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79신]쏟아진 책冊선물…즐거운 스트레스
‘오래된 전우戰友’ 육군병장 황형 보시게.
자네가 한 달 전쯤에 보내준 책이 도올 김용옥의 『동경대전 1-나는 코리안이다』(559쪽)『동경대전 2-우리가 하느님이다』(571쪽, 통나무 발간, 각권 29000원)이었지. 카톡으로 은근히 희망사항을 전하니 대번에 다음날 선물이 왔네. 그저 황감할 뿐이라고 하자 “My pleasure”라는 멋진 대구를 보냈지. 다시 한번 고맙네. 그나저나 도올 선생의 대작을 독파할 일이 꿈만 같네. 너무 읽고 싶은 책이어서 화들짝 기뻤으나 어느 세월에 곰씹어가며 다 읽는단 말인가? 속도, 진도가 안나가는 책이 이런 책이지. 아직은 중요한 기관의 대표로서 당당한 현역이므로, 낙향거사 친구에게 책 몇 권 사줄 가상한 마음과 경제적 여유가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더구나 그것이 또 자네의 즐거움이라니 말이야. 하하.
지난 2월초에도 아주 좋은 책선물을 해주었지. https://cafe.daum.net/jrsix/h8dk/945. 자네와 이름이 같은 손종섭 선생의 『옛 시정詩情을 찾아서 上』(698쪽)『옛 시정詩情을 찾아서 下』(730쪽, 김영사 출간, 각권 25000원)이 그것이었지. 어디 그뿐인가. 덤으로 보내준 『노화의 종말-하버드 의대 수명혁명 프로젝트』(624쪽, 부키 발간, 22000원), 『리더라면 정조처럼-숨겨진 리더십코드 5049』(김준혁 지음, 더봄 발간, 367쪽, 18000원), 『팩트풀니스Factfulness』(한스 로슬링 저, 김영사 발간, 473쪽, 19800원), 『엄마의 마지막 말들』(박준병 지음, 창비 발간, 16000원) 등은 또 어떠하고. 어쩌면 그렇게 내가 좋아할 책들만 골라 보냈는가. 이미 내 취향을 모두 파악한 것같아 기뻤네.
그런데 고백하지만 큰 문제에 봉착했네. 수불석권手不釋卷-한시도 손에서 떼놓지 않고 읽고, 보고 또 봐야 할 양서良書 중의 양서이건만 이 책들을 싸그리 독파할 마음과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걸세. 그게 은근히 스트레스이더군. 보물을 옆에 두고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마음의 갈등을 이해하겠나? 흐흐. 책 싫어하는 사람은 일년이 주어져도 불가능할 일일 터이나, 마음만 다잡으면 아무리 바빠도 한 달이면 다 읽고 머리 속에 정리를 해놓을 수 있으련만, 내 남은 생에 피가 되고 살이 될 엄청난 컨텐츠들이건만, 이게 만만치 않다는 말일세. 그래서 ‘즐거운 스트레스’라고 생각하네.
더구나 요즘은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농번기가 아닌가. 밭작물에 논농사까지 신경쓰다보니 하루가 짧네. 안해본 일들을 몸에 익히느라 심신이 고달프다네. 하하. 감나무농장 풀들을 깎느라 예초기를 이틀간 작동했더니 왼쪽 팔뚝이 아파 들 수가 없을 정도였으나 자고나니 말끔한 것을 보면 그래도 농사꾼 자식이고 체질인지도 모르겠네. 아무리 기계가 모를 심는다지만 심고 나면 군데군데 빠진 곳을 때워야 하네. 이른바 뗌방작업은 허리가 끊어질 일이지. 어쩌겠는가. 하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네. 굳이 수확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해야 할 일’이기에 하는 것이네. 밭에 풀이 우우우 솟아 묵정밭이 되는 것을 ‘죽어도’ 못보는 천상 농사꾼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더군.
이 아침 편지를 쓰는 까닭은, 자네가 보내준 양서들의 서머리summary랄까, 내용들이 대충 무엇인지, 왜 내가 그토록 읽고 싶어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나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한 때문이네. 그리고 이 고마운 은혜를 내가 직접 생산한 농산물(쌀이나 대봉감, 땅콩 등 밭작물)로 가을에 보답할 작정이라는 것도 얘기하고자 한 걸일세. 흐흐.
먼저 도올 선생이 그토록 극찬한 ‘동학東學의 성경聖經’이라고 할 수운 최제우 선생이 쓴 『동경대전』은 기독교의 『성경』, 불교의 『대장경』 등에 비견되는 한민족 사상의 정수精髓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네. 1, 2권의 부제副題 ‘나는 코리안이다’‘우리가 하느님이다’만 봐도 알 수가 있네. 맹목적 민족주의 관점이 결코 아닐세. 도올은 『노자老子』5000자를 고조선 사람이 지었다고 강변하지만 말이야. 편협되지 않은 한국의 철학자, 아니 국제석학이 필생의 작업 끝에 펴낸 길이 남을 역작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하네.
