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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만찬으로의 초대] (12) 미사에서의 행렬
하느님 도성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미사 거행 안에는 네 번의 행렬이 있다. 사제가 봉사자들과 함께 회중을 가로 질러 제대를 향해 가는 입당 행렬, 말씀 전례에서 복음 선포를 위해 「복음집」을 들고 제대에서 독서대로 가는 행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예물을 제대에 가져가는 행렬, 영성체하러 나아가는 행렬이 그것이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4항 참조)
각 행렬에는 노래가 따르는데, 입당 노래, 복음 환호송, 봉헌 노래, 영성체 노래가 이에 해당한다. 제대를 중심으로 배치된 다양한 전례 공간들은 이러한 예식 행위와 행렬의 움직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된다.
입당 행렬
“교우들이 모인 다음, 사제와 봉사자들은 거룩한 옷을 입고… 제대를 향해 나아간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120항)
미사의 입당 행렬은 ‘백성이 모인 다음’ 시작한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미사의 시작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 소집된 공동체를 전례 거행의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처럼 이 세상에 영원한 거처가 없음을 깨닫고 하늘 본향을 갈망하며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이다.(히브 11,8 이하 참조)
행렬은 이 순례하는 백성으로서 교회의 모습과 부름 받은 존재로서 걸어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상기시켜 준다. 교회는 주일마다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며 마지막 ‘주님의 날’, 영원한 하느님의 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감사 기도 제3양식 안에서도 잘 나타난다.
“아버지께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만물을 살리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백성을 끊임없이 모으시어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깨끗한 제물을 드리게 하시나이다.”(「로마 미사 경본」 621쪽)
입당 행렬은 그날 전례의 성격을 나타내는 여러 표지들과 함께 거행되는 신비를 미리 보여준다.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와 같은 중요한 거행에서 입당 행렬은 성대한 방식으로 할 수 있다. 향을 피운 향로와 십자가 그리고 불 켜진 초를 들고 가는 복사들을 차례로 앞세우고 다른 봉사자들과 사제가 그 뒤를 따른다. 이때 신자들은 행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입당 노래를 부름으로써 사제와 결합되어 거룩한 제사가 봉헌될 제대를 향하여 함께 나아간다. 경우에 따라서 부제나 독서자가 「복음집」을 조금 위로 올려 들고 사제 앞에 서서 행렬한다.
복음집 행렬
복음 봉독은 말씀 전례의 정점이다. 동방과 서방의 전례 전통에서는 그리스도의 상징인 「복음집」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특별한 공경을 표현하였다. 특히 성대한 미사 거행에서 「복음집」을 사용함으로써 복음 봉독에 가장 큰 경의를 드릴 수 있다. 곧 복음 선포 전에 촛불과 향로를 앞세우고 다른 공경의 표지와 함께 복음집 행렬을 성대하게 한다.
“이 행렬은 그리스도의 오심, 곧 당신 이름으로 교회에 부르신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려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복음집」 서문 12쪽) 그리고 이 행렬 동안 신자들은 복음 환호송을 노래함으로써 “복음 선포에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실 주님을 환영하고 찬양하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62항)
따라서 이 행렬은 단순히 독서대를 향한 이동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나누어주실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이다. 이때 신자들은 다함께 일어서서 기쁨의 환호를 노래하며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한다.
봉헌 행렬(예물 준비 행렬)
미사 거행의 세 번째 행렬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거행될 중심 장소인 제대를 향해 있다. 이 행렬에서 신자들이 제대에 가져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예물인 빵과 포도주만이 아니다. 곧 그리스도의 봉헌과 결합하게 될 우리 자신도 제대로 가져가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은 예물 준비의 이 행렬이 지닌 가치와 영적인 의미를 밝혀준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그 머리와 함께 봉헌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신비체의 지체들의 제사이기도 하다.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등은 그리스도의 그것들과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봉헌과 결합되며,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1368항)
영성체 행렬
미사에서의 행렬은 영성체를 위해 나아가는 행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행렬은 성찬의 잔치에 참여하는 이중적 차원, 곧 공동체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을 표현한다. 공동체적 차원은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해 함께 걸으며 영적인 일치와 기쁨을 드러내는 노래를 부를 때 드러난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6항 참조)
개인적인 차원은 각 신자가 성체를 모시기 전에 합당한 공경을 표시하고 믿음의 표지로 ‘아멘’하고 응답할 때 나타난다.
