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들 -가수 나훈아 등 8명
(①내가 만난 가수 나훈아) (1947- ) 부산 초량동 출생, 본명은 최홍기. 1975년 군대 시절 만났다. 그는 공군 병장, 나는 육군 상병이지만 나이 차이가 난다. 휴가 때 전국 여행에 나섰다. 동대구역에서 용산행 군용열차를 기다리면서 그를 만났다. 한 무리의 병사 틈새서 안면 있는 얼굴이 있다. 최홍기 병장? 군에서 주간 신문을 만드는 기자의 본성이 작용한다. 인솔 장교에게 최 병장과 인터뷰를 요청하니 바로 오케이. K-2 문화선전대 공연 후 서울로 가는 길이다. 4시간 단독 인터뷰하고 호남선을 타기 위해 회덕에서 헤어졌다. 어릴 적 부산 생활, 군 생활의 애환 등 같은 전우로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준비해간 삶은 계란 스무 개도 금방 동이 났다. 그때 받은 친필 사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최홍기, 단결 1975. 12. 5 군용열차에서>
(②내가 만난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 (1945- )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났으나 줄곧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고, 부산 수산대 중퇴. 1971년 국제신문 기자로 출발하여 1980년 월간조선 기자, 편집장이 된다. 작고한 김동길 교수와 함께 보수 논객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 그랜드 호텔에서 만났다. 모 단체의 특강 행사 진행을 맡아 그와 동행하게 되었다. 조선일보 관련 내용을 얘기하면서 내가 한 일을 소개한다. 큰 물줄기 두 개를 내가 바꾼 일이다. 하나는 오피니언 면에 등장하는 ‘외부 필자의 견해는....’식의 책임회피 문구를 없애고, 부음란을 가 나 다 순으로 개선토록 건의했는데 모두 관철되었다. 그는 놀라면서 “조선일보에 한자 병행도 좀 건의해 달라”고 내게 부탁하기도 했다.
(③내가 만난 태완선 경제부총리) (1915-1988) 경남 하동 출생으로 73세로 타계. 테완선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무슨 큰 인연이 있을까만 잠시 스치는 이야기를 하려 함이다. 그를 만난 것은 1970년대 후반으로 기억된다. 그룹 임원 골프대회가 경주 보문단지에서 열렸다. 그때 투숙한 곳이 보문호 옆 현대호텔이다. 총무부에 소속된 나는 숙소 점검 등 여러 준비로 현대호텔에 들렀다. 승강기에 오르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태완선 경제부총리, 그는 좀 특이한 얼굴이어서 쉽게 알 수 있다. 아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부총리님 반갑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반겨 인사한다. 그의 풍모가 돋보였다.
(④내가 만난 김상협 고려대 총장) (1920-1995) 김상협 전 고려대 총장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든 축일 터이다. 전북 부안 태생, 작고한 지가 벌써 30년이다. 고대 출신이 아니어서 큰 인연은 없고 그냥 얘기 한 번 나눈 것뿐이다. 아마도 1970년대 후반으로 기억된다. 임원 골프대회가 열리는 경산 CC를 찾았다. 임원들이 필드에 나간 틈을 이용하여 망중한을 즐긴다. 그때 눈에 들어온 인물 김상협 총장이다. 얼굴이 좀 특이하여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인사성 밝은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반갑게 인사했더니 오랜 지기처럼 반긴다. 아마도 고대 출신 제자라 여긴 것 같았다. 대구의 법조계 제자들이 스승을 초대한 자리라고 했다.
(⑤내가 만난 김동길 연세대 교수) (1928-2022) 평남 맹산 태생이다. 내가 대학 다니던 1970년대엔 김동길 교수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었다. 대학생들은 우상처럼 따랐다. 당시 신문 기사가 생각난다. 그의 강의를 신청한 학생이 천명을 넘었다. 수용할 공간이 없어 강당을 이용했고, 출석부가 열권이 넘었다고 한다. 세계 기록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그런 하늘 같은 교수를 광주 전남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특강 차 내려온 그는 유독 성씨를 좋아한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보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연구한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사육신 성삼문이라고 수차례 강조한다. 강연 후 질문했을 때 내 옆자리에는 충북대생 일가 여학생이 있어 더 큰 칭찬을 받았다. 떠날 때 여러 얘기 나누며 교문 밖까지 배웅한 기억이 난다.
(⑥내가 만난 김부겸 총리) (1958- )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대구중, 경북고, 서울대 졸업. 민주당 당적을 가져도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경기도서 16,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후 적지라 할 수 있는 대구에서 출마하였다. 20대 국회의원(2016-2020)에 당선되었으나 다음은 패배하였다. 그가 21대 국회의원 출마 직전 제주도 가면서 대구공항 2층에서 만났다. 먼저 내 소개를 한 후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구의 민심, 특히 지도층에 접근하는 방법 등을 얘기한다. 며칠 후 동아일보 인터뷰가 실렸는데 내 말이 그대로 올라 놀랐다. 김 총리는 경기도 양평에, 부친은 대구에 살면서 가끔 파크골프장에 나와 몇 차례 라운딩한 적이 있다.
(⑦내가 만난 성병욱 중앙일보 주필) (1940- ) 부모 고향은 상주지만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를 나와 중앙일보 정치부장, 주필을 지냈다. 그 후 세종대 언론홍보대학원장을 지낸 교육자이기도 하다. 내가 대기업에 몸담은 1970년대 후반에 상장회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였고, 신문에서 주가는 작은 쪽지에 불과하였다. 그런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관리상무 (연극인 이순재의 형) 는 엄청난 지령(?)을 내린다. 대기업이라고는 하지만 주가 시세표에 오르기는 너무도 힘들어 보였다. 그런 공간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도록 출장을 명한다. 그때 중앙일보서 만난 성병욱 정치부장, 항렬이 같아 접근의 디딤돌로 삼았다. 책상 위에는 전화기 4대가 놓여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그의 협조로 우리 회사 주가 시세가 신문에 오를 수 있음을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⑧내가 만난 변용식 TV조선 대표) (1949- )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를 나왔다.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 경제부장, 대표이사 전무, TV 조선 대표를 지냈다. 그를 만난 것도 중앙일보 성병욱 주필과 비슷한 시기이다. 상무의 제안으로 우리 회사 주식 시세를 신문에 넣기 위해 조선일보에 들렀다. 요즘 생각하면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때 증권 담당 경제부 기자가 바로 변용식이다. 대구서 올라온 풋내기를 따뜻하게 대해줘 무척 고마웠다. 다음 시세표 조정 때 고려하겠다는 답을 들었는데 약속이 지켜져 고마움이 컸다. 그 후 승진 때면 축전을 보냈다. 서울 출장길에 점심 식사를 대접받은 적이 있으며 지금은 방일영 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첫댓글 좋은 추억 간직 하셨네요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