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토종 아웃도어 시장 이끈 '블랙야크' 사장
강태선
사업에 정나미 떨어질 때마다… 나는 히말라야로 갔다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조선일보 : 2012.03.17.
히말라야의 선물- 초오유 하산길에 만난 윤기 흐르던 그 짐승… 옆의 엄홍길이 말했다" 회사이름, 저거 어때"
벼랑끝, IMF의 기적- 실직자 山으로 몰리고 부인들도 와보니 좋아… 산에 불어온 패션바람 그뒤 매출 두배씩 뛰어
깔딱고개를 넘자 인수봉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갑자기 찾아온 꽃샘추위에 약하게 눈까지 내린 북한산에는 체감기온 영하 10도가 넘는 한파가 몰아쳤다. 강태선은 환하게 웃고 있지만 반대편에서 덜덜 떨고있는 기자들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1973년 2월1일
스물여섯 청년이 옷가게를 열었다. 종로5가 시장골목, 매장 2평에 공장이 10평이었다. 간판은 동진(東進)산악, 동쪽으로 가면 성공하겠다며 이모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가 잡은 터에서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바로 옆에 강영삼(작고)이 있었던 것이다. 변변한 장비가 없던 시절, ‘산꾼’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배낭과 텐트 짊어지고 산으로 갔다. 강영삼의 ‘영삼사’는 국내에 딱 하나뿐인 산악장비제조사였다. 그가 청년에게 권했다. “옷만 팔아서야…등산장비를 만들지 그래.”
#1993년 9월
네팔과 티베트 자치구 국경에 ‘터키석(石)의 여신(女神)’이란 산이 있다. 해발 8201m 초오유다. 1993년 강태선(姜太善·63)은 그곳 정상을 밟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인생은 갈림길에 있었다. ‘등산장비를 지킬 것이냐 아웃도어 의류로 바꿀 것이냐?’ 엄홍길과 하산하던 그의 눈앞에 블랙야크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억세지만 윤기 자르르 흐르는 야크의 털이 히말라야의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엄홍길이 말했다. “브랜드 이름으로…블랙야크도 좋겠는데요?”
#2012년 3월7일
강태선의 휴대폰으로 ‘딩동’ 문자가 왔다. 그가 껄껄 웃더니 말했다. “조인성이가 울었대요, 너무 감격해서.” 지난주 그는 배우 조인성, 한효주와 네팔에 갔다. CF 촬영장소가 해발 4820m나 됐다. “다른 회사들은 대개 뉴질랜드로 가요. 편하고 풍광도 좋으니까. 전 히말라야만 고집합니다. 거기가 진짜거든요. 이번에도 인성이가 싫다고 하는 거 억지로 끌고 갔죠. 고생 좀 했지만 눈물이 날 만큼 좋은 결과를 얻었지.”
◇국산 1호 '삼대배낭'
그는 지금은 호텔로 가득 찬 제주 중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화려한 풍광과 정반대였다. 아버지는 4·3사태에 연루돼 일찍 세상을 떴다. 세남매에게 남은 것은 가난이었다. 장학금이 없으면 공부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17년이나 자취를 했다.
―고교 졸업 후 상경했습니다.
"처음엔 제주농협에서 일했어요. 당시 농협은 금융이 아니라 농업지원, 공판업무를 주로 했습니다. 2년쯤 지나니 '내 일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학에 미련도 남았고요. 1971년 겨울 서울로 와 남대문에서 옷장사하던 이모집 신세를 졌어요. 워낙 바빠서 틈틈이 도와드린다는 게 2년이 넘었고 공부는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원래 고려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그러다 동진산악을 차렸죠.
"생산, 유통, 자재, 경리를 배웠으니 자신이 생기더군요. 처음엔 옷장사를 하려다 강영삼씨의 조언을 받아 등산장비도 만들었어요. 저는 디자인하고 제작은 미싱사가 하고. 당시엔 등산장비라는 게 아예 없었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장비를 개조한게 유일했습니다."
―처음 만든 게 배낭입니다.
"미군이 쓰던 배낭이 굉장히 불편했어요. 등판 부분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맞지 않아 1시간만 메면 어깨 근처 피부가 다 벗겨졌으니까요. 그 배낭을 해체해 다시 디자인을 하고 미싱사에게 '이대로 만들어달라'고 했지요. 그게 '삼대배낭'입니다. 양쪽에 호주머니가 달려서 붙인 이름인데 국산배낭 1호입니다."