[전례 생활] 교회의 기초를 놓은 두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이달의 같은 날에 교회가 성대하게 기념하는 위대한 두 성인이 있다. 교회에 신앙의 기초를 놓은 두 사도, 곧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요 첫 교황이 된 베드로 성인과, 이방인의 사도라 불린 바오로 성인이다.
교회의 두 기둥과도 같았던 이들은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시대의 중심지인 로마의 주보성인이 되었다.
오늘날 세상 곳곳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을 맞이하듯, 바티칸 대성전의 광장 양편에 세워진 두 사도의 커다란 성상은 교회의 역사에서 다른 방법으로 서로를 보완해 준 그들의 역할을 묵상하도록 초대한다.
한 손에 열쇠를 움켜쥐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반석’을 뜻하는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을 약속하시며 맡기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상징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8-19).
한편 바오로 사도의 손에 들린 칼은 주님의 사도로서 이방인의 세계에 복음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과 영적 투쟁을 상징한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1-13.17).
교회는 언제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모습 안에서 교회의 단일한 시작과 기초를 바라보았다.
축일의 역사
교회가 한날에 위대한 두 성인을 기념하는 이 축일의 기원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초세기의 성인 공경의 영향으로 4세기에 이미 로마에서 6월 29일에 두 성인의 축일을 지냈음을 알려 주는 옛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4세기의 한 순교록에 따르면, 이날 교황이 집전하는 전례는 두 성인의 순교와 밀접히 관련된 세 장소, 곧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과 로마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그리고 박해 시기에 한시적으로 두 사도의 유해를 안치하고 보존했던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의 카타콤바에서 거행되었다.
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성인의 명성과 함께 이 축일이 서방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면서 두 사도의 순교 기념은 하나의 거행 안에 결합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증언은 두 사도를 동일한 전례적 공경으로 기념해 온 교회의 오랜 전통을 보여 준다.
“이 두 사도들의 순교는 같은 날에 기념합니다. 이 두 분은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날에 순교했지만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가고 바오로가 뒤따랐습니다. 사도들의 피로 우리에게 거룩하게 된 이 축일을 경건히 지내고 그들의 신앙과 생활, 그들의 수고와 고난, 그리고 그들의 증거와 복음전파를 공경하도록 합시다”(「설교집」, 295,7-8).
이 축일의 중요성은 5-6세기의 전례문을 담고 있는 「베로나 성사집」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성사집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천상 탄일”(In natale Apostolorum Petri et Pauli)이라 명명된 이날의 미사를 위해 무려 스물여덟 개에 달하는 미사 전례문들을 소개하고 있다.
7-8세기를 거치면서 이날의 축일 거행에 조금씩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 날에 거행되었던 두 성인의 기념이 차츰 분리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날 두 대의 미사를 거행하고자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을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2세기에 이르러 교황은 6월 28일 저녁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전야 기도를 주례하고 다음 날인 29일 아침에 두 대의 미사(새벽 미사와 낮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6월 29일 저녁에 성 바오로 대성전으로 이동해 다시 전야 기도를 바치고 다음 날인 30일 아침에 또 한 대의 미사를 봉헌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에 따른 1970년 「로마 미사 경본」과 함께 이러한 구분이 폐지되었고, 하나의 축일로서 전야 미사와 낮 미사 두 대의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참된 회심을 통해 결합된 두 사도
평범하게 살 수도 있었을 두 사람을 무엇이 주님의 사도로 변모시켰을까? 그리고 삶의 배경이나 성장 과정, 성격과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달랐던 두 사도를 하나가 되게 하였을까?
베드로는 가파르나움의 어부 출신으로 단순하면서도 거칠고, 열정적이면서도 충동적이며, 자신감이 넘쳤지만 동시에 나약한 인간이었다. 바오로는 고상한 지성인으로서 유다인 가운데 유다인, 율법을 지키는 데에도 흠잡을 데 없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엘리트 코스를 정식으로 밟은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겪었던 회심의 과정도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단번에 환골탈태하는 회심의 꽃을 피웠다면,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여정 가운데 진정한 회심에 이르렀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달랐던 두 사람을 하나로 결합시켜 준 바탕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정적인 회심 사건이 있었다.
사실 베드로는 매우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첫 수난 예고를 듣고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하고 펄쩍 뛰었다.
