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자에게 설교에 대해 질문하는 것 중에서 'teaching the Bible to people' 인가 아니면 'teaching people the Bible' 인가? 라는 질문이 있다. '성경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가?' ,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가?' 라는 질문은 언듯 같은 것 같지만 많은 차이가 있다.
성경을 사람들에게 가르친다는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들의 상황과 동떨어진 맥락속에서 설교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교는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교단의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일수록 이 경향은 더 강한 것 같다. 성경에 파묻혀 적실성이 없는 메시지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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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이 말하게 하라', '텍스트가 설교의 중심 되어야 한다.'는 말은 메시지 자체로는 분명하고 맞는 명제이지만, 그 속에 숨은 의미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존 스토트의 <현대교회와 설교>의 원래 제목은 'between Two Worlds'로 설교를 '두 세계 사이에 다리놓기'라고 설교를 정의한다.
'두 세계 사이에 다리 놓기' 라는 정의는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지만, 그 다리를 어떻게 놓느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존 스토트가 그렇게 명확하게 이야기 하지는 않지만 읽는 독자들은 '두 세계 사이의 다리놓기'라는 명제는 성경에서 출발해서 오늘날 우리의 문화까지 가는 한 방향으로의 다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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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 '성경본문이 말하게 하라'는 등의 명제를 읽을 때도 동일하다. 성경으로 출발해서 오늘날 현실의 문제까지 오는 한 방향으로의 다리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의 세계와 오늘날의 문화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성경을 통해 문화에 대한 이해가 더 커지고, 문화를 통해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으로 가야 한다.
팀 켈러는 이 과정을 '해석학적 나선형'(hermeneutical spiral)이라고 표현한다. D.A 카슨은 <성경해석과 교회>에서 "당신은 성경 본문과 당신의 문화 상황 사이를 왔다갔다 해야 한다. 그래서 본문이 당신의 이해를 교정하게 해야 한다. 즉, 당신 자신의 지평선과 본문 이해의 지평선을 합해야 한다. 이후에 반드시 진리에 대한 당신의 이해와 당신이 도달하려는 사람들의 이해 사이에 있는 간격을 연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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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슨은 두 개의 나선과 세 개의 지평선이 있다고 정의한다. 여기서 세개의 지평이란 첫째, 성경 본문의 지평, 둘째, 설교자 자신의 지평, 셋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지평이다. 먼저 성경본문과 문화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성경본문의 지평과 설교자 자신의 지평을 하나로 한 다음에, 현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의 지평 즉 문화 내러티브 속에서 복음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청중으로 건너오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해석학적 나선형구조를 띄면서 지속적으로 성경과 문화, 문화와 성경을 오고가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경 본문안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FCF즉 인간의 한계의 상황이다. 세상은 변하고 시대는 바뀌지만 인간의 본성을 바뀌지 않는다. 성경 속에 있는 인간안에 있는 타락한 본성의 무엇이 성경 본문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분석하고, 그 핵심적 뿌리를 오늘날 문화에서는 동일한 본성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지를 연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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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성경으로 시작된 인간 본성의 어떤 문제가, 성경 안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표출되었는지를 알고, 그 메시지를 가지고 오늘날 문화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일반서적들,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설교의 대지가 미리 나와 있어야 한다. 대충이라도 본문 속에서 전달해야 하는 아이디어들이 떠오르면, 본문을 계속 묵상하면서 오늘날 현실에서의 책과 드라마. 자료등을 계속 찾아서 본문을 왔다갔다 해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 안에 있는 성경과 다른 문화내러티브의 생각들을 평가하고 긍정하고 도전해줄수 있어야 삶의 현실에서 회개가 일어날 수 있다. 바울이 송사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면 오늘날 법정에서 송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정도가 아니라 그 송사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오늘날 그 본성이 어떤 형식으로 드러나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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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설교의 주해와 설교의 전달이라는 두 가지 과정으로 설교를 나누는 것 자체가 청중들에게 더 들리지 못하게 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주해와 전달은 나눠질 수 없는 두 세계의 다리를 왔다갔다하면서 상승형 나선형으로 점점 더 커져야 하는 것 같다.
사사기의 구조가 '하강형 나선형'으로 점점 사사들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의 형편과 상황이 좋지 않아지는 것과 반대로 '상승형 나선형'구조로 설교와 문화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왔다갔다하는 과정을 통해 성경이 문화를 또 문화가 설교를 이해하는 것으로 점점 더 문화에 대한 이해도 넓어지고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도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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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주해의 과정을 잘 거치고 난 후에 다시 전달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공식을 너무 완벽한 틀로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설교의 방식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해야 하는 것 같다. 오늘날 교회는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그렇다면 결국 기존의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설교가 등장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CTCKorea를 섬기면서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젊은 목회자들을 만날 때가종종있다. 개척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늘 한결같이 하는 말은 '그냥 마음대로 새로운 교회를 시도해보라'는 이야기를 종종한다. 기존의 교회의 방식대로하면 지금처럼 될 수도 있다. 개척의 모델을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은사를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모험해보라 권유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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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쩌면 설교의 영역에서만은 모험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설교학 시간에 배우는 것은 설교의 기본을 배운 것이고 그 위에 자신의 설교학을 올려야 한다. 자신의 설교철학을 찾지 못하면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만의 반복이기에 독특성이 없는 설교를 할 수도 있는 것 같다. 불경스러운 표현일지 모르지만, 많은 상품들 속에서 우리 상품을 사람들이 찾아야 한다면 단순한 유익성만이 아니라 독특성이 필요하다.
인터넷만쳐도 수많은 설교들이 가득하다. 유명한 목회자들의 설교뿐 아니라 각종 신학교 교수님들의 설교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교회에서 내가 하는 설교를 굳이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설교란 나의 청중들, 즉 우리 교회 사람들의 상황과 정황 속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여야 한다. 모든 청중들을 상대로한 보편적 메시지가 아니다. 이 정황의 지평은 단순히 심방을 하면서 얻는 정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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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방과 소그룹을 통해 교인들로부터 얻는 정보는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성경 본문에 나타난 인간의 한계 상황과 오늘 청중들의 한계상황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뒷배경에 있는 문화내러티브의 영향을 들어내줄 수 있어야 한다. 그후에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리스도가 등장할 때 우리는 주인이 바뀌는 복음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설교는 일주일의 준비로는 부족하다. 설교를 위해서는 좀 더 계획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시리즈 설교를 할 때는 미리 연구가 필요하고 책과 자료들을 많이 쌓아둔 상태에서 본문과 문화를 오고가는 시간들을 가져야 하는 것 같다. 옥한흠 목사님은 20시간 이상 설교 준비에 힘을 쏟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마도 대형교회 담임목사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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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도 몇 번의 설교를 해야 하는 목회자의 상황에서 그런 방식은 어렵다. 좀 더 효율적이면서도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설교를 할 수 있도록 좀 더 심플하면서도 효율적인 시간관리와 설교준비가 필요한 것 같다. 설교는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이지만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오고가면서 서로의 지평이 넓어지는 과정이어야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더 잘 이해되는 설교가 될 수 있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