―대박을 쳤습니까.
"20L, 25L, 30L, 38L, 네 종류를 만들었는데 제일 작은 게 800원, 제일 큰 게 1500원이었습니다. 써본 사람들은 좋다는데 잘 팔리진 않았어요. 공짜로 달라는 사람만 많았고요. 당시엔 아웃도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1년에 대목이 딱 한차례였거든요."
―그게 언젭니까.
"7월 20일부터 8월 15일까지 휴가철을 제외하면 배낭, 텐트, 코펠 같은 것은 팔리지가 않았어요. 한 달 팔아 1년을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여름엔 등산장비 만들고 겨울엔 청바지 팔았어요. 미국에서 우리나라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원조해준 것 중에 쓸만한 걸 골라서요."
―장비는 어떻게.
"배낭, 텐트, 우의, 침낭에 코펠, 버너까지 만들었습니다. 버너는 깡통을 망치로 두들겨 펴 모양을 만들고 삼발이를 붙인 뒤 연료통에 심지를 넣는 식이지요. 로프는 배에서 쓰는 걸 구해다 얇게 나눈 뒤 꼬아서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수준이 그때 그랬습니다."
―아웃도어란 용어가 생소한 시절이니 위기도 많았겠습니다.
"어음 때문에 결혼도 못할 뻔했는데요. 1975년 3월 16일에 장가들었는데 그해 1월에 받은 70만원짜리 어음이 부도난 겁니다. 도무지 자금을 회수할 수 없어 방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결혼 전날 제주로 내려가 결혼 다음날 아내를 두고 서울로 왔어요."
―신부가 놀랐겠습니다.
"집사람한테는 '정리하면 부르겠다'고 둘러댔습니다. 한참 지나니 아내가 울고불고해 결국 여인숙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주변 상인들이 '젊은 친구가 왜 그리 미련하냐'며 핀잔을 주더군요. 사람들 불러 결혼 피로연 한번 하면 돈이 모이지 않겠느냐고요."
―그렇군요.
"그 소릴 듣다 정말 머리가 '띵'하고 울렸어요. 아! 그 방법이 있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 거였죠. 근처 식당에 초대해 갈비탕 한 그릇씩 대접하니 음식값 빼고도 70만원이 모였습니다. 30만원으로 방 얻고 40만원은 자본금으로 보탰지요."
―전두환 전 대통령 때 곤욕을 치렀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민주화운동하다 끌려간 건 아니고요, 5·18사태 때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잖아요. 그게 산악장비업계엔 독약(毒藥) 같은 조치였습니다. 등산인구가 뚝 끊겼거든요. 종로5가의 신진산악, 유진산악 같은 유서깊은 가게들이 다 그때 문 닫았어요. 그런 업계가 전 대통령 때문에 다시 살아났으니 세상이 참 묘하지요."
―어떻게 살아났는데요.
"집권 후 통행금지를 해제했잖아요. 제가 그때 기획한 게 무박(無泊)등산이었어요. 동진산악이 운영하던 거봉산악회에서 월출산을 갔는데 그게 무박등산 1호였어요."
◇아웃도어 붐을 부른 금강산과 IMF
예전엔 산은 남자의 전유물이었다. 남자들은 집에서 입던 차림 그대로 비탈을 올랐다. 그런 산에 아주머니들이 몰려오면서 기이한 흐름이 일었다. 의상이 화려해지더니 곧바로 값비싼 의류를 걸치는 게 보편화됐다. 이제 산은 '패션의 경쟁장'으로 변했다.
―수지가 좋아졌겠습니다.
“최근 재벌들이 동네 빵집 하는 게 사회문제가 됐잖아요, 예전에도 그랬어요. 등산객 늘고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으로 붐이 일자 재벌들이 뛰어든 겁니다. 삼성 엑셀, 선경 레포츠(SK), 엘지 반도스포츠, 코오롱, 대우 하이파이브가 그 시절에 생겼습니다. 현대만 안 했지요. 다행히 재벌회사들이 사업을 접기도 하고 스포츠의류 쪽으로 방향을 돌렸지만 1992년에 또 위기가 왔습니다.”
―1992년에는 왜?
“국립공원에서의 야영·취사가 금지됐잖아요. 환경보호는 해야 되는 거지만 그 조치로 등산용품사의 90%가 망했습니다. 버너에 삼겹살 굽고 소주 한잔 하는게 관례였거든요. 그런데 코펠·버너·텐트·침낭 수요가 하루아침에 끊기니 견뎌낼 곳이 있었겠습니까. 저도 죽을 뻔했는데 소나타가 살려줬지요.”