그리고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하고 장담했을 때, 그것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고 자기에게 맡겨진 과업을 용감하고 당당하게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던 순간에도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루가 22,49)라고 말하며 나섰는지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가 구원받아야 할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마주하고 주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길에서였다. 베드로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의 길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또 참된 회심 없이 단순히 열정만으로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절망의 밤에 흘렸던 깊은 참회의 눈물은 주님의 자비로운 시선을 통해 주어진 은총의 선물이었다(루카 22,61-62 참조).
바오로 또한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신의 회심 사건을 회고하면서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주님께서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1코린 15,8-10).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한 참된 회심은 그들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님의 사도로 거듭나게 했던 결정적인 원동력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오직 그분의 사랑만이 모든 면에서 달랐던 두 인물을 하나로 결합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미사의 감사송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결국 같은 길을 걸었던 두 성인의 아름다운 결합을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
[거룩한 미사전례] 미사 준비
전례에 봉사하는 사목자와 봉사자들에게 길잡이가 될 내용을 다루어 본다. 독서자는 적어도 미사 시작 15분이나 30분 전에 손을 모으고 제대에 이르러 깊은 절을 하고 독서대에 올라간다. 이어서 그날 봉독 할 성경 독서가 제대로 펼쳐져 있는지 확인하고,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누구나 알아듣게”(「독서 목록 지침」 14항) 여러 차례 읽어본다. 하느님 말씀이 독서를 통하여 회중에게 올바로 전달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시편 담당자 또는 선창자(또는 성가대 지휘자)는 독서자처럼 미사 시작 전에 독서대에서 화답송을 미리 노래(선창) 해 보거나 낭송해 본다. 보통 화답송은 노래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독서 목록 지침」 20항). 제대 봉사자들은 적어도 미사 시작 전에 제의실에 가서 먼저 손을 씻고 전례 봉사자들의 옷을 입는다. 미사 거행 형태에 따라 사제가 입는 거룩한 옷(장백의, 띠와 개두포, 영대, 제의)을 제의실에 준비해 놓는다. 거룩한 옷을 준비하는 순서는 ① 제의(주님 은총), ② 영대(불사불멸), ③ 띠(순결) ④ 장백의(어린양의 피로 깨끗이 씻은 마음) ⑤ 개두포(마귀의 공격을 막아내는 구원의 투구)이다. 제대 위에 촛대와 촛불을 켜 놓고(미사 시작 5분 전), 제대 위나 둘레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는 십자가가 놓여 있는지, 제대와 독서대 마이크가 켜져 있는지 확인한다. 제대 초는 제대 위나 곁에 적어도 2개, 특히 주일이나 의무 축일 미사에서는 4개나 6개, 또는 교구장 주교가 집전한다면 7개를 준비한다. 사제석 곁에는 「미사 경본」과 사제용 성가집을 놓아두고, 주수상에는 성작, 성체포, 성작 수건 그리고 성작 덮개, 포도주와 물이 든 주수병 그리고 필요하면 성합이나 신자 영성체를 위한 제병을 확인해 둔다. 사제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에는 하느님과 백성에게 정중하고 겸손하게 봉사해야 하므로(「미사 경본 총지침」 93항) 미사 준비를 위해 육체적, 영신적 준비뿐만 아니라 미사 시작 전 제대 위에 준비되어야 할 것(「독서집」, 「복음집」, 마이크 성능, 독서자 및 전례 봉사자, 미사 준비 상황)을 모두 직접 확인해야 한다.
신자는 적어도 미사 시작 15-30분 전에 성당에 앉아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지난 일에 대한 성찰, 그날 독서와 기도를 읽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시간을 갖는다.
[성모 동산의 꽃과 풀들] 성심을 상징하는 금낭화와 베고니아
- 금낭화.
여러해살이풀 금낭화. 꽃의 맵시가 조신하고 예쁜 것이 마치 여인네들이 치마 속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던 두루주머니와 비슷하다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며느리주머니’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그 모양이 심장과 비슷하게 생긴 데다 색깔마저 붉어서 마치 피를 흘리는 것 같다 하여 ‘피 흘리는 심장’(bleeding heart)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금낭화(錦囊花)란 곧 ‘비단주머니 꽃’이라는 뜻인데, 서양인의 눈에도 역시 아름다운 꽃으로 보였다. 그래서 금낭화의 학명(學名)은 디켄트라 스펙타빌리스(Dicentra Spectabilis)다. 여기서 dicentra는 그리스어로 ‘둘’을 가리키는 디스(dis)와 ‘꽃뿔’을 가리키는 켄트론(centron)의 합성어로, 이를테면 ‘꽃뿔이 두 개인 꽃’이라는 뜻이다. 금낭화에서 꽃뿔은 두 장의 겉꽃 끝부분이 위로 젖혀져 툭 튀어나온 부분을 말한다. 그 속은 비어 있거나 꿀샘이 들어 있다. 그리고 spectabilis는 장관(壯觀), 곧 ‘크게 구경거리가 될 만하거나 매우 보기 좋다’라는 뜻이다. 그만큼 금낭화는 아름다운 꽃이라고 하겠다.