『옛 시정詩情을 찾아서』두 권은 한문학계의 원로였던 손종섭(1918-2017) 선생이 구순에 집대성하여 펼쳐 보인 우리 한시의 세계가 소담하게 담겨 있는 책이네. 번역에는 직역直譯과 의역意譯, 번안飜案과 재창작再創作이 있다고 하면, 손선생은 한시들을 당신이 아름다운 우리말로 멋들어지게 의역을 해놓았다네. 소리내어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나는 번역. 글자 그대로 직역을 하면 무슨 맛이 날 것인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네. 고려때의 문신 진화陳澕의 <雨餘庭院簇莓苔 人靜雙扉晝不開 碧砌落花深一村 東風吹去又吹來> 라는 ‘춘만春晩(늦은 봄)’이라는 한시를 이렇게 번역해놓았네. <비 오고 난 정원에는 이끼만 가득한데/인기척 없는 문은 낮에도 닫혀 있다//축대에 지는 꽃잎 한 치나 좋이 쌓인 것을/봄바람이 휘휩쓸어 불어갔다…불어왔다…> 어떠한가? 이렇게 살아 있게 번역하는 것은 가히 재창작이라고 할 걸세. 오직 시간만 강물처럼 남았을 노년에 심심찮게 한 편씩 읽어볼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엉뚱한’마음도 있다네.
다음에 『리더라면 정조처럼-숨겨진 리더십코드 5049』는 조선 27명 임금중 ‘으뜸 천재’인 정조正祖대왕의 리더십을 정조와 수원 화성華城 연구가인 김준혁이 쓴 책이네. 나는 정조(문무文武를 겸비하였기에 『홍재전서』 문집까지 남긴 유일한 임금)가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보다 어쩌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네. 부제 ‘리더십코드 5049’도 이유가 있네. 정조는 한참 윗대 할아버지인 이성계李成桂 다음 가는 명궁이었지. 50발 중 49발을 10점 만점 명중하고도 1발은 엉뚱한 곳에 쏘았다는데, 그 성적표가 화성박물관에 남아 있더군. 정말 대단하지 않는가. 1발을 엉뚱하게 쏜 까닭은 신하들의 사기士氣를 배려한 때문이라고 하더군. 그게 곧 정조의 리더십코드이었을 것이고. 재밌지 않은가?
『노화의 종말-하버드 의대 수명혁명 프로젝트』는 조만간 90세가 새로운 70세가 될 세상에 사는 우리가 꼭 읽어봐야 책이라고 생각하네. 평균수명 120세, 좋은가? 옳은가? 바람직한가? 형벌인가? 그래서 잔인한가?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위한 과학자들의 종합리포트라고 보면 될 듯하네. 책이 너무 방대해서 문제이지만, 궁금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심각하게 읽어볼 수밖에 없겠지. 아직 5분의 1도 못읽었지만. 흐흐.
『엄마의 마지막 말들』만큼은 단숨에 다 읽었네. 명문대 60대교수가 어머니가 병상에 눕자 본업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어머니에게 1년 넘게 ‘몰입’ 간병을 했다는군. 그 가운데 띄엄띄엄 한두 마디 들은 어머니의 어록語錄들을 적어놓고, 그 상황과 의중을 간략히 해설해 놓은, 보기 드문 책이어서 무척 인상적이었네. 우리같은 불효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지식인 효자’의 고백서라 할만하더군.
마지막으로 『팩트풀니스Factfulness』는 아직 떠들어보지 않았네. 인간의 본능本能(Instict)을 10가지(간극, 부정, 직선, 공포, 크기, 일반화, 운명, 단일관점, 비난, 다급함)로 분류해놓았던데, 아무래도 독파하기는 힘들 것같더군.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라는 부제를 봐서 꼭 읽어볼 생각이네.
결론적으로 좋은 책들을 추천도 아니고 직접 사 보내준 그 성의와 성원이 진심으로 고맙네. 하루빨리 심도 있는 서평이라도 보내줘야 할텐데, 아까 말한 것처럼 즐거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말로 대신하네. 어느 지인은 나에게 <이 나이에 아직도 남의 글을 읽는 욕심이 있느냐>며 칭찬인지 비난인지 아리송한 카톡 댓글을 보냈더군. 그래, 때때로 책을 읽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이 얼마나 많이 남을까를 생각할 때도 있긴 하지. 하지만 ‘활자 중독’에 걸린 사람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흐흐. 손종섭 선생이 재창작한 한시 번역은 가끔 한 편씩 감상해 볼 생각이네. 자네도 꼭 시도해 보게나. 줄이네. 늘 건강하게 여여如如히 잘 지내시길.
5월 27일
임실 우거에서 오랜 전우가 쓰네
추신: 이런 와중에 정부부처 위촉 교육기관인 '건설산업교육원'의 친구가 정세현 전통일부장관의 회고록 『판문점의 협상가-북한과 마주한 40년』(창비 출간, 637쪽, 30000원)과 『총균쇠-무기 병균 금속은 문명을 어떻게 바꿨는가』(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문학사상 발간, 710쪽, 28000원)를 보내왔다. 어디 그뿐인가. '50년 지기知己'가 도올 선생의 『노자가 옳았다』(통나무 발간, 501쪽, 27000원)를 전주 홍지서림에서 사줬다. 오 마이 갓! 즐거운 비명이란 말은 이럴 때 해당되는가.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친구복과 책복이 왜 이리 많을까? 귀향하면서 유발 하라리의 3부작 『호모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왜 사갖고 왔을까? 지금껏 1페이지도 읽지 못했는데. 완전 흑흑이다.