―소나타라면 현대에서 만든 자동차?
“그해에 현대자동차 소나타공장이 준공됐어요. 직원이 3만2120명이란 게 지금도 기억납니다. 준공 기념선물로 침낭을 택했는데 이유가 있었어요. 울산공장 직원 대부분이 외지인들인데 독신자 아파트에서 빨래를 하겠어요? 침낭을 이불 대신 썼다는데 문제가 있었어요. 입찰이 8월 14일인데 9월 5일까지 납품하라는 겁니다. 3만2120개를.”
―그게 가능합니까.
“그 소릴 듣고 사장들이 다 빠져나갔어요. 저도 말이 안 된다 싶었지만 워낙 사정이 안 좋아 미련이 남더군요. ‘대금의 50%를 선불(先拂)로 주면 해보겠다’고 떠봤습니다. 일이 되려는지 당시 복지과장이 돈이 있었어요. 부산으로 발령받으면서 자기 울산 아파트 판 돈 1억5000만원을 제게 주더군요.”
―그날부터 밤샘작업을 했겠습니다.
“서울과 경기도의 눈에 보이는 업체마다 일을 맡겼지요. 다음날 그 과장에게서 가슴 철렁한 전화가 걸려왔어요. ‘중단하면 안 되겠느냐’는 거였습니다. 고 정세영 회장이 당시 현대차 사장이었는데 해외출장에서 돌아와 보고를 받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대요.”
―왜요?
“현대차가 파업을 많이 하잖아요. 정 회장이 ‘너희들 환장했냐? 야 이놈들아 데모하는데 이불까지 사주겠다는 거냐’며 길길이 뛰셨대요. 사장이 그러니 부하들이 견딜 재간이 없잖아요. 그런데 일이 묘하게 꼬였어요. 침낭 선물이 취소됐다는 걸 안 노조에서 ‘침낭 내놓으라’며 데모를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공장 준공선물은 다른 것을 주고 추석 때 현금을 지급해 그 돈으로 침낭을 사도록 하자는 절충안이 나왔습니다.”
―배가 점점 산으로 가는 느낌입니다.
“안 되겠다 싶어 제가 울산으로 갔어요. 노조위원장이 알고 보니 산 타는 제 후배였어요. ‘선배님 웬일이시냐’고 하기에 설명을 하고 ‘너희들 계속 데모하면 나 망한다’고 했지요. 결국 ‘침낭은 공장 준공식과 관계없이 지급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어요. 곡절이 있었지만 잘됐어요. 납품기일이 두 달이나 늘어났으니까요.”
―현대와 인연이 깊습니다.
“그 뒤에도 한 번 있었어요. 제가 정주영 회장께 정말 감사하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1998년 10월에 계동 사옥에서 금강산 관광 설명회가 열렸는데 그게 아웃도어산업 팽창의 계기가 됐거든요. 금강산 관광객 대부분이 실향민이잖아요. 며느리, 딸들이 따라오니 자연 옷에 신경 쓰게 되지요. 현대 측에서 ‘등산화는 꼭 신고 오라’고 하자 등산화 매출도 확 늘었어요. 관광선 4척에 매장을 설치했는데 굉장히 잘됐어요. 무박등산·금강산 관광·IMF가 다 아웃도어 붐으로 이어졌습니다.”
―IMF는 왜 그런가요.
“실직 남편이 갈 곳이라곤 산밖에 없잖아요. 남편 기 살려주겠다며 부인들도 동행했는데 한번 와보면 좋거든요, 산이. 북한산·도봉산 또 가고 싶고 그러다 보니 알록달록한 옷들 늘어나고. 2002년의 우리 아웃도어 업계 전체 매출이 4000억원입니다. 그게 2005년에 8000억이 되고 그 뒤 매년 더블(Double)이 됐지요.”
―부침(浮沈)을 심하게 겪으면 사업에 정나미가 떨어질 때도 있겠죠.
“히말라야 등정을 시작한 게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히말라야 등반은 대장(隊長)으로 참여한 것까지 포함해 스무번이 넘습니다.”
◇허영호·엄홍길·박영석·오은선…
초오유에 오르기 전까지 동진산악의 대표 브랜드는 ‘프로자이언트’였다. 야영·취 사금지로 곤욕을 치르던 강태선은 이제 사업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돌려야 했다. ‘장비(裝備) 전문업체’에서 패션브랜드로의 전환이었다.
