내가 속했던 특간대 자리, 낭성국민학교가 있을 것이었다. 나는 막막한 어둠 속으로 그 근처가 됨직한 쪽을 쳐다보았으나 보일 턱이 없었다. 겹겹으로 모기떼만 달려들 뿐이고 끝없는 평원만이 무한정 뻗어 있을 뿐이었다.
서남쪽 신고산, 석왕사 방면으로부터 흘러와 이 근처에서부터 갑자기 폭이 넓어지며 북동켠을 향해 휘돌아간 남대천을 둘러싸고 안변평야가 바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어둠 속에 잠겨 있어 멀리 물러앉은 시커먼 야산의 능선이 더러 보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 400여 명도 완전히 여름밤 속에 녹아들어 있어 오직 머리 위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한가운데로 은하수가 우람하게 깊이 가로질러 있었고 북두칠성도 삐두름히 걸려 있었다. 우리는 삼삼오오 제각기 흩어져 앉아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여기저기 모깃불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독한 들쑥대 타는 냄새가 코에 매웠으나, 모기는 극성스럽게도 달려들었다. 대기층은 온통 겹겹으로 모기 장막으로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떼거리로 달려들며 윙윙 거리는 소리는 낮의 ˙적 비행기 소리와 맞먹었고, 우리는 어찌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마침 나는 김석조, 김정현과 셋이 논가에 앉아 있었다. 길가이자 키로 자란 풀섶이었고, 그 조금 둔덕진 아래로는 논이면서 그리고 그대로가 안변평야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셋 다 양손에 든 들쑥대와 명아줏대로 모기떼를 쫓고는 있었으나, 실은 별 무소용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김정현은 울진으로 나가는 이 패거리 속에 자기도 끼워넣어달라고 여간 졸라대지 않았었다.
“네? 그렇게 해주셔요. 형님 동무 힘으로, 능히 될 것 같은데요. 그래야, 통일된 뒤에, 나는 집에 가기도 쉽고.”
하기도 하고, 혹은,
“죽든지, 살든지, 난 석조 동무와 형님 동무 옆에 있고 싶어요. 같이 가게 해줘요, 네? 녜? 그래야 이담에, 통일된 다음에, 동무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기도 쉽고, 나도 더 의기양양하게 개선할 수가 있겠어요.”
하고 도대체 말도 안되는, 철딱서니라고는 없는 소리를 하곤 하였는데, 김석조도 처음 한동안은 자기의 소관 사항이 아니어서인지 이렇다저렇다 별말이 없었다. 딱히 김정현의 말에 동조를 하거나, 한마디인들 옆에서 거들지는 않았지만, 대충은 김정현도 한패거리에 끼여서 나간다 한들 크게 무방하지 않겠느냐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김정현이 지나칠 정도로 끈덕지게 졸라대자, 어느 순간인가 김석조는 드디어 단호하게 말하였다.
“어거지 쓸 일이 따로 있지. 그건 안돼. 동무는 후방으로 들어가서 더 공부를 해야 돼. 그런 일이 이 동무 힘으로 될 것도 아니고.”
어두워서 표정까지는 볼 수 없었으나 김석조의 그 억양은 놀라울 정도로 단호하여 마치 철퇴라도 내리치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뜻밖이어서 나도 한순간 멍멍하였지만, 김정현도 꿈틀하고 놀란 듯이 가만히 있더니 더 이상은 그 일로 다시는 조르지 않았다. 이미 그 일은 김석조의 그 한마디로 그렇게 우리 사이에서 깨끗이 결정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갑자기 조금 서먹서먹해져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 뒤, 나는 조심조심 하듯이 가만히 물었다.
“지금 석조 동무는, 갈승환 동무가 이틀 전에 떠나면서 동무에게 부탁한 그 말을 염두에 두면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김석조는 어둠 속에서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틈을 안 주고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 동무의 그딴 소리는 어쨌건 간에, 정현 동무는 우리 쪽에 끼일 수는 없지요.”
충청도 사투리가 깡그리 사라져 있는 것이 희한하였지만, 무언가 이 경우는 그것이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동무는 어쨌건 간에 공적인 기준에서 지금 그런 얘길 하는 거 아니겠어? 사적으로는 정현 동무와 도저히 떨어질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지만, 공적으로……”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하고 김석조는 금방 다시 단호하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공적도 사적도 아니에요, 저는. 그런 게 왜 굳이 구별이 되어야 하남요. 저는 이때까지, 사적으로만 김정현 동무와 친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 점, 분명히 갈승환 동무는 오해하고 있었지요. 그러구 이런 소린 제가 감히 할 수 있는 소린진 모르겠지만 갈 동무 같은 사람, 아무리 늘 옳은 소린 하고 있지만, 전 그런 사람 그다지 믿진 않아요. 그런 사람은 결국은 제 욕심부터 앞세우는 사람이거든요. 사실은 전 이런 소린 하고 싶지 않았는데.”
김석조는 빠르게 중얼거리다가 뒤끝을 이렇게 우물쭈물하면서 다시 덧붙였다.
“이런 식의 말, 그만두지요 뭐. 괜히 피차 딱딱해지기만 허니까요. 이런 소리 하다 보면 남 헐뜯기나 좋고.”
“그러지요. 그러지요.”
