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정념(情念)
우리는 감정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고통을 주는 이 감정이 정념이다. 괴로움, 두려움, 미움, 질투, 욕망, 쾌락 등이 다 정념이다. 이 정념을 어떻게 다스릴까를 탐구한 철학이 스토아 철학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제논(Zenon)이 내세운 사상이다. 제논은 이성으로써 이 정념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어떤 원리가 있고 그것을 파악하는 힘이 이성이라는 것이다. 제논은 우주는 로고스 즉 이성이라는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이 있고 이것은 곧 신의 섭리다. 그러니 인간은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이성의 질서에 의하여 정념에서 벗어난 상태를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한다. 곧 정념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파테이아다. 정념에 좌우되지 말고 이성의 명령에 따라 산다면 아파테이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안락함이나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주는 욕망과 고통에 빠지므로 금욕적인 삶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우주의 질서인 이성을 따르는 삶이 제논이 추구한 행복한 삶이다.
이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로는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은 클레안테스,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한 파나이티오스 등이 있고,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키케로, 노예 출신의 에픽테토스, 로마 오현제 중 한 사람인 황제 아우렐리우스 등이 유명하다.
에픽테토스는 “인간은 벌어진 일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하였다. 참으로 수긍이 가는 말이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외부에서 온 어떤 일 그것 때문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생각이 만들어내는 온갖 허상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해서 미움과 질투, 좋고 나쁨, 탐냄과 욕망 등 가지가지 생각을 거기에 덧붙이는 것이다. 새끼 토막을 새끼 토막으로 보면 되는 것을 거기에 붉은색, 푸른색을 칠하여 뱀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가 만들어 내는 허깨비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다. 이 에픽테토스의 말은 불교의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가르침과 일맥 통한다. 우리에게 날아온 첫 번째 화살을 맞고 당하면 되는데, 거기다가 내가 만든 두 번째 화살 즉 누가 이 화살을 쏘았을까, 화살에 독이 묻어 있으면 어찌하나, 염증을 크게 일으키면 어쩌나 등의 내가 붙인 허상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좋다고 보고 나쁘다고 보는 분별심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러면 분별 받지 않는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면 된다.
서산대사는 남원 고을을 지나다가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한다.서산대사는 낮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은 후에 이런 게송을 읊었다.
발백비심백髮白非心白 머리카락은 희어져도 마음은 세지 않는다고
고인증누설古人曾漏泄 옛 사람이 일찍이 말했다네.
금청일성계今聽一聲鷄 닭 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장부의 할 일 다 마쳤도다.
머리카락은 우리의 겉모습이다. 겉모습은 나이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근본은 젊고 늙고가 따로 없다. 낮닭 우는 소리에 어찌 좋고 나쁨이 그 속에 있겠는가? 그 속에 분별심이 있을 리 없다. 이 흔들리지 않는 마음 곧 분별하지 않는 본래 마음을 그 소리에서 본 것이다. 좋고 나쁘다는 분별심만 없으면 마음은 고요해지는 것이다. 그 마음을 깨달았으니 장부의 일을 다 마친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편안한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잠을 자며 청빈한 삶을 실천한 스토아학파 철학자다. 그는 불치병, 자식의 죽음 등 견디기 힘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일어나는 일이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항상 기쁘게 맞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의 건강에 이로우며 우주 자체를 행복과 선행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명상록에 나오는 — 삶의 지침이 되는 몇 구절을 인용한다.
머지않아 당신의 육체는 앙상한 뼈만 남아 끝내는 한 줌의 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남는 것이라곤 이름뿐, 아니 그 이름조차도 금세 사라질 것이다. 인간들이 인생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모두 공허하고 헛된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를 물어뜯는 강아지나, 싸웠다가 금방 웃고 또 금방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다.
종말이 소멸이거나 혹은 다른 상태로의 이동이라 해도 상관없다. 당신은 그저 평온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된다. 자신의 허약한 육체와 호흡의 한계를 넘어선 무엇이든 당신의 것이 아니며, 또한 당신의 능력에 속하는 것도 아님을 기억하라.
인간이여, 당신은 이 큰 세상의 한 시민으로 살아왔다. 그렇다면 그 기간이 5년 동안이든 100년 동안이든 당신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우주의 원칙에 맞는 일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을 이 세상에서 몰아내는 자가 폭군이나 부정한 재판관이 아니라 당신을 이곳에 데려온 자연이라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감독이 배우를 채용했다가 무대에서 떠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5막 중 3막까지만 연출해도 하나의 완성된 연극이다. 왜냐하면 언제 연극을 끝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는 일찍이 이 연극을 구성했다가 지금은 중단시키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연극의 구성이나 원료에 대해 책임이 없다. 따라서 흡족한 마음으로 떠나가라. 당신을 해고시킨 자도 흡족해할 것이다.
첫댓글 정말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이 화살만 맞지 않아도 한 소식 얻은 듯이 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