―사명(社名) 바꾸는 게 어렵지요.
“처음엔 반대가 많았어요. CI업체에 아이디어를 말하니 ‘레드 야크(Red Yak)’로 하자더군요. ‘세상에 빨간 소가 어딨느냐’고 물으니 ‘소비자가 의심하는 것도 괜찮다’면서요.”
―레드야크도 그럴듯한데.
“제가 고집 부렸지요. 히말라야 가보니 전부 검은색이었다, 그냥 블랙야크로 가자고요. 브랜드 이름이 중요합니다. 국내의 한 업체는 나일론 이미지가 강해 부작용이 있고 어떤 브랜드는 똑같은 이름을 쓰는 곳이 많아 해외진출을 못하잖아요.”
―초오유에 엄홍길씨와 함께 갔는데 두 분이 친합니까.
“홍길이는 고등학생 때부터 알았지요. 그 친구 집이 망월사가 있는 원도봉산 두꺼비바위 근처입니다. 어머니가 등산객 상대로 막걸리장사를 했어요. 산 타려면 장비가 많이 필요한데 갈 때마다 들고 다닐 수 없잖아요. 홍길이에게 맡겼습니다. 우리도 쓰고 그 친구도 쓰게요.”
―그런데 그분이 왜 회사 모델이 아닌가요.
“사연이 있어요. 히말라야에 한 번 가면 최소 1억원이 있어야 돼요. 방송팀이 끼면 3억원이 훌쩍 넘고요. 홍길이가 히말라야 14좌에 도전하는데 당시 사정으론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6개 성공시키고 나머지는 파고다어학원의 고인정씨가 도왔지요. 지금은 밀레로 옮겼고요.”
―히말라야 등산 붐을 일으킨 원조가 고상돈씨지요.
“나이가 저보다 한살 윕니다. 고향이 같은 제주도고요. 제가 서울시 산악연맹 회장을 10년 했는데 자주 어울렸어요. 설악산·한라산·북한산에서 훈련할 때 찾아가기도 했고요. 소박하고 말 수도 없는 얌전한 분이었어요.”
―오은선의 히말라야 14좌 등반도 지원했지요.
“원래 오은선이 박영석 팀이었어요. 히말라야 등반 지원에는 사업상 위험이 있습니다. 사고가 나면 브랜드 이미지에 악영향을 주는 거예요. 박영석이 히말라야 등반 중에 대원 2명이 사망한 적이 있어요. 그 후 스폰서를 구하기 힘들어지자 괴로워하던 오은선이 절 찾아왔어요. 그때 세 가지 조건을 걸고 수락했습니다.”
―뭡니까, 그게.
“‘등반대장은 내가 한다, 정상 도전은 오은선만 한다, 대원은 한 명이되 베이스캠프 이상 오르지 않는다’고요.”
―비용을 줄이려는 거였나요.
“그것도 있었지만 사고 나면 안 되거든요. 원래 히말라야는 베이스캠프부터 1·2·3·4캠프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온 뒤 재등정하는 게 관례입니다. 오은선은 달랐어요. 그냥 치고 올라가는 알파인 스타일이거든요. 그 친구는 돌아온 적은 있어도 사고는 한 번도 낸 적 없습니다. 판단력도 좋고요.”
―그런데 왜 칸첸중가를 올랐느니 못 올랐느니 하는 논란이 일었나요.
“외국에선 가만히 있는데 우리나라만…. 유럽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만일 그랬다면 가만히 있겠어요. 히말라야 등반 검증이 보기보다 치밀합니다. 네팔 관광청 직원이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한 뒤 정상을 밟은 사람과 인터뷰를 합니다. 다시 카트만두로 가 우리 문광부 같은 관청의 공무원과 인터뷰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인증서가 나옵니다. 칸첸중가의 정상이 꽤 평평해요. 거기가 정상이지 그중에서도 꼭짓점을 밟아야 정상인가요?”
―그래도 없었던 것만은 못합니다.
“요즘 오은선이한테 그래요. 칸첸중가 다시 한 번 오르라고.”
―등산계도 말 많은 동네 같습니다. 같은 한국 산악인의 공을 시기하는가 하면 허영호는 제명되기도 했죠.