금낭화는 활처럼 휜 20-30㎝ 정도 길이의 꽃대에 주머니 모양의 꽃이 많게는 20여 송이 줄지어 대롱대롱 매달려 핀다. 꽃송이 하나하나는 연한 자홍색의 심장 모양으로 사뭇 모양새가 현란해 보이지만, 그 꽃송이들이 조랑조랑 땅바닥을 향해 고개 숙인 모습은 마치 무엇에든 또는 언제든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금낭화의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리고 예전에 가톨릭교회의 식물학자들은 학자이기에 앞서 신실한 수도자였기에 이 꽃의 겸손한 자태에서 성모님의 면모를 보았다. 이 꽃을 보면서 사람을 위한 각별한 사랑과 온정을 보이시고, 심지어는 칼에 꿰찔린 듯 아파하신 그분의 마음을 연상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볼 때 금낭화는 성모님의 마음, 곧 ‘성모 성심’이었다.
- 베고니아.
이렇듯 독실한 신심에 바탕을 두고 식물계를 관찰하던 수도자 식물학자들의 시선에 성모 성심 또는 예수 성심으로 비친 꽃은 금낭화 말고 또 있었다. 그 중에는 베고니아도 있었다.
베고니아는 아메리카 원산으로, 열대와 아열대뿐 아니라 온대 지방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키우거나 번식시키기가 어렵지 않아서 예로부터 관상식물로 널리 재배되어 왔다. 또한 변이종(變異種)을 만들기도 그리 까다롭지 않아서 품종이 무려 적게는 800종에서 많게는 1700종을 헤아릴 정도로 다양하다.
그중에는 잎이 일그러진 심장 모양으로 생겼거나 꽃이 심장과 비슷하게 생긴 것도 있는데, 특히 Fuchsia Begonia(학명: Begonia fuchsioides Hook)라는 품종은 예수님의 마음 곧 예수 성심을 상징하고, Begonia fuch. rosea라는 품종은 성모님의 마음 곧 성모 성심을 상징한다고 여겨져 왔다.
성령을 상징하는, 그리고 성모님의 신발이라고도 불린 매발톱꽃
앞에서 살펴본 꽃들이 공통으로 한 가지를 의미하거나 상징한다면, 하나의 꽃이 여러 의미나 이름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매발톱꽃이 그런 꽃이다.
미나리아재비과 식물로 북반구 전 지역에 걸쳐서 볼 수 있는 이 꽃은 파란색(또는 보라색)과 노란색으로 대비되는 꽃의 색깔과 독특한 꽃모양이 아름다워 널리 사랑받는다. 아래로 피는 꽃 위로 솟은 긴 꽃뿔 다섯 개가 매의 발톱을 닮았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매발톱꽃’이라고 불리는데, 서양 사람들은 이 꽃을 보면서 매발톱이 아닌 비둘기를 연상했다. 그래서 이 꽃의 영어 이름은 ‘비둘기’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 콜룸바(columba)에서 유래한 콜럼바인(Columbine)이다. 이 이름에는 ‘작은 비둘기’ 또는 ‘비둘기처럼 생긴’이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이 꽃의 학명은 아퀼레과 불가리스(Aquilegua vulgaris)인데, 여기서 aquilegua는 라틴어로 ‘독수리’를 뜻하는 아퀼라(aquila)와 연관되는 말이다. 매발톱꽃이란 이름의 유래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한편으로는 이 꽃의 꽃뿔에서 독수리의 발톱을 연상했다고 할 수 있겠다.
- 매발톱꽃.