하고 건성건성 받으면서, 이런 경우의 그의 충청도 사투리를 안 쓰는 어투야말로 바로 김석조 분수만큼의 보편적 의식이 아니겠는가 싶어지며 나는,
“다만 한마디만 더 묻지요.”
하고 물었다.
“김정현 동무와 친해진 게 공적도 사적도 아니라고 동무는 말하고 있는데, 대강 그런 기준에서 울진까지 같이 갈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어? 근데 그 점, 동무가 단호하게 거절하는 건 뭐지요?”
그는 다시 금방 받았다.
“제가 공적도 사적도 아니라고 하는 건 진짜로 공적도 사적도 아니어서 아니라는 게 아니라, 실은 큰 테두리로는 공적인 기준이 의당 깔려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요. 아무 데서나 꼭 공적인 얼굴을 하고 공적인 말을 농해야만 공적이 되능감유. 그러면 괜히 서걱거리기나 하고, 서로 불편해지기나 쉽지유.”
“이제 알았소, 알았소. 그만 해두지.”
나도 이 근처에서 잘라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김정현이 쿨쩍쿨쩍 울기 시작했다. 울면서 어린애 응석 부리듯이 칭얼거렸다.
“난 이제 혼자 남아서 으어쩌지요. 석조 동무도 없고, 마음 좋은 형님 동무도.”
‘형님 동무’ 라는 호칭이 문득 우스워 나는 어둠 속에서 피식 웃었으나, 김석조는 김정현 쪽으로 한 발 더 바싹 붙어 앉으면서 어깨동무를 하였다. 어깨동무를 했다고 하기보다는, 한 팔로 어깨를 끌어안고 쓰다듬었다는 것이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김석조는 말했다.
“어차피 그렇게 돼야 되어, 동무는. 언제까지나 항상 동무 옆에서 동무를 누군가 봐주어야 하능감. 그렇겐 안돼. 동무에게서 그런 시절은 이제 영원히 지나가 버렸어. 오늘부터 이젠 동무 혼자서 감당을 해야 해. 어뗘? 동무 혼자서도 대강은 알 수 있고, 감이 잡히잖어. 이젠 감이 잡히겠지?”
김석조도 김석조대로 잔뜩 젖은 목소리여서 말할 수 없이 따뜻하고 간절하게 진정은 담겨 있었지만, 어느 구석인가 날이 선 칼을 내리찍듯이 서슬이 번뜩였다.
“응, 알어, 알어. 알 만해. 알 만해.”
김정현은 이제 어깨를 들썩이며 흑흑 흐느끼고 있었다. 흐느끼면서 빠르게 이렇게 받고 있었다. 김석조의 목소리도 차츰 울멍울멍 젖어가면서 김정현을 앞으로 통째로 끌어안듯 하고 몸통째로 와랑와랑 흔들어대면서 갑자기 버럭 소리치듯이 말하였다.
“동무는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져야 한다고. 동무는, 동무가 어느만큼이나 뜯어고쳐져야 하는지 , 아직은 모른다고.”
드디어 김석조는 힘껏 소리쳤다.
“동무, 동무는 뒤로 가. 후방으로 들어가라고. 들어가야 해. 알았어?”
“응,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비로소 김정현도 그 순간 울음을 뚝 그쳤다. 이제야 어느 정도나마 진짜로 기별이 가닿는지 갑자기 그 무슨 공포감에 휘어감기듯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그러고는 그 노상 나불거리던 말투부터 가셔졌다. 그는 마치 이 순간을 고비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마냥 갑자기 달라지고 있었다. 의젓하고 점잖아졌고, 말을 탈 줄 아니까 기마병 쪽으로 가겠노라고 짤막하게 한마디 했을 뿐(나나 김석조도 물론 그렇게 권하였다) 그 밖에 그는 한마디도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몇 번 거푸 기적 소리가 났다. 마침내 기관차가 와 닿는 소리였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집합” 소리가 울리고, 갑자기 역 앞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역사 쪽으로 향하였다.
열시에서 30분이나 지나서야 우리는 대강 전원 화찻간에 올라탔고, 떠날 시간이 임박해서야 김정현은 찻간에서 내렸다. 그러나 드디어 기차가 떠나고 금방 속도를 내기 시작했을 때, 통째로 열린 화찻간 문밖으로 같이 뛰면서 김정현은 뭐라뭐라 소리를 질렀는데, 아아, 모르긴 모르되 그것은 그로서는 재래적 기준에서의 마지막 울음이고 마지막으로 소리치는 소리나 아니었을까.
그 뒤, 이때까지 나는 그의 소식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뒤에 다시 자세히 밝힐 기회가 있겠지만, 그때 나와 같이 울진까지 나왔던 김석조는 불과 한 달 남짓 뒤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끝으로, 갈승환씨와 무척 닮았던 내 그 이모부는 국군이 진격해 올라온 뒤 불과 이틀도 채 안 지나서 그 마을의 맹렬 우익 청년에 의해 피살당하였다. 그 마을의 소위 악질들만 네댓을 골라 어느 집 소 외양간 앞 말뚝에 두 손을 묶어 매고 차례차례 귀밑에다 권총을 쏘았다던가.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창작과비평사 1984);
『남녘사람 북녁사람』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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