“진정한 산악인이죠. 똑똑하고요. 히말라야 도전사로 보면 1세대입니다. 돈으로 인한 오해가 있었는데 에베레스트 동북벽 도전에 실패하면서 다시 금전 문제가 불거졌어요. 그래서 제명까지 됐고요. 지금은 탐험가로 활동합니다. 기업체 강의도 하고요.”
강태선 사장이 우이동에 있는 블랙야크 매장에서 등산화 끈을 조이고 있다. 일요일이면 항상 산을 찾는다는 그의 배낭을 살펴보니 쓰레기를 줄이려 껍질 깎은 과일과 따뜻한 죽, 물통과 아이젠을 비롯한 각종 장비가 가득했다./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히말라얀 실크로드로!
아웃도어 회사를 매출순(順)으로 보면 노스페이스·코오롱이 1·2등이고 블랙야크와 K2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요즘 유명 아웃도어 의류는 학교에서 주먹 잘 휘두르는 일진들이 제일 먼저 빼앗아 입을 만큼 선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값도 무척 비싸다.
―유독 한 아웃도어 브랜드가 자주 언론에 오르내립니다.
“우리 패션 유행은 유학생들이 선도합니다. 노스페이스가 미국 브랜드니 그걸 입고 들어오면 국내에서 따라 하지요. 전 자부심이 있어요. 토종(土種) 브랜드의 간판이고 의류 진출이 늦었지만 더 기반이 튼튼하다고요. 진짜 산을 알고 장비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자랑입니까, 자부심입니까.
“허풍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찰 특공대 장비, 특전사(特戰司) 장비까지 ‘특’자(字)들어간 건 다 만듭니다. 그런 회사 있습니까? 전 직원들에게 말해요. ‘옷 대신 문화와 스토리를 만들라’고요. 2004년까지 업계 꼴찌였던 우리가 이만큼 올라온 게 다 그런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왜 아웃도어 회사에 산악인이 적을까요.
“초기에는 다 전문 산악인이 하다 넘어갔지요. 파타고니아를 비롯한 여러 회사가 그렇습니다. 산악인 출신이 하면 좋은 점이 있어요. 끈기가 다르거든요. 저도 1998년 중국에 진출한 뒤 10년을 고생했습니다.”
―지금은 흑자를 냅니까.
“첫 5년 동안 매년 강북의 아파트 한 채씩을, 다음 5년간은 강남 아파트 한 채씩을 갖다 바쳤다고 보면 됩니다. 사람·문화·상술(商術)을 몰랐으니까요. 일반 경영인이었으면 벌써 후퇴했을 겁니다. 전 버텼고 지금은 매장이 26개로 늘었습니다.”
―그럼 중국 원단을 많이 쓰겠네요.
“그렇진 않아요. 중국 원단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거든요. 국산이 40%, 베트남산이 35%, 중국산이 15%, 북한산이 10%입니다.”
―북한산이라면 개성공단?
“평양에서 직접 만듭니다. 1997년부터 거래해왔어요. 그 인연으로 묘향산도 두 번 가보고 백두산도 북한 쪽에서 올라가봤지요. 백두산은 북한 쪽이 훨씬 멋있습니다. 묘향산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아주 아름답습니다.”
―내년이 창립 40주년입니다.
“스스로 설정한 게 있어요. ‘히말라얀 실크로드’라고. 중국~몽골~중앙아시아 5개 공화국~러시아~동구를 거쳐 아웃도어산업의 본산(本山)인 이탈리아·독일·프랑스에 진출할 겁니다.”
―그런데 몽골에 비싼 의류나 등산화를 신을 사람이 있습니까.
“몽골은 자원대국입니다. 의외로 부자들이 많아요.”
―말이 나온 김에 묻겠는데 왜 그리 제품값이 비쌉니까. 항간에는 청계산 갈 사람들이 히말라야용 옷과 등산화를 신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명품은 하나의 꿈입니다. 자기만족을 느낄 수도 있지요. 시계·귀금속과 달리 그렇게 비싼 수준은 아닙니다.”
인터뷰 나흘 뒤인 11일 우이동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시내에서 가까운 구기동에서 하려던 계획이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이동으로 둔갑했다. 만반의 장비를 갖추고 나온 강태선이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깔딱고개까지는 가봐야지”라며 선등(先登)했다.
때 아닌 꽃샘추위가 찾아온 날이었다. 인수봉에서 내려온 강풍이 깔딱고개 위에선 기자 일행을 강타했다. 눈에선 눈물까지 났다. 강태선은 그 모습을 보고 “원래 추우면 눈물이 나는 법”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