매발톱꽃은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른 상징성을 갖고서 인기를 누려 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이 꽃을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상징으로 여겼다. 켈트 문화권에서는 꿈과 환시의 세계와 이 세상을 이어 주는 정문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왕궁이나 귀족의 궁성에서 재주를 부리는 어릿광대의 모자라고 보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한데 모여 있는 다섯 마리 새(비둘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가 하면, 매발톱꽃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아래로 피는 꽃송이마다 꽃뿔 다섯 개가 솟아 있는 특이한 생김새 특성 때문에 나름의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지에 옹기종기 달린 꽃송이들에서 저마다 솟아오른 꽃뿔들을 보면서 한데 모여 앉은 비둘기들을 연상했고, 그래서 성령을 상징하는 꽃이라 여기게 되었다. 또 매발톱꽃 일곱 송이 묶음을 보면서는 성령의 일곱 은혜를 가리킨다고, 세 송이 묶음을 보면서는 신・망・애 삼덕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식물의 잎이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을 보면서는 그것이 삼위일체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또한 이 꽃의 색깔인 파란색(또는 보라색)은 수난과 참회를 나타내고, 노란색은 빛과 활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한편, 중세기의 미술 작품들을 보면, 이 꽃이 그리스도의 꽃으로, 곧 구원의 역사에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중에도 기쁘고 의미 있었던 예수님의 구세 활동의 표징으로서 종종 화폭에 등장한다. 가령 성모 영보, 그리스도의 강생, 주님 탄생,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의 아기 예수님 경배, 성가족의 이집트 피신,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등의 장면에 이 꽃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꽃이 배치되는 자리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화폭의 오른쪽 하단 귀퉁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물론 이 꽃이 더러는 예언자들, 성인들, 심지어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을 그린 그림들에도 등장하는데, 이 경우에는 아마도 신실함, 성령의 그느르심과 가호, 악을 거슬러 씨우는 수호자들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교회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저 옛날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가셨을 적에 발을 내디디신 자리에서 이 꽃이 솟아났다고 하여 ‘성모님의 신발(또는 슬리퍼)’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전례의 숲] 미사 예물과 미사 지향
미사에서 흘러나오는 효과를 자신의 지향대로 적용해 주기를 요청하며 사제에게 주는 예물을 “미사 예물”이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미사 때 예물을 봉헌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미사 거행에 필요한 빵과 포도주, 곧 미사의 예물과 구분되는 사랑의 예물도 바쳤습니다. 3세기에 문헌에 미사 봉헌 행렬 때 빵과 포도주, 꽃, 초, 기름, 과일을 제단으로 가지고 나와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사도전승).
사제는 미사에서 예물을 봉헌한 이들을 “지향 판”(dyptica, dipticus)을 보며 기억하였습니다. 사랑의 예물은 미사와 관련이 있고 미사의 의미를 드러내지만 성체 성혈로 변할 것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예물도 빵과 포도주에 결합되어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향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세기부터 서방교회에서는 미사에서 누룩 없는 빵을 쓰고, 봉헌 행렬 때 빵 대신 돈을 바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봉헌된 돈은 주로 성직자들의 생계 지원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다른 형태의 “미사 예물” 관습이 나타났습니다. 예물을 봉헌한 교우가 요청한 특정 지향에 따라 사제가 미사를 거행하는 관습입니다.
이러한 관습은 개인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널리 퍼졌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연옥 교리가 나타났습니다. 곧 성실한 신자라도 죽은 뒤에 연옥에서 정화될 필요가 있다는 사상입니다. 교우들은 교회의 기도로 연옥 영혼이 “불의 정화에서” 더 빨리 벗어날 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기도 가운데 미사가 가장 뛰어난 효과가 있었습니다.
미사가 지금 여기 있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신학자들은 “미사 열매”의 신학으로 풀이하였습니다. 미사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이 바치신 십자가 제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미사의 품위는 절대적이고 그 가치는 무한합니다. 그런데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는 그 “열매” 또는 은총을 얻습니다.
