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직접 수리를 지시한 향교
혜경궁의 회갑연보다 몇 해 앞서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 묘소를 옛 수원도호부 뒷산으로 옮기고 고을을 팔달산 아래로 이전시켰다. 신도시 수원은 이름을 화성으로 고치고 정 2품 관청인 부로 승격되었다. 고을에는 새로 성곽을 쌓고 성내에는 왕이 머물 행궁을 지었다. 고을을 이전하면서 옛 도호부 시절에 지었던 관청 건물을 옮겨 지었는데, 향교 역시 팔달산 남녘 자리에 옮겨 세웠다.
향교 이전공사는 서둘러 이루어진 데다 헌 자재를 재사용한 탓에 누추한 모습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향교는 전국 300곳이 넘는 군현 마다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시설이었다. 향교에는 공자와 4대 제자에게 제사 지내는 대성전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 외에 여러 부속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향교 건물을 짓고 이를 관리하는 일은 전적으로 고을 수령의 책무였다. 고을 재정 형편이 넉넉하면 유능한 장인을 부르고 좋은 재목으로 집을 번듯하게 지을 수 있었지만, 영세한 고을에서는 겨우 형태를 갖추기에 급급했다. 도호부 시절 수원향교도 볼만한 형태는 아니었던 듯하였다. 왕이 수리를 지시하자 마침 행궁을 짓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와 있던 목수들이 수원향교를 다시 짓는 공사에 동원되었다.
목수 책임자인 목수변수는 정복룡(丁福龍)이었다. 그는 내수사 소속 목수로서 정조 13년(1789)에 사도세자 묘소를 옮기는 공사에서 책임자로 일했고, 화성축성 과정에서는 팔달문과 행궁 내 낙남헌을 짓는 일의 책임자였다. 몇 해 뒤에는 창덕궁 인정전을 짓는 공사에도 참여한 그 당시 손꼽히는 궁궐 목수였다.
향교를 다시 짓는 공사는 정조 19년(1795) 5월에 시작해 8월에 마쳤다. 기존의 대성전을 철거하고 터를 조금 넓혀 새 대성전을 짓고 그 아래에 동무와 서무도 지었다. 그러나 명륜당과 동·서재는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제사 지내는 시설만 다시 짓고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은 남겨둔 셈인데, 일을 크게 벌이지 않으려는 뜻으로 짐작된다.
행궁 못지않은 격식을 갖추다
새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넓은 내부 면적을 갖추었다. 이를 위해 고주를 앞뒤에 세우고 일곱 개 도리로 지붕을 짠 2고주 7량의 번듯한 구조를 취했다. 모든 부재는 반듯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으며 세부는 18세기 말의 성숙한 기술이 충실하게 반영되었다. 기둥 위에 짜인 익공식 공포는 행궁인 낙남헌과 유사한 방식이고 초각도 닮았다. 같은 목수변수의 솜씨가 발휘되면서 행궁 못지않은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대성전 실내 바닥을 덮은 전돌이다. 조선시대 사당 건물은 초기에는 바닥을 전돌로 까는 방식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전돌은 구하기도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시간이 가면서 전돌 바닥 대신에 마루를 설치 하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마룻바닥은 실내를 정결하게 유지하는 이점도 따랐다. 조선 후기에 들면 많은 향교 대성전의 바닥이 마루로 덮였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에 관한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17세기 초 안동지방 읍지인 《영가지》를 보면, 전에 안동향교 대성전의 바닥을 마루로 고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예에 어긋나기 때문에 마루를 철거하고 다시 전돌로 바꾸었다는 기사가 있다. 현실 여건 탓에 잘 지켜지지 않았지만 사당의 실내 바닥은 전돌로 덮어야 예에 맞는다는 믿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향교 대성전의 실내 바닥은 같은 시기에 널리 쓰던 마루가 아니라 전돌로 바닥을 깔아 격식을 갖추었다.
현존하는 향교 건물 가운데는 강릉향교와 나주향교, 장수향교, 영천향교 대성전이 일찍부터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최근 들어 향교에 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몇 군데 대성전이 추가로 지정되었는데, 수원향교 대성전도 2020년 보물의 반열에 올랐다.
글, 사진. 김동욱(경기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22-4월 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