신학자들은 교회 전체를 위한 일반 은총, 사제 직무를 위한 특별 은총, 사제를 포함하여 신자가 받는 개인 은총을 구분합니다. 이 은총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해는 수많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비추지만 누구나 똑같이 햇빛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가리구 라그란제).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기도 안에서 다른 이에게 다른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곧 사제는 직무를 통하여 미사 효과가 교우가 요청한 사람에게 가도록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무렵에는 개인 미사가 많아져 교우들은 미사에 참석하지 않고도 쉽게 그 적용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인 지향은 교회의 일반 지향들을 밀어내거나 앞설 수 없어
이러한 과정에서 미사 예물에 법적 개념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예물과 미사의 관계가 희미해지고 예물은 쉽게 돈으로 대체되면서 미사 예물에 계약 성격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예물을 가리키기 위하여 고대 로마 군인들에게 생계를 위해 지급하던 “수당”(stipendium)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제에게 물질적인 예물을 주고, 그 대가로, 사제에게서 미사에서 나오는 영적인 예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물을 봉헌한 신자는 다른 사람은 빼놓고 자신이 미사의 특별한 효과를 독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습과 이해는 무엇보다 예물과 미사 참여에 거리가 생기게 하였고, 미사 자체보다 그 효과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현대 전례 개혁에서는 미사는 거행 자체가 중심이며, 영성체로 절정에 이르는 신자들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교우들은 이제 모든 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이며 모든 이의 구원을 향하여 열려 있음을 압니다. 또한 그들 역시 사제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그들의 지향들도 사제의 것처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교회법에 따라 사제는 미사 예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미사, 한 미사에 한 지향이 원칙이지만 예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구장 주교와 본당 주임은 주일과 의무 대축일에 한 미사는 예물 없이 자기 교우들을 위하여 거행해야 합니다(missa pro populo).
전통적으로 세상을 떠난 이의 영혼을 하느님 자비에 맡기는 지향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이를 위해서도 지향을 둘 수 있습니다. 성소를 위한 지향, 정의와 평화를 위한 지향을 비롯하여 정당하고 경건한 모든 요청은 지향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교우가 아닌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도 지향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사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기념제이고 언제나 공동체 전체의 행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향 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세례, 혼인, 서품, 수도 서약 같은 예식 미사, 여러 가지 기원 미사, 위령 미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미사에는 언제나 일반 지향이 있습니다. 항상 교회 전체를 위해, 산 이와 죽은 모든 이를 위하여 바치는 것입니다. 개인 지향은 이 일반적인 이 지향에 덧붙여지는 것입니다. 개인 지향은 교회의 일반 지향들을 밀어내거나 앞설 수 없습니다.
미사 예물은 사고파는 거래가 아냐
미사 예물은 근본으로는 교회의 봉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결합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사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시며 사람들에게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 이제 하느님은 예수님께 받은 제물을 은총으로 바꾸어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십니다. 이렇게 미사 예물을 바치며 미사에 더욱 깊게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우들은 자기가 요청한 지향에 따라 거행되는 미사에 영성체를 하면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미사 예물의 중요한 바탕은 교회 활동을 위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생계, 특히 연로한 이들, 교육받고 있는 이들, 선교사들을 위한 기부입니다. 한마디로 자발적인 사랑의 기부입니다. 이것이 미사 예물을 가리키는 말이 “수당”(stipendium)에서 “예물”(stips)로 바뀐 이유입니다. 미사 예물은 사고파는 거래가 아닙니다. 따라서 “미사 예물을 바쳤으니 이 미사는 내 것이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미사 예물은 당연히 의무가 아닙니다. 나아가 교구와 수도회들에서는 예물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교회법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예물 없이도 미사 지향을 요청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945조).
사제가 감사기도문을 바칠 때 요청받은 지향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원칙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교우들이 미사 지향을 청하면서 미사 때 이름을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에는 교회 전체의 미사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잘못, 또는 영적인 이익보다 인간적 만족을 앞세우려는 유혹이 숨어 있습니다. 요청한 지향에 따라 제사를 봉헌하고 그 효과를 적용하는 것은 이름을 부르는데 있지 않고 교회의 기도, 곧 사제의 직무에 있습니다. 이름을 말한다고 효과가 커지는 것도 아니고 안 부른다고 효과가 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교우들은 미사 지향을 청할 때 이름 부르는 것을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 자비와 교회의 기도에 의탁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또한 사랑의 예물은 사람에게 덜 드러날수록 하느님 눈에 더 귀하고 아름답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목의 이유로 미사를 시작할 때나 신자들의 기도에서 지향의 이름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도 미사의 근본 뜻이나 미사의 공동체 차원을 생각하여 매우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혼인, 서품, 수도서약과 같은 예식 미사, 서품이나 서약 기념일, 또는 회갑에 바치는 기원 미사, 위령 미사에서는 감사기도문과 그 미사 기도문들에 제시되거나 허용하는 대로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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